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가 다 만들어줌 198화
카페 라일락의 구석진 자리.
자주 애용하는 자리에 앉은 이세훈은 맞은편을 바라보았다.
“…….”
방학이라서 그런지 생도복 대신 이빨무늬가 그려진 검은 반팔 티에 청바지를 입고 있는 생각에 잠겨 있는 루이제.
그 모습에 이세훈은 대답이 돌아올 때까지 커피를 홀짝였고, 잠시 후 입이 열렸다.
“그러니까 게르윈 그 새끼 아빠를 만나러 간다는 거지?”
“맞아.”
상아탑의 특기생으로 뽑히기 위해 비에르 바르무트와 손을 잡고 루이제의 무구에 수작을 부렸던 게르윈 크루거.
회귀 전이나 지금이나 루이제가 『여명』에게 농락당하게 만든 원흉이었고, 그 대가로 폐인이 되어 바벨을 떠난 녀석이기도 했다.
“으음…….”
이세훈의 대답에 루이제가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눈매를 찌푸리더니 이내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네 생각은 어때?”
“그때 일이랑 관련 있었을 거 같냐고?”
고개를 끄덕이는 루이제의 모습에 이세훈은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관련 없었을 거야. 그건 확실해.”
“……그래?”
추측도 아니고 확신에 가까운 대답에 루이제가 의아하게 바라보자 이세훈이 담담하게 설명했다.
“위르겐 그 양반은 완전히 방임주의거든. 자식들이 무슨 짓을 하든 결과만 보고 판단한다더라고.”
게르윈이 특기생으로 뽑히기 위해 더러운 수작을 부렸더라도 들키지만 않는다면 신경 쓰지 않고, 오히려 특기생으로 뽑혔다고 상을 줬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게르윈이 모든 수작질을 들키고 구제가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면 가차 없이 버리는 것이다.
“게다가 자식들끼리 경영권을 두고 경쟁을 시키니까 그런 수작질을 조장하는 듯한 느낌도 있어.”
경쟁자가 더러운 수를 쓰고도 제재를 받기는커녕 잘했다고 상을 받으면 당연히 다른 이들도 눈이 돌아갈 수밖에 없다.
이세훈의 설명에 루이제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완전 개새끼잖아.”
“개새끼지. 영웅의 탑 생기기기 전에도 부패기업인으로 유명했었어. 전쟁 중의 활약상이랑 완등자가 되면서 조금 세탁된 거지.”
다른 이들이 뒤바뀐 세계에 적응하지 못하던 시기에 빠르게 자신의 적성을 깨닫고 시체를 사들여 사령군단을 만들었던 위르겐 크루거.
그뿐만 아니라 시체를 사용한다는 특성 탓에 음지로 쫓겨날 뻔했던 사령술사들을 대대적으로 영입해 사령술의 기초를 닦기도 했는데, 그 활약상은 부정할 수 없었다.
‘여전히 인성쓰레기에 부패한 양반이라 그렇지.’
만마전과의 전쟁에서는 여전히 필요하지만, 사회적으로는 문제의 여지가 많은 골치 아픈 인물.
그런 이세훈의 설명을 모두 들은 루이제가 한참을 끙끙거리더니 어느 정도 생각이 정리됐는지 입을 열었다.
“그 사건이랑 관련 없으면 나랑도 관련 없는 거지. 물론 그 양반 자식교육이 엉망인 원인도 있겠지만…… 뭐, 그거야 나중에 내가 강해지고 나서 이 부분 불평 좀 하고.”
“그래. 이해해 줘서 고마워.”
“뭔 낯부끄러운 소리를…….”
질색인 표정을 하며 커피를 마시던 루이제가 문득 한 가지를 떠올리며 물었다.
“아, 너 이번 여름방학 때 계획 같은 거 있어?”
“음? 뭐, 있기는 하지.”
환락가를 무너뜨리고 십악인 몽환마를 죽인다.
1학년 생도의 여름방학 계획이라기에는 조금 거창하긴 하지만 명색의 회귀자인데 이 정도는 해줘야 하지 않겠나.
