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가 다 만들어줌 182화
“흐음…….”
무투학부 본관건물 밖으로 나온 이세훈은 주변에 사람들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바지주머니에 넣어둔 왼손을 꺼냈다.
움찔움찔─
시선이 닿자마자 꿈틀거리는 왼손.
자신의 몸인데도 다른 생물처럼 움직이는 그 모습에 이세훈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혈류로 통제 안 하고 있었으면 목부터 졸랐겠네.’
마광수의 심상을 왼팔과 동조시킨 다음 육체에 맞게 특화시켜서 안쪽에 담긴 기술을 재현한다.
회귀 전에 비슷한 방식을 몇 번 보거나 분석한 적이 있었기에 사용자체도 그렇게 어렵지 않았고 효과도 뛰어났지만 그만큼 부작용도 컸다.
‘원래는 살짝 흉내만 내려고 했었는데…… 너무 효과가 좋아서 분신처럼 돼버렸구만.’
영웅, 좀 더 정확히 정의하자면 마력을 다루는 존재에게 심상이란 힘을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근원’이나 다름없다.
그걸 그대로 가져온 것도 모자라 몸까지 맞춰주니 완전히 자리를 잡고는 진짜 제 몸인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간단히 비유하면 마광수 그 양반을 기반으로 만든 인공지능에 왼팔을 빼앗긴 상황인가…….’
몸을 빼앗은 사람이나 빼앗긴 사람이나 기겁할 만한 상태. 하지만 이세훈은 오히려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이런 효과면 꽤 쓸 만할 것 같은데?’
회귀 전. 이세훈은 제련 실력을 제외하면 특별한 재능이 없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혹평을 들었던 것이 전투였다.
동작을 몸에 익히거나 그 움직임을 효율적으로 개선하는 등 중간까지는 얼추 따라 할 수 있었지만 그다음단계, 심상을 녹여내는 것은 불가능했던 것이다.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몸이 안 따라줬지.’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냥 무구만 잘 만들면 됐지 뭘 그렇게까지 해야 되나, 라는 느낌도 있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회귀 전의 수많은 전투를 겪어 오면서 그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기도 했고 앞으로 만마전과의 싸움을 이끌어 나가기 위해서는 기본은 갖춰야만 한다.
‘그러니까 이걸 좀 더 체계화해서 사용하면 딱이야.’
심상이 녹은 기술을 펼칠 수 없다면 이번처럼 다른 이들의 것을 응용하면 될 뿐이다.
게다가 회귀 전과 다르게 이번에는 영혼이 변질된 탓에 전투 분야에도 재능이 있으니 훨씬 쉽게 가능하리라.
‘쉽지는 않아 보이지만…….’
탁탁!
목을 쥐어뜯고 싶은지 엄지와 손가락 네 개를 입처럼 부딪치며 위협하는 왼팔.
개가 으르렁거리는 것 같은 그 모습에 이세훈이 떨떠름하게 보고 있을 때.
우우웅
왼쪽 바지주머니에서 울리는 진동. 그에 이세훈이 자연스럽게 왼팔로 꺼냈고.
퍼억!
왼손이 기습적으로 휴대폰을 바닥에 패대기쳤다.
“…….”
바닥에서 진동을 울리는 휴대폰과 언제 그랬냐는 듯이 얌전히 있는 왼손. 그 모습에 이세훈이 멍하니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이 새끼 이거 성격 더럽네.’
누가 마광수 심상 아니랄까봐 적대한 이들에게는 그야말로 가차 없다.
땅바닥에서 애처롭게 진동을 울려대는 휴대폰을 본 이세훈은 오른손으로 주워들었다.
[이노우에 에리카]
“음?”
시험기간인데 무슨 이유로 전화한 것일까. 이세훈이 의아해하면서 받았다.
“무슨 일이야?”
-나랑 같이 결계술 연습할래?
에리카의 제안에 이세훈이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알았어. 그쪽으로 갈게.”
제이크는 방금 시험으로 대충 상태를 살폈고 지금 당장은 우위에 섰다고 봐도 좋은 상황. 그러니 에리카 쪽을 한 번 살펴보더라도 나쁠 건 없었다.
‘어차피 시간도 여유롭고.’
위치를 전해들은 이세훈은 곧장 에리카가 연습 중이라는 주술학부의 훈련실로 향했다.
