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가 다 만들어줌 126화
신체제어학 수업이 어영부영 끝난 뒤. 이세훈은 곧장 보르시파의 본청에 있는 학과장실로 향했다.
똑똑
“학과장님.”
“들어오십시오.”
안쪽에서 들려오는 대답에 이세훈이 방문을 열며 안으로 들어갔고, 책상에 앉아서 서류작업을 하던 류은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
표정에 변화는 없지만 무언가 기대가 잔뜩 담긴 시선. 그 모습에 이세훈이 슬쩍 웃으면서 다른 아공간 포켓 하나를 꺼내 들었다.
“점심 도시락 챙겨왔어요.”
“이쪽에 앉으시죠.”
류은하가 잽싸게 소파로 자리를 안내했고, 이세훈도 맞은편에 앉으면서 아공간 포켓을 탁상 위에 올려놓았다.
찰칵─!
버튼을 누르자 압축되었던 공간이 풀리고 큼지막한 양날 도끼와 단검 두 자루가 가지런히 놓였다.
균형 잡힌 조형과 겉면에 빼곡하게 새겨져 있는 언령각인.
이전보다 새기는 것이 익숙해졌는지 마치 하나의 술식처럼 보일 만큼 절묘하게 그려져 있었다.
“여기다 마무리로…….”
거기에 이세훈이 도끼와 단검에 각각 토속성과 화속성 마력을 집어넣었고 언령각인이 활성화되며 진면목이 드러났다.
우우웅!
“…….”
표면에서 파도치듯이 흐르며 성능을 강화시키는 언령각인. 그 아름다우면서도 먹음직스러운 형태에 류은하가 빤히 바라보았고.
꼬르륵
배에서 우렁찬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노골적인 반응에 류은하가 이세훈을 힐끔 올려다보았다가 다시 시선을 아래로 내리며 대답했다.
“점심때라서…….”
“알죠알죠. 이제 준비 다 됐으니까 얼른 드세요.”
맛있어 보여서 꼬르륵거린다는데 실망하는 대장장이가 어디 있겠는가.
이세훈이 태연하게 대답하자 류은하가 자세를 바로 하며 고개를 꾸벅였다.
“잘 먹겠습니다.”
까드득─콰득!
두 무구가 류은하의 입에 하나씩 잘근잘근 씹히며 들어갔고 움찔거리는 눈과 요동치는 입꼬리, 그리고 타오르는 머리카락이 만족스러움을 드러낸다.
‘역시 회귀 전보다 감정이 풍부해졌단 말이지.’
예전에도 맛있는 걸 먹으면 머리카락이 격하게 타오른다든가 그런 반응이 있긴 했지만, 얼굴에서 저리 반응이 오는 것은 처음이었다.
자신이 무구의 맛을 이해해 준 덕분일까. 그도 아니면 만나는 시점에서 변화가 있었던 걸까.
이세훈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재빠르게 식사를 끝마친 류은하가 입을 열었다.
“잘 먹었습니다. 이전보다 맛이 더 좋아졌군요.”
“다행이네요. 혹시라도 마음에 안 드시면 어쩌나 했는데.”
류은하가 조금이라도 질리는 기색이 보이면 곧장 만드는 방식을 바꿔야만 했기에 주의를 놓쳐서는 안 된다.
“…….”
그런 이세훈의 대답에 류은하가 살짝 묘한 표정으로 보다가 이내 무언가 결심한 듯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세훈 생도의 무구는 언제나 맛있…… 음…… 뛰어나니까요.”
“예?”
“그러니까 제 말은 이세훈 생도는 조금 더 자신감을 가지시는 편이 좋다는 뜻입니다.”
갑작스러운 류은하의 격려에 이세훈이 살짝 당황하다가 이내 그 상황을 이해했다.
‘예의상 한 말인데 자신감이 없다고 생각한 건가.’
회귀 전이었다면야 ‘맛있어? 그러면 돈 좀 더 줘’ 라고 했겠지만 아무래도 지금은 입장 차가 있기 때문에 조금 가려서 말할 수밖에 없다.
괜한 걱정을 끼쳤다 싶어 이세훈이 막 둘러대려던 찰나. 문득 이곳에 찾아온 목적을 떠올렸다.
‘잠깐. 이러면…….’
