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가 다 만들어줌 132화
다시 찾아온 토요일 아침.
평상시에도 주말이 되면 생도들과 교직원, 각 기업의 직원과 가족들이 나오면서 활기가 넘쳤지만 오늘은 그와 차원이 달랐다.
아공간 터미널에서부터 보르시파의 전시장으로 이어지는 엄청난 인파.
바벨의 거주민뿐만 아니라 외부에서 찾아온 이들로 인해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 수가 수인 만큼 바벨 측에서도 사전에 철저하게 통제를 준비해 뒀는데, 그중에서도 전시장의 검사대가 가장 철통같았다.
“이쪽 게이트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아공간 아이템 내부에 금지된 물품을 보관하고 계실 경우 입장이 불가능하니 협조 부탁드리겠습니다!”
아공간 아이템의 내부까지 살펴볼 수 있는 최신식 장치.
바벨 안에서만 작동되는 특수한 물건이었는데 그 덕분에 불순한 목적을 가진 이들은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그 철통같은 보안에 뒤늦게 도착한 이세훈은 속으로 살짝 감탄했다.
‘저것도 이미 나와 있는 상태인 줄은 몰랐네.’
자신이 기억하기로 최소 10년 뒤에나 외부에 공개된 물건. 바벨 안에서 먼저 쓴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때부터 쓰고 있었을 줄이야.
‘바깥에서는 그냥 아공간 아이템을 금지시키는데…… 새삼 기술력 차이가 느껴지는구만.’
길게 이어진 줄을 바라보던 이세훈은 그들을 피해서 옆쪽에 따로 마련된 관계자용 게이트로 향했다.
“출입증 있으십니까?”
“박람회랑 전시회 둘 다 있습니다.”
란 페이와 김인철에게 각각 받은 출입증을 보여주자 직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옆의 게이트를 가리켰다.
“출입증 찍고 들어가시면 됩니다.”
삑.
단말기에 출입증 두 개를 찍은 이세훈은 그대로 보안용 게이트를 통과했다.
내부를 훑고 지나가는 기묘한 감각. 거기에 이세훈이 옆을 바라보자 소지품를 체크하는 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없습니다.”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을 확인한 이세훈은 안으로 들어가면서 자신의 명치를 힐끔 보았다.
‘역시 몽상수납은 안 걸리나.’
몽환의 마력의 특성도 있지만 스킬 구조가 육체에 걸쳐져 있는 부분이 있기에 더 쉽게 통과한 모양이다.
‘몽환마가 협력했다면…… 이런 식으로 통과시킬 수도 있겠어.’
혹시 모를 가능성을 확인하며 전시장으로 향한 이세훈은 안쪽 로비를 살펴보았다.
평소와 다르게 사람들이 가득 차 있어서 그런지 마치 다른 장소에 온 것 같은 느낌. 그 풍경을 살피던 이세훈은 행사가 열리는 장소를 다시 확인했다.
‘박람회는 서관, 전시회는 동관이었지.’
어디를 먼저 가볼지 이세훈이 고민하고 있을 때. 주변이 웅성거린다 싶더니 옆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
블라우스에 발목까지 오는 롱스커트를 차려입은 에리카. 늘 그렇듯 신출귀몰하게 나타난 그 모습에 이세훈이 담담하게 맞이했다.
“그래. 좋은 아침.”
“어디부터 갈 거야?”
따라가겠다는 의지가 가득해 보이는 물음에 이세훈이 담담히 대답했다.
“고민 중.”
“그럼 전시회장 가자.”
에리카의 제안에 이세훈은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뭐.”
생각해 보니 전시회 쪽은 자신 때문에 아수라장이 될 가능성이 높으니 초기에 빠르게 살펴보는 편이 좋다.
결정을 내린 이세훈은 에리카와 함께 전시회가 열리는 동관으로 향했다.
“저 둘은…….”
“이노우에랑 가깝다는 건 진짜인 모양이야.”
“마이어스에 붙었다는 건 단순 소문이었나.”
