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가 다 만들어줌 155화
만마전의 바벨 습격 사건이 일어나고 3주.
소란스럽던 내부도 이제는 완전히 가라앉았고 생도들은 이전과 같이, 어떤 면에서는 더욱 열심히 학업에 집중했다.
바벨이 새롭게 추진하는 UD그룹과 순례교의 협력.
아직 논의 중이기에 어떻게 적용될지는 미지수지만 지금보다 영향력이 커진다는 것은 명확하다.
‘원래 뭐든 초기에 보상을 퍼주는 법이지.’
‘학부수석, 아니, 하다못해 상위권에 들어가서 UD그룹한테 장학생으로 선정된다면…….’
세 완등자가 함께 운영하게 될 바벨.
그 누구도 생각해 본 적 없는 휘황찬란한 미래에 졸업만 목표로 하던 생도들이 의욕을 불태웠고 자연스레 바벨 전체 분위기가 그 뒤를 따라갔다.
그리고 침체기를 벗어나 전성기를 맞이할 것이라 평가받는 보르시파의 제련학부 본관.
“다시.”
싸늘한 목소리가 강의실을 채웠다.
“예, 예!”
여러 색이 뒤섞인 광물을 들고 나갔던 생도가 재빠르게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고, 앞에 서 있던 헬레나는 차가운 눈으로 강의실을 바라보았다.
“몇 번이고 말하지만 무작정 섞는다고 되는 게 아니다. 각 광물의 배열을 이해하고 그것을 가장 효율적인 형태로 짜 맞춰서 합금으로 만드는 게 이 수업의 목적이다.”
테이블에 놓인 다섯 가지 색상의 광석 중 하나를 집어 든 헬레나가 그것을 곧장 다른 광석에 가져다 댔다.
철퍽─
그러자 희미하게 마력을 뿜어냄과 동시에 두 광석이 서로 섞이며 하나로 합쳐졌고, 그 과정을 세 번 반복했다.
우우웅
다섯 개의 광석이 한데 뒤섞여서 만들어진 초록빛 광석.
그것을 보란 듯이 탁자에 내려놓은 헬레나가 집중하고 있는 1학년 생도들을 둘러보았다.
“어떻게 조합하느냐에 따라 성질은 물론 특성도 천차만별로 변하기 마련. 어떤 제련법을 사용하든 기본이 되는 기술이니 집중해서 하도록.”
“예!”
생도들이 다시금 자신의 앞에 놓인 광물을 이리저리 합치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헬레나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수준이 떨어졌다고 듣기는 했었지만…… 이 정도로 형편없게 변했을 줄이야.’
과거 자신이 교수로 활동하던 시절보다 전체적인 실력이 30%는 떨어졌다.
물론 그렇다 해도 최상위권에 속한 것은 맞지만, 바벨의 위치를 생각한다면 턱없이 부족했다.
‘쓸 만한 녀석들은 모두 불칸 쪽으로 간 건가……. 어쩌면 이번 일로 몇 명 넘어올 수도 있겠군.’
몇 년 동안 풀어진 교육 과정을 손보고 교수진을 보강하여 예산을 더 투자한다면 시간은 조금 걸리더라도 이전 상태로 되돌릴 수 있으리라.
헬레나가 머릿속으로 계획을 점검하고 있을 때. 문득 생도들이 한 곳을 힐끔거리는 것을 발견했다.
우우웅─!
두 손으로 주무를 때마다 실시간으로 색상이 변하는 광석.
다섯 개를 하나하나 맞춰가면서 조정하는 게 아니라 이미 다 합쳐진 것을 실시간으로 배열을 고쳐가며 뒤바꾼다.
현역 대장장이들도 버거워할 만한 기술을 아무렇지 않게 펼치고 있는 이세훈의 모습에 헬레나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이제는 겸손 떨 생각도 없나 보군.’
다른 교수들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매번 수업에 필요한 만큼만 실력을 보였었다고 들었는데 아무래도 저번 사건 이후로 생각이 변한 모양이다.
1학년은 물론 제련학부 전체를 통틀어서 비교할 대상을 찾기 어려운 실력. 그 모습에 다른 생도들이 홀린 듯이 보고 있던 그때.
♬♪♩─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종소리. 강의시간이 끝났음을 확인한 헬레나가 생도들을 바라보았다.
“이번 과제는 오늘 배운 광물의 조합으로 진행할 테니 돌아가서도 차분히 연구해 봐라. 그럼 다음 수업 때 보지.”
