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가 다 만들어줌 157화
새카맣게 물든 시야.
이번에도 눈을 감고 있었는가 싶었지만 아래를 내려다보니 몸이 선명하게 보였다.
이전과 확실히 다른 상황에 이세훈은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과거의 기억이라기보다는…… 그 전 단계인가.’
인지하지 못하는 기억조차 담겨 있는 잠재의식.
자신이 서 있는 곳이 그 경계선이라는 것을 이세훈이 알아차린 순간.
쿠구구궁!
거대한 진동과 함께 출렁이기 시작한 어둠.
갑자기 요동치는 잠재의식에 이세훈이 경계하고 있을 때. 어둠이 갈라지며 천장과 벽이 솟구쳤다.
쿠웅!
퍼즐이 맞춰지듯 사방에서 나타난 풍경들이 맞물렸고 이세훈의 몸이 자연스럽게 그 위에 올라섰다.
안에서 폭탄이라도 몇 번 터진 것처럼 사방이 그을리고 균열이 간 허름한 대장간. 그 익숙한 광경에 이세훈이 바로 옆에 있는 탁자를 손으로 쓸었다.
“오랜만이네…….”
회귀 전 연합군에 본격적으로 합류하기 전까지 사용했었던 공방.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그 풍경에 이세훈은 자신도 모르게 감정이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잠재의식이라 그런가……. 관련된 감정 같은 게 쉽게 밀려오는 느낌이야.’
본래는 기억을 떠올리고 그것을 인지할 때까지 잡다한 감정들이 깎여져 나가지만, 지금은 잠재의식의 경계에 서 있다 보니 그것이 여과 없이 느껴진다.
간단히 비유하자면 정수기의 필터가 사라진 상황.
전신에 밀려오는 감정에 이세훈이 쓴웃음을 지으며 공방을 세세히 살폈다.
‘상태를 보니 허물기 직전인 것 같은데…… 이게 갑자기 왜 나타난 거지?’
난생 처음 겪는 상황인지라 이세훈이 아리송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다시 한번 주변의 풍경에 변화가 생겨났다.
화르르륵!
앞쪽의 화로에서 피어오르는 보랏빛 불꽃. 그리고 안쪽에는 한 주괴가 달궈지고 있었는데 그 모습에 이세훈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마…….’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생각에 이세훈이 반신반의하면서도 화로의 앞으로 다가갔다.
우웅!
멀리서 봤을 때는 그냥 보랏빛으로 보였지만 가까이서 보니 화로 안쪽의 불에는 검은 글자 같은 것들이 사방에서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 모습에 이세훈은 깊게 생각할 것도 없이 화로 옆에 놓인 집게로 안에서 달궈지고 있던 주괴를 꺼내 모루 위에 올렸다.
화르륵
보랏빛 불꽃에 휩싸인 주괴.
수많은 글자가 뒤엉켜져서 만들어진 그 독특한 형태에 이세훈이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그래. 날로는 못 먹는다 이거구만.”
책을 한 번 읽었다고 해서 거기에 적힌 정보를 모두 기억하고 제대로 이해하리란 보장이 없듯, 주작이 압축한 정보 역시 마찬가지였다.
정보를 제대로 기억하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가공하는 과정이 필요한 법. 그리고 이세훈의 잠재의식은 그것을 가장 익숙한 형태로 준비해 준 것이다.
‘진짜 뼛속까지 대장장이구만.’
회귀하고 여러 재능을 깨우치긴 했지만, 역시 근본은 대장장이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깨달은 이세훈은 그대로 양쪽 소매를 걷어붙이면서 허공에 손을 움켜쥐었다.
꽈악
손에 쥐어진 붉은 망치.
사부에게 받은 망치이자 가장 익숙한 잔화의 망치를 만들어낸 이세훈은 곧장 모루에 올려진 정보의 주괴를 내려다보았다.
‘크게 다를 건 없겠네.’
배열을 가다듬고 고르게 배치한다. 단조의 정석을 떠올리며 이세훈이 힘차게 망치를 휘둘렀다.
카앙! 카앙!
무분별하게 휘몰아치던 글귀들이 망치질에 의해 고르게 정렬된 순간. 빈 공간이 압축되듯이 주괴의 크기가 줄어들었다.