일반인보다는 영웅이나 그와 관련된 종사자들이 찾아오는 행사라 그런지 에리카와 함께 걷는 것만으로도 온갖 요상한 소리가 들려온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시선에 이세훈은 옆에 걷고 있는 에리카를 흘끔 바라보았다.
‘만족스러워하는 걸 보니 이것도 노렸나 보네.’
제이크한테 검을 만들어준 소식이 널리 퍼져서 마이어스랑 이미 계약을 맺은 게 아니냐는 소문이 돌았는데 그게 불만이었던 모양이다.
상당히 계산적인 접근이었지만 에리카의 인연레벨과 연관된 것이기도 했기에 이세훈은 그러려니 하며 걸음을 옮겼다.
‘입구부터 아주 화려하게 만들어뒀구만.’
문을 아예 떼어내고 크기를 확장시켜서 내부가 훤히 보이게끔 만들어진 입구.
원래 전시장의 구조라면 안쪽이 다 보여야 했지만 내부에 설치된 가벽 때문에 하얀색의 고급스러운 벽이 보였다.
“무슨 미로처럼 만들어둔 모양이네.”
“그래야 특정 작품에 시선이 모이게 만들 수 있으니까.”
복도의 맨 끝이나 코너의 바로 옆처럼 걸음을 옮기면서 사람들의 시야가 닿을 수밖에 없는 곳에 전시품을 배치한다.
이런 행사에는 참여해 본 적이 거의 없었기에 이세훈이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뭔가 결계 같은 느낌인데.”
무의식중에 사람들의 인지에 간섭한다.
너무 거창한 게 아닌가 할 수도 있지만 엉성하게 만들어진 결계보다 오히려 이쪽이 더 효과적일 수도 있었다.
마력이 느껴지지 않는 만큼 방심하고 이끌릴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비슷해. 유명한 박물관은 그 점을 이용해서 곳곳에 보안장치를 숨겨두기도 하고.”
“그래? 어떤 느낌일지 궁금하네.”
시야의 사각을 강제로 만들어서 숨겨두는 것일까. 흥미를 드러내는 이세훈의 모습에 에리카가 슬며시 이야기했다.
“그럼 다음에 같이 가자.”
자연스러운 제안에 이세훈은 크게 고민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에리카가 자신을 데리고 다니면서 여러 가지를 살피듯 자신 역시 그렇게 살펴볼 수 있다.
특히 저쪽에서 마련한 상황이라면 경계 받을 가능성이 내려갔기에 더더욱 유용했다.
“……정말?”
냉큼 받아들일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지 에리카가 의외인 표정으로 보았고, 그 시선에 이세훈이 피식 웃었다.
“뭐 이런 걸로 거짓말하겠어. 대신 다른 일정이랑 안 겹치게 미리 말만 해줘.”
“……응.”
“그럼 슬슬 들어가자.”
에리카와 함께 전시회장으로 들어선 이세훈은 곳곳에 설치된 전시품을 살펴보았다.
전시품들은 투명한 케이스 안쪽에 조명을 받으며 장식되어 있었는데 옆이나 아래에 정보창의 내용이 설명문처럼 간단히 적혀 있었다.
그리고 관람객이 근처에 있으면 그 효과를 보여주기 위해 실시간으로 마력을 공급받으며 발동됐다.
화르륵!
불꽃으로 이뤄진 투구부터 시작해서 천장과 벽에 착착 달라붙는 요상한 신발.
주변에 바람막을 형성해 투사체를 반사하는 망토도 있었고, 몸에 링거를 꽂아 저주를 즉시 뽑아내 주는 장치도 있었다.
전체적으로 효과가 좋다기보다는 겉만 번지르르한 물건이 많았는데 그 모습에 이세훈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주제가 미래라서 그런가. 엄청 요란하구만.’
현실적인 효율을 따지기보다는 나중에 개선될 것을 전제로 다양한 기능들을 선보인다.
다른 관람객들은 괜찮은 접근이다, 정도로 생각하며 넘어갔지만 회귀자인 이세훈의 눈에는 여러모로 기묘했다.
‘미래에 쓰이는 게 하나도 없네.’
