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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가 다 만들어줌-219화 (219/309)

회귀자가 다 만들어줌 219화

"........"

안대와 귀마개를 착용한 채 서 있는 마누엘.

그 흔들림 없는 자세를 바라보던 이세훈은 오른손으로 허공을 움켜쥐며 여백의 휘장을 발동했다.

스륵?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자연스럽게 빠져나오는 새하얀 휘장. 이세훈은 그것을 마누엘의 머리 위쪽에 펼친 다음 공간을 제어했다.

스스스

여백의 휘장에 맞닿아 있는 공간들이 방울방울 맺혔고 잠시 후 하나둘씩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약간의 일렁거림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무형의 빗방울. 마누엘의 몸에 닿아도 자연스럽게 녹아내려 아무런 감촉도 느낄 수 없었다.

그 소리 없는 소나기 아래에서 마누엘이 계속해서 가만히 서 있던 그때.

타악!

오른손이 무언가를 가볍게 낚아챘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동작. 자신의 손안에 있는 것을 잠시 확인하던 마누엘은 그대로 정면에 있는 이세훈과 루트비히에게 보여주듯이 손을 펼쳐 보였다.

우웅.

여백의 휘장에서 떨어졌던 공간의 방울.

그것이 형체를 유지한 채 마누엘의 손안에 있는 것을 본 이세훈은 슬쩍 웃으면서 루트비히를 바라보았다.

“이 정도면 되겠죠?”

“흐음. 그 정도면 충분한 것 같군.”

루트비히에게도 인정받은 이세훈은 곧장 마누엘의 손바닥에다가 손가락으로 글자를 적었다.

[합격]

“……크아아악!”

글자의 내용을 이해한 순간. 마누엘은 기다렸다는 듯이 괴성을 내지르며 안대와 귀마개를 벗어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으윽......”

한순간에 밀려들어 오는 빛과 소리. 오랜만에 느껴지는 감각들에 마누엘은 두통을 느끼며 눈매를 찌푸렸다.

‘무슨이런 무식한 훈련이……'

공간을 인지하기 위해서 시각과 청각을 차단해 다른 감각들을 극대화시킨다. 여기까지는 마누엘도 이해할 수 있었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한 번이라도 벗으면 감각이 다시 둔화된다고 이틀 내내 안대와 귀마개를 착용시킨 것이다.

“ 괜찮아?”

“괜찮을 리가 있겠냐……!”

감각이 예민해지면서 평소보다 통증이 증폭된 것도 힘들었지만 마누엘을 무엇보다 힘들게 만든 것은 ‘잠’이었다.

평상시에도 머릿속에 잡념이 많아 깊이 잠들지 못하는 편이었는데 시각과 청각이 차단되면서 더욱 예민해진 탓에 한순간도 제대로 자지 못한 것이다.

“후우.......후우......."

다크서클이 퀭하게 내려온 마누엘은 두 눈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면서 이세훈에게 물었다.

“그래서 훈련은 이걸로 끝이야?”

“일단은? 어떻게 베어낼지는 네가 하기 나름이라서.”

공간을 인지하고 만지는 것까지 성공했지만 그걸 베어낼 수 있느냐 없냐는 또 별개의 문제.

특히 본인의 기술에 따라서 미세하게 달라지는 만큼 어느 정도 실력과 재능이 있다면 스스로 깨우치는 편이 좋았다.

“그래. 그럼 도와줘서 고맙고, 약속한 건 모두 지킬 테니까 다음에 또 기회가 되면 보자. 배웅은 안 할 테니까 조심히 돌아가고 학원장님도 옆에서 지켜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면 저는 이만 한숨一”

쿠웅!

"........"

말을 다 끝내지도 못하고 대자로 쓰러져서 잠들어 버린 마누엘. 그 모습에 이세훈이 어이없이 보고 있을 때. 눈앞에 알림창이 떠올랐다.

[대상 ‘마누엘 오르테가’와의 인연이 성립되었습니다.]

‘흠. 뭐, 이 정도면 됐나.’

인연도 성립됐고 훈련시키면서 여백의 휘장에도 익숙해졌으니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성과다.

이세훈이 잠든 마누엘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 옆에 서 있던 루트비히가 물었다.

“장소를 옮길까 하네만, 괜찮겠나?”

“아, 예. 괜찮습니다.”

후웅.

대답과 함께 순식간에 뒤바뀐 풍경.

구름 한 점 없이 펼쳐진 광활한 밤하늘과 발아래에서 빛나는 바벨의 야경. 당연히 학원장실로 가리라 생각했던 이세훈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여기는……"

“바벨을 살필 때 종종 오는 곳이라네. 높이와 각도가 모두 적절해서 보기가 편하지.”

루트비히의 이야기에 이세훈이 발아래에 펼쳐진 바벨의 야경을 내려다보았다.

