회귀자가 다 만들어줌 234화
삐이이──
귓가에 울리는 가느다란 이명.
머리의 안쪽에서부터 바깥쪽으로 퍼져나가는 듯한 그 얇은 소리에 자예드의 눈동자가 멍하게 변했다.
지금 자신은 무엇을 듣고 있는 것인가.
수많은 소리가 압축된 것 같은 그 이명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을 때. 명치로부터 무언가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콰드득─우득─
가슴에 파고들었던 무언가가 심장을 기괴하게 변이시켰고, 이내 그것이 살아 있는 것처럼 머릿속으로 타고 올랐다.
저것이 자신의 머리에 도달하는 순간.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무언가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 본능적인 직감에 자예드가 가만히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던 그때.
서걱!
새하얀 검에 머리가 잘려 나갔다.
자예드의 목을 단숨에 쳐낸 백광. 허공에 떠오른 머리를 본 이세훈은 이어서 천충검으로 금원을 만들어냈다.
우우웅!
새하얀 검기로 이뤄진 백광과 황금색 검기로 이뤄진 금원. 두 자루의 검을 움켜쥔 이세훈은 곧장 전신의 근육을 폭발시키듯이 참격을 퍼부었다.
콰가가각!
자예드의 전신이 해체되다시피 난도질당하고 사방으로 핏물이 튀어 오른다. 마치 흔적도 없이 지워 버리려는 듯한 무자비한 공격.
‘왜…….’
어째서 갑자기 자예드를 죽인 것인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아미르가 굳어 있을 때. 이세훈이 두 검을 휘두르면서 소리쳤다.
“자예드는 밖으로 나왔을 때 이미 죽었어!!!”
몽환성의 꿈속에서 수십 년의 세월을 겪은 자예드는 이미 전신이 꿈으로 치환되어 있는 상태였었다.
겉보기에는 멀쩡했지만 몽환성의 붕괴에 따라 자연스럽게 무너졌을 육체.
이세훈은 몸을 난도질하는 과정에서 그것을 확실하게 확인한 것이다.
“지금 살아 움직이는 건 자예드의 껍질을 뒤집어 쓴 무언가야. 그러니까 당장 이걸 죽여!”
이세훈의 외침에 아미르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자예드의 껍질을 뒤집어 쓴 무언가라니. 그 이야기도 이해가 안 갔지만, 더더욱 이해가 안 가는 것은 그 다음 말이었다.
‘죽이라니…… 뭘 더 어떻게…….’
이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난도질당한 시체에 뭘 더 어떻게 하란 말인가. 그 의문에 아미르는 자연스럽게 대답을 떠올렸다.
‘동천안?’
정말 저 난도질당하는 시체가 아직 살아 있다면 동천안을 통해서 무언가 보일 터. 그 생각에 아미르의 두 눈이 은빛으로 물들었고.
“……아.”
셀 수 없을 정도로 조각 난 하늘이 눈앞에 펼쳐졌다.
주르륵
아미르의 두 눈에 피눈물이 흘러내리더니 이내 비틀거리며 무릎을 꿇었다. 동천안으로 본질을 직시했을 뿐인데 머리가 버티지 못하고 과부하가 걸린 것이다.
‘이런…… 아직 일렀나……!’
다른 기술들에 비해 동천안은 아직 미숙했던 걸까. 자칫 잘못하면 폐인이 되어버릴 수도 있는 아미르의 상태에 이세훈은 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뒤 움직였다.
푸확!
팔뚝을 베어 자예드의 시체 위에 피를 뿌린 이세훈은 그대로 몸을 돌려 아미르를 들쳐 업고 거리를 벌렸다.
각성하기 전에 제압하기에는 화력도, 상성도 좋지 않다.
다음으로 넘어갈 수밖에 없음을 깨달은 이세훈이 영연신마법으로 응급처치를 하며 뒤를 보았다.
