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가 다 만들어줌-195화 (195/309)

회귀자가 다 만들어줌 195화

“바벨은 앞으로도 더 많은 변화가 찾아올 것입니다. 그 격류 속에서도 멈추지 말고 나아가십시오. 그것이 여러분들에게 주어진 유일한 의무입니다.”

루트비히의 연설을 마지막으로 종강식이 마무리되었고, 생도들이 자연스럽게 주변으로 흩어졌다.

오늘부터 두 달 간의 자유.

물론 바벨에 입학한 생도쯤 되면 현장실습이나 교수휘하의 프로젝트 등 방학 중에도 참가하는 일들이 많았다.

하지만 강의가 없다는 것만으로 느낌이 색다른 법. 그리고 오늘은 시험이 끝난 날인 만큼 생도들 모두 얼굴에 화색이 돌고 있었다.

“방학이라…….”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세훈은 그동안 시험 때문에 미뤄두고 있었던 일들은 하나씩 곱씹어보았다.

‘천운철로 무구도 만들고…… 양산형 검기도 본격적으로 생산하고…… 원견사 얼굴도 한 번 봐야하고…….’

처음에는 얼마나 될까 싶었는데 하나하나 떠올리다 보니 끝도 없이 늘어난다.

특히 이중에서 가장 까다롭고 어려운 것은 몽환마의 토벌, 환락가의 공략이었는데 사전에 준비해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래도 이번 일로 얼추 설계도가 나오긴 했네.’

환락가에서 레아를 기다리고 있는 인형사. 마리오넷 팩토리. 증축 프로젝트. 몽환마의 눈. 그리고 구역장으로 임명받아 자신을 위한 이중스파이가 되어줄 아미르까지.

재료는 충분히 마련되었으니 남은 것은 이것들을 얼마나 잘 활용해서 환락가의 내부에 준비해 둔 ‘폭탄’을 전달할 것인가.

앞으로 기회를 잘 살펴봐야겠다고 이세훈이 다짐했고.

후웅!

반사적으로 몸을 뒤틀어 기척 없이 다가오던 이에게 손날을 찔러 넣었다.

탁!

매섭게 내질러진 손날이 새하얀 손에 가볍게 붙잡혔고, 황금빛의 웨이브 진 머리칼을 지닌 여인이 미소를 지었다.

“이제 안 망설이는구나?”

머리를 노리고 날아왔던 손날을 보며 재밌어하는 여인, 아리아의 모습에 이세훈이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전에 선배가 그렇게 하라고 하셨잖습니까.”

“흐응. 내 말을 그렇게 잘 들어줄 줄은 몰랐는데…… 그럼 다른 부탁도 들어주니?”

“아뇨. 그건 별개죠.”

“제멋대로네.”

슬쩍 웃으며 붙잡고 있던 손날을 놓아주는 아리아. 언제나 여유로운 그 모습에 이세훈이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래서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조금 서운한걸. 우리가 꼭 특별한 일이 있어야만 만날 수 있는 거야?”

“예.”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이세훈. 변함없이 자신을 싫어하는 그 모습에 아리아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핫. 그러네. 확실히 그런 사이지. 뭐, 특별한 건 아니고 검기 양산화 관련으로 말할 게 있어서.”

“그거라면…….”

“그 전에.”

이세훈을 바라본 아리아가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아까 종강식 때 이야기한 병문안 선물이 뭐야? 보아하니 뭔가 암호 같아 보이던데.”

방송을 보고 있을 위르겐을 겨냥하고 보냈던 메시지. 그 내용을 떠올린 이세훈이 담담히 대답했다.

“암호 같은 건 아니에요. 그냥 말 그대로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풀자면 ‘자신만만하게 말하더니 생도 한 명도 제압 못했네요. 무슨 계획인지 몰라도 처음부터 다시 짜세요.’ 지만 어쨌든 그 이외에 다른 뜻은 없었다.

“흐음…….”

그런 이세훈의 대답에 아리아가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이내 무언가 깨달은 듯 눈을 빛냈다.

“이제 보니 꽤 특이한 힘이 생겼었네. 학원장님 같은 느낌의…… 다른 완등자와 관련된 거구나?”

