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가 다 만들어줌-190화 (190/309)

회귀자가 다 만들어줌 190화

쏴아아─

귓가를 간질이는 익숙한 소리.

마음이 편안해지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쾌한 기억을 떠올리게 만드는 그 파도소리에 이세훈이 천천히 눈을 떴다.

“…….”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먹구름이 가득한 어둑한 하늘.

사이사이에는 우주가 새어 들어오는 것처럼 깊은 어둠이 흘러내렸고, 몸을 일으키자 지평선 너머까지 뻗어 있는 검은 바다가 보였다.

쏴아아아─

모든 것을 집어삼키며 천천히 밀려들어오는 검은 파도.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그 풍경에 이세훈은 자리에 앉은 채로 그저 멍하니 바라보았다.

자신은 회귀 전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이제야 꿈에서 깨어난 것일까.

스스로도 구분이 가지 않는 그 상황에 이세훈이 홀린 듯이 바라보던 그때.

[깨어나는 꿈이 발동되었습니다.]

화아악!

머릿속에 찬물이 끼얹어지듯 또렷해졌고 방금까지 자신을 붙들고 늘어지던 생각이 떨쳐내졌다.

의식을 되찾은 이세훈은 그제야 눈앞의 풍경에서 눈을 떼고 자신의 몸부터 내려다보았다.

‘……그럼 그렇지.’

회귀 전의 싸움에 찌들어 있던 몸이 아니라 생명력이 넘쳐나는 젊은 몸.

이곳이 꿈이나 그와 비슷한 장소라는 것을 깨달은 이세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이런 거지같은 곳에 떨어졌을 리는 없을 테고…… 몽환마인가?’

몽환마가 준비해둔 계획을 그대로 받아들였으니 무슨 일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았지만, 또 그렇다고 보기에는 의아한 부분들이 많았다.

‘몽환마가 직접 손을 썼다고 하기에는 너무 엉성한데.’

만약 저쪽에서 작정하고 준비했다면 꿈이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을 터.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상한 점은 주변의 풍경이 회귀 전이었다는 것이다.

‘아무리 몽환마라고 해도 그걸 뚫지는 못할 텐데.’

회귀와 관련된 정보들은 자신에게 있어 무엇보다도 중요했기 때문에 이세훈은 영연신마법을 응용하여 피의 일부분에 기억을 저장해 심장의 안쪽에 숨겨두었다.

자신은 몰라도 외부에서 침입한 이들은 절대 엿볼 수 없었고, 만약 알아차리고 시도했다고 해도 심장에서 통증이 느껴지며 신호를 줬어야 했다.

‘게다가 뭔가 묘한 이질감이 느껴지기도 하고…….’

어딘가 익숙한 것 같으면서도 다른 감각. 그에 이세훈이 천천히 뒤쪽을 돌아보았고.

“……아?”

하늘 높이 솟아 있는 새하얀 탑에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지하에서 솟아오른 만마의 늪에 대항하듯 천상에서 내려와 지구 곳곳에 자리 잡은 탑.

지난 수십 년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영웅들을 탄생시키며, 그 정점에 다다른 완등자를 배출해낸 ‘영웅의 탑’을 본 이세훈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저게…… 저게 왜 여기에?’

회귀 전 마지막쯤에는 모든 영웅의 탑이 무너졌었고, 애초에 그 근처에 있지도 않았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 탑이 자신이 최후를 맞이한 장소에 솟아 있는가.

그 비현실적인 광경을 올려다보던 이세훈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설마…….’

이런 식으로 부자연스럽게 영웅의 탑이 솟아 있는 광경이 만들어지는 곳은 이 세상에 딱 한 군데밖에 없었다.

‘영웅의 탑 내부.’

탑에 들어선 인간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심상을 토대로 시련을 만들어내는 영웅의 탑.

그곳이라면 영연신마법으로 꽁꽁 숨겨둔 자신의 회귀 전 기억이 나오는 것도, 꿈같으면서 현실 같은 이 이질적인 감각도 모두 설명이 가능하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파악하는 데 성공하기는 했지만 이세훈은 오히려 이전보다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내가 왜 영웅의 탑에 들어가 있는 거지?’

바벨의 규칙상 1학년은 영웅의 탑에 들어갈 수 없으며, 무엇보다도 이세훈은 그 근처로 다가간 적도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누군가 잠든 자신을 몰래 집어넣었나 싶지만, 스스로 들어가지 않으면 영웅의 탑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회귀 전을 포함해서 유례없는 상황에 당황하고 있던 그때. 이세훈의 시선이 문득 오른손의 금색 반지로 향했다.

‘…….’

공간의 권능. 영웅의 탑을 중심으로 세워진 바벨. 그리고 빙견의 자료에서 보았던 바벨의 숨겨진 특수시설들.

