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가 다 만들어줌 227화
[당분간 연락 못 해] - 이노우에 에리카.
[집안일로 바빠져서 연락하기 힘들 것 같아. 급한 일 생기면 누님한테 말해줘] -제이크 마이어스.
“흐음…….”
새벽 3시와 아침 8시에 도착한 문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비슷한 내용에 이세훈이 턱을 쓰다듬었다.
‘이노우에랑 마이어스도 다음 학기에 대비하는 건가.’
완등자가 세 명이나 협력해서 가꿔간다고 했으니 대비를 할 법도 하다.
둘에게 알겠다고 답장을 보내둔 이세훈은 염성하에게 문자를 보냈다.
[요즘 뭐 하냐?]
‘바로 보진 않을 테니까 저녁쯤에…… 어?’
예상과 다르게 문자를 읽었다는 표시가 바로 떠올랐고, 잠시 후 염성하에게서 답장이 왔다.
[수련] - 염성하.
짧고 굵은 답장. 귀찮은 티가 팍팍 나는 그 내용에 이세훈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수련 중에 답장을 하다니…….’
회귀 전의 광견은 한 번 수련에 들어갔다 하면 끝날 때까지 연락두절이었는데, 그것 때문에 작전이 밀린 적도 상당히 많았었다.
‘이전보다 사회성은 많이 길러졌구나.’
일반적인 사람의 기준에서는 갈 길이 멀긴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긍정적인 변화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열심히 하라고 답장을 보내둔 이세훈은 이어서 뉴스란을 살폈다.
최근 들어서는 사건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어 상당히 잠잠했는데 아래로 내리다 보니 익숙한 이름이 보였다.
[S급 영웅 류은하. 세라핌 길드와 계약해지 소송.]
대서특필까지는 아니지만 상당히 주목받고 있는 뉴스. 그 내용에 이세훈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진짜로 터뜨렸네.’
세라핌 길드와 계약을 파기할거라고 말하긴 했었지만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움직일 줄은 몰랐다.
‘흐음…… 회귀 전이랑 비교하면 확실히 빠르긴 해.’
회귀 전에 류은하가 이렇게까지 자신을 신경 쓰던 것이 대략 인연레벨 4레벨 정도. 지금이 3레벨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상당히 빠른 변화였다.
‘게다가 부정적인 감정도 약간 섞여 있었고…… 몽환마의 토벌을 끝냈을 때가 관건이겠구만.’
몸조심하라고 부탁했는데 십악이랑 싸우고 왔다고 하면 뭐라고 반응할까.
회귀 전이라면 주의를 주는 정도로 끝났겠지만, 이번에는 좀 더 격한 반응이 나올지도 모르리라.
‘뭐 일단 이건 나중으로 제쳐두고…….’
얼추 확인을 끝낸 이세훈이 막 시간을 확인하려던 그때.
딩동!
현관문에 울리는 초인종 소리.
그에 이세훈이 상대를 확인하고는 곧장 흑무사를 날려 인터폰의 버튼을 눌렀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현관에서 거실로 나오는 아미르. 여느 때처럼 부드럽게 미소를 짓는 그 모습에 이세훈이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왜 그러십니까?”
자신을 의심스럽게 바라보는 이세훈의 눈빛에 아미르가 의아해하던 그때. 그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던 이세훈이 담담히 이야기했다.
“뭔 일 생겼나 보네.”
“…….”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아미르의 두 눈이 순간적으로 휘둥그레졌고, 그 반응을 놓치지 않고 읽어낸 이세훈이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앉아서 이야기하자.”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아미르가 맞은편에 앉았고 이세훈이 투안과 몽환안을 사용해서 몸 안을 가볍게 살폈다.
‘이상한 건 없네.’
엿듣기나 자폭의 위험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이세훈은 그대로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는 아미르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 있었는지 전부 말해봐.”
이세훈의 물음에 아미르가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제 과거와 관련된 일이기에 처음부터 설명드리겠습니다. 저희 가문은 본래 지역유지 중 하나였으나 만마전과의 전쟁 중에 조부께서…….”
싱 가문의 부흥과 그 직후 이어진 몽환마의 습격.
당시 두령이었던 아버지와 장로들이 모조리 살해당했고 차기 두령으로 유력했던 사촌형 자예드 싱은 인질로 잡혀갔다.
“그렇게 저희 가문은 하루아침에 몽환마에게 종속당했습니다. 아마 음지에서 발을 빼려던 것이 거슬렸던 거겠죠.”
다른 사람의 일처럼 담담하게 자신의 과거를 설명하는 아미르. 겉보기에는 아무런 미련도 없어보였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이제는 수십 년도 더 지난 일인데 가끔씩 생각나더라고요. 참 거지같지 않습니까 형님? 원수를 갚았는데도 거기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게…….’