추측이 아니라 확신에 가까운 물음. 잠시 살펴본 것만으로 자신의 변화를 알아내는 아리아의 모습에 이세훈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단순히 감이 좋다는 것만으로 가능한 일인가?’

이전과 마력이 달라진 것까지야 자신도 충분히 구분할 수 있지만, 그 안에 완등자의 권능이 들어간 것까지 알아내는 것은 이야기가 다르다.

‘어쩌면 완등자들만 느낄 수 있는 뭔가가 있는 걸지도 모르겠네.’

아직은 완등자가 아니긴 하지만 훗날 영웅의 탑을 완등하여 성검사라 불리게 될 아리아.

그만한 재능이라면 벌써부터 완등자와 비슷한 시야, 혹은 감각을 지닌 것일지도 모르리라.

“뭐,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자. 그렇게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니까.”

“……그래주시면 저야 고맙죠.”

“그럼 이제 본론으로 돌아가서…… 여름쯤에 가문에 행사가 있다고 한 거 기억나니?”

아리아의 물음에 이세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것 때문에 시제품도 앞당겨서 만들었으니까요.”

전시회에서 시제품을 공개한 이후 이세훈은 제이크를 통해 생산을 위한 설비들의 설계도를 모두 보내둔 상태였다.

지금쯤이면 어느 정도 완공되었을 테니 조만간 본격적으로 생산이 시작될 터. 오랫동안 준비해 온 프로젝트가 드디어 막바지에 다다른 것이다.

“조만간 일정이 확실히 잡힐 것 같은데 아버지가 너도 정식으로 초대하고 싶다고 하시더라고. 네 생각은 어때?”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검술명가 마이어스 가문의 초대. 그 제안에 이세훈은 잠시 고민하다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어차피 전에 약속하신 보상 때문에 한 번은 갔어야 하니까요.”

행사에 맞춰서 생산 일정을 앞당겨준 대가로 마이어스 가문은 자신들의 창고에 있는 물건 중 하나를 내주기로 했었다.

그걸 받으려면 어차피 그쪽 집에 한 번 들렀어야 하니 겸사겸사 참가해도 나쁘지는 않으리라.

“생각보다 흔쾌히 받아주는구나.”

“참석하는 거야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니까요. 그래서 여름에 있을 행사라는 게 뭡니까?”

“약혼식이야.”

“그렇…… 약혼식?”

이세훈이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자 아리아가 싱긋 웃었다.

“왜. 의외니?”

“그건 아닙니다만…….”

예상치 못한 내용에 이세훈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회귀 전에 아리아가 누군가랑 약혼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회귀 전에는 파토난 건가? 아니, 어쩌면 나비효과일지도 모르겠구만.’

양산형 검기무구라는 엄청난 물건이 마이어스 가문에게 독점으로 넘어갔으니 어떤 변화가 생겨나도 이상하지 않다.

잠시 당황했던 이세훈은 금방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시간 잡히는 대로 말씀해 주세요.”

“알았어. 아, 그리고 지난번에 약속했던 보수는 언제쯤…….”

“아, 여기들 있었네.”

아리아의 말을 자르며 두 사람이 자연스럽게 다가왔고, 이세훈이 말을 걸어온 청년을 바라보았다.

새카만 흑발에 무테안경. 그리고 미소를 짓고 있는데도 묘하게 냉담함과 끈적거리는 불쾌감이 느껴지는 전형적인 엘리트 같은 모습.

에리카의 오빠이자 3학년 학년수석인 이노우에 렌의 등장에 이세훈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학원장님이 학년수석을 모두 불러오라고 하셔서. 아, 혹시 중요한 이야기 중이었어?”

미소를 지으며 물어보는 렌. 그 시선과 물음은 오롯이 이세훈을 향해있었는데 옆에 있던 아리아는 안중에도 없어보였다.

“흐응…….”

그 모습에 아리아의 미소가 짙어졌고 주변에 기묘한 긴장감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바벨 내에서 사이가 껄끄럽기로 유명했었던 이노우에 가문과 마이어스 가문. 아마 그런 소문이 퍼졌던 것은 이 두 사람 때문이 분명하리라.

