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가 다 만들어줌 232화
기본적으로 현 인류는 육대마경을 비롯한 순례길의 바깥, 만마의 늪에 오염된 구역을 탐사하는 것에 소극적이었다.
만마전이 득세하는 구역인 데다 육대마경의 경우에는 S급 영웅들조차 생환을 장담할 수 없을 만큼 위험한 환경을 지닌 경우가 많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순례교는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순례단’이라 불리는 조사단을 정기적으로 외부에 파견했었는데, 이들이 가장 경계하는 육대마경이 바로 ‘악몽의 도시’였다.
‘여섯 개 중에서도 하필이면 여기라니…….’
브라질의 수도인 브라질리아의 위에 자리 잡은 마경.
황무지 위에 보라색의 기괴한 건물들이 솟아 있는 이 마경은 겉보기에는 위협적이지 않지만 내부에 들어서면 달랐다.
처음에는 사람들의 대화를 나누는 것 같은 환청이 들리고 시간이 더 지나면 건물의 안쪽에서 사람의 그림자 같은 것들이 걸어 나오기 시작한다.
그렇게 점점 악몽의 도시가 생기를 띄어 그 모습이 평범한 도시처럼 보이는 순간, 그것을 본 사람이 그대로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사람마다 진행 속도도 다 다르고 명확한 기준이 없어서 조사하기가 가장 어려운 곳이라고 했었지.’
회귀 전에 읽은 순례단의 조사일지에 따르면 초창기부터 활동해 온 준S급 영웅이 내부로 들어서자마자 증발했다는 자료도 있었는데 그만큼 까다로운 장소였었다.
“악몽의 도시라니…….”
아미르가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중얼거렸고, 이세훈이 한숨을 내쉬며 이야기했다.
“일단 계획 자체에 큰 변동은 없어. 대신 네 사촌형을 구출하는 과정에서 내부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볼 생각이야.”
“환락가와 악몽의 도시와 연결고리를 찾으려는 겁니까?”
“그런 셈이지. 그냥 이름이 비슷하다고 이 위에 지었을 리는 없을 테니까.”
담담하게 이야기한 이세훈이 가라앉은 눈으로 몽환성을 향해 내려가는 엘리베이터의 문을 바라보았다.
아직은 짐작 가는 게 없다는 듯이 말하긴 했지만, 사실 이세훈은 몽환마가 무엇을 노리고 환락가를 악몽의 도시 위에 세웠을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마신의 파편이겠지.’
육대마경을 유지하는 핵이자 마신을 만들어내는 열쇠.
자신의 예상이 맞다면 몽환마는 환락가와 악몽의 도시에 모종의 연결점을 만들어놓은 다음 그것을 이용해 마신으로 거듭나려고 하는 것이 분명하리라.
‘회귀 전에 별다른 일도 없었고 환락가를 이전했던 걸보면 실패할 가능성도 있겠지만…… 그때 기준으로 생각하기에는 너무 많이 변했어.’
당장 자신의 존재 자체가 이미 몽환마에게 있어 큰 변곡점인 상황. 그렇기에 지금부터는 신중하게 움직여야만 한다.
변수를 차단하겠다고 섣불리 움직이는 것이 오히려 마신을 탄생시키는 기폭제가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폭탄 해체 같은 느낌이구만.’
예상치 못한 일들에 이세훈이 눈매를 찌푸리면서도 차분하게 생각을 가다듬었다.
마신이라는 거대한 변수 때문에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 반대로 잘만 풀린다면 회귀 전보다 쉽게 육대마신 중 하나의 가능성을 잘라낼 수 있는 것이다.
주어진 재료로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낸다. 그 마음가짐을 되새긴 이세훈이 입을 열었다.
“앞에도 말했지만 가능한 네 사촌형을 구하는 쪽으로 갈 거야. 하지만…….”
“알고 있습니다.”
