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가 다 만들어줌 146화
“진행하게.”
[큭…….]
루트비히의 이야기에 주작이 몸을 부르르 떨더니 이내 마지못해 이세훈의 앞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앞으로 내밀어진 왼손등 위에 올라탄 다음 양 날개로 부드럽게 감쌌다.
화르륵
손등 위에서 타오르기 시작한 주작의 분신. 그리고 그 몸이 완전히 타올라 사라지자 이전처럼 불꽃의 무늬가 새겨졌다.
우웅
붉은색으로 반짝인 문양은 그대로 자연스럽게 몸 안에 스며들 듯이 사라졌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주작과 연결되고 언제든지 불러낼 수 있다는 것이 본능적으로 느껴진다.
이세훈이 그 감각을 곱씹고 있을 때. 루트비히가 주작에 대한 설명을 이어갔다.
“자네가 포획한 녀석이니 필요한 일이 있다면 언제든지 자유롭게 사용하게나. 다만 바벨 밖에서는 본체와의 연결이 약해져서 직접 마력을 소모해야 하니 그 부분은 명심하고.”
“알겠습니다.”
“그러면 이제 남은 건 영약이로군. 생각해둔 건 있는가?”
루트비히의 물음에 이세훈은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영겁환과 작열화. 그리고 암영근이면 될 것 같습니다.”
뛰어난 효능을 지닌 대신 직접 섭취하면 부작용으로 죽을 수도 있을 만큼 위험한 물건들. 그러나 기다렸다는 듯이 나온 목록에 루트비히가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가공해서 먹을 생각인가?”
“예. 주작의 능력을 사용하면 괜찮은 게 나올 것 같아서요.”
주작이라는 귀한 일꾼을 얻었는데 단순하게 써먹으면 아쉽지 않은가.
이세훈의 이야기에 루트비히가 고개를 끄덕이며 허공에 손을 내리그었다.
철컥─
금빛 열쇠 구멍이 열리며 나타난 새하얀 공간 속에서 세 개의 상자가 나란히 떨어졌고 루트비히가 시선을 보냈다.
“확인해 보게나.”
이세훈은 곧장 앞에 놓인 상자를 하나씩 열어보았다.
우웅
첫 번째 상자에서 들어 있던 것은 짙은 보랏빛이 감도는 주먹만 한 구슬로 안쪽에는 새하얀 모래 같은 것이 느릿하게 휘몰아치고 있었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기묘한 흡입력을 느껴지게 만드는 물건. 그 형태를 살핀 이세훈은 곧장 정보창을 살폈다.
[영겁환永劫丸]
[등급 : 영웅] [품질 : 최상]
시간 포식자의 핵을 가공해서 만들어낸 영약.
신경계를 강화하여 모든 감각 능력을 증폭시키고 사고 속도를 증가시켜줍니다.
단, 뇌에 영약의 기운이 스며들 경우 사고 능력에 이상이 생길 수 있으므로 섭취 시 주의가 필요하다.
*모든 감각과 사고 속도를 증가시킵니다.
‘흐음. 꽤 잘 만들었네.’
A+급 몬스터인 시간 포식자의 부산물로 만들어낸 영약.
감각 능력과 사고 속도를 증가시켜주는 특수한 효과를 가지고 있었는데, 효능이 좋을수록 부작용도 커지기 때문에 어지간해서는 잘 쓰이지 않는 물건이었다.
‘다른 것들도 볼까.’
영겁환의 품질을 확인한 이세훈은 이어서 남은 두 상자도 열어서 물건을 확인했다.
잎이 타오르는 불꽃으로 이뤄진 꽃과 공처럼 뭉쳐져 있는 그림자의 뿌리. 그 겉모습을 살핀 이세훈은 두 개의 정보도 마저 살펴보았다.
[작열화灼熱華]
[등급 : 영웅] [품질 : 중상]
끝없이 타오르는 불꽃으로 이뤄진 꽃.
