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가 다 만들어줌 186화
[관계 : 평가評價]
대상의 값어치를 평가하는 것은 그 기준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지나온 과거와 현재를 평가하는 것은 직관적이며 그 기준을 명확히 알 수 있지만,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평가하는 것은 변칙적이고 그 기준을 명확히 알 수 없다.
단순히 평가에 순응하기보다는 상대가 바라고 있는 미래가 무엇인지 이해해야만 더욱 긴밀한 관계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대상의 평가가 높아질 때마다 인연석이 생성됩니다.
*대상의 평가가 유지되고 있을 때 인연석의 숙성속도가 증가합니다.
*대상의 평가를 온전히 이해할 때 인연석의 심상발현 확률을 증가시킵니다.
*현재 생성된 인연석 : 1개.
‘…….’
눈앞의 알림창을 본 이세훈이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에리카와 자신의 관계가 평범하지 않다는 것은 첫 만남, 인연이 제대로 성립되었을 때보다 짐작하고는 있었다.
하지만 인연레벨이 3레벨에 도달하면서 더욱 두터워진 관계를 읽은 이세훈은 에리카가 자신이 생각한 것 이상으로 비틀려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생각보다 방임주의였네.’
언뜻 보기에는 마광수와의 관계인 ‘이용’과 비슷해 보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조금 달랐다.
마광수는 도플갱어를 죽이게 위해 이세훈을 어떤 식으로 이용하겠다는 명확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에리카에게는 이런 계획이 존재하지 않았는데 그게 무슨 말인가 하면 어떤 수단을 사용하든 목적만 달성할 수 있다면 상관없어하는 것이다.
‘만약 내가 위험한 길을 골라도 아마 말리기는커녕 잘해보라면서 지원해 주겠지.’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방법이든 수용하는 포용력. 마치 바닥없는 늪과 같은 그 모습에 이세훈은 에리카가 마지막에 펼쳤던 주술을 떠올렸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분명히 제물계통이었어.’
생물의 혼과 육신을 제물로 삼아 위력을 강화시키는 계열. 동물이나 정령, 몬스터 등 흔하지 않을 뿐이지 종종 쓰이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이세훈은 그 기술이 매우 꺼림칙하게 다가왔는데 회귀 전 이노우에 가문이 인간을 제물로 당시의 십악, 탐망 이노우에 에리카를 봉인한 것을 봤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주의해서 봐야겠네.’
방금 그것만으로는 속단하기에는 이르다.
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이세훈은 어느새 미소를 지우고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에리카를 바라보았다.
“나름 회심의 반격이었는데 너무 쉽게 막는 거 아니야? 조금 속 쓰리네.”
쓴웃음을 지으며 이야기하는 이세훈의 모습에 에리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어. 그 정도면 주술학부 내에서도 손꼽힐 정도니까.”
“뭐, 1학년?”
“아니. 전체.”
2, 3학년은 물론 현역으로 활동 중인 4학년까지 포함해도 이세훈의 결계술이 손꼽힌다. 그 평가에 이세훈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 정도인가?’
물론 방금 결계는 자신이 생각해 봐도 잘 펼쳐진 것 같긴 했지만, 또 그 정도로 고평가받을 수준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이세훈이 아리송해하자 에리카는 더 설명하는 대신 옆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에 이세훈이 옆쪽, 훈련장 밖에 있던 교직원들과 생도들을 바라보았고.
“…….”
“…….”
혼이 빠져나간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멍하니 있는 생도들. 대략적으로 상황을 파악하고 경악하는 조교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든 과정을 속속들이 이해하고 굳은 표정으로 뚫어져라 보고 있는 로버트 교수.
그 각각의 반응을 모두 본 이세훈은 고개를 돌려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잘하긴 했나 보네.”
“응. 내가 아니었다면 아마 통했을 거야.”
“……그렇구만.”
말로는 이쪽을 칭찬하면서 띄워주는 것 같은데 묘하게 자신이 더 뛰어나다고 과시한다.
‘나중에 학년 수석 따고나서 보자.’
몇 배로 갚아주겠다고 이세훈이 속으로 다짐하고 있을 때.
짜악!
로버트가 가볍게 손뼉을 치며 생도들의 시선을 모으며 입을 열었다.