“여기야.”
팔각형으로 만들어진 훈련실.
각 꼭짓점 쪽에는 강철로 만들어진 인형들이 두 손을 맞잡으며 수인을 맺고 있었다.
‘과연. 시험맞춤형인가.’
이세훈이 그동안 시험을 친 다른 강의들과 다르게 결계구성학은 어떤 시험을 칠 것인지 이미 공지된 상태였다.
생도들이 각자 결계를 구성해 교수가 준비한 다양한 공격을 견뎌내는 방식.
내구성뿐만 아니라 여러 공격 방식에 대응할 수 있게끔 만들어야 했는데 이 훈련실은 딱 그것을 연습하기 좋게 만들어진 것이다.
“이런 훈련실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로버트 교수가 연습하라고 만들어준 거야?”
이세훈의 물음에 에리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따로 만든 거야.”
“흐음. 저 인형들도?”
“저건 본가에서 훈련용으로 쓰는 걸 가져왔어.”
에리카의 이야기에 이세훈이 훈련실 곳곳에 놓여 있는 강철 인형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좀 특이하다 싶더니…….’
마리오넷 팩토리나 다른 공방에서 만들어내는 골렘들과는 분위기가 상당히 달랐는데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외형이었다.
보통 헬멧을 쓴 것처럼 만드는 다른 골렘들과 다르게 이쪽은 사람의 얼굴을 아주 세세하게 재현해 뒀기 때문이다.
‘그냥 보기 좋으라고 하진 않았을 테고…… 주술과 연관이 있으려나.’
어떤 식으로 만들어진 물건인지 이세훈이 흥미를 느끼고 있을 때. 문득 앞쪽에서 시선을 느끼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뭐 하냐?”
어느새 바로 앞까지 다가와서 왼손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에리카. 그 뜨거운 시선에 이세훈이 떨떠름해 하자 에리카가 시선을 고정시킨 채 입을 열었다.
“왼팔 이식받았어?”
“아니. 내 팔인데.”
“그러면 왜 다른 사람의 팔이 된 거야?”
“…….”
에리카의 물음에 이세훈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쳐다볼 때부터 뭔가 눈치챘다는 것까지는 예상했지만 설마 이렇게 정확히 알아볼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영연신마법으로 억누르고 있어 겉으로 보기에는 차이가 없을 텐데…….’
단순히 감이 좋은 것일까. 아니면 육체의 변화에 민감한 것일까.
에리카의 새로운 능력을 알게 된 이세훈은 흥미롭게 바라보면서도 대답했다.
“일이 있어서 살짝 흉내를 냈는데 이렇게 되더라고. 시간이 지나면 가라앉을 거야.”
“…….”
이세훈의 대답에 에리카가 계속 왼손을 바라보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았다.
“만져봐도 돼?”
왼손의 상태를 살펴보려는 것일까. 에리카의 물음에 이세훈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대로 해.”
에리카가 자신의 손에서 무언가를 살펴본다면, 자신 역시 그것을 토대로 어떤 부분에 관심을 가지는지 알 수 있었다.
‘이렇게 관심을 보이는 걸 보니 평가 기준과도 관련이 있는 거겠지.’
인연관계를 생각한다면 나쁘지 않은 기회. 그런 이세훈의 허락에 에리카는 망설임 없이 두 손으로 왼손을 붙잡았다.
꿈틀─
에리카에게 붙잡히자 더욱 거세게 꿈틀거리는 왼손. 그 거친 반응에 이세훈이 피식 웃었다.
“성질 더러우니까 조심해.”
“응.”
고개를 끄덕인 에리카는 이세훈의 왼손을 천천히 살폈다. 손가락과 손바닥, 손등을 차분히 쓰다듬는 손길.
보석이라도 감정하는 것처럼 움직임이 하나하나 신중하고 섬세했는데 그 모습에 이세훈이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마력으로 냅다 살펴볼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신중한데.’
육체의 변화 쪽에 좀 더 집중하려는 것일까. 그렇게 한참을 살피던 에리카가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마력도 써도 돼?”
“상관은 없는데 무슨 일 생길지 모르니 주의하고.”
“알았어.”
우우웅!
대답과 동시에 은빛 마력이 이세훈의 왼손에 스며들었고, 그동안 조금 꿈틀거리기만 하던 움직임이 더욱 격렬해졌다.
