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가 다 만들어줌 161화
모리스를 제압하고 결정적인 증거인 심상 투영기를 확보한 뒤. 특무과는 저택을 대상으로 압수수색에 나섰다.
그동안 모리스가 개입했을 거라고 의심하고 있었던 수많은 범죄.
그와 관련된 자료를 찾고 관계자들까지 처벌해야만 성공이었기 때문이다.
“무슨 장치를 해뒀을지 모르니 조심히 가자고.”
“그래야지.”
하지만 마력이 생겨난 세계에 증거를 숨기는 방법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아졌고, 어설프게 건드렸다가 도리어 증거만 날리는 경우도 수없이 많았다.
그렇기에 특무과의 대원들도 탐지 도구를 사용하며 한 곳 한 곳 매우 신중하게 탐색했었는데.
“저쪽 벽 한번 부숴보죠.”
하선우 조사관이 데리고 온 청년은 조금 달랐다.
“…….”
“…….”
방에 들어와서 주변을 좀 둘러본다 싶더니 대뜸 빈 벽을 가리키는 청년. 그 모습에 대원들이 잠시 서로를 바라보다가 자연스레 함께 들어온 하선우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해보세요.”
“알겠습니다.”
대원들은 아리송해 하면서도 대형망치를 꺼내 청년, 변장한 이세훈이 가리켰던 벽을 있는 힘껏 후려갈겼고.
콰앙!!
벽면이 무너지며 금고의 겉모습이 드러났다.
“허…….”
“진짜 있네…….”
망치를 휘두른 대원들이 얼빠진 표정으로 바라보았고 이세훈이 금고의 겉면을 슬쩍 훑어보며 이야기했다.
“별거 없는 거 보니까 재산만 넣어둔 것 같은데 혹시 모르니까 한번 살펴보세요.”
“아, 예.”
대원들에게 간단하게 알려준 이세훈은 곧장 다른 방으로 향했고 거기에서도 똑같이 방 내부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방의 구조와 장식물의 배치. 거기에 지맥이나 저택을 순환하는 마력파이프의 구조 등 수많은 요소가 겹겹이 더해지면서 비밀스러운 장소를 만들어낸다.
‘저긴가.’
순식간에 구조를 파악한 이세훈은 특별할 게 없어 보이는 책장의 앞으로 향했다.
“보자…… 이거랑…….”
찰칵찰칵
몇몇 책들의 윗부분만 잡고 비스듬히 빼내자 이질적인 소리가 울려 퍼졌고, 그 과정을 몇 번 반복하자 책장 안쪽에서 빛이 번쩍이더니 움직이기 시작했다.
쿠구구궁
숨겨진 책장에 채워져 있는 각종 장부. 꽤 쓸 만해 보이는 물건들에 이세훈이 곧장 하선우를 바라보았다.
“이것들도 챙기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알겠습니다.”
그 이후로도 이세훈은 계속해서 저택을 돌아다니며 숨겨진 증거들을 찾아냈고, 특무과의 대원들도 어느 순간부터는 찾기는커녕 찾아낸 증거를 챙기는 데 정신이 없었다.
한 사람에 의해 수십 배로 빨라진 작업 효율.
그 과정을 멀찍이서 지켜보던 검은 슈트를 입은 중년 사내, 드와이트 조사관이 담담히 중얼거렸다.
“저 녀석…… 절대로 집에 초대하고 싶지 않아.”
“……저도 동감이에요.”
드와이트의 이야기에 맞은편에 서 있던 여성 조사관이 고개를 끄덕였고, 쭈그려 앉아서 캔커피를 홀짝이던 조사관이 이세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근데 그래서 결국 저 녀석은 정체가 뭐야?”
“글쎄요. 선우 씨가 가르쳐주질 않으니…….”
“니샤 너한테도 안 가르쳐줬어?”
여성 조사관, 니샤가 아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물어봤는데 절대 안 가르쳐 주더라구요. 그냥 집안을 통해서 아는 사람이라고만 말했어요.”
“흐음…….”
니샤의 대답에 캔커피를 홀짝이던 조사관, 리키가 미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씨 일가에 저런 인재가 숨겨져 있었던가…….’
만약 적당히 궁술이 뛰어난 사람이 왔다면 그러려니 했겠지만, 저 실눈의 청년이 보여주는 재능은 그와 차원이 달랐다.