“이걸로 결계구성학의 1학기 평가시험을 마치겠다. 남은 시험 기간 동안 열심히 하고 시험에 문의 사항이 있으면 언제든지 찾아오도록. 해산.”
로버트의 이야기에 생도들이 정신을 차렸고 서로를 힐끔 보더니 별다른 말 없이 훈련장 밖으로 나갔다.
질투도 어느 정도 급이 비슷해 보여야 가질 수 있는 감정. 학년만 같을 뿐이지 두 사람이 이미 다른 세계에서 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생도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남은 시험이나 잘 치자.’
‘어차피 내가 학과 수석 될 것도 아니고.’
빠르게 빠져나가는 생도들의 모습을 보던 이세훈은 에리카를 돌아보았다.
“그럼 나도 간다. 아직 남아 있는 시험이 있어서.”
“응. 그럼 시험 끝나고 봐.”
“그래. 수고해라.”
이세훈도 뒤이어 훈련장을 빠져나갔고, 에리카는 제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고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보던 로버트는 뒷정리를 하려던 조교들에게 손을 내저었다.
“내가 나중에 치울 테니 너희들도 먼저 가봐라.”
“아, 예. 알겠습니다.”
교수와 이노우에 가문의 관계를 알고 있는 조교들은 재빠르게 자리를 비워줬고, 로버트는 가만히 서 있는 에리카에게 다가갔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로버트의 물음에 에리카가 시선을 돌려서 마주 보았다.
자주색으로 은은하게 빛나는 눈동자. 어딘가 꺼림칙한 그 시선에 로버트가 살짝 긴장하고 있을 때, 에리카가 시선을 돌리며 대답했다.
“응. 괜찮아.”
“마지막에 쓰셨던 주술은…….”
“됐어.”
이어지는 말을 잘라낸 에리카가 담담히 이야기했다.
“그 이상 말하지 않아도 돼.”
단호한 명령에 로버트는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고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방금 있었던 일. 오라버니한테도 보고할 거지?”
“……예.”
로버트는 현 당주를 따르고 있기 때문에 자연스레 정통 후계자인 에리카의 오빠, 렌의 명령을 우선시했다.
어느 정도 예상한 대답이었기에 에리카는 크게 개의치 않고 이어서 이야기했다.
“필요했던 일이라고 같이 전해.”
“알겠습니다.”
로버트에게 대답을 들은 에리카는 그걸로 끝이라는 듯 훈련장 밖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때 에리카의 그림자 끝자락이 꿀렁이며 죽은 까마귀의 시체 같은 형상이 위로 떠올랐고.
슈르륵.
다시 안쪽으로 빨려 들어가며 모든 흔적을 지워냈다.
* * *
시험 다섯째 날.
대부분의 학부시험들이 마무리되고 내일 있을 학과시험을 대비하고 있을 때. 신체제어학 강의실은 첫날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철컥──
왼손에 움켜쥔 검집에서부터 마광수의 검이 뽑혀져 나왔고, 그 일격에 이세훈이 재빠르게 천충검을 펼쳐냈다.
카앙!
마광수의 검날을 막아낸 검은빛의 검기로 만들어진 검.
완벽히 습득한 ‘진철’을 본 이세훈이 긴장된 표정으로 바라보았고, 검을 다시 납검한 마광수가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택도 없군. A+다.”
마광수의 채점에 이세훈의 눈매가 일그러뜨렸고, 이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한숨을 내뱉었다.
“하아……. 돌겠네.”
시험 첫날부터 시작해서 오늘까지 포함해서 닷새째.
하루도 거르지 않고 재시험을 하면서 육체에 타인의 심상을 동조시키는 기술, ‘심상동조’를 연습했지만 그 결과는 시원찮았다.
‘안정성을 높이니 위력이 떨어지고, 위력을 높이니 제어력이 떨어지고. 도대체 뭐 어쩌란 거야?’
만점을 받아내기는커녕 기술을 고칠 때마다 기량이 오락가락해서 A에서 B까지 떨어졌던 점수.
이제는 기술이 많이 정립되어 루이제의 인연석 없이도 어느 정도 펼칠 수 있었지만, 점수만큼은 여전히 변동이 없었다.
‘이것만 해도 엄청난 발전이긴 하지만…… 시험에서 중요한 건 결국 점수지.’