눈앞의 모닥불을 바라보며 씁쓸하게 중얼거리던 빙견.
을씨년스러운 폐허 속에서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며 이세훈이 눈앞의 아미르를 묵묵히 바라보았다.
“설명은 이 정도로 하고. 본론으로 들어가면 지금 문제가 된 것은 몽환마가 증축 프로젝트 다음으로 준비하고 있는 투영 프로젝트입니다.”
“투영 프로젝트?”
“예. 몽환의 마력으로 인간과 마인들의 정보를 학습하고 다양한 표본을 만들어낸 다음에 현실에 강림시킬 군단을 만들어내는 계획입니다.”
아미르의 설명에 이세훈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정보를 학습시킨다는 건…… 설마 꿈을 이용하는 건가?”
“맞습니다. 표본의 꿈속에 다양한 자극을 가해 여러 결과를 만들어내는 방식이라더군요.”
꿈이라는 가상세계를 이용한 정보학습.
쉽게 말하자면 A라는 검사에게 궁수가 되는 꿈을 꾸게 만들어서 학습을 반복해 궁수A를 만들어내는 작업이었다.
말로는 그럴싸해 보여도 실제로는 터무니없는 이야기였지만, 이세훈은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상저장기…….’
증축 프로젝트를 위해서 환락가가 입수한 영웅들의 심상. 그 정보들을 활용해서 표본의 꿈속에 자극을 가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성공률이 높다고 할 순 없겠지만, 가능성이 생기는 것만으로 상당히 위협적인 이야기였다.
“지금 표본으로 쓰이는 건…… 네 사촌형이냐?”
“맞습니다.”
듣기만 해도 심상치 않은 계획에 인질까지 연루되어 있다.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변수에 이세훈이 잠시 동안 고민하다가 물었다.
“함정 같지?”
“……그럴 가능성도 높습니다.”
새로 준비 중인 프로젝트, 그것도 자예드 싱을 표본으로 사용하고 있는 계획을 직속비서가 된 지 얼마 안 된 아미르에게 상세히 설명한다.
아무리 아미르의 일처리가 뛰어났다고 해도 다른 목적이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네까짓 게 뭘 할 수 있겠냐는 태도로 말했을 가능성도 있겠지만…… 그건 너무 낙관적이겠지.’
몽환마의 의도를 생각해 보던 이세훈은 금방 생각을 털어냈다. 미치광이의 속내를 알아보려고 해봐야 이상하게 꼬일 뿐.
지금은 함정처럼 보이는 저 변수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가 더 중요했다.
‘회귀 전에는 저런 프로젝트가 없었던 것 같은데…….’
증축 프로젝트는 회귀 전에도 비슷한 경우가 있었지만, 투영 프로젝트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나마 비슷한 사례라면…… 멸각의 마신인가.’
주시자 『계승』과 십악 도플갱어가 협력해서 만들어낸 마신.
세세한 부분들은 차이가 있었지만 영웅과 마인들의 심상을 이용한다는 것은 상당히 유사했다.
‘관계성은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그냥 넘겨서는 안 된다는 거겠네.’
마신을 만들어내는 데 쓰인 방식과 비슷한 만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생각을 정리한 이세훈이 조용히 앉아 있는 아미르를 바라보았다.
“넌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이세훈의 물음에 아미르가 잠시 고민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현재 투영 프로젝트는 몽환성 내부에서만 진행되고 있습니다. 즉, 거기에 간섭하기 위해서는 몽환성에 직접 들어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몽환마의 힘 자체라고 볼 수 있는 몽환성. 그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사실상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아직 준비단계인 만큼 그렇게까지 큰 변수는 만들어내지는 못할 겁니다. 그리고 몽환마를 토벌하면 몽환성이 무너지면서 자연스럽게 해결될 테니 지금으로서는…….”
“다소의 희생, 자예드 싱의 죽음을 감수하고 움직여야 한다.”
아미르의 말을 가로챈 이세훈이 담담히 이야기했다.
“그 말이지?”
“…….”
이세훈의 물음에 아미르가 잠시 눈을 마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가장 현명한 판단입니다.”
상대는 다른 누구도 아닌 십악의 몽환마.
완등자를 상대로도 몇 번이고 살아남았던 괴물을 어쭙잖은 각오로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형님도 분명히 나와 같은 선택을 했겠지.’
자신을 흔들어보기 위해서 보여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미르는 그 덕분에 다시 한번 각오를 다졌다.
그동안 수없이 기다려온 기회를 정에 이끌려 놓칠 수는 없다. 그렇게 아미르가 다시금 다짐하던 그때.
“그게 아니야.”
이세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게 아니라니…….”
“네 말대로 그게 지금으로서는 가장 현명한 방법이지. 하지만 내가 물어본 건 그게 아니잖아?”
“…….”
