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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가 다 만들어줌-144화 (144/309)

회귀자가 다 만들어줌 144화

“…….”

“…….”

병실에 흐르는 무거운 침묵. 옆자리에 앉아서 아무런 말 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류은하의 모습에 이세훈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분위기가…….’

일주일 동안 의식을 잃었으니 걱정하는 것까지야 그럴 수 있지만 류은하가 보여주는 반응은 그보다 심했다.

누가 보면 본인이 때려눕힌 것처럼 죄책감을 느끼는 듯한 모습. 몸이 간지러워서 조금 움찔거렸더니 흠칫 떨면서 눈치를 살피는 그 모습에 이세훈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 학과장님.”

“……예.”

평소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가라앉은 목소리. 그 반응에 이세훈이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안 교수님 말씀으로는 상태가 꽤 좋은 편이라니까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지금 속도면 한 달 안에 퇴원할 수 있을 거예요.”

“한 달…….”

입원 기간을 듣고 더욱 어두워진 표정. 그에 이세훈이 재빠르게 덧붙였다.

“그, 그리고 양손도 문제없고요. 무구 만드는 데 아무런 지장도 없을 테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하더라고요.”

실제로 그렇게까지 말한 적은 없지만 회귀 전에 죽음의 고비를 몇 번이고 왔다 갔다 하면서 줄타기를 해온 이세훈에게는 딱 봐도 견적이 나왔다.

‘일단 두 손이 멀쩡하다고 하면 안심하겠지.’

류은하라면 가장 걱정되는 것이 그쪽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그런 이세훈의 생각과 다르게 류은하의 표정은 좀처럼 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이번 사건에는 제 책임도 있습니다. 저라도 바벨에 남아 있었더라면…….”

이번에 바벨이 비판받는 내용 중에 S급인 교직원들이 단 한 명도 상주하지 않았다는 점도 있었다.

실제로 이런 사건은 고위 영웅이 한 명이라도 있냐 없냐로 피해가 극명하게 갈리는 경우가 많았고, 다른 곳에서는 당직처럼 남아 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비판에는 바벨 쪽에서도 할 말이 있었다.

“학원장님이 계시니까 나가신 거잖아요. 솔직히 이번 사건은 예외로 쳐야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완등자가 지키고 있었는데 안심하고 자리를 비울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이번 사건에 한해서는 만마전이 기회를 잘 노리고 파고든 것이기에 자리를 비웠던 이들을 탓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위로를 해도 좀처럼 침울한 기색을 지우지 못하는 류은하. 그 모습에 이세훈은 계속 이야기하는 대신 아예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병문안 선물은 뭐 없나요? 조금 기대하고 있었는데…….”

류은하 성격상 몇 가지 정도는 챙겨왔을 테니 그걸로 잡담 좀 하다가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돌리면 되지 않을까.

이세훈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아. 가지고 왔습니다.”

류은하가 선물 바구니 대신 허리춤에 걸어둔 아공간 포켓 하나를 꺼내 들었다.

“회복 속도를 높여주는 제이슨 과육 영양제 세트. 그리고 몸에 남은 저주를 해소시켜주는 부적. 그리고 재활 중에 몸에 바르면 좋은 연고 세트랑…….”

쑤욱쑤욱

아공간 포켓 안쪽에서 쉴 새 없이 나오며 병실의 한쪽을 채우기 시작하는 각종 선물상자들.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는 그 선물 공세에 이세훈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무슨…….’

회귀 전에는 건강 용품 몇 개 챙겨주더니 이번에는 뭐가 이렇게 많단 말인가.

이세훈이 놀라는 사이에도 류은하는 멈추지 않고 지난 일주일 동안 준비해 온 물건들을 계속해서 꺼내며 설명했다.

“이건 원거리 저격을 막아주는 장치입니다. 사용자의 감각을 토대로 작동해서 사용하기가 까다로운데 이세훈 생도라면 충분히 사용하실 수 있을 겁니다.”