당장에라도 뭔가 터질 것처럼 일촉즉발인 상황에 이세훈의 두 눈이 빛났다.

‘싸우나? 싸우나?’

두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지 몰라도 이세훈은 아리아나 렌이나 모두 경계하고 있었기에 두 사람이 자신을 두고 싸운다면 쌍수를 들고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두 사람이 숨기고 있는 손패를 확인할 수도 있고 무엇보다도 적당한 때에 끼어들어서 우위를 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 때문에 싸우지 말라고 한 번쯤 외칠 때가 되긴 했지.’

회귀 전, 삼견이 자기 무구를 먼저 만들겠다고 말싸움하다가 거점으로 삼았던 도시를 싹 날려 버린 적이 있었다.

본래 폐허였던 도시였기에 다른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제때 피하지 못한 탓에 싸움에 휘말려 죽을 뻔한 적이 있었는데 그 이후로 삼견들이 조금 고분고분해졌었다.

‘그런 식으로 이 둘 사이에서 한 번 고삐를 잡으면…….’

양쪽 모두 어느 정도 편하게 다룰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이세훈이 생각하고 있을 때.

“저기.”

렌을 뒤따라왔던 갈색머리칼에 퀭한 인상의 청년, 2학년 학년수석 ‘마누엘 오르테가’가 담담히 이야기했다.

“학원장님 기다리시는 것 아닙니까? 뭔지 몰라도 적당히 해야 할 것 같습니다만.”

귀찮음이 팍팍 묻어나는 마누엘의 이야기에 두 사람 사이의 긴장감이 누그러들었고, 렌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이야기했다.

“그래. 슬슬 가야겠네. 우린 먼저 가볼게.”

렌이 몸을 돌려 걸어갔고, 마누엘도 고개를 꾸벅이고는 그 뒤를 따라 걸어갔다. 순식간에 흐지부지된 분위기에 이세훈이 살짝 입맛을 다셨다.

‘눈치 없기는…….’

루트비히가 정말 급했으면 어련히 공간이동으로 불렀을 텐데 뭘 그렇게 급하게 군단 말인가.

말투를 보건데 정말 루트비히를 생각해서라기보다는 가만히 보고 있기가 귀찮아서 그런 것이 분명하리라.

‘저런 부분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네.’

터덜터덜 걸어가는 마누엘.

2학기에 들어오는 편입생 중 한 명이자 루이제를 누르고 학년수석을 차지한 우르의 2학년 학과수석.

그리고 미래에 ‘웨폰마스터’라고 불리게 되는 S급 영웅. 회귀 전 자신의 단골이었던 상대의 뒷모습에 이세훈이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저 양반은 잘 지켜봐야지.’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한 이세훈은 아리아를 바라보았다.

“저희도 가죠.”

“흐음. 그래.”

두 사람은 렌을 뒤따라서 걸었고, 잠시 후 단상 아래에서 학과장들과 이야기 중인 루트비히가 보였다.

“아. 다들 모였군. 자네들은 이만 가보게나.”

루트비히의 이야기에 학과장들이 물러났고, 이세훈의 옆을 지나가던 류은하가 눈을 마주치더니 작게 입술을 움직였다.

‘신중하게.’

류은하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알아차린 이세훈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고, 학년수석들이 루트비히의 앞에 섰다.

“자네들을 불러 모은 것은 다름이 아니라 이전에 전달한 학년수석이 받을 혜택…… 완등자에게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특별체험’에 대해 할 말이 있어서라네.”

루트비히의 이야기에 주변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다른 누구도 아닌 완등자에게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기회.

아무것도 얻지 못할 수도 있지만, 얻는다면 영웅의 탑을 등반한 것 이상으로 성장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 기대가 담긴 시선 속에 루트비히가 담담히 이야기했다.

“일단 표기는 완등자라고 자신만만하게 했지만…… 사실 몇몇은 가르침을 받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네. 본래 고위 영웅들은 제멋대로 구는 경우가 많으니.”

자신은 거기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듯이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한 루트비히가 설명을 이어갔다.