심상 투영기라는 불법 도구를 사용한 대상을 정확히 찾아내는 관찰력과 몽환의 마력이 사용된 까다로운 보안장치를 가볍게 해제해내는 실력.
거기에 마법이나 주술, 인챈트 등 여러 기술에 지식을 가지고 있는지 범인들이 온갖 기를 쓰며 숨겨둔 물건을 당연하다는 듯이 찾아냈다.
‘저 녀석이 없었으면 이번에 이만큼 잡아내지도…… 아니, 아예 시작도 못 했을지도 모르겠네.’
오늘 붙잡은 모리스까지 포함하여 지난 사흘간 체포한 A급 범죄자들만 총 24명.
여기에 그들과 같이 다른 범죄를 저질러온 공범들을 포함한다면 머릿수가 백 명을 훌쩍 넘겼는데 몇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큰 성과였다.
‘자세를 보니 싸움도 못 하는 것 같지는 않고…… 정말 정체가 뭘까?’
뭔가 그럴싸한 신분이 없을지 리키가 고민하던 그때.
“제 생각에는.”
다른 곳의 조사를 마치고 돌아온 커다란 덩치의 흑인 사내, 벤 조사관이 담담히 이야기했다.
“원견사의 새로운 제자가 아닐까 싶습니다.”
벤의 이야기에 세 조사관이 서로를 바라보다가 이내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조금이라도 어설픈 부분이 보였다면 설마, 라고 했겠지만 며칠 동안 옆에서 봐온 모습을 보니 충분히 가능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선우 저 녀석이 엄청 깍듯하게 대하긴 했지.”
“그분의 제자라면 저 안목도 충분히 설명이 되고요.”
“확실히 그럴싸하네.”
오히려 원견사의 제자 말고는 더 그럴싸한 신분이 없다.
상대가 누구인지 어렴풋이 짐작하게 된 조사관들은 새삼스레 이세훈을 다시 보게 되었다.
정확히 몇 살일지는 몰라도 많아 봐야 2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데 완등자의 제자라니. 지금은 몰라도 사실상 S급까지는 확정된 것이나 다름없으리라.
“나중에 조사관에 들어올까?”
“그럴 성격으로는 안 보이는데요.”
“혹시 모르지. 생각은 있을지.”
“제 생각에는 안 올 것 같습니다.”
네 명의 조사관들이 한창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모든 조사가 끝이 났고, 하선우가 그들에게 다가갔다.
“다 끝났으니 이만 돌아가시죠.”
“알았어. 그럼 게이트부터…….”
조사관들이 아공간 포켓에서 장치를 꺼내 능숙하게 설치했고, 잠시 후 마석까지 끼워 넣자 간이형 게이트가 단숨에 활성화되었다.
후웅!
게이트를 넘어서자 단숨에 유럽지부의 전용 터미널로 들어섰고, 조사관들이 한숨을 내쉬며 무장하고 있던 검은 슈트를 해제하고 정장 차림으로 돌아갔다.
“고든이랑 드와이트가 술집 잡아둔다고 했는데 자네는 어떻게 할 건가?”
“저는 급한 일부터 처리해둔 다음에 생각해 보겠습니다.”
“거참. 내일부터 하면 될걸…….”
예나 지금이나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하선우의 모습에 드와이트가 질린 표정을 짓다가 문득 뒤쪽을 바라보았다.
주변을 차근차근 훑어보는 실눈의 청년. 그 모습에 드와이트가 혹시나 싶은 마음에 물었다.
“그럼 저 친구는? 이번이 마지막이니까 한잔하고 싶…….”
“죄송하지만 그건 좀 힘들 것 같습니다.”
드와이트의 말이 다 이어지기도 전에 하선우가 단호하게 잘라냈다.
“이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저 때문에 없는 시간을 만들어서 오신 분이라 용건이 끝나는 즉시 돌아가셔야 됩니다.”
“……쩝. 알았어. 그럼 우리는 먼저 가서 마시고 있을게.”
드와이트를 비롯한 조사관들이 손을 흔들거나 목례를 하며 자리를 떠났고,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세훈이 슬쩍 웃었다.
“너무 과보호 아닙니까?”
“……쓸데없는 접촉은 없는 게 좋다고 하셨잖습니까.”
“뭐. 그랬기는 했죠.”
멀어지는 조사관들을 바라보며 이세훈이 자연스레 자신의 볼을 만지작거렸다.
