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가 다 만들어줌 189화
기숙실의 거실에 놓인 큼지막한 TV.
소파에 앉은 이세훈은 화면에 중계되고 있는 화면, 폐허가 된 시가지에서 벌어지는 전투를 바라보았다.
콰아아앙!
금발의 앳된 청년이 휘두르는 푸른 검신과 근육질의 험상궃은 중년 남성의 탁한 회색 검신이 서로 맞부딪친다.
검끼리 맞부딪쳤을 뿐인데 공간이 일순간 일그러지고 두 사람이 서 있는 지면이 갈라지며 사방으로 충격파가 퍼져 나간다.
자연재해끼리 부딪친 듯한 살벌한 격돌.
그리고 그 직후 TV에서 쾌활한 목소리가 뒤따라 흘러나왔다.
[아앗! 제이크 생도! 이번에도 카사르 교수님의 공격을 맞받아치는데 성공했습니다! 이젠 제가 정말 1학년 학과시험을 중계 중인 게 맞는지 의문스러울 정도예요!]
무투학부의 최연소 교수, 란 팡의 해설과 동시에 화면 속의 두 사람이 다시금 서로를 향해 검을 휘두른다.
콰가가강! 콰앙!!
카사르의 묵직한 검격이 공간을 후려치듯 뻗어나갔고, 제이크는 힘겹게 그 공격을 막아내다가 결국 버티지 못하고 뒤로 튕겨져 날아갔다.
서걱!
하지만 건물에 부딪치기 직전에 휘광검을 휘둘러 벽을 잘라내며 안쪽에 착지했고 그대로 천장을 부수면서 위쪽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건물 내부를 이용해서 따돌리겠다는 판단. 그 모습에 TV를 보던 이세훈이 혀를 찼다.
“쯧쯧. 상대를 잘 생각해야지.”
제이크가 들어간 10층 정도의 건물을 올려다본 카사르가 자신의 검, 회연의 손잡이를 꽉 움켜쥐었고 그와 동시에 검신이 흐릿해지며 연기처럼 변했다.
그리고 그 검을 정면의 건물을 향해 휘두른 순간.
콰과가강!!
회색 연기로 이뤄진 수백 개의 무구들이 건물에 쏟아지며 무너지기 시작했다.
-으악!
설마 건물을 통째로 무너뜨릴 줄은 몰랐는지 제이크가 비명을 내지르며 밖으로 탈출했고, 카사르는 두 눈을 번뜩이며 바닥을 박찼다.
콰아앙!!!
허공에서 검이 부딪치자 제이크가 충격을 줄이지 못한 채 단숨에 튕겨져 나갔고 카사르는 계속해서 그 뒤를 쫓으며 몰아붙였다.
[숨 돌릴 틈도 없이 밀어붙이는 공격! 제이크 생도 정말 잘 버티고 있습니다! 아주 대단해요!]
상황만 보면 제이크가 아주 꼴사납게 당하는 것 같지만, 상황을 알고 보면 란 팡의 해설처럼 칭찬받을 상황이었다.
‘원래 시험 취지는 카사르를 피해 다니면서 시가지 곳곳에 숨겨져 있는 포인트를 획득하는 거였으니까.’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적이 상주하는 전장에서 어떻게 행동하는지 보는 것이 이번 아칼쿠프의 학과시험.
사실상 한 번이라도 발각되는 순간 탈락이 확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는데 제이크는 카사르에게 발견되고 5분 넘게 버티고 있는 것이다.
‘마광수 이 양반…… 이걸 노리고 준비한 거구만.’
전력을 다하지 않는다고 해도 명색의 S급 영웅.
본래 제이크 수준에서는 제대로 버티기 힘들었지만, 마광수의 시험을 치르면서 대응능력이 대폭 올라가 지금까지 버티는 데 성공했다.
사실상 마광수의 시험이 없었다면 큰 활약상을 보이지 못하고 탈락했을 수도 있으리라.
‘이것도 어떻게 보면 반칙 아닌가.’
속으로 투덜거리던 이세훈은 제이크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다시금 살펴보았다.