수많은 정보가 이세훈의 머릿속에서 하나둘씩 맞춰지고 한 가지 가능성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인지 검증하기 위해 이세훈이 승천제의 반지에 마력을 불어넣어 공간의 권능을 끌어올렸고.

‘공간왜곡.’

우웅

눈앞의 공간이 비틀리며 다른 풍경을 비추었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침대에 잠들어 있는 자신. 영혼만 쏙 빠져나온 듯한 상황에 이세훈이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진짜 유체이탈인가? 아니, 이쪽도 살아 있는 육체다.’

주변의 감각도 그렇고 몸 안쪽에서 심장의 펌프질로 움직이는 혈류가 그것을 증명한다.

하지만 문제는 그게 침대에 잠들어 있는 자신도 마찬가지라는 것이었는데 이세훈은 그 괴팍한 상황에 머리가 아파 오는 것을 느꼈다.

‘일단 상황부터 파악하자.’

바깥을 살피기로 한 이세훈은 거실로 나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새벽녘의 바벨. 그런데도 바깥은 환한 상태였는데 하늘 전체가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질적인 풍경에 이세훈은 원인을 찾기 위해 주변을 살펴보았고, 바벨의 중앙에 있는 영웅의 탑에 시선이 닿았다.

‘역시 저게 원인인가.’

구름 너머에서 흘러 내려오는 황금색 힘이 바벨의 하늘을 황금빛으로 물들이며 기묘한 공간을 만들어낸다.

이세훈이 그 신비로운 광경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을 때.

“시험 중 자리 이탈은 결점사유라네.”

옆에 선 루트비히가 능청스럽게 이야기했다.

공간이 비틀리는 낌새조차 없이 자연스럽게 나타난 루트비히. 어느 정도 예상한 등장에 이세훈이 그를 바라보았다.

“이게 학원장님이 말씀하신 특별 시험입니까?”

“맞네. 어떤 시험인지 알겠는가?”

여전히 바깥을 바라보는 루트비히의 모습에 이세훈도 다시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영웅의 탑에서 흘러나오는 힘, 바벨의 이질적인 풍경, 그리고 그곳을 뒤덮은 공간의 비틀림을 곱씹은 다음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공간의 권능으로 바벨과 영웅의 탑을 연결시키고, 간접적으로 영웅의 탑의 시련을 겪을 수 있게 만드신 거라고 생각합니다.”

“정확하군. 역시 자네는 우수해.”

만족스럽게 웃으며 긍정하는 루트비히의 모습에 이세훈이 긴장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진짜 영웅의 탑은 건드린 건가…….’

영웅의 탑은 인류에게 있어 희망의 상징이자 동시에 완등자와 같이 범접할 수 없는 초월적인 건축물이었다.

탑에 들어가 시련을 통과하는 것만으로 강력한 힘을 선사하며, 끝에 다다랐을 때는 완등자라는 초월자를 만들어내는 신비한 구조.

거기에 인류의 기술로는 탑의 구성 물질조차 밝혀내지 못했으니 절로 경외감이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런 영웅의 탑을 외부의 공간과 결합시키다니.

회귀 전에 어지간한 일을 다 겪어본 이세훈조차 놀라운 광경이었다.

‘이렇게 대규모로 펼칠 수 있을 정도라면 오랫동안 연구한 게 분명할 텐데…… 왜 회귀 전에는 알려지지 않은 거지?’

몽환규도에서 보았던 빙견의 연구 자료에서 흔적이 남아 있기는 했지만, 승천제가 영웅의 탑을 외부와 연결시켰다는 이야기는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혼란스럽기 그지없는 상황에 이세훈은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들을 천천히 정리했다.

‘승천제는 오래 전부터 영웅의 탑을 연구했었고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상태였다. 하지만 회귀 전에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죽기 전까지 그 사실을 공개하지 않았고, 지금은 특별시험을 치기 위해서 공개했다…….’

저런 엄청난 연구 결과를 겨우 생도들의 시험에 사용하냐는 생각이 들 수 있지만 어찌 보면 이게 딱 맞는 사용법이었다.

영웅의 탑은 안에 들어온 자들에게 시련을 안겨주고 그것을 통과했을 경우 강력한 힘을 주지만, 반대로 통과하지 못하면 영원히 탑에서 빠져나올 수 없게 된다.

그 때문에 과거에 수많은 이들이 탑에서 실종, 사실상 죽음을 맞이했고 데이터가 쌓인 지금도 수많은 매년 10분의 1은 살아 돌아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위험요소를 제거하고 몇 번이고 재도전이 가능하게 만들어낸 거라면…….’

바벨의 위상은 지금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올라가게 될 것이다. 그 사실을 곱씹던 이세훈이 자연스레 한 가지를 깨달았다.

“UD그룹과 순례교가 협력한 것도 이것 때문이군요.”