‘솔직히 한 명 정도는 알아볼 줄 알았는데 말이야.’
이전에 블랙 암즈에 갔을 때 에리카가 자신에게 걸어줬던 변장술.
이번 기회에 연습도 해볼 겸 재료를 구해서 시도해 봤는데 생각 이상으로 잘 먹힌 것이다.
‘기존 술식에 몽환의 마력을 섞어서 쓴 게 잘 먹혔나…… 조금만 더 가다듬으면 꽤 쓸 만할지도.’
이세훈이 가죽으로 만들어진 가짜 얼굴을 계속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 하선우가 주변에 남은 이들이 없는 것을 확인한 다음 물었다.
“그런데…… 이걸로 괜찮으시겠습니까?”
“어떤 게요?”
“이번 일로 어느 정도 타격이야 있겠지만 그리 크지 않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협회 입장에서는 만마전과 간접적으로나마 거래를 한 변절자들을 대거 체포했기에 대외적으로나 내부로나 좋게 흘러가고 있지만, 이세훈은 조금 애매했다.
구매자들 모두 서약서로 입막음을 당해 판매자에 대한 정보가 철저하게 차단되어 있었고 그와 관련된 증거들 역시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단서가 하나도 발견되지 않은 건 너무 아쉽군.’
이번에 이렇게 한 번 소탕 작전이 벌어져 자연스레 바르무트 가문 역시 더욱더 조심스럽게 움직이게 될 터.
무슨 방법을 쓰는 것이 좋을지 하선우가 고민하던 그때.
“아, 뭐. 상관없어요.”
이세훈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어차피 이걸로 한 방에 꺾을 수 있을 거란 생각도 안 했고, 지금이 딱 원하는 상황이거든요.”
이세훈의 설명에 하선우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제대로 타격을 못 준 게 원하던 상황이라니. 그건 또 무슨 말인가.
그런 하선우의 시선에 이세훈이 담담하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조사관님도 아시겠지만 이번에 잡은 놈들은 사실상 버림패예요. 안 잡히면 좋고, 잡혀도 문제는 없는 정도죠.”
“예…….”
“근데 문제가 없다는 거지 안 아깝다는 뜻은 아니거든요.”
어차피 잡혀갈 녀석들이라면 진작 더 과격하게 써먹어서 한탕 했을 텐데. 오랫동안 투자해 온 바르무트 가문이라면 충분히 그런 아쉬움이 생길 수도 있다.
“그래서 아마 이번 소탕 작전이 퍼지면…… 남은 버림패들을 조금 과감하게 쓰려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게 제 생각이에요.”
“그건…… 사숙을 노린다는 뜻입니까?”
하선우의 물음에 이세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죠. 아니면 다른 곳일 수도 있고. 아무튼 중요한 건 그 버림패를 쓰는 순간인데…… 아무리 그래도 그냥 냅다 휙 던지진 않을 거 같거든요. 그쵸?”
“음…… 확실히 그건 그렇겠죠.”
말이 버림패지 이번에 체포한 이들 역시 각 국가에서는 그럭저럭 알아주는 중견 길드장이거나 실력을 인정받은 베테랑 영웅들.
그런 이들의 전력을 사용할 수 있는 기회라면 철두철미하게 상황을 만들어서 사용할 가능성이 크리라.
“그래서 감독을 맡은 굵직한 녀석이 한두 명은 오지 않을까 싶은데…… 그 녀석을 노려보려고요.”
그 정도면 바르무트는 물론 환락가와도 깊게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르니 잘만하면 많은 정보를 얻어낼 수 있을 것이다.
이세훈의 설명을 모두 들은 하선우는 살짝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이전에도 느꼈지만…… 자신이 위험할지도 모르는 상황에 전혀 두려움이 없어.’
마치 이런 상황 자체가 익숙한 것 같은 모습. 이것도 재능이라 봐야 할지 하선우가 생각에 잠기던 그때.
“아. 다 왔네요.”
두 사람이 게이트 앞에 도착했다.
“그럼 가볼게요.”
“……예.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방금까지 하던 생각을 떨쳐낸 하선우가 고개를 꾸벅였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세훈이 한 가지를 떠올리며 이야기했다.
“아, 그리고 챙겨줘서 고마워요.”
“…….”