아무리 성과가 좋아도 점수를 못 따내면 의미가 없다. 특히 자신은 제자리인데 경쟁자가 앞서나가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골이 아팠다.
“제이크는 어제 만점 받았다고 하셨었죠?”
“어제가 아니라 오늘이다. 새벽 3시에 따갔으니까.”
본래 제이크도 A+에서 같이 헤매고 있었지만, 어젯밤 갑자기 느낌이 온다면서 마광수를 새벽까지 붙들고 늘어지더니 기어코 만점을 따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나랑 다르게 제대로 검을 휘둘러서 받아쳤다고 했었지.’
전력이 아니라고는 해도 마광수, S급 영웅이 진지하게 휘두른 일격을 고작 1학년 생도가 맞받아쳤다.
겉보기에는 별거 아닌 것처럼 보여도 며칠 사이에 실력이 엄청나게 올랐을 터. 다른 때라면 축하해 줬겠지만 시험 기간인 지금은 달랐다.
‘그 정도면 학과시험도 압도적으로 쓸어버릴 가능성이 높겠지. 에리카도 뭐, 말할 것도 없고.’
예상과 다르게 뒤처지지 않고 바짝 따라붙는 제이크와 에리카. 그 상황에 이세훈은 뿌듯하면서 한편으로는 울화통이 치밀어 올랐다.
성장할 거면 시험이 다 끝나고 하지 왜 하필이면 이렇게 경쟁하고 잇을 때 미친 듯이 성장한단 말인가.
‘특별시험까지 생각하면 아직 자신이 있긴 하지만…….’
정말 이대로 괜찮을지 이세훈이 머리를 굴리던 그때. 눈가가 퀭한 마광수가 한숨을 내쉬었다.
“너도 그냥 여기까지 하지 그래. 여기서 힘 뺐다가 학과시험을 망치면 무슨 의미냐.”
“으음……. 그건 그렇긴 하죠.”
아무리 신체제어학에서 좋은 점수를 받아봐야 학과시험에서 조금이라도 점수가 떨어지면 그야말로 본말전도다.
‘특히 이번 학과시험은 변수가 많으니까’
바벨에서 비밀리에 준비 중인 학과시험의 이벤트. 이세훈은 며칠 전에 아미르와 거래를 할 때 그와 관련된 정보를 미리 들었었다.
‘저는 싸우면서 친해진다는 표현만큼 비현실적인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현실에서는 믿으시는 분들이 꽤 많더군요.’
정보와 관련된 금제가 있는지 조금 애매한 표현. 쉽게 짐작하기 어려운 내용이었지만, 아미르에게 같이 건네받은 편입생 자료 덕분에 이세훈은 금방 답을 깨달았다.
‘편입생들의 학과시험 참가. 그게 지금으로서는 가능성이 높다.’
어차피 2학기에 편입이 예정되어 있으니 실력을 확인해 봐야 되는 상황. 그러니 아예 학과시험에 참가해서 기존의 생도들과도 경쟁하게 만드는 것이다.
조금 과격하긴 하지만 충분히 실용적인 방법이었고, 아미르의 존재 자체가 그것을 증명하기도 했다.
‘이걸 알고 있던 것도 그렇고, 정보에 관한 금제가 걸려 있던 것도 보면 그놈도 편입생이겠지.’
실제로 그에 대해서 빙 둘러서 물었을 때 아예 부정하지 않았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아낸 이세훈은 한 가지 사실을 추가적으로 알아냈다.
‘몽환마 그 자식…… 아주 자신이 넘치는 모양이야.’
아무리 몽환마라고 해도 승천제가 떡하니 버티고 있는 바벨 안에서 제대로 사건을 일으키려면 그만한 준비가 필요한 법.
하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그런 전조가 보이지 않았고, 유일한 단서라고는 아미르 한 명뿐. 그렇기에 이세훈은 그것을 보고 간단하게 결론을 내렸다.
‘이번 계획은 아미르 그놈 한 명만 이용하는 거야.’
아마 규모가 커질수록 제약이 늘어나고 경계 받을 가능성이 높으니 허를 찌르기 위해 대폭 축소한 듯한 모습.
시도 자체는 나쁘지 않지만 문제는 아미르 혼자만으로 도대체 무슨 사건을 벌일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버림패로 써도 힘들 것 같은데…….’