무거운 목소리로 대답한 아미르가 이야기를 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욕심을 부릴 만큼 미련하지는 않습니다. 주어진 기회 내에서…… 후회가 남지 않도록 성공해 보이겠습니다.”
그동안 생각이 많았는지 각오가 느껴지는 대답. 그에 이세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능한 해보자고.”
띵!
엘리베이터에 청아한 소리가 울려 퍼졌고, 문이 열리며 고급스럽게 꾸며진 몽환성의 복도가 모습을 드러냈다.
겉보기에는 혼란스러운 바깥과 달리 평화로운 풍경. 하지만 두 사람에게는 복도에서 소용돌이치고 있는 힘이 선명하게 보였다.
“저건…….”
“전투 중이니까 몽환성에도 영향이 있는 거겠지. 그냥 들어가면 그대로 비틀려 버릴 거야.”
지금 몽환성 내부는 아무런 전조도 없이 변질되어 버리는 꿈과 같은 상태.
그렇기에 지금 이 안에 무사히 들어설 수 있는 것은 꿈을 꾸는 주인밖에 없었다.
“후우…….”
잠시 숨을 고른 이세훈이 경계의 권능을 다시금 조정했고, 몽환마의 눈이 더욱더 요사스럽게 빛났다.
조금만 방심해도 오른쪽 눈이 침식당할 만큼 아슬아슬한 상태. 최대한 몽환마에 맞춰서 조정한 이세훈이 아미르를 돌아보았다.
“어깨 잡고 딱 붙어서 와.”
“알겠습니다.”
아미르가 왼쪽 어깨를 잡으며 몸을 딱 붙였고, 그대로 두 사람이 엘리베이터에서 나와 몽환성의 복도로 들어섰다.
꿀렁─
전신에서 느껴지는 부유감.
마치 중력이 약해진 것처럼 느껴졌는데 실제로는 육체가 꿈으로 치환되면서 밀도가 옅어진 것에 가까웠다.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예외 없이 꿈으로 치환되는 건가.’
상상을 뛰어넘는 강제력에 아미르가 긴장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몽환마의 눈이 있어서 이 정도라면 맨몸으로 들어섰을 때는 어떻게 됐을까.
아마 S급 영웅이라 할지라도 오래 버티지는 못하리라.
“어디에 있는지는 알아냈어?”
“최심부에 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정확한 위치는 저도…….”
“그거면 충분해.”
몽환성은 진짜 건물이라기보다는 몽환마의 심상이 구현된 세계.
그렇기에 하나하나 탐색하는 게 아니라 가고자 하는 것을 감각적으로 이해해야만 했다.
‘최심부…….’
몽환성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장소. 이세훈이 그렇게 머릿속으로 되새기자 단번에 주변의 풍경이 변했다.
아래로 향하는 계단과 바닥에 붙어있는 거대한 문. 그것을 제외하면 온통 벽으로 가로막혀 있었는데 어딜 봐도 함정처럼 보였다.
“가자.”
“예.”
두 사람은 계단 아래로 내려갔고 그 끝에 있는 거대한 문 위에 올라섰다.
그리고 이세훈이 몽환마의 힘을 이끌어내며 아래를 내려다보았고.
찰칵─
잠긴 문이 열리며 두 사람이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 * *
“으음…….”
자연스레 잠에서 깨어난 아미르는 천천히 눈을 뜨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본가에 있는 자신의 침실. 다섯 명은 거뜬히 쓸 거대한 침대 위에서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아미르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내 방이 원래 이랬었나……?’
익숙하면서도 어딘가 낯선 느낌.
그 기묘한 이질감에 주변을 살피던 아미르가 침대의 이불을 만져보았다.
사르륵
꿈이라기에는 너무나도 선명한 감촉. 그것을 한창 곱씹어보던 아미르가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
‘그냥 잠이 덜 깬 모양이네.’
어제 밤늦게까지 서류 정리를 도우면서 머리를 너무 많이 썼던 걸지도 모르겠다.
