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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가 다 만들어줌-176화 (176/309)

회귀자가 다 만들어줌 176화

아칼쿠프의 모든 무기학부가 모인 건물 플라비움.

콜로세움을 연상케 하는 그 거대한 건물의 중심, 자연공원과 함께 조성된 트랙의 위에서 생도들이 가볍게 뛰며 이야기를 나눴다.

“야야. 1학기 평가시험 이야기 뭐 나온 거 없어?”

“학부시험이야 뭐 별거 없고…… 학과시험이 좀 무섭던데. 카사르 교수님이 인수인계하시면서 계획 중이시래.”

“망했네…….”

“망했지…….”

한숨을 푹 내쉬며 뛰는 두 사람. 그 옆을 추월하면서 우연히 이야기를 들은 금발의 청년, 제이크가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학과시험이라…….’

바벨은 학기말에 생도들의 능력을 평가하는 시험을 치르는데 그 종류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는 학부시험.

전공과 부전공 시험들을 일컫는 것들로 학부 단위에서 이뤄지는 소규모이기에 그렇게 묵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학과시험.

이름 그대로 학과의 모든 생도들이 동시에 치르는 시험이었는데 바벨 내부에서도 외부에서나 가장 유명한 것이 이 시험이었다.

‘일단은 규모부터가 다르니까 말이야.’

학부시험은 해봐야 본관 건물이나 다른 건물을 빌려서 간소하게 치러지지만 학과시험은 필요에 따라 학과 구역 전체를 시험 장소로 사용할 수 있다.

그로 인해 출제자인 학과장이 마음만 먹으면 엄청난 규모의 시험이 가능한 것이다.

‘나도 누님처럼 할 수 있을까…….’

트랙을 달리던 제이크는 3년 전에 본 영상을 떠올렸다.

학과 구역 전체가 무대로 열렸던 배틀로얄.

다른 1학년 생도들이 거점을 만들거나 신중히 기회를 노리고 있을 때 자신의 누이, 아리아 마이어스는 당당하게 거리를 나섰다.

그리고 함정과 습격을 정면에서 박살 내고 숨어 있는 생도를 모조리 찾아내 단 2시간 만에 학과시험을 끝내 버린 것이다.

‘재밌는 시험이었어요.’

시험이 끝나고 상처 하나 없이 미소를 지으며 소감을 남기던 아리아. 3년 전인데도 선명한 그 기억에 제이크가 잠시 생각하다가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

“……그럴 리가 없지.”

자신도 어디 가서 실력이 떨어진다는 소리를 듣지는 않지만 그래도 넘을 수 없는 벽이라는 것이 있는 법이다.

금방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 제이크가 다시 달리기에 집중하려던 그때.

“뭐가 그럴 리가 없다는 거지?”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염성하가 무뚝뚝하게 물었다.

“여, 염 선배님?!”

그 예상치 못한 등장에 제이크가 깜짝 놀라며 바라보았고 염성하가 무심하게 달리면서 물었다.

“뭐가 그럴 리가 없냐고 물었다.”

“예? 아니…… 그게…….”

염성하의 거듭된 질문에 제이크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찾아와 말꼬리를 잡기 시작하니 도대체 무슨 목적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말이 심기를 건드린 건가? 아니 그래도 보통은 이렇게 말을 걸 리가…….’

이세훈과 친구라는 공통점을 제외한다면 아무런 접점도 없는 사이. 그 애매한 거리감에 제이크가 쉽사리 대답을 못하자 염성하가 이야기를 덧붙였다.

“별다른 뜻을 가지고 물어보는 건 아니다.”

“아…… 그런가요?”

“그래.”

고개를 끄덕인 염성하가 무심하게 이야기했다.

“패배자의 얼굴을 하고 있길래 무슨 한심한 생각을 하고 있나 싶어서 물어봤지.”

“…….”