이세훈의 이야기에 하선우의 표정이 살짝 묘하게 변하더니 이내 한숨을 내쉬며 이야기했다.
“다 쓰시면 꼭 파기해 주십시오.”
“걱정마세요. 그럼 다음에 또 봅시다! 오늘은 좀 쉬시고!”
경쾌하게 인사한 이세훈이 게이트 너머로 사라졌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하선우도 몸을 돌려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일단 뭘 먼저 처리해야 하나…….”
물론 집이 아니라 사무실을 향해.
* * *
하선우와 헤어지고 유럽의 아공간 터미널에 도착한 뒤.
이세훈은 바로 바벨로 향하는 대신 몇 군데를 거쳐 얼굴과 복장, 체형과 자세를 교정하며 행적을 뒤섞었다.
그리고 교직원으로 위장하여 기숙사로 들어오고 나서야 본래의 얼굴로 돌아오며 기숙실로 도착했다.
“후우…… 뻐근하네.”
오는 길에 전신을 너무 바꾸는 바람에 얼굴은 물론이고 온몸이 삐걱거린다.
잠시 스트레칭을 하면서 육체를 조정한 이세훈은 이어서 화장실 거울 앞으로 가 눈을 살폈다.
“흐음…… 좀 많이 쓰긴 했나.”
희미하게 보랏빛이 서린 두 눈동자.
몽환안을 해제한 상태인데도 그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이었는데 희미하지만 새하얀 부분, 공막을 침범하려는 기미도 보였다.
‘여기서 2시간 정도 더 쓰면 그땐 진짜 위험하겠는데.’
이번에 이세훈이 굳이 직접 나선 것은 믿을 만한 사람이 없어서 가장 크기도 하지만 겸사겸사 몽환안의 능력을 적극적으로 실험해 보려는 생각도 있었다.
그리고 지난 사흘간 여러 방면으로 사용해 본 결과 그럭저럭 견적이 나왔는데 간단히 말하자면 투안보다 조금 더 까다로운 정도였다.
‘다른 녀석들은 신체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해서 위험도가 더 커지겠지만 나는 다르단 말이지.’
몽환안의 부작용은 오랜 사용으로 인해 자신의 진짜 눈을 꿈과 혼동하게 되면서 사라지게 만드는 것.
이 감각이 언제 어떻게 찾아올지 모르기 때문에 상당히 위협적이었는데 이세훈에 한해서는 그런 문제가 없었다.
자신의 육체에 대한 완벽한 이해도. 영연신마법을 단련하면서 쌓아 올린 경험이 두 눈을 확실하게 구분시켜줬기 때문이다.
‘그래도 너무 오래 쓰면 아예 꿈으로 치환되어 버리니까 앞으로도 조심해야겠어.’
몽환안에 대한 심층적인 분석을 끝낸 이세훈은 그대로 양쪽 눈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잠시 숨을 고르며 머릿속의 망치를 그려냈고.
카앙!!
두 눈알을 있는 힘껏 후려쳤다.
“으음…….”
한껏 지친 눈동자에서 느껴지는 짜릿한 통증.
고무볼이 터지기 직전까지 짓눌렸다가 겨우 돌아온 듯한 그 아찔한 감각과 함께 이세훈이 손을 떼어내며 다시 거울을 보았다.
보랏빛이 사라진 대신 사방으로 실핏줄이 터진 눈.
그 흉흉하기 그지없는 모습에 이세훈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음음. 이렇게 하면 4시간은 더 쓰겠어.’
눈 상태를 모두 점검한 이세훈은 이내 거실로 나가 아공간 포켓에서 한 물건을 꺼냈다.
우우웅
주홍빛과 보랏빛이 뒤섞인 몽환적인 구슬. 그 형태를 살피던 이세훈은 곧장 정보창을 펼쳐보았다.
[심상 투영기]
[등급 : 영웅] [품질 : 상]
특수한 광석을 이용하여 만들어낸 명상용 도구.
사용자의 심상을 한 단계 강화하여 꿈으로 투영합니다. 단, 위 효과를 사용할 때마다 내구도가 영구적으로 감소합니다.
*강화된 심상을 투영합니다. 단 그 경지가 높을수록 내구도의 소모율이 높아집니다.
‘그 고집불통이 증거품까지 빼돌려주고…… 세상 참 오래 살고 볼 일이야.’