그 모습을 살핀 이세훈은 다시금 주괴를 화로의 안에다 집어넣어 가열시켰다.
화르륵!
불꽃에 떠돌아다니는 글자들이 압축된 주괴의 겉에 달라붙어 다시금 부풀어 오른다.
그 모습을 확인한 이세훈은 다시 주괴를 꺼내 모루에 올려놓은 다음 망치를 휘둘렀다.
카앙! 카앙!
불로 달구고, 망치로 때린다.
광석을 제련하는 게 아니라 정보를 제련하는 것이기에 조금 어색할 때도 있었지만, 이세훈은 금방 요령을 잡아가며 배열을 다잡았다.
그렇게 시계도 없는 공방 속에서 쉴 새 없이 작업을 반복하던 그때.
우웅!
글자들이 떠다니며 혼탁하게 변했던 화로의 불꽃이 순수한 보랏빛으로 변했고, 그 모습을 본 이세훈은 자신이 완성한 물건을 내려다보았다.
단조를 거듭하여 단검의 날로 벼려진 주괴.
얼마나 압축되었는지 처음과 다르게 사이의 빈틈이 없어 새카맣게 보일 정도였다.
“후우…….”
잠재의식의 위인만큼 땀이 나거나 몸이 땡기는 일은 없었지만 대신 정신력이 많이 소모되었는지 나른함이 밀려왔다.
뺨을 가볍게 두들기며 풀어지는 정신을 바짝 조인 이세훈은 단검의 날을 집어 들었다.
“이다음이야 뭐…….”
이제는 익숙한 일이었기에 이세훈은 곧장 단검의 날을 자신의 심장에 찔러넣었다.
스스스
물에 녹아드는 잉크처럼 단검의 날이 저항 없이 스며들었고, 심장이 펌프질하며 그것을 전신으로 퍼뜨렸다.
그리고 온몸에 방대한 정보가 녹아든 그 순간.
“미친 새끼야!!!”
우렁찬 고함과 함께 이세훈의 몸이 대장간 한쪽으로 튕겨져 나갔다.
쿠당탕!!
탁자와 함께 벽면에 처박혔다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몸. 온몸에서 느껴지는 격통과 갑작스러운 상황에 이세훈이 눈매를 찌푸리던 그때.
꽈악!
왼손이 재빠르게 바닥에 떨어진 장검을 움켜쥐었다.
파앙!
마력을 머금은 장검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내던져졌고 이어서 오른손에 쥐어진 망치를 꽉 움켜쥐며 침입자를 향해 달려든다.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움직이는 몸에 이세훈이 깜짝 놀라면서도 금방 상황을 파악했다.
‘기억?’
주작이 압축해 준 정보를 원활하게 받아들이려고 사용했던 인연석. 그 안에 담긴 기억이 뒤늦게 발현된 것이다.
‘그럼 지금 습격한 건 누구지?’
과거에 이랬던 적이 있었던가. 이세훈이 흐릿한 기억을 되새기는 사이 두 눈이 먼지로 가려진 앞쪽으로 향했고.
“얼씨구.”
이쪽을 사납게 노려보는 푸른색 눈동자가 보였다.
【Reflection】
카아앙!!!
귀가 찢어질 듯한 굉음과 함께 앞서 내던진 장검이 산산조각 나며 사방으로 흩뿌려졌고, 막 휘두르던 망치가 일시정지를 누른 것처럼 뚝 하고 멈췄다.
그리고 주변을 자욱하게 가린 먼지가 완전히 가라앉으며 습격한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깝네. 더 휘둘렀으면 오른손이랑 같이 작살 났을 텐데.”
어깨까지 오는 은발에 흉흉하게 빛나는 푸른색 눈동자. 그리고 전신을 꽁꽁 싸매듯이 가리고 있는 검은 가죽 자켓에 라이더 슈트.
자신을 한심스럽게 바라보는 루이제, 회귀 전 폭견의 모습에 이세훈이 의외인 표정을 지었다.
‘얘가 온 거면 몇 번 없는데.’
폭견과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건 연합에 합류한 뒤라 공방에 찾아온 적은 몇 번 없었다.
조금씩 떠오르려는 기억에 이세훈이 집중하는 동안 상황은 계속해서 흘러갔다.