“우선 탐구자는 연락이 끊긴 지 오래돼서 불가능하네. 성화공도 자신이 그럴 이유가 없다고 거절했고, 선행자는 맘대로 하라는데 이 친구 성격상 제대로 가르치지 않을 가능성이 높을 걸세.”

단숨에 세 명의 완등자를 제외시킨 루트비히.

지금 완등자는 총 일곱 명이었기에 결국 남는 것은 네 사람밖에 없었다.

“그러니 원견사와 불명자, 순례자와 나. 이렇게 네 사람 중에 한 명을 선택하면 일정을 조율해서 기회를 마련해 주겠네. 누굴 고르겠는가?”

루트비히의 물음에 모두가 잠시 생각에 잠겼고, 마누엘이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전 학원장님께 교육받고 싶습니다.”

마누엘의 이야기에 루트비히가 고개를 끄덕였고, 이어서 렌이 입을 열었다.

“저는 원견사 하백연님에게 교육받고 싶습니다.”

“호오…… 그렇게 하지.”

루트비히가 흥미로워하며 대답했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아리아도 결정을 내린 듯 입을 열었다.

“저는 순례자님과 만나보고 싶습니다.”

“흐음. 확실히 나쁘지는 않겠군. 그럼 남은 건…….”

세 사람의 대답을 들은 루트비히가 이세훈을 바라보았다.

“자네는 누구에게 듣고 싶은가? 중복되어도 상관없으니 편하게 말하게나.”

루트비히의 물음에 아리아와 렌도 슬쩍 바라보았다. 그 시선들 속에 이세훈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과연 지금 상황에서 누구한테 배우는 것이 가장 이득일까. 잠시 고민하던 이세훈은 금방 답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저는…….”

* * *

사막과 인접해 있는 중동의 낡은 폐가.

그 안쪽으로 로브를 입은 인물이 들어서더니 모래먼지로 엉망인 후드를 걷어냈다.

“후우…….”

가볍게 숨을 내쉰 청년, 아미르는 폐가를 살짝 둘러보다가 안쪽으로 들어가 먼지가 잔뜩 쌓인 바닥에 앉았다.

그런 다음 품에서 작은 약통을 꺼내더니 안쪽에 들어 있는 특제 수면제 한 알을 입안에 털어 넣고 두 눈을 지그시 감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리고 그 몸이 아주 살짝 비틀거리려던 순간.

후웅!

주변의 풍경이 완전히 바뀌었다.

깔끔하게 꾸며져 있는 응접실. 자신이 꿈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아미르가 자연스럽게 깨달은 그때.

끼이익

응접실의 문이 열리며 이 공간의 주인, 몽환마가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았어요.”

맞은편에 앉으면서 나긋한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몽환마. 그 모습에 아미르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깍듯한 아미르의 태도에 몽환마가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언제나 친절하군요. 처음 만났을 때도 이렇게 응대해 줬었는데…….”

즐거운 추억을 회상하듯 이야기하는 몽환마의 모습에 아미르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장로들을 백치로 만들고 단원들을 세뇌해 하인들을 학살시키며 두령이었던 아버지를 수백 마리의 나비로 만들어 흩날려 보낸다.

그리고 그 끔직한 광경 속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미소를 지으며 몽환마를 안내하는 어린 자신. 과거의 기억을 떠올린 아미르는 감정이 크게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아직…… 아직은 아니야.’

지금은 기회가 오지 않았다. 그동안 몇 번이고 있었던 일이기에 아미르는 흘러나오려는 감정을 자연스럽게 가라앉히며 대답했다.

“존귀한 분에게 그에 맞는 예의를 갖추는 것일 뿐입니다.”

“후후. 아부라는 걸 아는데도 듣기가 좋네요.”

부드럽게 웃어 보인 몽환마가 아미르를 바라보았다.

“인사치레는 이 정도면 될 것 같고…… 이제 이번 계획이 어떻게 실패했었는지 듣고 싶네요. 말해보시겠어요?”

계획의 보고가 아니라 실패를 이야기하라.

몽환마에게 이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은 자신의 죄목을 직접 말하라는 뜻이었고, 처형당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라는 뜻이었다.

‘화가 나 있을 거라더니…… 정말이군.’