화속성마력이 담긴 물건이나 불꽃에 접촉할 경우 뿌리를 내려 마력과 열기를 빨아들이며 성장한다.
*화속성마력과 열기를 빨아들여 힘을 증폭시킵니다.
*양분에 따라서 잎의 성질이 변화됩니다.
[암영근暗影根]
[등급 : 영웅] [품질 : 최상]
그림자 나무의 숨겨진 뿌리.
암속성마력과 접촉하면 뿌리를 내린 다음 안쪽에 그림자 나무의 씨앗을 심습니다.
순수한 암속성마력으로 이뤄져 있기에 씨앗을 배출하는 즉시 마력으로 변환됩니다.
*암속성마력과 접촉하면 씨앗을 형성합니다.
*씨앗을 형성하는 즉시 순수한 암속성마력으로 변환됩니다.
작열화는 섭취하려다가 반대로 마력을 빼앗기며 체내에서 꽃이 성장해 타죽을 수 있었고, 암영근은 그림자 나무의 씨앗이 급소를 노리기 때문에 재수 없으면 심장에 침식해서 즉사할 수도 있었다.
하나같이 흉흉하기 그지없는 물건들. 하지만 그만큼 내부에 속성 마력이 풍부하게 담겨 있기 때문에 잘만 먹는다면 몸에 좋은 것들이었다.
“위험한 물건들이니 조심하게나.”
“명심하겠습니다.”
물건을 모두 확인한 이세훈이 상자를 닫은 다음 아공간 포켓에 넣었고, 루트비히가 천천히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럼 이걸로 걱정거리도 해결됐으니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해 봐도 되겠군.”
의자에 천천히 몸을 기댄 루트비히가 이세훈을 바라보았다.
“어제 중대발표가 있었네만 혹시 봤는가?”
“예. 류 학과장님이랑 같이 봤습니다.”
“바벨에도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일단 진행은 했네만…… 막상 일을 다 처리하고 나니 다른 사람의 생각이 궁금해지더군.”
쓴웃음을 지은 루트비히가 부드럽게 물었다.
“자네는 이번 협력 체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좋은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바벨에서 진행되는 프로젝트가 다양해질수록 생도들에게도 기회가 많아질 테니까요.”
“그렇군. 그 이외에는 없는가?”
무언가 바라는 대답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원하는 것을 말하라는 것인가.
의도를 명확히 알 수 없는 질문에 이세훈은 잠시 고민하다가 순순히 대답했다.
“어떻게 보면 학원장님 말고도 다른 완등자분들과 만나 뵐 수 있게 됐으니 그것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어째서인가?”
“왜냐하면…….”
오른손 약지에 끼워진 승천제의 반지를 만지작거린 이세훈이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그분들의 힘도 보고 연구할 수 있을 테니까요.”
완등자의 힘을 연구한다.
그 누구도 쉽게 할 수 없는 말이었지만, 이세훈은 당사자 앞에서 거침없이 이야기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루트비히에 한해서는 이런 이야기를 불쾌하게 여길 가능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본인의 권능도 아무렇지 않게 넘겨줬으니까 말이지.’
자신의 힘이 연구당해도 상관없는데 다른 완등자의 힘은 오죽하겠는가. 어쩌면 할 수만 있다면 적극적으로 장려할지도 모를 일이다.
이세훈의 대답에 루트비히가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좋은 기회가 될 수 있겠군. 참고하겠네.”
“감사합니다.”
“이 이야기는 이걸로 됐고…… 아, 그래.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자네 상태가 조금 괜찮아지면 영웅 협회에서 사람이 한 명 찾아갈 걸세.”
“영웅 협회요?”
이세훈의 물음에 루트비히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테러 사건을 조사하는 특무과의 조사관일세.”
루트비히의 이야기에 이세훈의 눈매가 살짝 찌푸려졌다.
‘그 사냥개 새끼들인가…….’