북태평양에 만들어진 거대한 인공섬. 영웅의 탑을 중심으로 세워진 그 거대한 도시의 모습에 이세훈이 새삼 감탄했다.

‘잘만들긴 했어.’

인공섬에 존재하는 수많은 시설들이 절묘하게 맞물려 마치 하나의 생명체처럼 움직인다.

이런 구조를 만들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쳤을까. 그 풍경을 이세훈이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을 때.

“어떤가.”

옆에 서 있던 루트비히가 물었다.

“이 정도면 잘 가꿔진 것 같지 않나?”

자부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루트비히. 그 옆모습에 이세훈은 자연스레 바벨의 별명을 떠올렸다.

‘승천제의 정원이었던가.’

루트비히가 지난 수십 년간 정성을 들여 가꾼 터전. 그 주인으로서 내비치는 자부심에 이세훈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육성기관이자 연구소. 거기에 다양한 편의시설을 갖춰 거주지로서도 훌륭했다.

영웅들뿐만 아니라 평범한 시민들도 살고 싶어 하는 이상적인 공간. 그것이 바로 지금의 바벨인 것이다.

“바벨은 내가 꿈꾸는 이상적인 공간을 만들어낸 걸세.”

“이상적인 공간……"

“모든 이들이 어제의 자신보다 더 나아지고자 하는 진취적인 세계. 그걸 만들어내는 것이 나의 오랜 꿈이었다네.”

루트비히의 이야기에 이세훈은 자연스레 입학식에서 들었던 연설을 떠올렸다.

‘그때도 시련이니 뭐니 말했었지.’

스스로 향상심을 가진 이들도 많았지만, 루트비히는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을 독려하고 이끌고자 하는 사람이었다.

만마의 늪이라는 거대한 시련 속에서 사람들을 이끌고 나아가려는 존재. 그렇기에 지금처럼 혼란한 세계에서는 리더로서 나쁘지 않으리라.

‘조금 빡세기는 하지만 말이야……'

이세훈이 야경을 내려다보며 여러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루트비히가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리고 지금 나와 바벨은 그 꿈을 이룰 수 있느냐 없느냐를 결정짓는 중요한 갈림길에 서 있네. 성공할 수 있을지는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지.”

자신의 꿈이 걸린 일생일대의 순간. 지금이 얼마나 중요한 시기인지를 설명한 루트비히가 담담히 이야기했다.

“그러니 이번에 내가 자네를 돕지 못하더라도 부디 너그럽게 넘어가 주게나.”

루트비히의 이야기에 이세훈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당연히 도와달라거나 그런 이야기가 나올 줄 알았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이야기가 나왔기 때문이다.

‘이거 설마 내 눈치를 보는 건가?’

자신도 이런 상황이니 못 도와줘도 이해해 달라.

양해를 구하는 듯한 루트비히의 이야기에 이세훈이 신기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이렇게까지 신경 쓰고 있을 줄은 몰랐네.’

도와주지도 않을 거면서 테스트랍시고 여백에 집어넣길래 자신을 집 앞마당에 풀어놓은 개새끼처럼 취급하는 건가 싶었는 데 아무래도 그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루트비히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게 된 이세훈은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제가 그동안 학원장님께 도움을 받은 게 얼마나 많은데 그런 생각을 하겠습니까.”

이번에만 도움을 못 받을 뿐이지 그동안 루트비히와 바벨에게서 받아낸 것들을 생각해 보면 결코 적지 않다.

그런데 겨우 이번 한 번가지고 실망해서 거리를 둔다? 회귀 전의 광견 같은 미친놈이 아니고서야 그런 짓은 안하리라.

“자네가 그렇게 말해주니 한결 마음이 놓이는군. 혹시라도 도와줄 생각도 없으면서 테스트 같은 거나 한다고 고깝게 여겨지는 게 아닐지 걱정이 들더군.”

“하핫. 그럴 리가요. 그런 은혜도 모르는 짐승 같은 놈이 어디 있겠습니까.”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하는 이세훈의 모습에 루트비히도 부드럽게 웃었다.

“고맙네. 이건 약소하지만 자네의 성취에 대한 보상일세."

루트비히가 허공에 손을 내리긋자 황금색 열쇠 구멍이 나타났고, 그대로 90도로 회전하더니 위아래로 갈라지며 하얀 구멍이 나타났다.

그동안 몇 번이고 봐온 장면이었지만 여백을 다룰 수 있게 된 지금은 조금 다르게 보였다.

‘특수한 아공간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여백이었네.’

어쩌면 바벨 곳곳에도 여백으로 숨겨진 공간들이 많을지도 모르겠다고 이세훈이 생각하던 그때. 안쪽에서 한 반지가 빠져 나와 이세훈의 앞으로 날아갔다.