“오자마자 왜 지랄이야?”
화가 잔뜩 난 목소리가 입에서 나오자 폭견이 삐딱하게 선 채로 올려다보았다.
“그건 내가 할 말인데.”
“뭐?”
“그렇게 뒤지고 싶으면 나한테 죽여달라고 하던가. 왜 여기서 궁상맞게 혼자서 자살을 하고 지랄이냐고.”
이건 또 무슨 헛소리인가. 당황하던 이세훈의 머릿속에 벼락처럼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아. 그때인가.’
만마전과의 전쟁이 시작되기 전이자 폭견과 통성명을 하고 조금씩 거래하기 시작했던 초창기.
즉, 당시 서로에 대해서 아는 게 별로 없어 상당히 어색하던 시기였고.
“자살? 내가 언제?”
“방금 장검으로 심장 찌르려고 했었잖아.”
영연신마법이나 마혈기에 대해서도 전혀 모르던 시절이었다.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그냥 기술 연습한 거야.”
“……심장을 칼로 쑤셔대는 기술이 있다고?”
황당함을 넘어서 의심스럽게 바라보는 폭견. 그 시선에 자연스레 삐딱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캐스팅 대신 소리를 질러대면서 마법을 쓰는 양반도 있는데. 없을 건 뭐야.”
“…….”
폭견의 눈매가 차갑게 가라앉는다 싶더니 곧장 주변의 마력이 움직였다.
서걱!
간발의 차로 머리끝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의 칼날. 멍하니 있었으면 코가 썰려 나갔을 그 섬뜩한 일격에 이세훈의 몸이 반사적으로 망치를 휘둘렀다.
카앙!
하지만 망치는 미리 예상이라도 한 듯 투명한 방벽에 가로막혔고, 그 사이 폭견의 검은 워커가 정강이를 힘껏 걷어찼다.
빠악!
마력으로 강화까지 했는지 상당히 살벌한 소리. 하지만 과거의 자신은 몸을 움츠리기는커녕 신음 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그 모습에 폭견이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사나운 표정으로 올려다보았다.
“한 번만 더 그따위로 입 놀리면 아가리를 찢어버릴 줄 알아.”
단순한 경고가 아니라 정말로 하려는 의지가 가득해 보이는 협박. 1인칭으로 그 모습을 본 이세훈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야…… 이런 모습은 진짜 오랜만인데.’
폭견의 성격이 워낙 개판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회귀 직전, 인연레벨이 Lv.5일 때는 투덜거려도 나름의 미운정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느껴지는 것이라고는 짜증과 적의뿐. 그야말로 남이나 다름없는 사이인 것이다.
‘내가 이때 뭐라고 했었더라…….’
서로 서먹하던 시절이니까 그래도 적당히 예의 바르게 말하지 않았을까. 이세훈이 기억을 되새기는 사이 과거의 자신이 대답했다.
“찢어봐. 할 수 있으면.”
“…….”
다시 한번 분위기가 흉흉해졌고, 폭견의 두 눈이 푸른색으로 차갑게 빛나며 감정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그리고 그렇게 한참 눈싸움을 하는가 싶더니 폭견의 눈빛이 사그라들며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됐다 됐어. 준비한 물건이나 내놔.”
신경질적으로 까딱이는 손에 과거의 자신이 불만스럽게 쳐다보다가 공방 구석에 놔둔 철제가방을 집어 던졌다.
탁!
그것을 가볍게 낚아챈 폭견은 잠금장치를 풀고 안쪽을 힐끔 살핀 다음에 물었다.
“사용법은?”
“동력로에 집어넣기만 하면 돼. 그다음은 네 언령으로 알아서 하는 거고.”
“흐음. 좋아. 불량이면 죽여 버릴 거니까 각오해.”
이번에도 농담하듯이 가볍게 이야기하지만 진짜로 죽일 의지가 선명하게 느껴진다.
루이제에게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그 모습에 이세훈이 신기하게 바라보았고 과거의 자신이 까칠하게 대답했다.
“불량 아니면 평생 오지마. 너 같은 놈이랑 거래하기 싫으니까.”
“……쯧.”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혀를 찬 폭견이 그대로 가방을 챙겨서 공방 밖으로 걸어간다.