“저…….”

“그리고 이건 지난번에 빌려드렸던 방어구와 비슷한 성능과 효과를 지닌 쉐도우 그릿 아머 세트입니다. 보시다시피 착용감이 거의 없어서 생도복 안에 입고 다니시면 될 겁니다.”

손바닥만 한 원반 형태의 장치와 검은색 큐브로 압축되어 있는 방어구를 보여주며 설명하는 류은하.

죄다 영웅 등급에 편의성이 뛰어난 방어구들로 성능도 상당히 뛰어나서 길 가다 재수 없게 십악만 마주치지 않으면 죽을 일이 없을 만큼 성능이 확실했다.

건강은 물론 호신용 도구들로 가득한 선물 구성에 이세훈이 쉴 새 없이 설명을 이어가는 류은하를 바라보았다.

‘엄청 놀랐었나 보구만…….’

처음에는 조금 과한 게 아닌가 싶었지만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이야기다.

살면서 처음으로 자신의 입맛을 이해해 주고 충족시켜주는 유일한 사람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비명횡사할 뻔한 것 아닌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류은하에게는 그야말로 가슴이 철렁한 순간이었으리라.

“학과장님.”

“이건…… 예?”

“걱정 끼쳐드려서 정말 죄송합니다.”

이세훈의 사과에 류은하가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자세를 고치고 진중한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이번에 이세훈 생도와 친구분들 활약에 대해서는 바벨의 학과장이자 같은 영웅으로서 정말 감사드리며 존경하고 있습니다.”

“…….”

“하지만 류은하 개인으로서 부탁드리자면…… 자신의 몸도 소중하게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진심이 담긴 류은하의 이야기에 이세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하겠습니다.”

마지막에 예상치 못한 문제로 크게 다치긴 했지만, 이제 그 점도 파악했으니 이런 실수는 없을 것이다.

이세훈의 대답에 류은하가 잠시 눈을 마주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믿겠습니다.”

조금이지만 침울하던 분위기가 가셨고, 그 모습을 본 이세훈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다음에 또 다치면 아예 감금하려고 할지도 모르겠네.’

속으로 실없는 생각을 한 이세훈은 다시 선물 공세가 시작되기 전에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바깥 상황은 좀 어떻습니까? 휴대폰으로 뉴스를 좀 보긴 했는데 명확하게 나온 게 없어서…….”

이세훈의 물음에 류은하가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일단 이번 사건과 연루된 모든 직원과 기업에 대해서 전수조사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도 전반적인 색출 작업에 들어간다더군요.”

이번 테러 사건의 가장 큰 원인은 오랫동안 내부에 숨어 있던 내통자들의 협력.

특히 10년 넘게 근무한 직원들도 많았다 보니 영웅 업계 전체가 보안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동안 개별적으로 활동해 온 십악이 연합해서 움직였다는 사실에 전 세계가 동요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최근 들어 마인들의 범죄가 기승을 부리기는 했었지만 거기까지는 치안에 대한 불안감 정도로 끝날 수 있었다.

하지만 십악, 살아 있는 재해나 다름없는 괴물들이 힘을 합쳐 공격해 온 것은 그야말로 차원이 다른 위협이었다.

한순간의 실수로 수천, 수만 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할 수 있는 불안요소.

그렇기에 이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하기 위해 전 세계가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흐음…… 어떤 쪽으로 흘러가고 있나요?”

“아직까지 명확하지는 않지만 영웅 협회를 필두로 한 각 기관의 협력체계 강화. 그리고 십악의 토벌에 관해서도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그동안은 인류와 만마전 간의 냉전이 형성되면서 서로 암묵적으로 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지만, 지금처럼 십악이 먼저 완등자를 공격한 이상 더는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십악의 토벌이라…….’

회귀 전에는 육대마신이 나타난 이후에나 본격적으로 논의되었던 이야기. 그것이 수십 년이나 일찍 언급되고 있는 상황에 이세훈이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몇 명은 미리 제거해두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네.’