이세훈이 몽환마에게 얼마나 큰 피해를 줬는지 전해 들었기에 아미르는 크게 동요하지 않고 자신이 한 일을 설명했다.

“계획대로 진행됐지만 이세훈은 멀쩡했고…… 승천제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한 모습. 하지만 몽환마는 어제 자신의 분신이 계획을 실행하고, 실패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세훈이 해결했지만…… 그 사실을 승천제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건가?’

마치 이세훈과 승천제 사이에 아무런 연관도 없다는 듯한 느낌. 이전 같았으면 기만책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지금은 조금 생각이 달랐다.

‘승천제가 봉인했다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테니까…….’

오른쪽 눈매를 매만지던 몽환마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세훈에게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숨겨진 한 수가 있다.

그게 과연 자신이 찾던 몽환안일까, 아니면 그와 전혀 다른 무언가일까.

어느 쪽이든 지금은 반응이 오기를 기다리거나 다음 기회를 노리는 수밖에 없다.

결론을 내린 몽환마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군요. 그래도 이세훈과 친분을 만드는데 성공했으니 우선은 가까워지는 데 집중하도록 하세요.”

“예.”

“그리고 구역장 건은…… 이유가 어찌 됐든 계획이 실패했으니 없었던 일로 하죠.”

몽환마의 이야기에 아미르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담. 실례가 안 된다면 한 말씀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뭐죠?”

몽환마의 물음에 아미르가 표정을 가다듬으며 이야기했다.

“혹시 제 역할은 승천제 휘하의…… 아니, 그렇게 추측되는 몽환의 마력 사용자를 유인하는 미끼입니까?”

“…….”

아미르의 이야기에 몽환마가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고, 이내 무표정하게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죠?”

“처음에는 제 역할이 이세훈과 가까워져서 그를 마담께 헌상하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정말 단순히 그것이 목적이셨다면 이렇게 자비를 베풀어주시지 않으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몽환마가 찾고 있는 것은 몽환안이라는 스킬을 보유한 존재. 이세훈에게 들은 정보를 토대로 아미르는 자신이 자연스럽게 깨달은 것처럼 이야기했다.

“그리고 이번 사건으로 인해 어느 정도일지는 몰라도 이세훈이 저를 경계할 가능성이 높아졌습니다. 본래 마담의 방식대로라면 저를 살려두시더라도 계획에서 완전히 배제하셨을 것입니다.”

“…….”

“즉, 처음부터 제가 적에게 발각되거나 의심당하더라도 상관없었다, 오히려 그것을 바라고 보내셨던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이번에 보냈던 눈도 자신이 제압당했을 때,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내기 위해서 보냈던 것일지도 모른다.

필요에 따라 버림패로 쓰이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버림패로 보내졌다. 아미르는 이세훈과의 대화로 그 사실을 확실하게 알게 된 것이다.

“…….”

아미르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몽환마는 잠시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만약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건가요?”

버리지 말아달라고 빌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기 위해 기회를 달라고 할 것인가. 아미르는 담담히 자신의 선택지를 이야기했다.

“정보를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수단이 필요합니다.”

바로 저항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지금으로서는 제가 붙잡히더라도 몇몇 흔적들로 추측하는 것이 한계입니다. 그렇기에 정보를 정확히 전달할 수 있는 정확한 수단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그리고 상대가 블랙암즈의 여객선에서 마주친 자라면 저를 알아보고 계속해서 주시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으니…….”

“쿡.”

몽환마의 몸이 살짝 들썩였고, 잠시 후 입가를 가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핫!”

진심으로 즐겁다는 듯한 웃음소리. 그렇게 한참동안 웃음을 터뜨리던 몽환마가 눈가의 눈물을 훔치며 입을 열었다.

“아아…… 제 스스로가 정말 한심하네요. 당신이 이렇게 유용한 인물인 줄 알았다면 이런 식으로 쓰지 않았을 텐데.”

“모두 제 아둔함 때문입니다.”

“아니에요. 뒤늦게라도 이렇게 당신의 능력을 볼 수 있었으니 좋은 일이죠. 우선 방금 의견대로 정보전달에 쓸 만한 물건을 준비해서 보내줄게요. 그리고…….”