짧게 이야기한 헬레나가 먼저 강의실 밖으로 나갔고, 생도들이 주섬주섬 짐을 챙기면서 서로 눈치를 살폈다.
‘아이 씨. 아빠가 어떻게든 친해지라고 했는데…….’
‘근데 저걸 뭐 어떻게 다가가…….’
예전에도 인상이 험악해 다가가기 어려웠는데 요즘은 온몸에서 뭔가 흉흉한 느낌이 새어 나와 더욱 말 붙이기가 어려워졌다.
그렇게 생도들이 밖으로 나가지도 않고 서로 눈치만 보고 있을 때.
스윽
한 소녀가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섰다.
“안녕.”
막 짐을 챙기고 일어나던 이세훈은 강의실까지 찾아온 에리카를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이야?”
“너 만나러.”
이제는 많이 익숙해진 직설적인 화법에 이세훈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만날 일이 있었던가?”
“그냥 이것저것 묻고 싶어서.”
“그래? 뭐, 그럼 나가면서 이야기하자.”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 짐을 챙긴 뒤 밖으로 나섰고, 그 모습에 생도들이 다급히 뒤따르려다가 멈춰 섰다.
“…….”
이세훈의 뒤를 따르면서 말없이 바라보는 에리카의 눈.
그 보랏빛 눈동자에서 느껴지는 압박감에 생도들이 뒤따르지 못한 채 남았고, 본관 건물 밖으로 나온 이세훈이 한숨을 내쉬었다.
“고맙다. 따라붙으면 어쩌나 했는데.”
“별거 아냐.”
담담하게 대답한 에리카는 이내 피곤해 보이는 이세훈을 바라보았다.
“평상시에도 이래?”
“요즘은 뭐, 어딜 가든 저런 상태지.”
양산형 검기 무구가 발표된 이후. 바벨 내에서 이세훈의 입지는 180도로 변했다.
이전에는 실력에 대한 불확실함, 바르무트 가문과 적대할 만큼 거친 언행, 거기에 이노우에와 마이어스라는 걸출한 명문가가 노리고 있다는 사실에 쉽게 접근하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양산형 검기 무구라는 규격 외의 기술을 개발해내자 모두가 위험을 감수해서라도 다가서기 시작한 것이다.
‘하나라도 얻어걸리면 본인들이 명문가가 될 테니 말이야.’
인생 일대의 도박.
당사자들이야 각오를 다지고 접근하는 것이겠지만 그들을 모두 상대해야 하는 이세훈으로서는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우러러 보이는 것까진 좋았는데…… 말까지 거니까 귀찮네.’
회귀 전에 매니저까지 달고 다니는 영웅들을 보고 겉멋이 들었다고 욕했지만, 이렇게 비슷한 일을 겪으니 왜 그런 사람들을 고용했는지 이해가 갔다.
조금 귀찮아지겠다 싶으면 ‘매니저에게 문의하세요’ 하고 가버리면 되니 얼마나 편한가.
‘진짜로 한번 구해봐……?’
자신 대신 잡무를 처리해 줄 성실한 매니저. 그에 대해서 이세훈이 고민하던 그때.
“이거.”
에리카가 아공간 포켓 하나를 건넸다.
“전에 부탁했던 자료들이야.”
“오.”
바르무트 가문과 관련된 자료들.
사소한 정보도 상관없으니 공유해 줄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달라고 했는데 며칠도 안 돼서 준비해 온 것이다.
“양은 어느 정도야?”
“음. 3…….”
“3박스?”
아공간 포켓으로 건네줬으니 그 정도는 되지 않을까. 그런 이세훈의 물음에 에리카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300박스 정도.”
“…….”
박스 크기가 어느 정도일지는 모르겠지만 300박스라면 정말 온갖 사소한 정보까지 모조리 출력한 모양이다.
조금 예상과 다르기는 했지만 그래도 부탁한 그대로였기에 이세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 잘 쓸게.”
“응.”
고개를 짧게 끄덕인 에리카는 조용히 따라 걷다가 물었다.
“술식 해석은 어떻게 되고 있어?”
“아. 그거?”
병문안 때 에리카가 종이로 남기고 간 숙제. 그것을 떠올린 이세훈은 미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음…… 아직은 잘 모르겠더라.”