류은하를 어떻게 설득해 볼까 싶었는데 쉬워질 수도 있겠다. 적당히 표정을 가다듬은 이세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음…… 안 그래도 그 부분에 대해서 학과장님한테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말씀하시죠.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도와드리겠습니다.”
“이번에 보르시파에서 학부수석 출신 졸업생들을 대상으로 전시회가 개최된다던데. 아십니까?”
“그거라면…….”
자리에서 일어난 류은하가 책상으로 가더니 종이 한 장을 들고 와 건넸다.
“이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전시회 ‘미래未來’]
멋들어진 글귀로 이름과 설명이 간단히 적혀 있는 포스터.
앞에는 학부수석으로 졸업한 이들 중 어느 정도 유명세를 탄 녀석들을 위주로 적혀 있었는데, 이세훈은 그들을 쭉 훑어보았다.
‘아는 이름은 없네.’
공개된 리스트를 모두 확인한 이세훈은 곧장 류은하에게 물었다.
“이번 전시회는 졸업생만 참여하는 겁니까?”
“몇몇 학부에서는 3, 4학년 생도들이 함께 준비하거나 별도로 준비한 작품들도 있다고 합니다.”
생도도 참가할 수 있다. 기다렸던 대답에 이세훈이 두 눈을 빛냈다.
“그럼 저도 참가할 수 있을까요?”
이세훈의 물음에 류은하가 살짝 의외인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물었다.
“이유를 들을 수 있겠습니까?”
무엇이든 들어준다고 했지만 이유가 부실하면 거절당할 수도 있다.
그 사실을 떠올리며 이세훈이 분위기를 잡으며 입을 열었다.
“학과수석으로 여기저기 이름이 알려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중에 제 능력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조금 자신감이 없어지더라고요.”
“저번에 다 처리…… 음. 계속 말씀하시죠.”
“……그래서 이번 전시회에 제 작품을 보여서 제대로 된 평가를 받고 싶습니다.”
최대한 도전적이고 긍정적으로, 이세훈이 열정적인 생도의 모습을 연기하자 그 모습을 본 류은하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세훈 생도가 저렇게 화난 얼굴을 하다니…….’
알게 모르게 자신을 얕보는 이들에게 화가 쌓였던 것일까. 흉흉한 표정에 잠시 고민하던 류은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참가 자체는 어렵지 않을 것 같습니다. 단순 행사에 가까운 전시회고 이세훈 생도는 올해 학과수석이니 홍보를 위해 참가시켰다, 정도로 받아들이겠죠.”
“그럼…….”
“다만, 나중에 다른 소리가 안 나오게끔 테마에는 맞춰 주셔야 합니다. 다음 주까지 그런 물건을 준비하실 수 있겠습니까?”
류은하의 물음에 이세훈이 ‘미래’라 적혀 있는 테마를 슬쩍 보고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그거라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아마 이번 전시회에 참가하는 이들 중에 자신만큼 미래를 명확히 보여주는 출품작은 없을 것이다.
확신이 담긴 이세훈의 모습에 류은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 회의에 제시해서 진행해둘 테니 다음 주 목요일까지는 완성해서 보여주십시오.”
“예. 그럼 준비되는 대로 연락드리겠습니다.”
고개를 꾸벅인 이세훈이 학과장실 밖으로 나갔고,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류은하의 표정이 천천히 굳어져 갔다.
“아직도 그런 사람들이 남아 있었나…….”
아무래도 지난 상아탑의 특기생 선발 대회에서 검기 양산화에 대한 화두를 던진 것 때문에 불만을 가진 이들이 다시금 머리를 내민 걸지도 모르겠다.
조만간 리스트를 정리한 다음 새로운 리뷰 영상을 찍어야겠다고 류은하가 다짐하던 그때.
우우웅
주머니에서 울리는 진동.
거기에 휴대폰을 꺼낸 류은하가 전화를 걸어온 상대를 살펴보았다.
[유리얼 오펜하이머]
“…….”
세라핌 길드의 길드장이자 자신의 스폰서.
전혀 반갑지 않은 그 이름에 류은하의 눈매가 살짝 꿈틀거렸다가 전화를 받았다.
“말씀하시죠.”
-안부 인사도 없이 삭막하기는. 언제까지…….
“끊겠습니다. 용건은 메시지로 보내주십시오.”
뚝
쓸데없는 이야기에 류은하가 전화를 끊었고, 뒤이어 걸려온 전화도 모조리 거절했다.