잠시 고민하던 몽환마가 입을 열었다.

“오늘부로 당신을 직속비서실로 배정할게요. 구역장을 맡기는 것보다는 그쪽이 더 쓰임새에 적합하겠네요.”

개별적으로 구역을 책임지며 자율권이 주어지는 구역장과 다르게 몽환마의 직속에서 ‘도구’처럼 쓰이는 이들이 모여 있는 직속비서실.

한계가 또렷한 자리이며 언제 어떻게 죽을지 알 수 없었지만, 아미르는 아무런 불만 없이 받아들였다.

“감사합니다.”

“흐음…… 정말 아무런 망설임이 없네요. 가족들 때문인가요?”

몽환마의 물음에 아미르가 순간적으로 입술을 살짝 깨물다가 고개를 깊이 숙였다.

“부디 자비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자신의 쓸모가 다해 사라지더라도 남은 가족들은 손대지마라.

그런 아미르의 간곡한 부탁에 몽환마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성공한다면 차기두령까지 함께 풀어서 가문을 놓아줄게요. 그래야 재건이라도 할 수 있을 테니까.”

“…….”

차기두령, 자신을 대신해서 몽환마에게 인질이 되어 잡혀갔었던 사촌형 자예드. 그 마지막 모습을 떠올린 아미르가 다시 한번 밀려나오려는 감정을 억누르며 고개를 숙였다.

“반드시 성공해 보이겠습니다.”

“좋아요. 더 필요한 것은 없나요?”

자신이 유용하다고 느꼈는지 호의적인 태도. 그 모습에 아미르는 이세훈에게 부탁받은 것을 떠올리며 조심히 대답했다.

“혹시 대상을 구분할 수 있는 내면이나 심상의 형태에 대해서 알고 계십니까?”

“아아. 그러고 보니 당신한테는 그런 능력이 있었죠.”

동천안에 대해서 떠올린 몽환마가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부드럽게 웃으며 이야기했다.

“미쳐있을 거예요.”

“……예?”

“그자는 저처럼 이곳이 꿈이라는 걸 알고 있거든요.”

몽환마의 거듭된 이야기에 아미르가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곳이라는 건 지금 이 응접실이 아니라 바깥의 현실을 말하는 것인가?

‘그런데 그게 꿈이라고?’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이해하지 못하는 아미르의 모습에 몽환마가 미소를 지었다.

“심상을 풀어뒀으니 당신의 눈으로 직접 보세요. 그러면 무슨 뜻인지 알거에요.”

“……알겠습니다.”

아미르는 동천안을 발동하여 눈앞의 몽환마를 보았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오른쪽 눈을 비롯하여 전신에 구멍이 뚫려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일렁거리는 보라색 안개덩어리.

그 기괴하기 짝이 없는 모습에 아미르의 두 눈이 커졌다.

‘상태가 이렇게 악화됐었다고……?’

눈 하나를 봉인 당했을 뿐인데 이렇게까지 불안정해질 수 있단 말인가. 비정상적인 상태에 아미르가 당황하고 있을 때.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몽환마가 그 어느 때보다도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했다.

“저와 그 사람은 알고 있어요. 당신들이 현실이라 믿고 있는 이곳이 그저 꿈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이죠.”

“…….”

누군가는 이상한 헛소리라며 비웃고 말겠지만, 아미르는 그 이야기에 손끝이 떨리며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눈앞의 여인, 몽환마라고 불리는 이 괴물은 방금 그 말을 진심으로 믿고 있었다. 자신이 살아가는 이곳이 꿈이며 다른 현실이 존재한다고.

“그러니까 그도 미쳐 있을 거예요.”

꿈과 현실을 구분 짓지 못하는 불안정한 상태.

그것이 몽환의 마력을 다루는 자에게 필요한 재능이자 몽환안이라 불리는 스킬을 획득하기 위한 조건.

그 사실에 아미르는 자연스레 한 가지를 깨달았다.

“이 지긋지긋한 꿈속에서 깨어나고 싶을 테니까.”

몽환안을 보유한 자는 눈앞의 괴물처럼 어딘가 비틀린 존재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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