과거에는 그럴싸하다고 여긴 예상도 후대에서 보면 우습기만 하듯 전시회장에 있는 물건 중에 제대로 상용화될 만한 물건은 거의 없었다.
어쩌다가 하나 보여도 자세히 살펴보면 접근 방식이 틀려먹어 모조리 갈아엎어야 했는데 그래서 그런지 이세훈이 보기에는 참신함보다 답답함이 느껴졌다.
“…….”
에리카 역시 크게 흥미가 가는 게 없는지 힐끗 봤다가 걸음을 옮겼고, 자연스레 두 사람만 빠르게 안으로 움직였다.
이러다가 10분도 안 돼서 다 살펴보겠다 싶던 순간. 이세훈의 시선이 한 전시품에 닿았다.
“저건…….”
인챈트가 빼곡하게 새겨진 두 개의 구.
서로 떨어진 상태로 허공에 떠 있었는데 이세훈과 에리카가 다가가자 마력을 공급받으며 푸른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우우웅
구의 주변에 헤엄치듯이 움직이는 푸른색 글귀. 그 모습을 본 이세훈은 설명문을 읽지 않고도 효과를 알아차렸다.
‘다른 쪽에서 술식을 전달받아서 재현하는 건가.’
겉에 새겨진 인챈트와 외부에 발현된 술식이 달랐는데 다른 곳에서 신호를 전달받아 술식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보였다.
‘공명현상을 응용한 것 같은데…… 이건 괜찮네.’
마법사가 원거리에서 술식을 구성할 수 있게 도와주던 소모품과 구조나 효과가 매우 흡사했다.
잠시 전시품을 바라보던 이세훈은 곧장 제작자를 확인했다. 만든 사람은 졸업생 3학년 생도였는데 그중 3학년의 이름이 상당히 익숙했다.
[하워드 그랜트]
인챈트학부이자 보르시파의 3학년 학과수석.
상아탑의 특기생 선발 대회 때 마주쳤던 상대라는 것을 알아차린 이세훈이 잠시 바라보다가 에리카에게 물었다.
“하워드 그랜트가 누군지 알아?”
이세훈의 물음에 에리카가 슬쩍 보다가 대답했다.
“그랜트 가문의 둘째 아들이야. 2학년까지는 그냥 학부수석 정도였는데 최근에 급성장해서 학과수석을 따냈어.”
“흐음. 집안은 어떤 곳이고?”
“인챈트 쪽에서는 꽤 알아주는 가문이야. UD 그룹이랑 바르무트 가문과 협력해서 매 분기마다 성장하고 있고.”
에리카의 설명에 이세훈이 하워드 그랜트가 협력해서 만든 출품작 ‘술식 전이 장치’를 바라보았다.
‘십악이랑 주시자 쪽에서 딱 써먹기 좋은 성능이야.’
이전에 자신, 정확히는 레아에게 접근해서 보이던 기묘한 태도. 그리고 갑작스러운 실력의 향상.
여기까지야 우연일 수도 있지만 이세훈은 다른 무엇보다도 바르무트와 가깝다는 점이 매우 의심스러웠다.
‘끼리끼리 다닌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란 말이지.’
물론 삼견을 끌고 다닌다는 이유만으로 온갖 오해를 샀던 자신과 같은 예외가 있긴 하지만, 대부분은 그런 법이다.
특히 뭔가 구린 놈이 뜯어먹는 게 아니라 얌전히 협력한다? 열에 아홉은 비슷한 놈들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흐음. 가자.”
어떤 구조인지 확인했으니 충분히 대응할 수 있다. 이세훈이 걸음을 옮기자 에리카가 말없이 뒤따랐고 잠시 후 큼지막한 홀이 나타났다.
복도 형태로 된 이전과 달리 탁 트인 내부.
외곽에 전시품들이 띄엄띄엄 놓여 있는데 가장 이목을 사로잡는 것은 당연하게도 중앙에 놓인 물건이었다.
“저건 뭔데 아직도 가려져 있어?”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서 시간이 지난 뒤에 공개한다던데.”
“누가 만들었길래…… 이세훈?”