“많이 바빠?”
“그렇긴 한데 아예 여유가 없는 건 아니야. 왜?”
“시간 있으면 어디 좀 가게.”
루이제의 이야기에 이세훈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짓다가 이내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나랑 그렇게 놀고…….”
“개소리 말고. 이거야 이거.”
이세훈의 말을 단번에 잘라낸 루이제가 휴대폰을 앞으로 내밀었다.
화면에 떠 있는 것은 교육기관의 유망주들을 대상으로 한 기업의 현장체험 개요.
그리고 그 기업이란 바로 마리오넷 팩토리, 『여명』과 관련된 것으로 추측되는 곳이었다.
“너 어차피 여기도 한 번 들쑤실 생각이었잖아. 다음에 나랑 같이 가자.”
“흐음…….”
루이제의 제안에 이세훈이 마리오넷 팩토리의 현장체험 내용을 살펴보았다.
공방의 견학과 소속된 장인들에게 교육을 받는 등, 내용이 나쁘지는 않다.
그리고 만약 정말로 내부에 『여명』이 존재한다면 자신과 루이제가 신청을 넣는 즉시 무언가 반응을 보이리라.
‘조금 위험하긴 하겠지만 대책만 세워두면 되겠지.’
결정을 내린 이세훈은 루이제에게 휴대폰을 돌려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이때 시간 비워둘게.”
“오케이. 그전까지 빡세게 연습하고 있을 테니까 너도 이번에 가서 잘 배우고 와.”
“물론이지.”
시간을 확인한 이세훈은 남은 커피를 단숨에 마신 다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이만 가볼게. 슬슬 약속시간이라.”
“응? 다른 사람이랑 같이 가는 거였어?”
“어쨌든 바벨 밖으로 나가는 거니까.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까 보디가드는 있어야지.”
이제는 만마전 전체가 눈에 불을 켜고 자신을 살펴보고 있을 테니 신분을 숨기지 않을 때는 반드시 믿음직한 인물과 함께 동행해야 한다.
“그건 그러네. 그래서 누구랑 가는데?”
루이제의 물음에 이세훈이 슬쩍 웃었다.
“내가 최우선인 사람.”
* * *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위치한 아공간 터미널.
바벨에서 건너온 이세훈은 큼지막한 창밖으로 보이는 어두컴컴한 야경을 바라보았다.
‘저쪽에서 오전 11시쯤에 건너왔으니까 이쪽은 오후 11시쯤이겠네.’
시차로 인해 한낮에서 한밤중으로 변한 주변.
상당히 늦은 시간인데도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터미널의 내부에 이세훈이 천천히 둘러보고 있을 때.
“이세훈 생도.”
뒤따라 나온 검은 정장에 붉은 머리의 여인, 류은하가 담담히 이야기했다.
“UD그룹 측에서 마중을 나와 있다고 하니 밖으로 바로 나가면 될 것 같습니다.”
“그래요? 생각보다 깍듯하게 나오네요.”
배우러 왔으니 알아서 오라고 할 줄 알았는데 어쨌든 표면상으로 협력관계를 맺었으니 대우를 해주려는 모양이다.
‘아니면 병문안 선물이 필요 없다는 말에 감동한 걸 수도 있고.’
속으로 피식 웃은 이세훈은 무표정하게 서 있는 류은하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모처럼 여름방학인데 저 때문에…….”
“괜찮습니다. 어차피 저도 따로 예정이…….”
우우웅
주머니에서 울리는 진동. 그에 류은하가 휴대폰을 꺼내서 화면을 보더니 전화를 거절하고 차단까지 해놓은 다음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집어넣었다.
“없었으니까요. 신경 쓰지 마시고 편하게 하실 일을 하시면 됩니다.”
딱 봐도 본래 예정이 있었지만 자신의 부탁에 다 무시하고 달려온 것처럼 보였지만, 이세훈은 굳이 그 부분을 캐묻지 않기로 했다.