순간적으로 시비를 걸려고 온 건가 싶었지만, 이세훈과 염성화의 대화를 떠올린 제이크는 그가 원래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악의는 없지만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화가 나게 만드는 싸가지 없는 말투.

이세훈이 왜 염성하를 보고 질색하는지 조금 알게 된 제이크가 마음을 다잡으며 대답했다.

“그냥, 이번 1학기 평가시험을 잘 칠 수 있을까 싶어서요.”

“학과수석을 유지할 수 없을까봐 그런 건가?”

“아뇨. 그쪽은 자신 있지만 그게…….”

이런 것도 말해야 하나 싶었지만 어차피 비밀도 아니었고 염성하가 어디서 말할 것 같지도 않았기에 제이크가 솔직히 대답했다.

“제가 과거의 누님처럼 할 수 있을까 싶어서요.”

“흐음. 아리아 마이어스의 이야기인가.”

제이크의 이야기에 잠시 고민하던 염성하가 대답했다.

“내가 보기에 걱정할 필요는 없어 보이는군.”

“…….”

염성하의 이야기에 제이크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다른 사람이라면 그냥 말로만 하는 위로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염성하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주변 분위기나 사람들의 기분이 어떻든 간에 자기 생각을 숨김없이 이야기하는 게 바로 염성하 아니었던가.

거기에 자신의 누이와 가장 많이 대련한 사람이었기에 그 말이 좀 더 깊이 다가왔다.

‘말하는 건 조금 그렇지만…… 좋은 사람이었구나.’

제이크가 눈앞의 괴팍한 선배를 다시 보고 있을 때. 염성하가 무심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미 졌다고 마음속으로 패배를 인정했는데 그럴 이유가 없지 않나.”

“……예?”

“패배자에게는 패배자의 길이 있는 법이지. 두 번 지는 건 꼴사나우니까 지금부터 정진해라.”

자기 할 말을 끝낸 염성하가 속도를 높여서 앞으로 뛰어갔고,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제이크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졌으니까 신경 쓰지 말고 다음에 잘하라고……?’

물론 어느 정도 포기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그걸 저렇게까지 말한단 말인가. 뒤에는 정진하라고 덕담했지만 앞에 한 말이 저래서야 의미도 없다.

제이크의 머릿속에 염성하의 말이 메아리치듯이 울려 퍼졌고 그와 동시에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좋아.”

저런 말까지 들었는데 손을 놓으면 앞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각오를 다진 제이크가 두 눈을 빛내며 바닥을 박찼다.

후웅!

다른 생도들을 제치고 빠르게 달려 나가는 제이크. 그 힘찬 뒷모습에 염성하가 가만히 바라보았고.

‘내 조언이 통한 모양이군.’

조금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 * *

[네가 눈여겨보고 있는 제이크 마이어스한테 쓸 만한 조언을 해줬다. 나중에 잘되면 빚으로 생각해라.] - 염성하

“…….”

책상에 앉아서 서류를 읽고 있던 이세훈은 메시지의 내용을 보고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이 새끼 이거…… 또 무슨 개짓거리를 한 거야?’

회귀 전에도 그랬지만 염성하가 선심 쓰듯이 일을 벌이면 그중에 제대로 된 꼴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예를 들어 어떤 범죄 조직이 필요한 재료를 빼돌리고 있어서 짜증난다고 하니 그날 밤 본진에 쳐들어가 대장과 간부의 머리통을 죄다 날려 버린 놈이다.

‘그것 때문에 동맹 조직들한테 사건의 배후라면서 현상금 붙고, 그렇게 일 벌려놓고 감사하게 생각하라고 뻔뻔하게 말하고…… 생각하니까 또 열 받네.’

자주는 아니지만 잊을 만하면 한 번씩 터지는 일이었기에 이세훈이 눈매를 매만졌다.

‘그래도 뭐…… 그 정도로 큰일은 아니겠지.’

만약 그랬다면 제이크 쪽에서 뭐라고 문자가 왔을 것이다.