‘이건…….’
단순히 마력으로 내부를 살피는 것뿐만 아니라 무언가를 자극하고 있다. 이세훈이 그 구조를 살피던 그때.
투웅!
에리카의 손을 쳐낸 왼손이 전력으로 목을 찔렀다.
손날을 세우고 마력을 둘러 근육까지 쥐어짜낸, 살의가 담긴 일격. 어떻게 보면 이세훈이 낼 수 있는 전력 그 이상의 위력이었지만.
끼기긱─
에리카의 목을 꿰뚫지는 못했다.
왼팔을 단단히 묶어서 고정한 은빛 실.
겉보기에는 허공에서 갑자기 나온 것처럼 보였는데 실제로는 훈련실 전체에 투명한 상태로 펼쳐져 있는 상태였다.
‘이런 식으로 발동되는 거구만.’
발동된 결계를 가볍게 살펴본 이세훈은 에리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괜찮냐? 좀 닿았던 것 같은데.”
“응. 괜찮아.”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인 에리카는 은빛 실에 묶인 이세훈의 왼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손날 끝이 살짝 닿았던 자신의 목을 쓰다듬었고.
[대상 ‘이노우에 에리카’의 평가가 높아졌습니다.]
[인연석이 이미 생성되어 있습니다. 숙성도가 증가됩니다.]
눈앞에 알림창이 떠올랐다.
‘……의외인데.’
알림창의 내용을 살펴본 이세훈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이전에 평가를 좋게 받은 적이 있어서 레벨이 오르지 않을까 했는데 변동이 없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평가가 낮아서 그런 것 같지는 않고…… 뭔가 조건이 필요한 걸지도 모르겠네.’
에리카의 채점 기준, 그것과 밀접한 분야의 기술을 사용할 수 있어야 인연레벨이 오르는 것이 아닐까.
이전에 숙제라고 내줬던 주술식을 떠올린 이세훈이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넌 괜찮아?”
이세훈의 손을 살피던 에리카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음? 뭐가?”
“왼손 부상이 조금 심한 것 같아서.”
“……아.”
에리카의 이야기에 이세훈이 그제야 은빛 실에 묶여 있는 왼손을 바라보았다.
별문제 없겠거니 하고 대충 살펴봤었는데 다시 보니 상태가 좋지 않았던 것이다.
‘이 상태에서는 통증도 전달이 안 되나 보네.’
한 가지 더 신경 쓸 부분이 늘어난 것을 확인한 이세훈은 에리카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괜찮아. 이 정도면 크게 문제없어.”
“정말?”
“걱정 안 해도 돼.”
손을 내저은 이세훈이 자신의 왼손을 내려다보았다. 예전이었으면 병동에 갔을 수준의 부상. 하지만 그것을 본 이세훈은 걱정은커녕 기대되는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좀 쓸 만한 물건을 얻었거든.”
* * *
그 날 저녁.
결계술 연습을 마치고 기숙실로 돌아온 이세훈은 거실의 소파에 앉아 자신의 왼손을 바라보았다.
“흐음. 좀 심하긴 했네.”
왼손에 남아 있던 심상이 모두 사라지면서 감각도 정상으로 돌아왔는데 통증이 상당했다.
뼈가 부러진 것은 물론 공격 자체가 무리하게 펼쳐졌던 것이다 보니 근육이나 관절 부위도 많이 망가진 것이다.
본래라면 왼팔에 통으로 깁스를 해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
그 상태를 살핀 이세훈이 곧장 오른손 약지에 끼고 있는 승천제의 반지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우우웅─
공간의 권능이 펼쳐지면서 허공에 검은색 점이 생겨나더니 이내 접혀진 종이가 펼쳐지듯 확장된다.
그리고 잠시 후 안쪽에서 하얀색 향로, 순례자의 향로가 툭하고 탁자 위에 놓였다.
“후우…… 쉽진 않구만…….”
공간의 권능으로 만들어낸 아공간.
아공간 포켓에 넣어두면 전투 중이거나 급할 때 써먹기가 힘들 것 같아서 승천제의 반지를 써먹기로 한 건데 좀처럼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뭐. 이것도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승천제의 반지에서 마력을 거둔 이세훈은 그대로 향로에 손을 올린 다음 체내에 저장해둔 신성력을 불어넣었다.