영웅 협회의 핵심적인 무력 단체라고 할 수 있는 특무과.
융통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놈들만 모인 곳이었는데 회귀 전에 이세훈도 치가 떨릴 만큼 당한 적이 있었다.
몇 달 동안 쫓기던 기억을 떠올린 이세훈은 속으로 치를 떨면서 루트비히에게 물었다.
“혹시 저를 수상하게 여기고 있는 겁니까?”
상황만 보면 이세훈은 만마전의 테러를 막아낸 생도 중 한 명이지만, 예민한 이들이 보기에는 일개 생도가 그만한 활약을 펼친 것 자체에 의구심을 가질 수도 있었다.
“일단은 사건의 조사를 위해서 목격자의 진술을 확보하는 거라고 했네만…… 그자들의 성향을 생각한다면 가능성이 없지는 않지.”
“으음…….”
루트비히의 이야기에 이세훈의 눈매가 찌푸려졌다.
어느 정도 움직이다 보면 한 번쯤은 엮일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막상 그놈들이랑 만나서 신경전을 펼쳐야 한다고 생각하니 살짝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이세훈이 고민하던 그때.
“너무 걱정하지는 말게나.”
루트비히가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그자들이 뭘 알아내든…… 내가 허락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말하지 못할 테니.”
조사관이 수상한 점을 발견하더라도 루트비히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면 바깥에서 입도 뻥긋할 수 없다.
모든 영웅의 정점에 올라서 있는 완등자만이 가질 수 있는 초법적인 권한. S급 영웅들도 껄끄러워하는 특무과의 조사관도 루트비히의 눈치를 보는 것이다.
‘……내가 줄을 잘 탔구만.’
이 정도라면 영웅 협회와 마찰이 일어날 만큼 크게 일을 벌여도 조용히 빠져나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 이세훈은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고개를 꾸벅였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할 것까지야. 학원장으로서 생도를 보호하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한 루트비히가 시계를 힐끗 보았다.
“환자를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던 것 같군. 혹시 할 이야기가 있는가?”
루트비히의 물음에 이세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없습니다.”
“그렇군. 이번 일로 자네에게 줄 보상이 많으니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이야기하게나.”
후웅
루트비히가 손을 내저음과 동시에 이세훈이 학원장실에서 사라졌고, 그의 감각이 병동 쪽으로 뻗어갔다.
“으으…….”
침대에 걸터앉은 채 매스꺼워하는 이세훈. 그 모습을 확인한 루트비히는 시선을 거두며 묘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번에도 여백을 본 건가…….”
과거 루트비히가 영웅의 탑 꼭대기에 올라섰을 때.
그가 가장 먼저 깨달은 것은 꽉 차 있다고 생각한 공간 속에 빈 공간, ‘여백餘白’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육안은 물론 마력으로도 관측되지 않는 제3의 공간.
루트비히는 그것을 인식하며 제어할 수 있게 되었고, 모든 공간능력자를 압도하는 승천제가 되었다.
그런데 이세훈은 그걸 지금 엿보는 데 성공한 것이다.
‘반지 덕분에 쉽게 본 것도 있겠지만…… 그래도 놀랍군.’
예를 들어 눈이 안 좋은 사람이 안경을 끼면 시야가 선명해지긴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처음 보는 외국어를 이해할 수는 없다.
그런데 이세훈은 안경, 권능을 몇 번 사용해 본 것만으로 여백을 이해하며 보기 시작한 것이다.
‘사용할 수도 있을까.’
보는 것과 사용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일이지만, 그래도 시작점에 섰으니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생각지 못한 이세훈의 재능에 루트비히가 고민하고 있을 때. 새하얀 구멍 안쪽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떻게 할 거냐?]
“……우선은 두고 볼 생각이오. 어쩌면 보는 것에만 특화된 것일 수도 있으니.”
[그 이상도 가능하다면?]