“……이전부터 느꼈지만 자네 눈치가 참 빠르군.”

마음에 든다는 듯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은 루트비히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부는 아니지만 큰 영향을 끼치기는 했지. 그들에게도 영웅의 탑은 유용한 시설이니까.”

“정말…… 놀랍네요…….”

루트비히가 만마전의 움직임에 대응하려는 것은 알았지만 설마 이렇게 엄청난 수를 준비하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이게 말로만 듣던 나비효과인가 싶어 이세훈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바벨을 바라보고 있을 때.

“이 이야기는 다음에 차분히 하도록 하고 우선은 시험 이야기로 돌아가지.”

루트비히가 몸을 돌려 이세훈을 바라보았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지금 자네가 이렇게 서 있는 것은 본래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라네.”

“으음…… 하긴 저도 학원장님께서 주신 반지가 없었다면 아마 못 빠져나왔을…….”

“아니. 그런 이야기가 아닐세.”

고개를 가로저은 루트비히가 담담히 이야기를 이었다.

“영웅의 탑과 연결된 공간에 들어가면 시련을 완수하는데 집중하게끔 조정을 가해둔 상태였네. 하지만 자네의 심상이 너무 견고해서 그런지 조정이 아예 안 통하더군.”

“아…….”

“직접 손을 썼다간 아예 연결이 끊어질 것 같아서 어찌할지 고민했었는데…… 자네가 때마침 내 권능을 사용하여 불완전하게나마 빠져나온 것이지.”

루트비히의 설명에 이세훈은 어쩌다가 이렇게 된 것인지 대강 알아차렸다.

‘영연신마법으로 기억을 숨겨둔 탓인가.’

영웅의 탑과 연결된 공간에 들어가게 하는 것까지는 성공했지만 그 이후에 있는 세세한 개입은 실패했던 모양이다.

“으음. 졸지에 시험 규칙을 두 번이나 깨먹었네요.”

“그러게 말일세. 뭐, 그래도 그 정도는 해야 학년수석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나.”

“그렇…… 예?”

이세훈이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자 루트비히가 난처하게 웃었다.

“이런. 방금 건 못 들은 걸로 해주게. 그리고 돌아가면 시련을 완수하는 데 집중해 주고.”

“잠깐…….”

따악!

루트비히가 손가락을 튕김과 동시에 거실에 있던 이세훈의 몸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흠. 제대로 돌아갔군.”

여전히 영웅의 탑 안쪽은 보이지 않지만 제대로 돌아간 것은 느껴진다.

‘매번 놀라게 만드는 재주가 있단 말이지.’

이세훈이 누워 있는 침실을 바라보던 루트비히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렸고, 자연스럽게 바벨이 내려다보이는 상공으로 이동되었다.

그리고 아래로 시선을 내리며 앞서 눈여겨보았던 생도들의 시험 과정을 살펴보았다.

-후우…… 후우…….

땅에서 솟구친 수천 자루의 검날을 맨발로 밟으며 하늘 위로 걸어가는 제이크 마이어스.

-…….

수천 마리의 까마귀들로 만들어지는 검은 계단을 타고 하늘 위로 향하는 이노우에 에리카.

-흐읍!

탑 외벽을 빙 두른 황금색 계단 위를 달리면서 두 창으로 파도처럼 밀려오는 불꽃과 어둠을 떨쳐내는 염성하.

-으으…… 기분 나빠.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언령마법으로 주변을 밝히며 황금색 계단을 조심스레 올라가는 루이제 발렌트.

-으갸가각!

인챈트 붓으로 희미해지는 황금색 계단을 직접 칠하면서 다급히 탑을 오르는 레아 클로델.

-쿨럭…….

그리고 보랏빛 안개가 만들어낸 한 청년의 형상에게 전신을 난도질당해 비틀거리는 아미르 싱.

“아름답군…….”

보다 나은 존재가 되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그 모습에 루트비히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다시 영웅의 탑과 바벨의 연결을 견고하게 만들기 위해 자리를 떠났고.

우웅─

이세훈의 방 안에서 아주 희미한 보랏빛이 반짝였다.

* * *

쏴아아─

처음으로 돌아온 풍경.

하지만 이제는 상황을 모두 파악했기에 이세훈이 뒤쪽의 영웅의 탑을 바라보았다.

‘결과를 들어서 조금 김새긴 했지만…… 그래도 좋게 마무리하는 게 좋겠지.’

혹시라도 다른 녀석이 이번 시험에서 좋은 결과를 내면 루트비히가 마음을 바꿀지도 모르지 않는가.

결정을 내린 이세훈은 그대로 자신의 심상 속에 만들어진 영웅의 탑 앞으로 향했다.

‘보자. 회귀 전에 했던 대로 하면…….’