‘저 정도면…… 과거의 아리아랑 얼추 비슷한가?’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찾아본 활약상과 비교하면 더하면 더했지 결코 부족함은 없어 보인다.
-흐아압!
본인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 먼지투성이인데도 두 눈이 반짝였고, 휘광검 역시 그 어느 때보다 푸르게 빛났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이세훈은 이내 피식 웃었다.
‘그래. 홍보도 되고 나쁠 건 없겠지.’
게다가 저쪽은 S급 상대로 겨우겨우 버텨내고 있지만, 이쪽은 완등자가 만들어 놓은 설비를 휘젓고 다녔으니 훨씬 평가가 높을 것이다.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결론을 내린 이세훈은 이번엔 우르의 학과시험을 생중계 중인 채널로 돌렸다.
콰아앙!!
시가지에서 싸우는 아칼쿠프와 다르게 숲속에서 벌어지는 전투.
이쪽은 생도들이 저마다 인간형 골렘, 오토마톤을 하나씩 곁에 둔 채 싸우고 있었다.
본인이 직접 나서지 않고 보조하는 식으로 싸우는 것이었는데 오토마톤이 파괴되면 탈락하는 규칙이었다.
오토마톤의 활용법과 전략적인 판단이 중요한 우르의 학과시험. 그리고 이쪽 역시 두각을 드러내는 사람이 있었다.
까아악─!
은색 날개를 펄럭이며 숲을 질주하는 까마귀와 전신에 은색갑주를 걸친 채 사정없이 날뛰는 오토마톤.
-뭐, 뭔데!
-반칙 아니냐고!
둘에게 발각된 순간 누구든 1분을 채 버티지 못했고, 오토마톤을 파괴당하며 곧장 안전지대로 보내졌다.
학살이라는 표현밖에 떠오르지 않는 처참한 관경.
그리고 그 상황을 만들어낸 검은 머리의 소녀, 에리카는 산책이라도 나온 것처럼 무심하게 걸음을 옮겼다.
[이건 압도적이라는 말밖에 할 수 없군요. 아무래도 금방 결착이 날 것 같습니다.]
해설을 맡은 마도학부의 란 페이 교수가 담담히 이야기했고, 이세훈 역시 그 모습을 바라보며 비슷하게 생각했다.
‘영골장갑에서 벌써 노하우를 빼갔을 줄이야…… 저러면 상대도 안 되지.’
이전에 이세훈이 만들어준 까마귀 전용 외골격, 영골장갑은 회귀 전 에리카가 주력기술이었던 ‘귀오무장’에서 착안한 물건이었다.
그렇기에 어느 정도 사용하다 보면 전투에 특화된 강화주술도 깨닫게 될 거라 생각했는데 벌써 숙달되어 오토마톤에 적용시킨 것이다.
콰앙!
다른 생도들의 오토마톤은 때리는 족족 박살 나고, 상대의 반격에는 흠집은커녕 몸이 살짝 밀리고 끝난다.
재학생이든 편입생이든 모조리 쓸어버리는 그 광경에 이세훈이 턱을 쓰다듬었다.
‘이쪽도 잘하고 있지만…… 뭔가 파격적인 그런 맛은 없네.’
물론 에리카의 기술을 이해한다면 놀랍겠지만, 시험 내용이 워낙 담백해서 따로 돋보이는 것이 없었다.
자신의 경쟁자인 제이크와 에리카의 학과시험을 모두 살펴본 이세훈은 씩 웃었다.
‘학과시험은 내가 유리하다.’
시험에 끌려 다니는 두 사람과 시험의 룰 자체를 깨부숴 버린 자신과 비교하면 아무래도 임팩트가 부족하지 않겠는가.
학년수석 쪽은 크게 문제가 없겠다고 생각한 이세훈이 만족스럽게 웃고 있을 때.
띵동─
거실에 울려 퍼지는 초인종 소리.
기다리던 손님의 방문에 이세훈이 곧장 소파에서 일어나 현관문으로 향했다.
철컥
“…….”
현관문 앞에 복잡한 표정으로 서 있는 아미르.