염성하에게 개짓거리 하지 말라고 답장을 보내둔 이세훈은 다시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순례자가 새롭게 개발해낸 치료법을 사용하면 부상으로 은퇴한 영웅들 대부분을 현역으로 복귀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판명되었습니다.

일각에서는 임상 실험이 부족하여 확실하지 않다는 의견도 있지만 치료법을 개발한 이가 순례자, 완등자이기에 영웅 업계에서는 이미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은퇴한 영웅들 사이에서 순례교를 향한 후원이 쏟아지고 있으며 길드와 기업들 역시 각 지부에 사람을 파견하여 협상을 시도하고 있는 모습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현 상황에서 저희 협회 역시 부상으로 인한 사무직 전환 혹은 은퇴가 빈번히 일어나는 만큼 순례교와 협력체계를 갖추고 부정적인 인식을 고치며 부족한 인원을 보충해야…….」

하선우에게 받은 협회 내부의 보고서를 살핀 이세훈이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아주 난리도 아니구만.’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서도 고위 영웅들의 부상과 은퇴는 영웅 업계에 있어 엄청난 손실이었다.

하위 영웅들이야 기본적인 교육과 장비만 갖추면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지만 뛰어난 재능이 있어야 하는 고위 영웅들은 그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걸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나왔으니 눈이 돌아갈 만도 하지.’

길드와 기업들은 자신들이 먼저 거래를 따내기 위해 암암리에 경쟁을 펼치기 시작했고, 영웅 협회 역시 여기에 끼어들려고 하고 있었다.

‘협회도 부상자들이 많으니까 말이야.’

협회 소속 영웅들이 범죄자나 마인들과 싸우다 보니 일반 영웅들에 비해 습격당하는 일도 많았고, 그로 인해 부상으로 은퇴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 때문에 인식도 나빠져서 전 세계적으로 인력 부족에 허덕였는데 그런 협회에게 있어 순례교의 새로운 치료법은 반드시 확보해야 할 수단이었다.

‘생각한 것 이상으로 반응이 좋은데. 이 정도면 꽤 기대해 봐도 되겠어.’

보고서를 모두 읽은 이세훈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만약 아무런 관련도 없었다면 돈을 왕창 번다는 소식에 조금 배가 아팠겠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순례교가 치료법으로 벌어들이는 수익을 모두 넘겨준다고 하기도 했고 환락가가 벌이고 있는 증축 계획에 제대로 제동을 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걸로 순례교의 입지가 높아져 이득을 많이 얻게 되면…… 순례자의 성격상 또 보상을 퍼주겠지.’

지난번에 보답이라고 이것저것 받을 때는 조금 부담스럽긴 했지만 시간이 지나니 금방 적응이 돼서 괜찮아졌다.

다음에도 똑같은 수준으로 보답을 받는다면 부담감 없이 마음껏 받아줄 수 있으리라.

‘결과적으로 이번 일은 잘 해결됐구만.’

처음에는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골치 아팠는데 제인과 만나면서 이래저래 쉽게 풀렸다. 그 사실에 이세훈은 안도하면서 한편으로는 살짝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근데 제인 그 양반하고는 끝까지 인연이 안 생겼네…….’

접점이 그리 많지는 않았어도 이번에 있었던 일들을 생각하면 보통은 인연이 성립되고도 남을 정도였다.

그런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는 것은 제인의 속내도 에리카처럼 어딘가 살짝 비틀려 있다는 뜻이리라.

‘뭐, 이 부분은 차근차근 살펴보면 되겠지. 안 그래도 그쪽은 상당히 위험한 상태니까.’

이전에 몽환규도로 봤던 빙견의 자료에 의하면 제인은 4학년 때 바벨이 외부에서 개최한 행사에 참가했다가 사고로 죽었다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현재 제인은 3학년. 시기가 이르기는 하지만 자신으로 인해 어떤 나비효과가 일어났을지 알 수 없는 만큼 주의하는 것이 좋았다.