이세훈이 머릿속으로 설계도를 떠올린 순간. 탑 외벽에 황금색 계단이 하나둘씩 설계도의 구조대로 생성되기 시작했다.

“흠흠.”

그 모습을 흡족하게 바라본 이세훈은 그대로 계단을 오르며 위로 향했고, 지상으로부터 멀어지면서 주변의 시야가 탁 트이기 시작했다.

“그래 봐야 볼 거는 없지만…….”

탑이 있는 땅을 제외하면 온통 검은 바다로 뒤덮여 있는 풍경. 생명력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그 삭막한 풍경에 이세훈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회귀 전도 아마 이런 상태였겠지.’

자신의 과오를 보는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같은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는 다짐이 들기도 했다.

‘그러려면 이전보다 열심히 해야 하는데…… 생각해 보니 영웅의 탑 이것도 좀 고민이네.’

오른쪽의 새하얀 외벽을 바라보던 이세훈이 애매한 표정으로 구름에 덮여 있는 하늘 위를 올려다보았다.

영웅의 탑은 사람마다 시련의 수가 달라지며 이세훈은 총 10가지, 간단히 말하면 10층으로 이뤄져 있었다.

이 10층을 모두 통과할 경우 완등에 성공하여 완등자가 되는 것이었는데 회귀 전 이세훈은 9층까지만 통과하고 도전을 포기했었다.

‘그럴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말이야…….’

육대마신 중 셋을 쓰러뜨렸지만 인류연합군 역시 전력이 크게 소모되어 위험천만하던 상태.

그 상황에서 삼견뿐만 아니라 수많은 영웅들의 무구를 담당하던 자신이 완등을 도전했다가 죽어버리면 아마 공멸이 아니라 인류만 멸망했으리라.

‘뭐, 그렇게 될 줄 알았으면 도전하는 게 나았을 까도 싶다만…… 무조건 실패했겠지.’

10층에 어떤 시련이 준비되었을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당시의 자신으로는 절대 통과하지 못했을 거라는 모종의 확신이 있었다.

과거에 통과한 시련들을 떠올리던 이세훈이 다시금 주변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꼴을 보아하니 회귀하면서 시련도 꽤 변한 것 같은데…… 루트비히한테 잘 보여야겠구만.’

괜히 무슨 변수가 튀어나올지 모르는 영웅의 탑을 맨몸으로 도전하기 보다는 루트비히의 도움을 받아서 안전하게 재도전하는 것이 좋으리라.

이세훈이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어느덧 구름의 바로 밑까지 도착했고, 어느덧 마지막 계단이 저 끝에 만들어져 있었다.

‘역시 1층은 쉽네.’

다른 녀석들이 얼마나 빨리 통과했을지는 모르겠지만 막힘없이 올라왔으니 이 정도면 그리 나쁘진 않으리라.

그리 생각하며 이세훈이 마지막 계단을 향해 발을 올리던 그때. 돌연 불쾌한 기시감과 함께 의문이 떠올랐다.

‘내가 만든 계단이 몇 개였었지?’

자신의 기억에 의하면 분명히 684개. 하지만 지금 밟고 있는 계단까지 포함하면 685개가 되어버린다.

누군가는 가볍게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 이세훈이 그것을 깨달으며 자신이 밟고 있던 계단을 다시 내려다보았고.

촤라락─

어느새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는 계단에서부터 수백 마리의 나비가 쏟아져 나왔다.

“윽?!”

눈 깜짝할 사이에 휩쓸린 이세훈의 몸이 아래로 떨어져 내렸고, 지면에 충돌함과 동시에 나비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사라졌다.

그리고 보이는 것은 온통 보랏빛으로 뒤덮인 흐릿하고 끈적거리는 세계.

조금만 방심해도 전신을 갉아먹으려고 드는 그 불쾌한 감각에 이세훈의 눈매가 찌푸려졌다.

“여긴…….”

몽환의 마력으로 가득 차 있는 공간.

자신을 이곳으로 불러들인 이가 누구인지 곧장 깨달은 이세훈이 경계하고 있을 때.

촤라락

보랏빛 안개에서 만들어진 수백 마리의 나비들이 뭉치며 하나의 형상을 이루기 시작했다.

관자놀이에 돋아난 동그랗게 말린 검은 뿔과 진한 보랏빛 머리카락. 검은색 눈동자에는 샛노란 동공이 요사스럽게 맺혔으며 레이스 드레스 사이로 연보랏빛 피부가 보인다.

아아─

아름다우면서도 소름끼치는 느낌을 안겨주는 여인이 미소를 짓고는 드레스의 치맛자락을 양손으로 잡고 슬쩍 올렸다.

그리고 우아하게 고개를 숙이며 즐겁다는 듯이 속삭였다.

“만나서 반가워요. 이세훈 씨.”

십악 중 한 명, 몽환마의 등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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