뭔가 엄청난 수를 준비해 둔 것일까. 아니면 그냥 예언이 틀렸었고 몽환마는 미래를 보고 아미르를 잠입시킨 것일까.
어느 쪽이든 아직 단정 지을 수 없었기에 이세훈은 일단 아미르가 참가할 학과시험 쪽에 주의를 기울이기로 했다.
‘하. 시험 신경 쓰는 것도 바쁜데 이런 잡다한 곳에도 신경써야 하고…… 세상이 안 도와주는 구만.’
솔직히 자신이 학년 수석에 떨어진다면 이것 말고는 이유가 없다. 짜증 나긴 하지만 또 무시할 수는 없었기에 이세훈은 체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교수님 말씀이 맞네요. 슬슬 정리하겠습니다.”
“크흠. 그러면 오늘은 여기까지…….”
“오늘은 오후 9시까지만 하고 가겠습니다.”
“…….”
선심 쓰듯 말하는 이세훈의 이야기에 마광수가 시계를 바라보았다. 현재 시각은 오전 10시 32분.
오후 9시까지 칼을 휘둘러야 한다는 사실에 마광수가 두 눈을 질끈 감았고.
“아. 점심저녁은 안 먹을 겁니다.”
“야이 망할 새끼들아!”
다시는 재시험 방식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 * *
웨에에엥─!!!
“?!”
갑자기 울려 퍼지는 사이렌 소리.
침대에서 튕겨져 나오다시피 일어선 이세훈은 재빠르게 거실 밖으로 나와 창밖을 바라보았다.
“기습…… 뭐야 저건.”
만마전의 기습인가 싶었던 이세훈은 창밖에 보이는 풍경에 멍한 표정을 지었다.
본래 바벨의 도심이 내려다보이던 곳에 만들어진 거대한 미로. 벽의 높이만 해도 족히 100미터는 넘어 보였고, 넓이는 눈에 보이는 모든 구역을 다 뒤덮고 있었다.
그 어마어마한 규모에 이세훈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몽환마가 내 뇌를 주무르고 있는 건가?’
잠든 사이에 몽환마에게 당한 게 아닌지 이세훈이 진지하게 의심하고 있을 때. 기숙실 내부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부터 보르시파 1학년 생도들의 1학기 학과시험을 실시하도록 하겠습니다.]
스피커로부터 들려오는 무덤덤한 목소리, 류은하의 이야기에 이세훈이 잡생각을 떨쳐내고 귀를 기울였다.
[올해 보르시파의 학과시험은 지난번에 일어난 습격 사건들을 비롯하여 만마전과의 긴장 상태를 반영하여 보다 실전적인 형태로 개편되었습니다.]
본래 보르시파의 학과시험은 주어진 과제에 맞춰서 물건을 만들거나 자유롭게 창작을 권유하는 등 다른 학과들보다 상당히 느슨하게 진행됐었다.
하지만 새롭게 취임한 류은하 학과장은 급변하는 정세에 맞춰서 근본을 모조리 갈아엎었고, 그 결과 기존과 완전히 다른 학과시험이 만들어졌다.
[여러분들은 자신을 기술자나 장인, 혹은 예술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 근원을 따지자면 ‘영웅’. 훗날 만마전과의 전쟁에서 그들을 쓰러뜨려야 할 전력입니다.]
정말 실전을 앞두고 있는 것처럼 류은하의 목소리가 냉담하게 울려 퍼졌고, 기숙사에서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생도들이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기에 이번 시험의 주제는 실전. 여러분들이 가진 힘과 지식, 기술을 모두 사용하여 미궁을 돌파하고 중앙의 코어에 도달하십시오.]
쿠구궁!
류은하의 이야기에 맞춰 바깥의 미로의 벽들이 묵직한 소리를 내며 아래로 내려갔고, 그동안 가려져 있던 거대한 설비가 모습을 드러냈다.
우우웅!
미궁 중앙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거대한 원형 기계.
미궁을 유지하는 핵이자 결승점인 코어. 그 모습에 모든 이가 멍하니 바라보았고.
[그럼 행운을 빌겠습니다.]
덜컹!
기숙실의 문이 일제히 열리며 학과시험의 시작을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