천막이 가려진 전시품에 관람객들이 주변에 모였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 수가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만약 어정쩡한 인물이었다면 그냥 나갔을 수도 있지만 최근 들어 주목받고 있는 이세훈의 물건이라 기대감이 생겨난 것이다.
“뭐 만들었어?”
출구 근처에 서 있던 에리카가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고, 이세훈이 슬쩍 웃었다.
“비밀.”
아무래도 말로 듣는 것보다는 직접 보는 편이 더 반응이 격렬할 터.
“…….”
이세훈의 대답에 에리카가 불만스러워하면서도 다시금 고개를 돌려 전시품 쪽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리고 소문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까지 더해져서 큼지막한 홀이 어느 정도 찼을 때쯤. 전시품을 가린 천막이 위로 올라가며 모습을 드러냈다.
“뭐야. 그냥 검이잖아?”
“특별한 건 없어 보이는데…….”
조명도 없이 케이스 안쪽에 가지런히 세워진 밋밋한 철검. 거기다 다른 전시품과 다르게 아무런 설명도 없었는데 그 모습에 모두가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타악!
그러자 홀 내부의 조명이 갑작스레 꺼지고 전시회장은 순식간에 어둠에 잠겼다.
뭔가 사고라도 났나 싶어 관람객들이 당황하던 그때. 이세훈의 전시품에 마력이 공급되기 시작했다.
우우웅.
검에 스며든 마력이 안쪽을 가득 채우더니 자연스레 표면에 새겨진 인챈트로 흘러가며 황금색 톱니바퀴를 힘차게 돌렸다.
그리고 거기서 빚어지는 막대한 힘이 검날의 끝으로 맹렬하게 질주한 순간.
촤아아악!
황금빛 검기가 어둠을 갈라내며 선명하게 빛났다.
그 화려하기 그지없는 모습에 웅성거리던 전시장이 순식간에 침묵에 휩싸였고, 그 광경에 관람객들이 깜짝 놀라면서도 의문을 가졌다.
‘검기무구?’
‘잘 만들긴 했는데…… 저게 왜 여기에 나온 거지?’
겉보기에는 평범한 검기무구 같은데 도대체 뭐라고 이런 연출까지 하면서 공개한단 말인가?
전시회장의 모두가 쉽사리 답을 떠올리지 못하고 있을 때.
“……검기 양산화.”
그 비밀을 알아차린 에리카의 중얼거림에 전시회장에 나지막하게 울려 퍼졌다.
무구업계의 난제이자 수많은 이들이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했던 영역.
그 물건이 자신들의 눈앞에 나타났다는 사실에 관람객들은 감탄보다 불신을 느꼈다.
‘말도 안 돼.’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영웅 업계의 종사자들만 모였기에 더욱 믿을 수 없었다.
검기 양산화가 어디 개 이름도 아니고 어떻게 올해 입학한 1학년 생도가 어떻게 해낸단 말인가.
그렇게 모두가 부정하던 그때. 이런 상황을 예상한 듯 전시품의 위로 패널이 형성되며 글자가 떠올랐다.
[최초의 양산형 검기무구]
누군가의 중얼거림과 전시회, 주최자인 바벨이 직접 공인해서 말하는 것은 그 무게감이 다르다.
철검에 맺힌 검기가 정말로 양산화에 성공했음을 깨달은 관람객들의 입이 점점 벌어지기 시작했고.
───!!!
자신들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눈앞의 저 평범해 보이는 철검이 앞으로 영웅 업계에 얼마나 큰 지각변동을 일으킬지, 그 사실을 깨달으니 자신들도 모르게 소리가 터져 나온 것이다.
“이, 이세훈! 그 사람 찾아!”
“그러고 보니 아까…… 어라?”
미리 이세훈의 위치를 봐두고 있었던 이들이 고개를 돌렸다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불이 꺼지기 전만 해도 분명히 같이 서 있었는데 지금은 에리카 한 사람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 상황을 예상하고 미리 나간 것일까. 그 사실에 상황을 파악한 이들은 재빠르게 출구로 달려나갔다.
‘반드시 만나야 한다!’
‘거래 하나만 따내도 인생역전이야!’