고개를 털어내며 잠기운을 걷어낸 아미르가 침대에서 일어나 방에 붙어있는 욕실로 향했다.
쏴아아
간단히 몸을 씻어내고 옷을 갈아입는다. 늘 있는 하루 일과였지만 아미르는 왠지 모르게 붕 뜨는 느낌이 들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아미르가 눈매를 매만졌다.
‘커피라도 마셔야 뭘 하겠군.’
한숨을 내쉬며 방 밖으로 나선 아미르는 아래층으로 향했다.
지나가다 마주치는 사용인들이 공손히 고개를 숙였고, 창밖으로는 아름답게 꾸며진 정원이 보인다.
매일같이 보는데도 어째서인지 눈을 뗄 수 없는 그 풍경에 아미르가 멍하니 걷던 그때.
“아미르!”
뒤쪽에서 쾌활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갑작스러운 부름에 아미르가 고개를 돌리려던 순간. 누군가가 매달리다시피 어깨에 팔을 두르며 몸을 던졌다.
“윽?!”
앞으로 넘어질 뻔한 것을 간신히 중심을 잡은 아미르는 갑자기 나타나 자신의 어깨에 팔을 두른 상대를 바라보았다.
구릿빛 피부에 곱슬끼가 있는 머리카락을 묶은 꽁지머리. 얼굴만 보자면 훤칠한 미남이지만 시종일관 올라가 있는 입꼬리가 장난기 넘치는 소년처럼 보이게 만들기도 한다.
“……자예드 형?”
그 모습에 아미르가 멍하니 중얼거렸고 청년, 자예드가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뭐야. 반응이 왜 그래?”
“아니. 어떻게 여기에…….”
환영이 아니라 정말로 자신의 옆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 아미르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자 자예드가 눈매를 가늘게 떴다.
“너. 내가 오늘 돌아온다고 한 거 까먹었구나.”
“……뭐?”
“가족들 먹여 살린다고 밖에서 그 개고생을 하고 왔는데 꽃잎 뿌리면서 반겨주지는 못할망정…… 슬퍼서 눈물이 다 나려고 하네. 흑흑.”
서글픈 표정을 지으며 눈물을 훔치는 시늉을 하는 자예드. 그 능청스러운 모습에 아미르가 가만히 바라보다 점점 기억을 떠올렸다.
‘그래…… 그러고 보니 한 달 동안 외부에 파견 나갔다가 오늘 돌아온다고 했었지.’
어쩌다가 이런 중요한 소식을 까먹은 걸까.
갑자가 미안해진 아미르가 서러워하는 자예드를 바라보았다.
“미안해 형. 어제 밤늦게까지 일했더니 머리가 잘 안 돌아가네.”
“아. 그랬어? 거참 큰아버지도 적당히 하시라니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은 자예드가 어깨에 두른 팔을 풀면서 등을 툭 쳤다.
“그럼 커피 만들어주면 용서해 줄게.”
“아, 응. 알았어. 어차피 나도 마실 생각이었으니까.”
“좋아좋아. 그럼 얼른 가자고.”
자예드가 장난스럽게 등을 밀며 재촉했고 아미르가 당황하다 이내 슬쩍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주방으로 내려온 아미르는 물을 끓이면서 커피 그라인더로 원두를 갈았다.
드르륵─
커피가 갈리는 소리와 함께 울려 퍼지는 소음. 그렇게 작업을 이어나가던 아미르는 의자에 앉아서 기다리는 자예드를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밖에서 뭐 하고 왔어?”
“뭐 늘 하던 일이지.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정보도 좀 팔고…… 영웅 행세는 해야 되니까 마인이나 몬스터들도 좀 잡고.”
턱을 괸 채 지겹다는 듯이 이야기하던 자예드가 무언가 떠올린 듯 몸을 바로 세웠다.
“아. 그러고 보니 이번에는 파검이랑 만났네.”