“다시 한번 물어볼게.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이세훈의 물음에 아미르의 눈동자가 흔들렸고 두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처음으로 드러난 감정의 동요.
아무리 억누르려 해도 계속해서 솟구쳐 오르는 감정들에 아미르가 허탈하게 웃으며 모든 것을 놓아버렸다.
“당연히 구하고 싶죠. 무슨 그런 당연한 걸 물어봅니까?”
“근데 왜 말 안 했어?”
“왜 말 안 했냐고요?”
평소라면 감정을 억누른 채 그럴싸한 말로 상황을 정리했겠지만, 지금은 솟구쳐 오르는 감정을 고스란히 이야기했다.
“그딴 게 가능할 리가 없으니까요.”
“…….”
“몽환마의 뱃속이나 다름없는 몽환성에 들어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사람을 구해 탈출한다. 이게 정말 가능하다고 생각합니까?”
자신의 물음에도 계속 이야기해 보라는 듯 가만히 쳐다보기만 한다. 그 초연한 모습에 아미르는 무언가 울컥하는 감정을 느꼈다.
“도대체 저한테 이런 말을 하게 하는 이유가 뭡니까. 아, 혹시 나중에 딴소리할까봐 그런 겁니까? 당신이 세운 계획 때문에 내 가족이 죽었으니 책임져라, 뭐 그런 거요?”
“…….”
“그런 거라면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기회주의자긴 하지만 그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으니까요. 그러니까…….”
계속해서 커져가는 감정. 가슴을 짓누르는 감각에 아미르가 이빨을 꽉 깨물며 이세훈에게 애원했다.
“더 이상 절 비참하게 만들지 마세요…… 제발…….”
자신을 위해 희생했던 사람을 복수를 위해서 다시 희생시킨다.
그것이 아무리 현실적인 선택이라 할지라도 비참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으로 직시하게 된 자신의 감정. 그 끝없는 무력감에 아미르가 천천히 가라앉던 순간.
“그래? 알겠어.”
이세훈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힘들면 말하지 그랬어. 난 그냥 다른 아이디어가 있나 싶어서 물어본 건데.”
“…….”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하는 이세훈. 그 모습에 아미르가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혹시라도 자신을 일부러 도발하는 것인가 했지만, 동천안으로 보이는 감정은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이었다.
‘이게…… 뭔…….’
뭔가 농락당한 기분에 아미르가 뭐라 말을 잇지 못하던 그때. 이세훈이 심드렁하게 이야기를 이었다.
“뭐, 어쨌든 정리하자면 구하는 쪽이 좋다는 거지? 그럼 그쪽으로 가자.”
“……뭐라고요?”
혹시라도 잘못 들었나 싶어 되물어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똑같았다.
“몽환성에 쳐들어가서 네 사촌형도 구하자고.”
“…….”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는 이세훈의 모습에 아미르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몽환성이 무슨 동네 개집도 아니고 저렇게 쉽게 말한단 말인가.
이번에야말로 자신을 도발하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동천안의 풍경은 여전히 푸른 하늘이었다.
“왜 그런 무모한 짓을…….”
“너는 별다른 변수가 없다고 단정했지만 나는 좀 신경 쓰이거든. 몰랐으면 모를까 알았으면 한 번은 들쑤셔 봐야지.”
회귀 전 환락가의 공략에 없던 변수. 몽환마의 함정일 가능성이 있다고 해도 일단 한 번은 찔러봐야하지 않겠는가.
“아무리 그래도…….”
“그리고 네 입으로 말했잖아. 구하고 싶다고.”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미르의 모습에 이세훈이 담담히 이야기했다.
“한 배를 탔는데 그 정도는 해줘야지. 안 그래?”
사실 아미르가 정말로 자예드가 어떻게 되든지 상관없다고 말했다면, 이세훈도 그렇게 진행할 생각이었다.
자신에게 있어 자예드는 회귀 전이나 지금이나 이야기로만 들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저 대신 자예드 형님이 살았어야 합니다. 그 편이 더 나았을 거예요. 분명히.’
하지만 빙견, 아미르는 세계가 멸망해가던 그 순간까지도 자예드의 죽음을 떠올리며 후회하고 있었다.
만약 그게 아미르를 빙견으로 삐뚤어지게 만든 원인이라면 개과천선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해내야 하리라.
‘그렇게 하기로 했으니까.’
자신의 후회도, 삼견의 후회도 바로잡는다.
회귀 후 결심했던 것을 떠올린 이세훈이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아미르를 쳐다봤다.
“뭐, 더 할 말 있어?”
“예? 아, 아뇨. 이젠 없는데…….”
“그럼 멍 때리지 말고 너도 돌아가서 준비나 해.”
자리에 일어선 이세훈이 두 눈을 빛내며 이야기했다.
“이틀 뒤. 환락가를 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