꿀렁─
사방으로 흩뿌려졌던 자예드의 살점과 핏물이 한 점으로 모여들어 작은 웅덩이를 만들어냈고, 그 중심에서부터 한 육체가 천천히 솟아오르기 시작한다.
피부를 벗겨내고 근육을 드러낸 것처럼 붉고 가느다란 육체. 그 자체만 놓고 보면 조금 징그러울 뿐이었지만, 진짜는 아래쪽이었다.
콰드득─콰득─
육체가 솟아오르던 피와 살점의 웅덩이. 그 안쪽에서 똑같이 생긴 괴물 수십 마리가 손을 뻗어 위로 솟구쳐 오르던 몸을 붙잡고 매달렸다.
아아……. 안 돼…….
싫어……. 내 자리야…….
내가 깨달았어……. 돌려줘…….
수 없이 반복되어 온 꿈속에서 수련을 거듭해 온 ‘나’.
누군가는 A급 영웅에서 쓰러졌고, 누군가는 완등에 도전하여 실패했으며, 또 누군가는 십악의 마인이 되었다.
스스로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많은 ‘나’가 추악하게 매달리며 몸을 붙잡고 아래로 끌어당긴다.
거기에 올라서는 것은 자신이라고, 깨닫는 것은 자신이라며 저주와 원망을 쏟아내며 끝없이 붙잡는 것이다.
……하하
그 추하기 그지없는 ‘나’를 보고 느낀 것은 우습게도 벅차오르는 충만감이었다.
너희들이 아니야.
아래쪽에서 울려 퍼지는 절규와 저주.
그것을 환희와 축복으로 삼아 자예드, 그 ‘껍질’에서 벗어난 마신이 자신들을 짓밟으며 더더욱 위로 올라섰다.
끝없이 반복되어오던 꿈이 이곳에서 현실이 되고, 현실은 또 다시 덧없는 꿈으로 이어진다.
머릿속에 자리 잡은 그 거대한 깨달음에 마신이 두 눈을 붉은빛으로 빛내며 입을 열었다.
내가 멸각滅殼이다.
쿠구구궁!
악몽의 도시 전역이 무너질 것처럼 뒤흔들렸고, 이내 기괴하게 비틀려있던 보랏빛의 건물들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이제는 건물이라기 보단 거대한 나무와도 같은 형상. 그 끝자락에 가지들이 사방으로 뻗어 이내 붉은 꽃을 피워간다.
팔랑─
아래를 향해 천천히 떨어지는 붉은 꽃잎들.
이곳이 마경이라는 것조차 잊게 만들만큼 그 몽환적인 풍경에 패닉에 휩싸여 있던 환락가의 주민들이 그 광경을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을 때.
콰드득!
꽃잎에 닿은 주민들이 핏물을 뿜어내며 압축되었다.
“으아악……!”
“피해! 닿으면 죽는다!”
그 모습을 본 주민들이 그제야 꽃잎을 피하기 위해 도망치거나 저항했지만 모두 무용지물이었다.
마법을 쏘아내거나 무구를 휘둘러도 환영처럼 가볍게 통과하더니 그대로 몸에 닿자마자 전신을 압축시킨다.
푸화아악!
마경의 땅이 순식간에 핏물로 흥건히 젖었고 그 위로 압축된 고깃덩어리들이 씨앗처럼 뿌리를 내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수십만의 생명을 집어삼키는 땅. 그 악몽과도 같은 광경을 바라보던 멸각이 고개를 돌렸다.
스스스─
완전히 흩어지기 직전인 보랏빛 안개. 그에 멸각이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팔랑
붉은 꽃잎들이 안개에 스며들자 한 덩어리로 압축되었고 이내 그 껍질이 갈라지며 몽환마가 밖으로 튀어나왔다.
“…….”
사뿐히 착지한 몽환마가 멍한 눈으로 주변을 살폈고, 이내 무언가 깨달은 듯 환한 미소를 지었다.
“제가 해낸 건가요?”
아무런 일도 기억하지 못하는 듯한 몽환마의 모습에 멸각이 담담히 대답했다.