우우웅!
향로의 안쪽에서 반짝이는 신성력. 그리고 그것이 녹아내리는가 싶더니 잠시 후 틈사이로 새하얀 연기가 바깥으로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하얀빛과 황금빛이 같이 반짝거리고 있는 독특한 안개. 그것을 본 이세훈은 회귀 전에 배웠던 신성마법을 하나 발동시켰다.
파바박!
안개가 뭉쳐 만들어진 화살촉들이 이세훈의 왼팔에 꽂혔고 그 즉시 황금색으로 빛나며 안쪽에 스며든다.
스스스
왼팔에 깊숙이 스며드는 신성력. 조각난 뼈가 단단히 붙고 끊어졌던 근육들도 하나하나 다시 연결되었는데 회복 속도는 물론 효과도 상당했다.
마치 다치기 전 상태로 시간을 되돌리는 것 같은 효과. 그 과정을 살핀 이세훈이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이건 볼수록 신기하네…….”
신성마법 ‘육체복원’.
부상을 치료할 뿐만 아니라 회복 직후에 발생하는 이질감까지 최소화시키는 기술로 회복계통의 신성마법 중에서는 상당히 고난이도였다.
그렇기에 회귀 전에 이세훈도 대강 방법만 설명으로 들었을 뿐이지 제대로 발동시키는 것은 힘들었는데 순례자의 향로를 얻은 지금은 달랐다.
‘신성력을 불어넣고 신성마법을 발동하려고 하면 대신 완성시켜 준다…… 설마 이런 효과가 있을 줄이야.’
기존의 성법기 중에서도 신성마법을 보조하는 방식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지만, 순례자의 향로는 그와 차원이 달랐다.
다른 것들이 인스턴트 음식처럼 만들기 쉽게 만들어놓은 정도라면 이쪽은 아예 재료를 가져가서 처음부터 끝까지 요리해서 맞춤형으로 음식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아마 안쪽에 들어 있는 순례자의 권능. 그리고 과거에 직접 사용하면서 남은 심상이 맞물린 덕분이겠지.’
만약 순례자가 아예 성법기를 새로 만들어서 권능을 담아줬다면 힘을 강화하는 선에서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과거 본인이 직접 사용했던 순례자의 향로를 사용한 덕분에 안에 새겨져 있는 심상이 권능에 반응했고, 그 결과 자동으로 신성마법을 발동해 주는 엄청난 물건이 된 것이다.
‘만약 신성력이 없었다면 신성마법을 쓸 때마다 권능이 소모돼서 소모품으로 끝났겠지만…….’
실제로 순례자도 그렇게 쓰라고 준 것이겠지만 원래 세상일이라는 게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법이다.
“아, 다됐네.”
잠깐 생각에 잠긴 사이 왼팔이 모두 회복됐고, 이세훈은 그대로 손을 쥐락펴락하며 살펴보았다.
별다른 이질감 없이 깔끔하게 치료된 상처.
체내에 저장한 신성력을 절반이나 쓰기는 했지만 괜히 병동에 가서 안정을 취해야 한다며 입씨름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육체복원처럼 고난이도 신성마법을 쓸 수 있다는 것도 확인했고.’
처음에는 자신의 힘으로 어디까지 쓸 수 있을지 걱정이었지만 이 정도라면 문제없다. 그에 이세훈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역시 순례자가 최고야.’
기존에 가지고 있던 완등자의 권능이 담긴 무구, 승천제의 반지와 불명자의 지골은 효과가 좋기는 했지만 모두 한 가지씩 큰 단점이 있었다.
승천제의 반지는 순수하게 공간능력을 다루는 게 어렵고, 불명자의 지골은 가공된 무구가 아니라 신체의 일부다 보니 사용할 때마다 침식증상이 발생한다.
그래서 두 가지 모두 잠재력에 비해 제대로 써먹지 못했는데 순례자의 향로는 그와 다르게 완전히 쓸 수 있는 것이다.
‘회복계통 말고 다른 것도 한번 보고 싶은데…….’
기억하고 있는 신성마법 중에 까다로운 것이 없나 고민하던 이세훈은 이내 한 가지를 떠올렸다.
‘아. 그러고 보니 예지가 있었지.’
신과 정신을 연결해서 미래를 내다본다는 미심쩍기 그지없는 기술.