류은하가 무시한다는 것은 그래도 문제가 없다는 계산이 끝났기에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광견 그놈이랑은 다르지.’
그쪽은 ‘문제가 생기든 말든 알 바 아니다’ 하고 움직이기 때문에 어디부터 수습을 해야 할지 알아봐야 했지만, 류은하는 무슨 일이든 믿고 맡겨도 괜찮았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번에 잘 부탁드릴게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럼 출발하시죠.”
두 사람이 터미널의 입구로 향하는데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근처에서 들려온다.
뭔가 심상치 않다고 생각하며 밖으로 나선 순간. 이세훈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게 뭔…….”
두개골에 푸른색 청염이 일렁거리는 스켈레톤들이 검은 정장을 차려입고 길을 만들어내듯 줄지어 섰고, 그 끝에 고급 리무진 한 대가 놓여 있었다.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모으는 그 광경에 이세훈이 어이없이 보고 있을 때.
창백한 피부에 냉담하게 생긴 사내가 곁으로 다가왔다.
“어서 오십시오 이세훈 생도님. 류은하 학과장님.”
두 사람에게 고개를 숙이며 깍듯하게 인사한 사내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자신을 소개했다.
“오늘 두 분을 모시게 된 UD그룹의 비서실장직은 맡고 있는 베냐민이라고 합니다.”
어제 통화했던 상대인 베냐민의 모습에 이세훈이 신기한 표정을 지었다.
‘이 양반이 위르겐의 오른팔인가.’
오직 위르겐의 명령에만 절대복종하며 UD그룹의 공식적인 업무부터 시작해서 비공식적인 일 처리까지 도맡아 처리하는 하수인.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비명횡사한 S급 영웅의 말로를 직접 보게 된 이세훈은 신기한 표정을 지었다.
‘억울한 표정을 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좀 의외네.’
달관했다기보다는 명령을 따르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생각이 없어 보인다.
그 모습을 흥미롭게 살피던 이세훈이 뒤쪽의 리무진을 슬쩍 보았다.
“어디로 갑니까?”
“회장님께서 간단하게나마 얼굴을 뵙고 싶다고 하셔서 우선 본사로 향할 예정입니다.”
깍듯하게 대해주기는 하지만 일정은 이쪽에서 정한다. 완전히 져주는 것은 아닌 행동에 이세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학과장님. 가죠.”
“예.”
두 사람이 스켈레톤으로 만들어진 통로를 걸어서 지나갔고, 리무진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스켈레톤들이 절도 있게 문을 열어주었다.
차 내부는 당연하게도 세계적인 기업의 총수가 보내준 만큼 매우 고급스러웠는데 내구도도 상당해 보였다.
‘묘하게 서늘한 걸 보아하니 사령술로 강화시켰나보네.’
아마도 특수제작한 뼈를 차량 사이에 끼워 넣었을 터.
사실상 언데드에 가까운 리무진의 구조에 이세훈이 신기해하고 있을 때. 문이 닫히며 부드럽게 출발하기 시작했다.
후웅
방음이 되어 있는지 배기음도 들리지 않았고 저녁이라 한산한 도로 위로 리무진이 나아간다.
근처에는 다른 언데드들이 탑승한 차가 호위하듯이 따라 움직였고 하늘에는 뼈로 이뤄진 새들이 곳곳을 날아다닌다.
상상 이상으로 철저한 UD그룹 측의 호위에 이세훈이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흐으음…… 이거 아무래도 많이 감동한 모양인데.’
만났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일지 기대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조금 걱정되기도 한다.
바깥을 한참 살피던 이세훈은 안쪽을 시선을 돌렸다.
“…….”
“…….”
시체처럼 묵묵하게 앉아 있는 베냐민과 석상처럼 옆에 딱 붙어서 앉아 있는 류은하.
둘 다 본래 과묵하기도 했지만 그것과 별개로 묘한 긴장감이 감도는 것을 느꼈다.
‘서로 의심하는 건가.’