그러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 통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이전에 이야기했던 연구재료가 구해졌어. 다음 주 주말에 바로 실험해볼 거니까 본사로 찾아와.]
- 유리얼 오펜하이머.
“…….”
문자의 내용에 류은하의 눈매가 살짝 찌푸려졌다.
또다시 그 지긋지긋한 장소로 가야 하다니. 하지만 서약으로 묶인 계약이었기에 무시할 수는 없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으니…….’
그렇게 생각을 고치며 류은하가 답장을 보냈다.
[알겠습니다.]
* * *
‘이걸로 전시회 쪽은 걸쳐놨고…… 남은 건 박람회인가?’
바벨에 자리 잡은 기업들의 신기술과 신제품이 소개되는 초대형 마공학 박람회.
규모로 따지자면 세 학과의 행사 중에서 이쪽이 가장 컸었는데 이세훈이 가장 경계하고 있는 것도 이 박람회였다.
‘기업이면 『여명』이 숨어들어오기 딱 좋으니까 말이야.’
지난 블랙 암즈 습격사건으로 확인된 적은 십악의 몽환마와 주시자 『공양』뿐이지만 이세훈은 다른 쪽으로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십악이나 주시자나 서로 사이가 좋지 않은 경우가 있지만 결국은 만마전이라는 한 진영에 속한 녀석들.
미리 손발을 맞추지 않아도 어느 한쪽이 사고를 치면 이때다 싶어 이득을 챙기기 위해 날뛸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여명』 그놈들이면…… 이때다 싶어 루이제를 납치하려고 할 수도 있고.’
아직은 사건이 일어날 것인지 확실치 않지만, 다 터지고 난 다음에 대응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박람회는 어떤 식으로 접근해야 할지 이세훈이 차근차근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우웅
주머니에서 울리는 진동.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보자 처음 보는 번호가 찍혀 있었다.
‘누구지?’
자신의 번호를 알 만한 사람이 있었던가. 거기에 이세훈이 의아해하며 전화를 받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세훈 생도. 마공학부의 란 페이 교수인데 잠깐 통화 괜찮나?
피곤함이 가득 묻어나오는 목소리, 란페이의 물음에 이세훈이 곧장 대답했다.
“예. 괜찮습니다.”
-지난번에 이야기했던 보상안이 정리되어서 연락했다.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했으면 하는 데. 어디가 편한가.
상아탑에서 벌어졌던 사고를 막아낸 것에 대한 보상. 그 이야기에 이세훈이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제가 교수님 계신 곳으로 가겠습니다.”
-그럼 내 연구실에서 보지. 마공학부 본관의 22층으로 올라오면 보일 거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이세훈은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마공학부라…….’
박람회로 이어지는 길을 찾은 듯한 느낌에 이세훈이 곧장 경전철을 타고 우르에 있는 마공학부로 향했다.
‘깔끔하고 무난한 느낌이네.’
교육 시설이라기 보다는 기업의 사옥같은 느낌의 깔끔한 마공학부의 본관 건물.
그 모습에 이세훈이 주변을 살피며 안으로 들어서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
벽에 등을 기댄 채 휴대폰을 바라보는 루이제.
뭐 때문인지 몰라도 표정이 살짝 일그러진 게 심기가 불편해 보였는데 그 모습에 이세훈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여긴 왜…… 아, 전처럼 같이 부른 건가?’
같이 올라가면 되겠다 싶어 이세훈이 곁으로 다가갔고, 인기척을 느낀 루이제가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꺼지라고…… 뭐야. 너였어?”
반사적으로 욕을 퍼부으려다가 멈칫하는 루이제. 그 모습에 이세훈이 잠시 바라보다가 손가락으로 눈가를 훔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꺼질게.”
“뭐? 아니…….”
당황하는 루이제를 두고 이세훈이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고, 한 박자 늦게 뒤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야이 씨. 너 장난칠래?”
“장난 아냐. 나 상처받았어.”
“진짜로 상처 입혀줄까?”
두 눈을 가늘게 뜨며 흘겨보는 루이제의 모습에 이세훈이 피식 웃었다.
“대뜸 욕부터 해놓고 너무한 거 아냐?”
“아니, 뭐, 이상한 놈들이 자꾸 말 걸어서 좀 그런 거야. 아닌 거 알면서 사람 당혹스럽게…….”