미래에 마신이 되는 십악은 그 잠재력 때문에라도 가능하다면 처리해두는 편이 좋다.

만약 토벌단이 꾸려진다면 그쪽으로도 영향력을 발휘할 방법을 생각해 보기로 하며 이세훈이 다른 질문을 꺼냈다.

“바벨은 뭔가 달라지는 게 없나요?”

그동안 지켜본 바에 의하면 루트비히의 성격상 이렇게 한 방 먹어놓고 얌전히 있을 리가 없다.

이세훈의 물음에 류은하가 살짝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저도 확실히는 모르겠습니다. 뭔가 준비를 하시는 것 같기는 했습니다만…….”

“흐음…….”

바벨에서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무엇이 있을까. 이세훈이 여러 가지를 떠올려보고 있을 때.

우우웅!

갑자기 진동이 울리는 휴대폰. 그에 이세훈이 화면을 보자 제이크에게서 도착한 메시지가 떠 있었다.

[학원장님 중대발표 중!]

“……중대발표?”

뭔가 심상치 않은 낌새를 느낀 이세훈은 곧장 탁상에 올려둔 단말기를 집어 들어 병실의 TV를 틀었다.

채널을 돌릴 필요도 없이 나타나는 긴급 속보 타이틀. 그리고 그 아래 단상에 선 루트비히의 모습이 전 세계에 송출되고 있었다.

[이번 사건에 대해서는 바벨의 책임자이자 한 사람의 영웅으로서 깊은 책임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입학식이 열렸던 바벨의 중앙광장에서 영웅의 탑을 등진 채 이야기하고 있는 루트비히. 그 진중한 표정에 이세훈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저 양반…… 도대체 무슨 꿍꿍이지?’

혹시 만마전에게 선전포고라도 하는 것일까.

짐작도 가지 않는 상황에 이세훈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 TV속의 루트비히가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번 사건을 통해 저는 바벨이 폐쇄적으로 운영되어 시대의 흐름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렇기에 변화한 흐름에 맞춰 새롭게 체계를 가다듬고자 합니다.]

새로운 체계란 도대체 무얼 말하는 것인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모두가 루트비히의 이어질 말을 기다리고 있을 때.

[오늘부로 바벨은 UD그룹과 순례교와 협력 체계를 갖추고 교육 커리큘럼과 보안 정책을 모두 개편하여 미래를 책임질 영웅들을 육성하는 데 총력을 다 하도록 하겠습니다.]

루트비히의 입에서 새로운 개편안이 언급된 순간. 이세훈의 병실뿐만 아니라 중대발표를 보고 있던 모든 장소가 침묵에 휩싸였다.

UD그룹과 순례교의 협력.

단순하게 보면 그냥 힘을 더하는 수준이지만, 문제는 그 집단의 수장들이었다.

‘불명자와 순례자…….’

루트비히와 같은 완등자. 즉, 십악과 마찬가지로 개별적으로 활동해 왔던 완등자 중 세 사람이 앞으로 힘을 합치겠다고 대대적으로 선언한 것이다.

‘이거…… 진짜 난리나겠는데.’

바벨의 명성과 영향력이 강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내부적으로는 불명자와 순례자 휘하의 사람들이 들어오며 지금보다 더 치열한 이권 다툼이 벌어질 것이다.

그리고 세 완등자의 동맹에 의해 만마전 쪽에서도 격렬한 반응이 일어날 것이 분명하리라.

회귀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사건. 그 심상치 않은 흐름에 이세훈이 화면 속의 루트비히를 바라보았고.

[이 새로운 시련을 뛰어넘을 수 있도록 부디 바벨과 인류의 앞길에 축복이 함께하기를.]

언제나와 같이 부드러운 미소가 그의 입가에 떠올랐다.

* * *

꿈의 경계에 자리 잡은 몽환성.