지금 상황이 믿기지 않는지 떨떠름해 하는 그 모습에 이세훈이 담담히 이야기했다.
“들어와.”
“……실례하겠습니다.”
고개를 꾸벅인 아미르가 안으로 들어왔고 두 사람은 곧장 소파에 마주보고 앉았다.
“…….”
“…….”
자리에 앉은 이후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
누가 먼저 이야기를 꺼낼지 살피는 모양새에 아미르는 잠시 동안 이세훈을 바라보다 이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제가 먼저 질문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좋을 대로.”
이세훈의 허락에 아미르가 잠시 고민하다가 가장 궁금한 것을 물었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여객선에서 만난 정체불명의 습격자가 이세훈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아미르는 그냥 단순히 정체를 숨겼다고만 받아들였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오면서 생각을 거듭한 결과. 그게 말도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벨에 입학하기 전까지 별다른 재능도 없던 사람이 반년도 안 돼서 저만한 제력 실력과 전투 능력, 그리고 공간 능력까지 보유한다?’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가진 천재라 해도 불가능한 일. 그렇기에 아미르는 다른 가능성을 떠올렸다.
지금 세간에 알려진 이세훈은 어디까지나 대외적인 위장신분. 진짜 정체는 승천제와 연관된 바벨의 숨겨진 전력일지도 모른다고.
“흐음…….”
그런 아미르의 속내를 파악한 이세훈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고민에 잠겼다.
여태까지 했던 것처럼 ‘그냥 내 재능이 너랑 비교도 안 될 만큼 엄청난 건데?’ 라고 대답하기에는 아미르가 의심이 많은 성격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몽환마를 쓰러뜨릴 수 있다는 믿음을 주려면 아무래도 뒷배가 든든한 느낌이 더 좋겠지.’
잠시 고민하던 이세훈은 결론을 내린 다음 오른손 약지에 끼워둔 승천제의 반지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우웅─
허공의 공간이 약간 일그러졌고, 그 모습을 본 아미르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공간을 제어하는 능력과 반지에서 일순간 드러난 거대한 심상. 그 압도적인 존재감에 아미르는 반지의 출처가 어디인지 금방 알아차렸다.
‘승천제…….’
완등자의 힘이 담겨져 있는 물건.
절대 쉽게 얻을 수 없을 그 물건에 아미르가 절로 긴장했고, 이세훈이 마력을 거두면서 담담히 이야기했다.
“대충 이런 거지. 더 자세히 설명해 줘?”
“……아뇨.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이세훈이라는 위장신분을 사용하고 있는 승천제의 후계자. 그 추측에 아미르는 모든 상황을 납득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동안 베풀어주신 자비,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상대가 마음만 먹었다면 이전의 여객선에서도, 그리고 바벨에 들어왔을 때도 얼마든지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아미르가 공손히 대답했고, 그 반응에 이세훈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이, 이게 정답이었네.’
의심도 어느 정도 옅어졌고,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깍듯하게 대하는 것이 매우 볼 만했다.
회귀 전의 빙견이 봤다면 거품을 물만한 광경에 이세훈이 표정을 가다듬으며 이야기했다.
“좋아. 그럼 이번에는 이쪽에서 질문한다.”
“예. 금제에 걸리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대답하겠습니다.”
아미르의 대답에 이세훈은 잠시 고민하다가 물었다.
“처음부터 버림패로 보내진 거냐?”
“아뇨. 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면 그랬을 겁니다.”
“그럼 이번에 노린 건 장기적인 접선?”
“그것도 있기는 했습니다.”
두루뭉술한 아미르의 대답에 이세훈은 대강 몽환마의 계획이 어떤 구조였는지 이해했다.
‘가능하면 이번 시험기간 안에 결착을 짓고 싶었나 보네.’
만약 적절한 기회가 보인다면 아미르를 버림패로 사용하면서까지 시도하고, 그런 기회조차 없다면 곁에 붙여두고 다음을 기약한다.
철저하게 아미르를 도구로 사용하는 몽환마의 계획에 이세훈이 턱을 쓰다듬었다.
‘상상 이상으로 취급이 안 좋은데…… 시기를 생각해 보면 어쩔 수 없나.’