베냐민은 류은하가 혹시라도 돌발행동을 일으키는 것이 아닌가 경계했고, 류은하도 베냐민이 갑자기 습격해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감각을 곤두세웠다.
서로 신뢰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분위기. 이세훈은 그 모습에 왠지 모르게 바벨과 UD그룹의 관계가 어떤지 간접적으로 느껴졌다.
‘필요에 의해 손을 잡기는 했지만…… 신뢰 같은 건 눈곱만큼도 없겠지.’
이 자리에서는 자신의 안전이고, 바벨과 UD그룹의 경우 아마 이전 특별시험 때 보았던 영웅의 탑의 연구결과가 분명하리라.
‘그러고 보니 그것도 한 번 물어보긴 해야 하는데.’
영웅의 탑과 현실을 연결시키는 승천제의 연구.
회귀 전에 본 적 없었던 그 광경을 다시 떠올린 이세훈이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과연 그 연구는 무엇을 위한 것이고, 최종적으로 어떤 결과를 만들어낼 것인가. 짐작도 하지 못한 일인 만큼 좀처럼 상상이 가지 않았다.
‘뭐, 그냥 단순히 영웅들의 육성에 도움을 주려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어째서 회귀 전에는 공개하지 않은 것일까.
이세훈이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리무진이 거대한 빌딩의 앞에 세워졌다.
“도착했습니다.”
이번에도 미리 대기하고 있던 언데드들이 문을 열어주었고, 밖으로 내린 이세훈은 그대로 눈앞의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주변의 다른 빌딩과는 차원이 다른 크기와 높이. 예상과 다르게 이쪽에는 다른 호위들이 보이지 않았는데 나름대로 자신감의 표출로 보였다.
‘여기서부터는 내 영역이다 이거구만.’
바벨이 승천제의 정원으로서 안정을 보장받듯이 이곳 UD그룹의 본사 건물 역시 불명자 위르겐의 터전으로 그의 휘하에서 보호받는다.
살아 있는 생물처럼 위압감을 뿜어내는 빌딩을 올려다보던 이세훈이 그대로 베냐민의 안내를 받으며 안으로 향했다.
“본사 건물 내부에 견학하고 싶으신 곳이 있으시다면 차후에 편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어디든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음…… 알겠습니다.”
사람들 대신 언데드들이 바쁘게 일하고 있는 건물을 슬쩍 살피던 이세훈은 그대로 안쪽에 있는 엘리베이터에 탔다.
우우웅─
세 사람이 탑승한 엘리베이터가 순식간에 최상층에 도착했고, 문이 열리자마자 고급스러운 복도가 나타났다.
단 한 사람을 위해서 만들어진 층. 그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던 이세훈은 끝에 위치한 문 앞에 섰다.
“…….”
세계에서 손꼽히는 초거대기업 UD그룹의 회장. 그리고 일곱 명의 완등자 중 최강의 사령술사.
불명자 위르겐 크루거가 기다리고 있을 문을 올려다보던 이세훈이 옆에 서 있는 베냐민을 바라보았다.
“바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직접 문을 열고 들어가라는 듯 옆으로 빠지는 베냐민. 그에 옆쪽에서 걷던 류은하가 앞으로 나섰다.
“그럼 제가…….”
“아뇨. 제가 먼저 들어갈게요.”
앞장서려는 류은하를 붙잡은 이세훈은 그대로 굳게 닫힌 문에 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무게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은 문을 가볍게 열어젖혔고.
[네놈인가]
방 안쪽을 가득 채운 어둠이 순식간에 뻗어 나와 복도까지 모조리 집어삼켰다.
순식간에 주변을 뒤덮은 칠흑 같은 어둠. 그 안쪽에 한 줄기의 선들이 그어지더니 이내 천천히 위아래로 벌어졌다.
천장과 벽, 바닥을 가득 채운 수십, 수백 개의 눈동자. 자신을 바라보는 그 무거운 시선들 속에서 이세훈이 방 안쪽에 있는 해골을 보았고.
[일단 죽어라]
그 몸이 경계를 넘어 어둠 속에 삼켜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