물론 똑같은 심상 투영기를 수십 개나 얻었기에 그런 것도 있지만, 회귀 전의 하선우였다면 절대로 내주지 않았을 것이다.
속으로 피식 웃은 이세훈은 다시금 심상 투영기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흐음.”
겉으로나 정보창으로나 크게 문제가 없어 보이는 물건. 하지만 이세훈은 여기에 어떤 함정이 숨겨져 있는지 이미 확인한 상태였다.
‘여기였던가…….’
다른 심상 투영기를 살피면서 발견한 ‘틈’.
눈으로 제대로 보이지 않을 만큼 그 희미한 구멍에 이세훈이 검지를 가져다 댄 다음 몽환의 마력을 살짝 담은 채 조심스레 빼냈다.
스스스
그러자 구멍의 안쪽에서 보랏빛의 얇은 실 같은 것이 빠져나왔고, 심상 투영기의 겉모습도 급격히 변하기 시작했다.
주홍빛과 보랏빛이 혼탁하게 뒤섞인 채 마치 심연과도 같은 모습을 풍기는 구슬. 그 모습을 본 이세훈은 곧장 정보창을 읽어보았다.
[마의 거울]
[등급 : 영웅] [품질 : 중상]
특수한 광석을 이용하여 만들어낸 명상용 도구.
마기의 힘으로 강화된 자신의 모습을 투영해서 볼 수 있습니다. 단 위 효과를 사용할 때마다 내구도가 영구적으로 감소하며 희미한 충동이 생겨나게 됩니다.
*마기로 강화된 모습을 투영합니다. 그 힘이 강할수록 내구도의 소모율이 높아집니다.
*장시간 사용할 경우 마기를 향한 갈망이 생겨납니다.
“설마 마기를 섞어 넣고 몽환의 마력으로 눈속임을 할 줄이야…….”
마의 거울을 사용한 이들은 자신들이 아직 일깨우지 못한 재능을 토대로 강해진 모습을 보여준다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이 물건은 어디까지나 마인이 된 모습을 비추어줬을 뿐. 그걸 몽환의 마력이 교묘하게 그들이 원하는 형태의 ‘꿈’으로 치환시켜 보여준 것이다.
‘몽환의 마력을 이 정도로 다루는 기술이라면…… 분명히 몽환마한테서 기술을 받아온 거겠지.’
오랜 시간 동안 성장이 정체되어 실의에 빠진 영웅들을 타락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듯한 계획.
그 내용에 이세훈이 턱을 쓰다듬었다.
‘노리는 대상이야 흔해 빠졌는데…… 중요한 건 그놈들을 타락시켜서 어디다 써먹느냐는 거네.’
몽환마의 성격상 S급도 못된 영웅 하나 꼬드기겠다고 이렇게 일을 벌일 리가 없다.
이세훈이 과거의 기억을 되짚어가며 고민하던 그때.
우웅
주머니에서 울리는 진동. 그에 휴대폰을 보자 염성하에게서 온 메시지가 도착했다.
[할 일 없으면 나랑 대련해라. 사부님이 보고 싶어 하신다.] - 염성하
“대련인가…….”
받아들일지 말지 잠시 고민하던 이세훈은 이내 결정을 내리며 어디로 가면 되는지 물었다.
[신체제어학 강의실] - 염성하
“음?”
염성하의 답장에 이세훈이 살짝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당연히 이전에 갔었던 프라이빗 트레이닝실이나 다른 대련장일 줄 알았는데 설마 신체제어학 강의실이라니.
‘염진현이 마광수랑도 안면이 있었나.’
생각해 보면 두 사람 모두 초창기부터 활동한 데다 같은 나라 출신이니 이상할 것도 없다.
자리에서 일어선 이세훈은 곧장 신체제어학 강의실로 향했다.
끼이익
문을 열자 마광수와 마주 보고 앉아있는 염 씨 두 명이 보였고, 이세훈이 곧장 그 곁으로 다가갔다.
“기다리셨…….”
막 인사를 꺼내려던 그때. 이세훈의 눈에 갑작스레 이질적인 감각이 느껴졌다.
마치 어디론가 끌려가는 듯한 충동.
몸이 보내오는 그 본능적인 경고에 이세훈은 회귀 전의 경험을 토대로 곧장 몽환안을 발동했고.
‘……과연. 이쪽이었구만.’
염진현의 전신에 뿌리내린 몽환의 마력을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