“ 이건......"

중앙에 하얀색 선이 그어진 황금색 반지.

겉보기에도 평범해 보였고, 실제로도 별다른 힘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이세훈이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루트비히가 설명을 이었다.

“자네를 위해서 만들어낸 반지네만…… 사정이 있어서 약간의 금제를 걸어놨네. 그걸 풀어야 제대로 사용할 수 있지.”

“무슨 금제입니까?”

“미안하지만 그것도 말해줄 수 없네.”

금제를 풀어야 쓸 수 있는데 그게 뭔지 말해주지 않겠다. 누가 들으면 장난치는 건가 싶겠지만 루트비히는 시종일관 진지 했다.

‘뭔가 까다로운 물건인가 보네.’

보기 드물기는 하지만 이런 식으로 제약이 덕지덕지 붙은 물건이 없는 것은 아니다. 대수롭지 않게 넘긴 이세훈은 곧장 반지를 잡아서 정보장을 살폈다.

[영웅의 반지]

[등급: 전설] [품질: 중]

최초로 완등에 성공한 절대자, ‘루트비히 슈베르트’가 직접 만든 반지.

금제로 인해 모든 기능이 봉인되어 있다.

‘흐음……금제가 엄청나긴 한가 보네.’

어지간한 금제들은 뭔가 꽉 묶어놨다는 느낌이라도 드는데 이쪽은 그냥 아무것도 느껴지지가 않는다.

이 정도 완성도라면 강제로 뭔가 해보려고 했다가는 반지 자체가 파괴될 가능성이 높으리라.

‘완등자가 되라거나 그런 말도 안 되는 조건은 아닐 테고…… 뭐 차근차근 알아 가면 되겠지.’

영웅의 반지를 오른손 약지에 착용한 이세훈은 별다른 문제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루트비히에게 고개를 꾸벅였다.

“감사히 잘 쓰겠습니다.”

“직접 풀어주지는 못하지만 기회가 보이면 적극적으로 밀어주겠네.”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한 루트비히는 밤하늘의 달로 시간을 확인한 다음 물었다.

“혹시 따로 하고 싶은 말 있는가?”

루트비히의 물음에 이세훈이 잠시 고민하다가 물었다.

“다른 완등자분들 중에 도움을 받는다면 누가 좋을까요?”

환락가는 공략할 기반을 모두 갖춰뒀기에 준비가 다 될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상황.

그렇기에 지금부터는 몽환마를 확실하게 죽일 수 있는 무력이 필요했는데, 위르겐 한 명만으로는 100% 성공한다고 장담 하기 어려웠다.

‘가능한 확률을 높여두는 게 좋겠지.’

아무리 자신이 회귀 전에 몽환마를 토벌하는 데 성공했다고 해도 그때와 지금은 전혀 다른 상황.

능력도 그때보다 한참 떨어지는 상태였기에 더욱 철저한 준비가 필요했다.

“완등자라……"

이세훈의 물음에 루트비히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 생각에는 원견사가 좋을 것 같군.”

“이유가 있을까요?”

“원거리 공격에 능한 만큼 어디에서 뭘 하든지 지원받기가 쉽지. 그리고 자네의 계획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원견사라면 도와주지 않을까 싶군.”

루트비히의 이야기에 이세훈이 두 눈을 빛냈다.

원래도 원견사와 순례자 중에 한 명을 끌어들일 생각이었는데 그들의 ‘가치관이 어떤지 제대로 알 수 없기에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다.

‘순례자보다는 원견사가 더 낫다 이거구만.’

완등자에 관한 건 완등자에게 물어보는 것이 가장 빠르다. 이세훈이 만족스러워하던 찰나.

“그도 그럴 것이.”

루트비히가 옆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지금도 자네를 보고 있으니까.”

담담한 한마디. 그에 이세훈은 자연스레 루트비히의 시선을 따라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망망대해. 하지만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있는 이세훈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설마......'

우우웅.

주머니에서 울리는 진동. 그에 이세훈이 휴대폰을 꺼냈고, 본 적 없는 전화번호가 찍혀 있었다.

상대가 누구일지 얼추 예상이 간 이세훈은 그대로 휴대폰을 귀에 가져다 대며 전화를 받았다.

-꽤 재밌는 일을 준비하고 있는 모양이구나.

“ 그게......"

-됐다. 어차피 한 번은 만날 생각이었으니 직접 듣는 편이 더 좋겠지.

바벨로부터 수천 킬로미터 넘게 떨어져 있는 네팔의 에베레스트산. 그 정상에 놓인 갈색 흔들의자가 멈췄고, 새하얀 중절모와 코트를 걸친 인물이 일어섰다.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젊은 청년을 바라보며 노파, 하백연이 두 눈을 감은 채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서로 얼굴이나 한번 보자꾸나. 제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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