회귀 전 빙견이야 여러 사건들을 처리하면서 능력을 인정받았었지만, 지금 아미르는 별 다른 실적이 없는 말단이나 다름없었다.
‘나중에 몽환마의 공략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 권한은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머릿속으로 잠시 고민하던 이세훈은 아미르에게 손을 내밀었다.
“줘.”
“……예?”
“준비한 게 있을 거 아냐. 그거 달라고.”
이세훈의 단도직입적인 이야기에 아미르가 잠시 당황하다가 그 말 뜻을 이해하고 아공간 포켓에서 고급스러운 보석함을 꺼냈다.
“여기 있습니다.”
보석함을 건네받은 이세훈은 곧장 열은 다음에 안쪽을 살펴보았다.
가지런히 놓여 있는 수십 개의 보석. 그리고 그 사이에 자연스럽게 섞여 있는 보라색 보석.
‘……과연. 저건가.’
보라색 보석을 내려다보던 이세훈은 보석함을 다시 닫으면서 아미르를 바라보았다.
“용도는?”
“바벨의 편입생들 중에 이세훈 생도님과 친해지고 싶은 이들이 준비해서 보낸 선물입니다.”
“단체 뇌물이구만.”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대외적인 이야기. 실제로는 보라색 보석, 몽환마의 힘이 담겨져 있는 저 물건을 자신에게 안겨다 주는 것이 목표였으리라.
“그 이외에는 없고?”
“……잠시 왼손을 내밀어 주십시오.”
이세훈이 앞으로 왼손을 내밀자 아미르가 품속에서 단검을 한 자루 꺼낸 다음 손잡이 밑에 달린 보석으로 손등을 가볍게 눌렀다.
우우웅─
그러자 보석이 희미하게 빛났고 이세훈의 몸 전체에 기묘한 막이 씌워졌다. 마치 여기가 목적지라고 알려주기 위해 깃발이 꽂힌 듯한 감각.
‘학과시험에서 노렸던 건 이쪽인가.’
어떤 구조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아미르가 미궁을 먼저 통과했다면 자신에게 이 막이 씌워졌으리라.
“제가 준비한 것은 이게 전부입니다.”
“흐음. 좋아.”
여기까지 확인했으면 나머지는 어떤 식으로 굴러갈지 대충 보인다. 보석함을 슬쩍 본 이세훈이 담담히 이야기했다.
“넌 나랑 오늘부터 정기적으로 정보교환을 하기로 계약을 맺은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지?”
“……알겠습니다.”
“좋아. 그러면 이만 가봐.”
자리에서 일어난 아미르는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몽환마가 준비한 함정을 정면으로 부딪쳐서 자신의 입지가 흔들리지 않게 만들고, 계약 관계를 형성하여 다른 사람으로 대체되지 않게 만든다.
물론 목적 자체는 자신을 이중스파이로 만들기 위해서 조금 지원해 준 것뿐이지만, 그래도 덕분에 목숨을 건졌을 뿐만 아니라 기회를 붙잡은 것은 변치 않았다.
“감사인사는 끝나고 나서 해. 잘 안 풀리면 의미 없으니까.”
“예. 그럼 나중에 다시 뵙겠습니다.”
아미르가 기숙실 밖으로 나갔고, 이세훈은 보석함을 다시금 바라보았다.
‘저쪽에서 노리는 건 빈틈이 드러났을 때겠지.’
하려고 하면 지금 당장에라도 빈틈을 만들 수 있지만, 그렇게 하면 아무래도 작위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렇기에 이세훈은 준비를 해둔 다음 기다리기로 했다.
‘금방 기회가 올 테니까 말이야.’
지금도 예언 마법을 완전히 신뢰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정도까지 왔으면 어느 정도는 믿을 만할 것이다.
소파에 몸을 기댄 이세훈은 그대로 고개를 돌려 창문 밖으로 보이는 새하얀 탑을 바라보았다.
‘그 노인네가 무슨 괴팍한 시험을 준비했는지가 관건인가…….’
* * *
늦은 새벽.