주술과 관련된 책들도 봐가면서 매일 같이 살펴보고 있지만 아직까지 어떤 효과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게다가 매번 해석을 거칠 때마다 결과가 다르게 나와 어느 쪽이 맞는 길인지 도저히 짐작이 안 가는 것이다.
이세훈의 대답에 에리카는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해석하고 있네.”
“이게?”
“방향을 잘못 잡았다면 같은 해석만 나와. 매번 달라진다는 건 술식의 심상을 제대로 이해한단 거야.”
“흐음…….”
매번 답이 달라지는 것이 오히려 맞게 가고 있는 것이라니. 듣기만 해도 아리송한 이야기에 이세훈이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생각을 털어냈다.
“시간제한은 없지?”
“응.”
“그럼 차근차근 풀어볼게.”
지금 당장은 바르무트를 터는 것이 우선이다. 이세훈의 대답에 에리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잊지만 않으면 돼.”
“그건 걱정 말고…… 근데 어디까지 따라올 거야?”
역까지 따라오는 에리카의 모습에 이세훈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보자 에리카가 주변을 슬쩍 보았다.
“어디까지 가?”
“인챈트학부.”
“그럼 그 앞까지.”
“…….”
태도만 보면 이전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변한 에리카의 모습에 이세훈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마음에 들었다 이건가?’
호의를 표현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자신이 점찍었다고 주변에 알리려는 것 같기도 하다.
검기 양산화 발표 이후 상당히 달라진 에리카의 모습에 이세훈이 잠시 고민하다가 물었다.
“너희 집안은 뭔가 진행하는 프로젝트 없냐?”
“왜?”
질문과 동시에 고개를 돌려 바라보며 묻는 에리카.
마치 이 순간만을 기다린 듯한 모습에 이세훈이 살짝 놀라면서도 대답했다.
“아니, 뭐, 할 만한 게 있으면 한번 같이 해봐도 괜찮지 않나 싶어서. 너한테 도움받은 것도 많잖아.”
“…….”
이세훈의 대답에 에리카가 말없이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정리하는 대로 보여줄게.”
“그래. 뭐 슬슬 시험 기간이니까 시간 나는 대로…….”
“얼마 안 걸릴 거야.”
그 말을 끝으로 에리카가 재빠르게 역 아래로 내려갔고, 잠시 후 하늘 위에서 까마귀 한 마리가 재빠르게 어디론가 날아가기 시작했다.
까악─!
협박이라도 당한 것처럼 바쁘게 날아가는 까마귀. 그 모습에 이세훈이 쓴웃음을 지었다.
“기다리고 있었나 보네…….”
마이어스에게 뒤처지는 게 아닌가 신경 쓰고 있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이다.
그런 에리카의 모습에 이세훈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저쪽은 뭘 꺼내오려나.’
에리카에게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총 두 가지 목적이었다.
첫 번째는 마이어스 가문과 이미 계약했다는 소문을 없애려는 의도.
그리고 두 번째는 이노우에 가문과 연결된 주시자의 ‘계파’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몽환규도에서 봤었던 빙견의 자료. 거기에 이노우에 가문이 주시자랑 정기적으로 교류한다고 했었지.’
정확히 어떤 녀석들과 교류를 하고 있었는지는 적혀 있지 않았지만 어느 정도 짐작되는 녀석들이 있었다.
‘아무래도 『계승』일 가능성이 크려나.’
육체를 개조하여 후대에게 재능과 힘을 고스란히 넘겨줄 수 있는 기술을 연구하는 놈들인 『계승』.
강력한 힘을 지닌 마인들을 개조하여 힘을 계승시키고 마신이 될 수 있는 잠재력을 만들어내는 게 녀석들의 목적이었는데, 그 정체가 들켰을 때 파장이 상당했다.
인류 연합에서 큰 활약을 펼치던 몇몇 영웅들이 녀석들과 거래하여 자식의 재능과 힘을 증폭시켰다는 것이 발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치가 떨리네.’
지금은 전력이 모자라니 써먹어야 한다고 주장하던 녀석들과 당장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녀석들.
결국 만마전과 싸우는 와중에 내부분열로 이어졌는데 인류연합군이 저지른 헛짓거리 중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뽑힐 만큼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어찌 마무리되나 싶었더니 폭견이랑 빙견 그 개새끼들이 갑자기 한 판 붙어 가지고 또 일이 커지고…… 에휴.’
지나간 일인데도 다시 떠올리니 머리가 지끈거리면서 그놈들의 고삐를 확실히 잡아둬야겠다는 다짐이 더욱 굳어진다.