정말로 모든 권능이 낱낱이 분석 당할 수도 있다. 그 이야기에 루트비히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러면 다른 친구들도 소개해 줘야겠지.”
* * *
병실로 돌아온 뒤. 이세훈은 저녁이 됨과 동시에 모든 재료를 꺼내놓은 다음 주작을 불러냈다.
화르르륵
손등에 문양이 떠오름과 동시에 안쪽에서 불꽃이 피어오르더니 잠시 후 학원장실에서 본 주먹만 한 주작이 나타났다.
그 모습에 이세훈이 가볍게 인사라도 하려던 찰나.
[미리 경고해두지]
주작이 날카로운 눈으로 이세훈을 바라보았다.
[내가 너와 계약을 맺은 것은 어디까지나 그 괴물 같은 노인네 때문이다. 그러니 나를 하인처럼 부려먹을 생각이었다면 생각을 고치는 게 좋을 거다.]
“…….”
[내 힘을 사용하는 게 아니라 내가 너에게 힘을 ‘빌려’주는 것이다. 그 차이를 인지하지 못한다면 한 줌의 재도 남기지 못할 것이다.]
화르르륵!
거세게 타오르는 주작의 몸.
분신이기는 하지만 본체와 직접 연결된 상태인 만큼 흘러나오는 압박감이 심상치 않았다.
크기만 쪼그라들었을 뿐이지 이전에 봤던 상태와 비슷하거나 그보다 더 강해진 것 같은 느낌.
그 무시무시한 경고에 이세훈이 가만히 바라보았고.
콱!
잽싸게 모가지를 움켜잡았다.
[켁! 가, 갑자기 무슨……!]
예상치 못한 손길에 주작이 당황하자 이세훈이 불꽃으로 이뤄진 몸을 만지작거렸다.
“열기는 느껴지는데 공격성이 없네. 계약자에 대한 적대 행위는 전부 금지당한 모양이지?”
[큭…….]
“상식적으로 그런 안전장치도 없이 학원장님이 계약하라고 할 리가 없잖아. 너 바보냐?”
이세훈의 물음에 주작이 흠칫 떨었다.
어린 애송이니까 적당히 위압감을 흘리면 경계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미 자신의 상태를 다 들킨 것이다.
“뭐, 걱정하지 마. 어쨌든 네 말대로 힘을 빌려 쓰는 입장이니까 최소한의 예의는 지킬 거야.”
[…….]
이세훈의 이야기에 주작이 미심쩍은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이전에도 이런 식으로 풀어주겠다고 이야기해놓고 자신의 영혼을 마구 쥐어 짜내면서 제압하지 않았던가.
‘……하아. 의심스러워도 어찌할 방법이 없군.’
금제에 묶이고 계약 관계가 된 이상 최대한 협조하는 수밖에 없다. 자신의 처지를 깨달은 주작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그래서 뭘 어떻게 할 작정이지?]
“일단 꽃부터 심어야지.”
[저걸 키울 생각인가.]
상자 안에 놓인 작열화를 힐끗 본 주작이 거만하게 이야기했다.
[확실히 내 불꽃을 이용하면 섭취하기 좋은 꽃잎으로 변할 테지. 그래서 어디에 키울 생각이지? 토양이 좋아야 효과도 좋아질 텐데.]
“안 그래도 지금 어디가 좋은지 보고 있어.”
담담하게 대답하면서 주작의 몸을 살펴보는 이세훈.
뭔가를 찾는 듯한 그 모습에 주작이 의아해 하하다가 무언가를 깨달으며 몸이 굳어졌다.
[……왜 토양을 이야기하는데 내 몸을 만지는 거지?]
분신이기는 하지만 본체와 연결되어있기 때문에 사실상 자신의 몸이나 다름없다.
주작의 질문에 이세훈이 대답하지 않고 한참 몸을 살피다가 눈을 마주 보았고.
“머리랑 엉덩이.”
예의 바르게 두 가지 선택지를 제안했다.
“어디다 심어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