고풍스럽게 꾸며진 성안 쪽의 넓은 회의실에서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정원을 불태우네 마네 그렇게 기세 좋게 출발하더니, 고작 수십 명 죽이고 돌아온 거냐? 거참 대단한 실적이군 그래.”

5m를 가볍게 넘기는 우락부락한 몸에 금목걸이와 하와이안 셔츠를 걸쳐 입은 새하얀 사자 수인 ‘수왕獸王’이 입가를 비틀며 어금니를 드러냈다.

그 노골적인 비웃음에 맞은편에 심드렁하게 앉아 있던 인형사가 삐뚜름하게 올려다보았다.

“다른 녀석들은 몰라도 네가 그런 말 할 자격이 있어?”

“멍청한 놈들을 비웃는 데 자격이 필요한가?”

“필요하지.”

슬쩍 웃은 인형사가 수왕을 바라보았다.

“S급한테 골통이 깨질 뻔했던 녀석이 실력으로 비웃는 건 좀 그렇잖아.”

“…….”

인형사의 이야기에 수왕의 눈매가 살짝 일그러졌다. 그리고 잠시 숨을 가다듬다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때 놈은 이미 완등에 근접한 상태였다.”

“아, 그래서 지는 게 당연하다? 그렇게 완등자를 인정해 주는 놈이 우리가 지고 온 건 왜 그렇게 못 비웃어서 안달인가 모르겠네.”

거듭되는 인형사의 비아냥에 수왕의 금색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그리고 새하얀 갈기가 부풀어 오르며 살의를 드러내려던 순간.

“또또 쓸데없이 힘 빼려고 하네.”

수왕의 옆에 앉아 있던 새부리 마스크의 인물, 조율자가 한심하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본체도 아니고 인형한테 화풀이해서 뭐하려고? 제발 철 좀 들어라 이놈아.”

“…….”

조율자의 이야기에 당장에라도 인형사에게 달려들 것처럼 털을 곤두세웠던 수왕이 눈매를 찌푸리면서도 기세를 가라앉혔다.

주먹의 풍압만으로도 저 약해빠진 인형의 머리통을 박살 낼 수 있겠지만, 조율자의 말대로 그렇게 화풀이를 해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숨을 고르며 분노를 가라앉힌 수왕이 인형사를 노려보았다.

“언젠가 네 시체를 씹어 먹어주마.”

“그래. 나는 인형으로 만들어서 오랫동안 써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짧게 비아냥거린 두 사람이 시선을 돌린 찰나. 상석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몽환마가 나긋하게 이야기했다.

“두 분 들어오십니다.”

몽환마의 이야기와 동시에 비어 있던 좌석에 두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얼굴이 검은 소용돌이로 뒤덮여 이목구비가 없는 인물과 미간과 양 뺨에 작은 실선이 그러진 장발의 사내.

새롭게 나타난 두 사람을 본 조율자가 반갑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오랜만이네. 도플갱어. 천안.”

조율자의 활기찬 인사에 얼굴이 검은 소용돌이로 뒤덮인 도플갱어가 고개를 슬쩍 돌리며 물었다.

“파검 쪽에 정보를 흘린 게 네놈이냐?”

단도직입적인 물음에 조율자가 멈칫하다가 검지와 엄지를 살짝 모으며 멋쩍게 대답했다.

“조금?”

서걱─

섬뜩한 절단음이 울려 퍼졌고 조율자의 양팔이 살짝 어긋나더니 바닥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조율자의 양팔을 잘라낸 도플갱어는 무심하게 이야기했다.

“다음번은 목이다.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마라.”

그걸로 할 말은 끝이라는 듯 고개를 돌리는 도플갱어. 그 모습에 조율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같은 십악끼리 좀 도울 수도 있지 나참…….”

“붙여드릴까요?”

몽환마의 나긋한 물음에 조율자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됐어. 내가 할게.”