‘빙견…… 그러고 보니 그놈도 조만간 봐야 할 텐데.’
몽환마와 환락가를 공략하려면 아무래도 빙견, 아미르를 이용하는 것이 가장 쓸 만하다.
하지만 회귀 전과 달리 아직은 그리 신용 받지 않는 말단. 제대로 써먹으려면 만나서 의논을 거치는 것이 좋으리라.
‘바르무트랑 몽환마. 갈피는 잡혔는데 쉽지가 않네…….’
이세훈이 생각을 거듭하며 걸음을 옮겼고, 잠시 후 목적지였던 고대인챈트학의 강의실 앞에 도착했다.
“견학하게 해주세요!”
“학점은 없어도 되니까 구경만이라도……!”
문 앞에 옹기종기 모여서 애타게 소리치는 생도들. 그 예상치 못한 광경에 이세훈이 멍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
‘과연…… 이쪽도 인기 폭발이구만.’
설계와 제작을 모두 자신이 지휘했다고 말했기 때문에 주목도가 조금 덜하긴 했지만, 어쨌든 검기 양산화에 레아의 인챈트가 쓰인 것은 사실이다.
그 때문에 인채트학부에서도 비주류강의였던 고대인챈트학에 생도들이 몰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거참…….’
보통 같으면 옳다구나 받아들일 텐데 아무래도 레베카 교수나 레아는 그런 성향은 아닌 모양이다.
혼란스럽기 그지없는 강의실 입구에 이세훈은 잠시 눈매를 매만진 다음에 앞으로 걸어갔다.
툭툭
“누구……?!”
어깨를 두드리는 손길에 뒤돌아보았던 생도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사람 수십 명은 처리하고 온 것 같은 차가운 눈. 거기에 그냥 삐딱하게 서 있을 뿐인데도 온몸이 피칠갑을 한 것처럼 피비린내가 풍겨왔다.
“아니…… 그…… 저…….”
실전이라고는 경험해 본 적 없던 인챈트학부 생도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고, 이상한 분위기를 느끼고 고개를 돌렸던 다른 생도들 역시 비슷하게 변했다.
모든 이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모인 것을 확인한 이세훈은 자신이 광견이라고 머릿속으로 되새기며 입을 열었다.
“전부 꺼져라.”
그렇지 않으면 복부에 창날을 쑤셔주겠다.
적의와 살의가 듬뿍 담긴 경고에 생도들이 혼비백산하며 물러났고, 조용해진 복도를 본 이세훈이 험악하게 만들었던 눈매를 풀었다.
“나참…….”
고개를 가로저은 이세훈은 곧장 굳게 닫혀 있던 문 앞으로 다가가 가볍게 두드렸다.
“나야. 문 열어.”
안쪽에서 인기척이 살짝 느껴지는가 싶더니 잠시 후 문이 살짝 열리며 레아가 고개만 쏙 내밀었다.
“다 갔어?”
“아마도.”
“휴우…… 들어와.”
안도의 한숨을 내쉰 레아가 문을 열어주었고 이세훈은 강의실 안으로 들어섰다.
“…….”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보이는 것은 입구를 겨누고 있는 수십 개의 총구.
자세히 보니 전부 제압용이었는데 방금 밖에 있었던 생도들은 모두 처리할 수 있을 수준이었다.
“질렸나 보네.”
“질렸지. 그것도 엄청.”
철야로 작업할 때보다 다크서클이 더욱 짙어진 레아가 의자에 털썩 앉았다.
“어딜 가든 인채트 좀 가르쳐달라, 같이 작업하자, 좋은 계약이 있다. 거기다 공방은 또 어떻게 알았는지 그 앞에 찾아와서는 명함을 산더미처럼 쌓아두고…….”
머리를 움켜잡으며 중얼거리는 레아의 모습에 이세훈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도 상당히 시달렸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자신보다 만만하게 여겨진 레아가 더 고생한 모양이다.
뭘 어떻게 말해줘야 할지 이세훈이 고민하던 그때. 레아가 고개를 슬쩍 들어 바라보았다.
“후배. 우리 물건 하나만 같이 만들까?”
“어떤 거?”
“특정 단어를 반복해서 말하는 상대를 전기충격으로 지져 버리는 호신용품.”
어딘가 망가진듯한 레아의 모습에 이세훈이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조금만 참아. 조만간 방법을 마련할 테니까.”