그렇게 과거의 기억이 막 끊어질 것처럼 흘러가던 그 순간.
화르륵
가슴팍에서 보랏빛 불꽃이 피어올랐다.
‘이건…….’
이전에 빙견과의 기억을 봤을 때도 일어났던 형상. 몸의 제어권이 돌아온 것을 확인한 이세훈은 어떻게 된 건지 분석할 틈도 없이 반사적으로 소리쳤다.
“잠깐!”
그 부름에 밖으로 나가던 폭견이 멈칫하더니 그대로 뒤돌아보았다.
“왜?”
살짝 짜증 나 있는 표정에 이세훈이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일단 몸이 움직여지길래 뭐라도 해보려고 부르긴 했는데 이거다 하고 떠오르는 게 없었다.
‘뭔가 물어볼 만한 게 없나……?’
이때 당시 폭견이 주로 하던 일은 『여명』과 관련된 시설을 찾아내고 박살 내는 것. 주시자의 뒤를 캐내는 일인 만큼 양지나 음지나 움직임을 면밀하게 파악하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순간. 혈류가 요동치는 감각과 함께 이세훈의 머릿속으로 한 가지 생각이 번뜩였다.
“황혼주괴를 지속적으로 매입하는 집단에 대해서 아는 거 있어?”
에리카에게 건네받은 자료에 의하면 바르무트 가문은 오래전부터 여러 루트를 통해 황혼주괴를 매입해왔으며 최근 들어 그 양을 늘리기 시작했다.
그 자체만 놓고 보면 그리 수상하다고 할 만한 것이 없었지만 중요한 것은 그 시기였다.
‘모든 세력이 변화하는 순간에 가장 먼저 보인 움직이라면, 이유가 없지는 않겠지.’
크게 겉으로 드러나든 드러나지 않든 충분히 단서가 될 수 있다.
이세훈의 물음에 폭견이 가만히 바라보더니 이내 눈매를 가늘게 떴다.
“너도 뭐 들은 거 있냐?”
“있었으면 너한테 물어보지도 않았겠지.”
이세훈의 대답에 폭견이 잠시 기억을 가다듬는가 싶더니 입을 열었다.
“요즘에는 없지만 이전…… 한 10년 전까지는 꽤 있었지. 뭔가 유행하듯이 팔리기는 했는데…… 생각해 보니 이상하네.”
“뭐가?”
“그렇게 유행한 거치고 별로 이거다 싶은 물건이 없더라고. 게다가 그 황혼주괴라는 것도 요즘에는 잘 안 나오는 것 같고.”
소리 없이 유행하고, 소리 없이 사라진 물건.
그 이야기에 이세훈이 미묘한 표정을 짓던 그때.
“아. 그러고 보니 그게 있었네.”
무언가 떠올린 폭견이 이세훈을 바라보았다.
“너 염화문 알지? 광견 그 새끼한테 멸문당한 곳.”
“……거긴 왜?”
예상치 못한 언급에 이세훈이 의아하게 바라보자 폭견이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 녀석들도 매입했었거든. 멸문하기 전에.”
* * *
[깨어나는 꿈이 발동되었습니다]
화악!
단숨에 일깨워지는 정신. 현실로 돌아온 이세훈은 재빠르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네, 네놈…… 갑자기 무슨 짓을…….]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당황한 주작. 그 모습에 이세훈은 따로 설명하는 대신 폭견이 마지막으로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염화문이 황혼주괴를 매입했었단 말이지…….’
지금의 염화문주는 권력을 위해서라면 더러운 짓도 서슴지 않는 인물. 그렇다면 더욱더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쪽도 한번 찔러봐야 하나……? 근데 어떻게 한다…….’
좋은 방법이 있을지 이세훈이 머리를 굴리던 그때.
우웅
주머니에서 울리는 진동. 그에 이세훈이 휴대폰을 꺼내자 화면에 염성하의 이름이 떠올랐다.
‘……타이밍 한 번 예술이네.’
이쪽의 생각이 전달되기라고 한 걸까. 그런 우스운 생각을 하며 이세훈이 전화를 받았다.
“뭔데?”
-내일 시간 있나?
“왜?”
이세훈의 물음에 휴대폰 너머로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더니 담담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부님이 널 뵙고 싶어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