마두르크 저택 안쪽의 학원장실에 여전히 불이 켜져 있었고, 루트비히는 1학기 시험에 대한 보고서를 훑어보았다.
“올해는 급격히 성장하는 생도들이 많군.”
3학년의 염성하와 레아 클로델, 2학년의 루이제 발렌트, 그리고 1학년의 제이크 마이어스와 이노우에 에리카.
올해 초와 비교하면 놀라울 만큼 성장한 이들. 거기에 그 기세가 꺾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미래가 아주 창창했다.
그 결과에 루트비히는 자연스럽게 이들과 연관된 인물이자 가장 큰 성장을 보인 1학년, 이세훈의 보고서를 읽었다.
“미궁의 권한을 복사해서 이용했다…… 허허.”
언뜻 보기에는 권한을 복사하기만 하면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실제로는 조금 달랐다.
권한이 허락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미궁 내에서 공간을 이동할 수 있는 권리. 연산 과정은 문 앞에 제출품을 냈을 때만 생략된다.
즉, 이세훈이 결승점까지 단숨에 이동한 것은 모두 본인의 능력이었던 것이다.
[저놈도 괴팍한 놈이군. 능력의 발동하는 데는 서투르면서 발동 이후의 연산 과정은 저렇게 능숙해지다니.]
“감각적으로만 이해하고 있는 탓이겠지. 계기만 주어진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능숙하게 공간 마법을 다룰 것 같은데…….”
[말은 쉽군. 재능 없는 놈들은 평생을 살아도 그런 계기가 안 오는데 말이야.]
목소리의 퉁명스러운 이야기에 루트비히가 미소를 지었다.
“불가능한 것과 가능성이 낮은 건 엄연히 다른 법이지. 안 그렇소?”
[어련하시겠어. 그건 그렇고.]
화제를 돌린 목소리가 평소보다 진지하게 물었다.
[정말로 할 생각이냐?]
“…….”
[네 연구 결과를 공개하는 건 파장이 다르다. 특히 십악 그놈들이 무슨 발악을 할지 알 수 없어.]
하얀 구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의 이야기에 루트비히가 말없이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그대는 그리 생각하고 있나 보군. 하지만 나는 생각이 다르다네.”
[뭐?]
“세계는 이미 크게 요동치고 있어. 거기에 그런 자그마한 파장이 섞인다 한들 아무런 변화도 없을 것이오.”
슬쩍 미소를 지은 루트비히가 덧붙였다.
“아주 조금 가속될 수는 있겠지.”
[……강행하겠다는 거군.]
“그대가 절대로 안 된다고 말한다면 따르겠소.”
루트비히의 이야기에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하얀 구멍 안에서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네 멋대로 해라. 하지만 뒷감당은 확실히 해야 할 거다.]
철컥!
그 말을 끝으로 하얀 구멍이 닫히며 황금색 열쇠구멍이 나타났고, 그대로 녹아내리듯이 사라졌다.
“…….”
잠시 동안 말없이 허공을 바라보던 루트비히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뒤쪽으로 향했다.
저택의 정원과 하늘 높이 뻗은 새하얀 탑.
처음 이곳을 세웠을 때와 여전히 변함없는 그 모습에 루트비히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 정도 뒷감당이야 얼마든지 할 수 있지.”
지금은 한 명의 생도가 만들어낸 이 흐름을 더욱더 키워야만 한다.
그 사실을 되새기며 루트비히가 손을 뻗었다.
우우웅─
창밖으로 보이던 새하얀 탑, 영웅의 탑이 희미하게 떨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구름에 가려진 위쪽에서부터 황금빛 기운이 천천히 타고 내려오더니 지면에 퍼지기 시작했다.
쿠구궁!
바벨 전역에 울려 퍼지는 거대한 진동.
그 안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존재감을 느낀 루트비히가 단숨에 오른손을 비틀었고.
콰칭─
무언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하늘이 황금빛으로 물들어 갔다.
마치 다른 세계로 건너온 것 같은 이질적인 풍경. 창 너머로 그 모습을 올려다본 루트비히가 손을 거두며 미소를 지었다.
“마지막 시험이니 다들 힘내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