‘모처럼 바벨이랑 순례교가 동맹을 맺었는데 거기에 찬물이 끼얹어지면 곤란하지.’

빙견의 자료를 곱씹던 이세훈은 그 내용은 간단히 정리한 다음 하선우에게 받은 보고서를 태웠다.

화르륵!

보고서가 재도 남기지 않고 깔끔하게 타올랐고 이세훈은 그대로 의자에 몸을 쭉 기대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이젠 뭘 한다…….”

해야 할 일 자체는 여전히 많았다.

몽환마가 영웅들에게서 복사한 심상을 어디에 사용하는지, 증축 프로젝트의 진짜 목적이 무엇인지, 그리고 정말로 멸각의 마신을 만들고 있는 것인지.

정보를 알아낸 만큼 해야 할 일들 역시 늘어났는데 하나같이 쉬운 일이 없었다.

‘흐으음…… 일단 잠시 기다려 볼까.’

이런 일들을 무작정 매달려서 해결하는 게 아니라 기회가 왔을 때 제대로 잡아서 차근차근 풀어가는 것이다.

방침을 정한 이세훈은 지금 당장 자신에게 급한 일, 이제 2주도 채 남지 않은 1학기 평가시험에 집중하기로 했다.

‘학과수석이나 이런 건 무조건 유지해야지.’

대외적인 위치도 위치지만 수십 년을 회귀한 경력직인데 한참 어린 애들한테 밀려서 떨어지면 되겠는가.

만약에라도 학과수석에서 밀려나게 된다면 수치심에 단검으로 심장을 쑤셔 버릴지도 모르리라.

‘제련학부 쪽은 솔직히 별 문제 없고 신경써야 할 건 신체제어학이랑 결계구성학, 그리고 고대인챈트학 쪽인가.’

신체제어학은 마광수의 성격을 생각하면 무슨 말도 안 되는 시험이 나올지 몰랐고 결계구성학과 고대인챈트학 쪽은 이세훈이 약간 자신 없었다.

결계나 인챈트나 이것저것 다룰 수 있게 되기는 하지만 또 잘한다고 하기에는 약간 애매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뭐…… 일단은 되는 만큼 해볼까.’

어차피 현상유지가 목적이니 그렇게 또 열심히 할 필요도 없다. 이세훈이 그렇게 생각하던 그때.

우웅!

갑작스레 진동을 울리는 휴대폰. 그에 메시지를 보낸 상대를 보니 ‘바벨’ 이라고 짤막하게 적혀 있었다.

‘이건…….’

바벨에서 생도들에게 보낸 메시지.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이세훈이 휴대폰을 들고 도착한 메시지를 읽어보았다.

「다음 학기에 있을 바벨의 대규모 개편에 앞서 이번 1학기 평가시험은 기존과 다른 방식으로 치러질 예정입니다.

바벨의 생도 여러분들은 해당 안내를 참고하여 자신들의 능력을 아낌없이 펼쳐주시기 바랍니다.

*각 학년별로 모든 학과가 참여하는 특별시험 도입.

*학과수석 중에서 가장 뛰어난 생도를 뽑는 학년수석 도입.

*새롭게 선정된 학년수석들에게 여름방학 중 ‘완등자’에게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특별체험 제공.」

생각보다 그리 길지 않은 메시지. 하지만 그 내용을 읽은 이세훈이 두 눈을 가늘게 떴다.

“학년수석에…… 특별체험이라…….”

완등자라고 적어둔 것을 보면 아마 루트비히뿐만 아니라 순례자나 불명자, 어쩌면 그 이외에 다른 완등자들 역시 가능할지도 모른다.

쉽게 구할 수 없는 기회. 그리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다른 학과수석, 제이크와 에리카를 밟아야 한다.

그 사실에 이세훈이 잠시 생각에 잠겼고.

“……재밌겠는데?”

곧 다가올 평가시험에 의욕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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