“파검이라면…… 마광수?”
“응. 우연히 만났는데 겸사겸사 대련도 좀 했지. 조금만 실수했으면 아마 졌을 거야.”
“그렇…… 잠깐. 마광수를 이겼다고?”
원두를 갈던 아미르가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았고, 그에 자예드가 으쓱한 표정을 지었다.
“당연하지. 내가 폼으로 S급 최강이라 불리는 줄 알아?”
“…….”
거짓말처럼 느껴지지 않는 자예드의 대답에 아미르가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재능이 뛰어나긴 했지만…… 그 정도는 아니었을 텐데.’
애초에 자예드는 A급을 막 달지 않았던가?
머릿속에 차오르는 수많은 의문들에 아미르의 눈매가 찌푸려졌다.
“음? 왜 그래?”
“……아니. 그냥 아직 잠이 덜 깼나봐.”
고개를 가로저은 아미르는 다시 원두를 갈면서 커피를 만드는 데 집중했다.
“여기 있어.”
“잘 마실게.”
완성된 커피를 받은 자예드가 커피를 홀짝이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아미르가 똑같이 커피를 마셨다.
집에서 자주 먹던 커피의 맛. 그것을 입안에서 곱씹으며 아미르가 자예드에게 물었다.
“형.”
“응?”
“몽환마 기억해?”
아미르의 질문에 잠시 침묵이 감돌았고, 자예드가 지그시 바라보다가 커피 잔을 내려놓았다.
“오늘따라 뭔가 이상하네. 어디 안 좋은 거 아냐?”
“그냥 알고 싶은 게 있어서 그래. 대답해 주면 안 될까?”
간곡한 부탁에 자예드가 가만히 바라보다 이내 한숨을 푹 내쉬며 머리를 긁적였다.
“기억하냐고 물으면 당연히 기억하지. 10년도 더 지난 일이라지만 가문이 쑥대밭이 됐었는데.”
“10년도 더 지난 일이라는 건…… 몽환마가 습격한 그날을 말하는 거지?”
“그래. 그때 큰아버지도 크게 다치셨고, 장로들 중에 죽은 사람들도 많았지.”
과거를 회상하듯 허공을 바라보던 자예드가 돌연 아미르를 바라보았다.
“그때 네가 몽환마가 습격해 온다는 것을 알리지 않았다면 정말 큰일 났을 거야.”
“……내가 알렸다고.”
아미르가 조용히 중얼거리는 사이 자예드가 부드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완전히 막아내진 못했지만, 그래도 네 덕분에 그 정도로 줄일 수 있었던 거야. 그러니까 아직도 그날의 일로 자책하고 있다면 그러지 마. 넌 최선을 다했었으니까.”
“…….”
“맨날 어른스러운 척은 다 하더니 속은 아직 애기구만 애기. 짜식…….”
피식 웃으며 머리를 헝클 듯이 쓰다듬어주는 자예드.
어릴 때부터 변함없는 그 손길에 아미르가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날 미워하지 않는구나.’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변하지 않은 자예드의 모습에 아미르가 무언가 말하려다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무슨 말을 할지는 자신도 모르겠지만, 그걸 입 밖으로 꺼내 버리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나 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미르가 아무것도 못 하고 가만히 있자 자예드가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평소에는 만지지 말라고 그렇게 쳐내던 녀석이 오늘은 또 얌전하네…… 너 진짜 어디 아프냐?”
“그런 거 아니야…….”
“흐음.”
아미르를 유심히 바라보던 자예드가 손을 떼어내더니 남은 커피를 단숨에 마신 다음 자리에서 일어낫다.
“일어나. 대련하러 가자.”
“……뭐?”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아미르가 당황하며 바라보자 자예드가 팔짱을 끼며 바라보았다.
“보니까 커피가 아니라 땀 한 바가지 흘려야 정신 차릴 것 같네. 따라와.”
“잠깐…… 으앗!”