회귀 전에 들은 바에 의하면 적중률이 꽤 높다고 했었는데 이세훈은 썩 신용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 기술의 창시자이자 권위자라고 할 수 있는 순례자가 전쟁 초창기에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자기가 죽는 미래도 못 봤다면 효과가 영 시원찮고, 미래를 봤는데도 바꿀 수 없다면 그건 그것대로 의미가 없으니까.’
어렵기만 하고 실용성은 찾아보기가 힘든 기술. 지금도 거기서 생각이 달라지지는 않았지만 이세훈은 한 번 사용해 보기로 했다.
어차피 지금 목적은 순례자의 향로가 신성마법을 어디까지 펼칠 수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보자…….’
회귀 전에 들은 사용법을 머릿속으로 되새긴 이세훈은 그대로 순례자의 향로에 손을 올렸다.
‘신탁의 카드.’
우우웅!
신성력을 머금은 순례자의 향로가 안개를 만들어냈고, 그것들이 허공에 고리의 형태가 뭉치기 시작했다.
황금색으로 빛나는 고리. 순례교에서 신의 상징으로 여기는 황금 고리와 똑같았는데 그 모습에 이세훈이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꽤 그럴싸한데…….’
여기서 어떻게 발동될 것인가. 이세훈이 기대하며 바라보고 있을 때, 고리의 12시 방향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스스스
새하얀 입자가 모여서 만들어진 한 장의 카드.
그 완성된 카드가 고리의 1시 방향으로 움직이자 12시 방향에 다시 새로운 카드가 형성된다.
그 과정이 반복되어 총 7장의 카드가 만들어졌고, 잠시 후 텅 비어 있는 고리의 안쪽에 카드들이 나열되었다.
‘7장이라…… 나쁘진 않네.’
회귀 전에 총대주교, 카말의 이야기에 의하면 신탁의 카드는 카드가 많을수록 정확도가 뛰어나고 시전자의 실력과 신성력의 양에 따라서 수가 결정된다고 했었다.
그리고 대주교들 중에서 최고기록은 9장.
2장이 적기는 하지만 신성력의 양이 적은 것을 고려하면 순례자의 향로는 대주교급 신성마법을 펼친다고 봐도 무방했다.
‘좋아. 이 정도면 얼추 견적은 나왔구만.’
신탁의 카드를 사용하길 잘했다고 생각한 이세훈은 만족스럽게 웃다가 문득 고리 안쪽에 나열된 카드들을 바라보았다.
‘……일단 썼으니까 보기는 할까?’
썩 신용은 안 가지만 그냥 취소하기는 사용된 신성력이 아깝지 않은가.
결정을 내린 이세훈은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제일 왼쪽의 카드를 뒤집었다.
새하얀 테두리 안에 그려진 그림. 그 안쪽에는 시계를 보는 사내가 그려져 있었는데 아래에는 황금색으로 한 단어가 적혀 있었다.
[미래]
‘흐음…… 타로카드 같은 형식인가.’
흥미로운 표정을 지은 이세훈은 이어서 한 장씩 카드를 넘기며 그림과 글귀를 계속해서 읽었다.
[탑] [시험] [불청객] [친우] [재난]
새하얀 탑 아래에서 수많은 시험을 치르다가 갑작스레 찾아온 불청객을 친우와 함께 마주하여 재난에 휩쓸린다.
하나의 이야기처럼 연결되는 여섯 장의 카드. 그리고 그 글귀에 무언가 느낀 이세훈은 마지막 카드를 바라보았다.
“……후우.”
한숨을 내쉰 이세훈은 재빠르게 카드를 뒤집었고, 그 안에 그려진 그림이 보였다.
황폐한 땅 위에 무릎을 꿇은 사내. 그 머리와 팔을 힘을 다한 듯 축 늘어져 있었고, 명치에는 한 자루의 ‘단검’이 박혀 있다.
“…….”
그 그림을 말없이 바라본 이세훈은 천천히 시선을 내려 아래에 적힌 단어를 읽었다.
[죽음]
이 일곱 장의 카드가, 순례교가 신이라고 부르는 놈이 자신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세훈은 어렵지 않게 신탁의 내용을 해석해 냈고.
“이 사이비 새끼들이…….”
자신이 시험기간 중에 죽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