아직은 아니지. 그보다 기억은 온전한가?
“기억 자체는 온전하네요. 다만 제가 했다는 것이 실감이 가지 않는다고 할까…… 조금 아쉽네요.”
눈매를 매만지며 한숨을 내쉬던 몽환마가 눈앞에 떨어지던 꽃잎을 보고는 곧장 그것을 손으로 잡아냈다.
스륵
환락가의 주민들과 다르게 몸이 압축되지 않은 몽환마는 자신의 손바닥에 놓인 붉은 꽃잎을 신기하게 보았다.
“놀랍네요. 이 꽃잎 안에 제가 그렇게 힘들게 만들어냈던 꿈의 공간이 재현되어 있다니…….”
접촉한 순간 대상을 꿈속으로 끌어들여 새로운 존재로 탈바꿈시키는 붉은 꽃잎.
효과만 해도 놀라운데 몇 장만으로 죽은 것이나 다름없던 자신을 부활시켰으니 그야말로 신에 가까운 힘이었다.
‘정확히는 부활이 아니라 개변인가.’
엄밀히 따지면 본래의 자신은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몽환마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이 세계는 꿈.
자신이 몇 번이고 죽고 되살아나든 결과적으로 깨어나기만 한다면 똑같았기 때문이다.
깨달음의 차이지. 섣불리 이해하려 하지마라. 네까짓 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담담히 이야기하는 멸각에 몽환마가 흥미롭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제가 밉지는 않으신가요?”
몽환마의 물음에 멸각이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꿈 따위에 증오를 품을 이유는 있나?
텅 비어 있는 눈동자. 자신을 향해 아무런 감정도 지니지 않은 그 모습에 몽환마가 기쁨에 몸을 떨었다.
자신과 이세훈의 특성을 완전히 물려받은 완벽한 존재. 그 모습을 본 몽환마는 다시 한번 확신했다.
‘이자라면…… 날 이 꿈 속에서 깨어나게 해줄 거야.’
마인의 한계를 넘어 그야말로 신의 영역에 도달한 존재.
이전에 ‘노야老爺’에게 들은 그대로의 힘에 몽환마가 기뻐하던 그때.
그런데.
멸각이 다른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저 녀석들은 뭐지?
갑작스러운 물음에 멸각의 시선을 따로 고개를 돌린 몽환마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머…….”
마경에 쏟아져 내리는 꽃잎 사이에서 아직도 상처 하나 없이 서 있는 이세훈과 아미르.
두 사람 모두 꽃잎이 닿아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는데 그 모습에 몽환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멀쩡한 거지?’
겉보기에는 몽환마도 멀쩡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꽃잎에 닿을 때마다 처음처럼 개변을 반복하고 있었다.
다만 결과가 거의 비슷하고 본인이 별로 신경 쓰지 않았기에 아무런 변화도 없는 것처럼 보일 뿐.
사륵
하지만 눈앞의 두 사람은 꽃잎에 닿아도 아무런 변화를 보이지 않는다. 그 모습에 멸각이 눈매를 찌푸렸다.
무슨 짓을 한 거지?
우웅!
불쾌함을 드러내며 질문한 것뿐인데 주변의 마기가 요동치며 머릿속이 칼로 쑤셔진 것처럼 아파온다.
하위 영웅들은 그냥 직시하는 것만으로 미쳐 버릴 수 있는 거대한 존재감.
그 익숙한 감각에 이세훈이 숨을 고르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안 했어. 그냥 네가 불완전할 뿐이지.”
이세훈의 대답에 멸각의 눈동자가 일그러지더니 불쾌감을 넘어 살의를 드러냈다.
내가 불완전하다고?
쿠구궁!
그것만큼은 그냥 넘겨들을 수 없다는 듯 힘까지 끌어올리며 압박하는 멸각.
이세훈은 회귀 전의 경험이 있기에 눈매를 조금 찌푸리는 선에서 끝났지만 이미 부상을 입은 아미르는 달랐다.