아미르를 어깨에 들쳐 업은 자예드는 그대로 뒤뜰에 있는 연무장으로 향했다.
훈련시간이었는지 단원들이 무구를 휘두르고 있었는데 자예드와 아미르를 발견하자 그 즉시 고개를 숙였다.
“잠깐만 쓸 테니까 물러나 있어. 대련용 무구 챙겨오고.”
자예드의 명령에 단원들이 외곽으로 빠지며 자리를 만들었고, 두 사람이 거리를 벌린 채 나란히 섰다.
갑자기 대련을 하게 된 상황에 아미르가 당혹스러워하던 그때. 자예드가 반대편에서 소리쳤다.
“대련 중에 정신 못 차리면 혼날 줄 알아!”
“……그렇겠지.”
평상시에는 무슨 장난이든 잘 받아주지만 대련 중에는 일곱 살짜리 사촌동생도 전력으로 패대기치던 것이 자예드 아니었던가.
쓴웃음을 지으며 아미르가 몸을 풀던 그때.
한 단원이 곁으로 다가와 대련용 무구가 놓인 쟁반을 앞으로 내밀었다.
“……음?”
아무런 생각 없이 무구를 받아 쥐려던 아미르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쟁반 위를 다시 보았다.
쟁반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두 자루의 단검.
얼음을 깎아서 만들어낸 것처럼 냉기가 감돌았는데 예리한 검날 때문에 더더욱 오싹하게 느껴졌다.
‘이건…… 대련용이 아니잖아.’
자신이 빙결연금으로 만들어내는 단검보다 더욱 날카로운 무구. 그것을 살핀 아미르가 쟁반을 들고 온 단원을 바라보았다.
“무구를 잘못 가져온 모양인데 다른 걸로 다시…….”
“아니.”
아미르의 말을 잘라낸 날카로운 인상의 단원이 담담히 이야기했다.
“이게 맞아. 아미르.”
“그게 무슨…….”
“잡아.”
단호하기 그지없는 단원의 말에 아미르가 흠칫 떨다가 이내 자신도 모르게 쟁반에 놓인 단검을 움켜쥐었다.
스아아─
손바닥을 통해 전신으로 타고 오르는 냉기. 그와 동시에 머릿속으로 찬물이 끼얹어지는 느낌과 함께 수많은 것들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
자신의 손에 쥐어진 단검을 내려다보던 아미르는 눈앞의 단원, 이세훈을 바라보았다.
“한 번뿐이야. 명심해.”
짧게 이야기한 이세훈이 쟁반을 든 채 물러섰고,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아미르가 고개를 돌려 자예드를 바라보았다.
투박한 단검 두 자루를 쥔 채 여유롭게 자신을 기다리는 모습.
현실이라고 밖에 느껴지지 않는 그 풍경에 아미르가 한참동안 바라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저벅저벅
연무장의 감촉이 신발 너머로 선명하게 느껴지고, 뜨거운 햇빛이 머리 위로 쏘아진다.
주변을 둘러싼 채 흥미진진하게 바라보는 단원들과 2층의 가주실에서 느껴지는 시선.
이 세계에서 무엇 하나 생생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 없었다.
꽈악─
그런 감각을 부정하듯 두 손에 쥐어진 단검을 꽉 움켜쥔 아미르는 자예드의 바로 앞에 섰다.
“음? 뭐야. 나 몰래 새 단검이라도 샀어?”
“…….”
“뭐, 크게 상관은 없겠네. 오히려 그 정도 핸디캡은 있어야 제대로…….”
“자예드.”
아미르의 나지막한 부름에 자예드가 말을 멈추고 바라보았다. 자신이 알던 모습보다 더욱 어른스러워진 분위기.
어딘가 낯설게 느껴지는 그 모습에 자예드가 멍하니 보고 있을 때.
“여긴 현실이 아니야.”
아미르가 씁쓸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네가 만들어낸 꿈속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