“……방법?”
“뭐, 회사 하나 차려서 직원 한 명 고용한 다음에 거기로 다 보내게 하면 되잖아.”
방금까지는 할까 말까 고민이었지만, 레아의 상태를 보니 진지하게 마련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
‘그리고 회귀 전에 쓸 만했던 녀석들도 하나씩 회사 안에다 집어넣으면…… 생각보다 괜찮겠는데?’
이전에는 자신에게 그럴 만한 영향력이나 힘이 없기에 자중했지만, 지금이라면 충분히 괜찮아 보인다.
이세훈이 진지하게 그쪽으로 생각을 검토하던 그때.
“아. 그, 그건 조금 그런데…….”
레아가 당황하며 손을 내저었다.
“뭐야. 나랑 같이 회사 차리기 싫어?”
“아니. 싫은 건 아닌데 조금 이르다고 해야 하나…… 좀 더 차분히 생각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해서.”
시선을 피하며 멋쩍게 이야기하는 레아. 그 모습에 이세훈이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뭔가 이상한데.’
자신이 알던 레아라면 ‘사장님!’ 이라면서 돈이랑 연구비 좀 잘 꽂아달라고 농담을 던져댔을 터.
그런데 이렇게 딱 잘라서 거절하다니.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분 것인가. 예상치 못한 반응에 이세훈이 가만히 바라보다가 물었다.
“이제 유명해졌으니까 나 버리고 딴 놈이랑 계약하려고?”
“……어?”
“그렇게 열과 성의를 다해서 가르쳐줬었는데…… 이렇게 뒤통수를 맞네…….”
씁쓸하게 중얼거리는 이세훈의 모습에 레아가 더욱 당황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조금 더 진지하게 생각해 보자 이거지! 넌 내가 그럴 사람으로 보여?”
“원래는 아니었는데…… 지금은 조금.”
“아냐!!”
이런 대답은 생각지도 못했는지 억울하다는 듯 외치는 레아. 그 모습을 가만히 살피던 이세훈이 이어서 물었다.
“정말 아냐?”
“그래. 진짜 조금만 생각할 시간을 주면…….”
“흐음…… 좋아. 그럼 지금은 그런 걸로 하자.”
고개를 끄덕인 이세후은 옆쪽으로 턱짓을 했다.
“목마르니까 커피 좀 타줘.”
“……싸가지 없는 새끼.”
불만스럽게 투덜거린 레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인챈트로 만들어낸 커피머신을 사용하여 빠르게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세훈이 이전에 있었던 일들을 곱씹었다.
‘이렇게 된 게…… 지난 습격 이후인가?’
생각해 보면 그때도 메시지만 보냈지 병문안을 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 모습에 이세훈은 레아가 겪은 일에 대해서 떠올렸다.
‘인형사한테 납치당하기 직전에 학원장이 돌아와서 살았다고 했었지.’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레아의 태도가 왜 저렇게 바뀌었는지 이세훈이 고민하는 사이 앞쪽에 커피가 놓였다.
“여기 있습니다요. 후배 어르신.”
“땡큐.”
이세훈에게 커피를 가져다준 레아가 자리에 앉으며 자신 몫의 커피를 홀짝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이세훈이 문득 회귀 전에 종종 본 적 있었던 일을 떠올렸고.
“자기한테 안 오면 나나 레베카 교수님부터 죽이겠다고 인형사가 협박해서 그쪽으로 갈지 말지 고민하고 있는 거지?”
“푸흡!!!”
이세훈의 질문에 레베카가 마시던 커피를 뿜어냈다.
“커헉! 콜록! 케헥!”
미처 다 뿜어내지 못한 커피가 목구멍을 후려쳐 토할 듯이 기침을 터뜨리는 레아.
자신의 추리가 정확하다고 온몸으로 증명해 주는 레아의 모습에 이세훈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권유할 상대가 잘못됐구만.’
이세훈이 고개를 가로젓는 사이 기침이 가라앉은 레아가 헝클어진 머리를 가다듬을 새도 없이 다급히 고개를 들었다.
“너, 너…… 그걸 어떻게…….”
할머니에게도 비밀로 한 일인데 어떻게 그걸 정확하게 알고 있단 말인가.
자신의 마음을 읽힌 것 같은 상황에 레아가 놀란 얼굴로 바라보았고.
“찍었지.”
“…….”
이세훈의 자신만만한 대답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