이 소식을 전달하기 위해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휴대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고 전시회장 내부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
그 혼란스러운 와중에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이세훈의 전시품을 바라본 에리카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마이어스 가문의 검기.’
다른 이들은 아직 거기까지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지만, 에리카는 저 황금빛 검기가 마이어스 가문의 것임을 바로 알아차렸다.
불이 꺼지자마자 빠져나간 이세훈의 모습을 떠올린 에리카가 말없이 전시품을 계속 보고 있을 때.
“아! 여기 있네.”
뒤늦게 전시회장에 도착한 제이크가 에리카에게 황급히 다가갔다.
“혹시 세훈이 어디 갔는지 못 봤어? 아까까지 너랑 같이 있었다고…… 에리카?”
“…….”
“너 눈빛이 뭔가…… 그게…… 이만 가볼게!”
도망치듯 전시회장에서 빠져나가는 제이크. 그 뒷모습을 에리카가 말없이 바라보았고.
“저기…….”
“눈치 챙겨 임마.”
비슷한 이유로 접근하려던 이들이 맹수라도 본 것처럼 조용히 뒤로 물러섰다.
* * *
바벨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까마득한 하늘 위. 그 허공에 만들어진 새하얀 구멍 너머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벌레들이 많군.]
불쾌함이 짙게 서린 목소리. 그 까칠한 반응에 옆에 선 루트비히가 담담히 이야기했다.
“본색을 드러낸다면 그렇게 되겠구려.”
[네놈은 거슬리지도 않나?]
평소보다 까칠한 목소리의 물음에 루트비히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바벨 안에서 움직이는 수많은 인파. 그중에서 몇몇 이들이 남들과 다르게 주변을 살피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린다.
수많은 경험을 토대로 쌓인 영웅으로서의 직감, 그리고 초월적인 완등자로서의 감각.
그 모든 것이 저들이 다른 목적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지만, 루트비히는 손을 쓰는 대신 미소를 지었다.
“그럴 리가. 도리어 즐겁지.”
[즐겁다고?]
“바깥에서는 제멋대로 굴던 이들이 여기에서는 내가 정한 규칙대로 철저하게 통제되고 있으니 이것만큼 즐거운 게 어디 있겠소.”
자신에게 적의를 품은 이들조차 이곳에서는 그 뜻을 거스를 수 없다. 그 정갈하게 정리된 정원의 풍경에 루트비히가 흡족함을 느꼈고, 목소리가 치를 떨었다.
[저놈들이 네놈의 그 음습한 취미를 몰라서 안타깝군.]
“소소한 취미인데 너무 나무라지 마시게.”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한 루트비히는 다시금 바벨의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용케 여기까지 자라났어.’
바다 한가운데에 새하얀 탑만 덩그러니 놓여 있던 장소가 이제는 이렇게 거대한 도시, 아름다운 정원으로 가꾸어졌다.
지난 시간을 되새기던 루트비히는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그럼 이제 슬슬 손님을 맞이해야겠구려.”
[딱 봐도 유인책 같은데 괜찮겠나?]
“해충 몇 마리에 망가질 만큼 어설프게 가꿔놓지는 않았소. 그리고…….”
바벨을 내려다보던 루트비히가 문득 한 사람을 떠올렸다.
수많은 벌레를 끌어들일 만큼 매혹적이면서도 치명적인 독을 품고 있는 새로운 꽃. 그 존재를 떠올리며 루트비히가 슬쩍 웃었다.
“어련히 잘 해결할 것 같군.”
확신은 할 수 없었지만, 그런 생각이 든다.
정원에서 시선을 돌린 루트비히는 허공에서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후웅
시야가 바뀌고 바벨에서 떨어진 망망대해가 펼쳐진다. 그리고 보이는 것은 바다 한가운데에 신기루처럼 세워져 있는 보랏빛의 성.
그 위에 서 있는 세 그림자. 인형사와 조율자, 몽환마의 모습에 루트비히가 천천히 손을 뻗었고.
“일단 가볍게 시작해 보세.”
북태평양의 수천 미터에 다다르는 바다가 그 손짓을 따라 반으로 갈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