“쿨럭!”
겨우 진정됐던 체내의 마력이 다시 날뛰었고, 입에서 검은 핏물이 터져 나와 바닥을 적셨다.
창백해진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아미르의 모습에 멸각이 우습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하찮군.
무언가 거슬려 잠시 확인하고 갈 생각이었지만, 굳이 그럴 필요도 없어보였다. 그리 판단한 멸각이 두 사람을 죽이려던 그때.
꽈악─
무언가가 발목을 움켜잡았고, 그 불쾌한 감각에 멸각의 시선이 아래를 향했다.
이미 미동도 않는 ‘나’ 사이에서 유일하게 힘을 유지하고 있는 한 명.
아직 이성을 잃지 않은 자예드가 발목을 꽉 움켜잡으며 이글거리는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그것만큼은 안 돼.”
후웅!
웅덩이를 벗어나려던 멸각이 다시 안쪽으로 끌어당겨졌고, 그 갑작스러운 저항에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네놈……!
무릎까지 끌어들이는 그 손길에 멸각이 당황하며 저항하던 그때. 이세훈이 담담히 입을 열었다.
“한 가지 제안하고 싶은 게 있는데.”
“……제안?”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몽환마가 의아하게 바라보자 이세훈이 아미르를 진정시키며 담담히 이야기했다.
“믿을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 너희들을 죽이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대비는 충분히 했으니까.”
흔들림 없이 바라보는 이세훈의 시선에 몽환마와 멸각이 굳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단순한 허세라고 하기에는 그 말에서 어떤 무게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마치 이와 같은 일을 여러 번 해본 적 있는 사냥꾼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
건방진…….
자신이 사냥감이 된 것 같은 기분에 멸각이 불쾌감을 드러내고 있을 때. 이세훈이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쪽을 선택하고 싶진 않거든. 나도 위험해지고…… 이 녀석은 무조건 죽을 테니까.”
자신에게 기대있는 아미르를 힐끗 보며 말하는 이세훈. 그 이야기에 몽환마가 흥미롭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래서 결국 하고 싶은 제안이라는 게 뭐죠?”
“1시간.”
멸각과 몽환마를 바라본 이세훈이 담담히 이야기했다.
“그동안 서로 제대로 준비해서 싸우는 거지. 어때?”
마치 대련이라도 하는 것처럼 가볍게 이야기하는 이세훈. 그 제안에 몽환마가 멍하니 바라보다가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물었다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이신가요?”
“난 언제나 진심이야.”
“후후. 확실히 그렇게 보이네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대답하는 이세훈의 모습에 몽환마가 옆의 멸각을 바라보았다.
크윽…….
여전히 멸각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자예드.
아미르가 죽는다는 이야기에 더더욱 필사적으로 매달렸는데 상상 이상으로 자아가 견고했다.
‘확실히 불완전한 상태야.’
물론 지금 상태로도 어지간한 이들은 상대하기 충분하지만, 만약에라도 이곳에 완등자가 나타나게 된다면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었다.
‘힘이 완전해지면 완등자가 오더라도 죽일 수 있어.’
그리고 일이 수틀린다면 그냥 도망치면 되는 것 아닌가.
마신이 깨어난 시점에서 이미 자신들의 승리나 다름없다.
여러 상황을 고려한 몽환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약속은 어떻게 보증할까요?”
“필요 없어. 여기서 빠져나가려고 하면 바로 죽일 거니까.”
“……자신감이 넘치시네요.”
도대체 어디서 저런 자신감이 나오는 걸까.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보는 몽환마의 모습에 이세훈이 아미르를 부축하며 담담히 말했다.
“그럼 1시간 뒤에 보자고.”
그걸로 끝이라는 듯이 이세훈이 몸을 돌렸고, 그대로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그 무방비해 보이는 모습에 몽환마의 눈이 가늘어지려던 찰나.
우웅!
명계의 어둠이 두 사람을 감싸며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