우드득 콰득

조율자의 등 쪽이 꿈틀거리더니 이내 가늘고 기다란 손 두 개가 검은 가운 안에서 빠져나와 잘린 두 팔을 주웠다.

그리고 그대로 잘려나간 단면에 가져다 대자 언제 잘려나갔냐는 듯 두 팔이 자유자재로 움직였다.

“음음. 됐네.”

조율자가 개운하다는 듯 몸을 풀고 있을 때. 장발의 사내 ‘천안天眼’이 입을 열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일을 벌인 겁니까?”

“뭐. 승천제가 조금 설치는 것 같아서 손을 봐줄까 하고…….”

“쓸데없는 이야기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진 않습니다.”

뺨 쪽에 그어진 실선이 천천히 벌어지더니 붉은색의 동공이 한 차례 꿈틀거리며 조율자를 노려보았다.

“당신들 때문에 승천제와 불명자, 순례자가 협력 체계를 갖췄습니다. 이번 일로 전면전이 시작되면 어떻게 책임질 생각입니까.”

일곱 명의 완등자가 모습을 드러낸 뒤. 더 이상 전력이 우세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만마전은 훗날을 도모하기 위해 힘을 모으기로 결정했었다.

그리고 아직 그 준비가 끝나지 않은 상황. 그런데 완등자를 자극하여 뭉치게 만들다니. 무슨 생각으로 그런 일을 벌인 건지는 몰라도 치명적인 실수였다.

“책임이라…….”

천안의 물음에 조율자가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예정대로 흘러간다면 굳이 나설 필요가 없긴 하지. 마경에 심어둔 ‘파편’이 완성되기만 하면 우리들의 승리니까.”

육대마경의 핵이자 만마의 늪이 낳은 근원의 파편.

그것이 완성되어 자격을 갖춘 자에게 넘겨지는 순간. 저 괴물 같은 완등자조차 단신으로 쓰러뜨릴 수 있게 된다.

힘의 크기를 넘어선 압도적인 상성. 그렇기에 지금처럼 불리한 상황에 굳이 완등자를 자극할 필요가 없기는 했지만.

“하지만 이미 우리가 생각한 예정과는 많이 틀어졌어.”

그 모든 것은 계획대로 상황이 흘러간다는 전제하의 이야기였다.

“천안. 너도 봤을 거 아냐. 이세훈이라는 녀석이 만들어낸 양산형 검기.”

“…….”

“그게 완성된 순간 심상을 담아내는 물건 역시 머지않아 개발될 거야. 승천제라면 그렇게 방향을 잡았겠지.”

검기를 양산화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시작일 뿐.

진짜는 거기서부터 파생되는 ‘심상’의 체계화이며 그것이 본격적으로 적용되는 순간 인류가 만들어내는 무구는 기존의 체계를 완전히 벗어던지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끝에 도달하는 건 뭘까?”

조율자의 물음에 심드렁하게 앉아 있던 인형사가 대답했다.

“완등자의 권능도 양산화하겠지.”

“맞아.”

이번에 바벨을 습격하면서 발견한 성화공의 화로.

조율자가 바벨을 습격한 것은 그 소문으로만 들었던 시설을 직접 확인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더 이상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니야. 이제는 누가 먼저 끝에 도달하느냐지.”

“……그래서 뭘 어떻게 하자는 겁니까?”

“날뛰자는 거지.”

회의실의 상석. 어둠에 잠겨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자리를 바라본 조율자가 기대된다는 듯 입을 열었다.

“마음에 안 드는 놈들도 죽이고, 파편도 연구해서 성장을 촉진시키고 그렇게 마음껏 말이야.”

흘러가는 상황이 예정과 달라졌다면, 더 큰 혼란으로 흐름을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끄는 수밖에 없다.

조율자의 의견에 회의에 참석한 다른 십악들도 고개를 돌려 상석의 자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어둠 속에 자리 잡은 무언가가 한 차례 꿈틀거렸고.

[그리 하라]

세계가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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