루이제가 멋쩍어하며 이야기하자 이세훈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물었다.
“너한테 말을 걸었다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루이제에게 말을 걸다니. 거기에 이세훈이 신기함을 느끼다가 문득 한 가지를 깨달았다.
‘아. 얘는 폭견이 아니었지 참.’
회귀 전에야 『여명』에 속해 있던 마법사와 그 단체를 모조리 쓸어버리겠다고 빌딩 수십 개를 무너뜨려서 유명했지만, 지금은 비교적 얌전한 생도 신분이 아니던가.
“그래서 어떤 놈들이었는데?”
“몰라. 언령마법 잘 봤다고 같이 작업하면 어떠냐고 얼마나 들러붙는지…… 다음에 그냥 한 놈 걸리면 두들겨 패야겠어.”
어지간히도 질렸는지 신경질적으로 이야기하는 루이제. 그 모습에 이세훈이 턱을 쓰다듬었다.
‘언령마법이면 확실히 흥미로울 만도 하지.’
기존의 마법과 체계가 확연히 다르다 보니 연구해 볼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실제로 회귀 전에 폭견이 본격적으로 합류하면서 언령마법에 대한 연구가 많이 이루어졌었는데, 그때 엄청난 발전을 보인 기술들이 몇 가지 있었다.
‘그걸 생각해 보면 이쪽도 좀 해볼 만하긴 하네.’
루이제에게 부전공수업으로 어떻게 권유해 볼지 이세훈이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엘리베이터가 22층에 멈추면서 문이 열렸다.
두 사람은 복도를 타고 안쪽으로 향했고 금방 ‘란 페이’라고 붙은 문패를 발견했다.
똑똑
“교수님. 이세훈입니다.”
“들어와라.”
안쪽에서 들려온 대답에 이세훈과 루이제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란 페이의 연구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서류가 깔끔하게 쌓여서 만들어진 탑과 에너지 음료 캔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성. 정리가 되어 있으면서도 난장판인 그 모습에 이세훈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깔끔하게 엉망으로 만들면 이런 느낌이려나.’
여러 의미로 대단한 연구실의 모습에 두 사람이 떨떠름하게 보고 있을 때. 서류 탑 뒤쪽에서 란 페이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거기 옆쪽 소파에 앉아 있어라. 하던 것만 마무리하고 갈 테니까.”
“알겠습니다.”
두 사람이 그나마 깔끔한 손님용 소파에 나란히 앉아서 기다렸고, 책상에서 볼펜 소리가 끝없이 들려왔다.
그리고 잠시 후 서류 탑 사이로 란 페이가 능숙하게 빠져나와 두 사람의 맞은편에 앉았다.
“지저분한 꼴을 보여서 미안하군. 필요한 자료를 찾느라 옛날 서류를 꺼내다 보니…….”
조금 심하다는 건 아는지 멋쩍은 표정을 지어 보이는 란 페이. 그 모습에 이세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교수님 연구실인데 뭐 어떻습니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해해 주니 고맙군. 그럼 본격적으로 보상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지.”
탁자에 놓인 서류철 하나를 집은 란 페이가 두 사람의 앞에 내밀었다.
“이게 이번에 상아탑 측에서 줄 수 있는 보상 목록이다. 쭉 살펴보고 필요한 걸 고르면 된다.”
란 페이에게 서류철을 건네받은 두 사람은 곧장 같이 펼쳐보았다.
[이번 폭주 사태를 진정시키고 해결해준 생도들에게 각각 30억에 달하는 보상을 약속한다.
그리고 금전이 필요하지 않을 경우에는 상아탑이 보유한 물건 중에서 그에 버금가는 가치의 물건을 제공하여…….]
기본적인 설명과 함께 쭉 나열된 여러 물건.
영웅 등급의 희귀한 재료는 물론 다양한 무구들이 잔뜩 있었는데 그중에는 제시된 30억으로도 살 수 없는 물건들이 꽤 있었다.
‘희소성이나 이름값을 다 제외하고 순수하게 가치만 따져서 주겠다, 이거구만.’
상아탑에서 어느 정도 손해를 감수한 보상안.
혹시라도 바벨, 루트비히에게 밉보여서 불이익을 받을까 봐 작정하고 주머니를 연 것이 분명하리라.
‘꽤 괜찮은데…….’
이세훈이 리스트를 찬찬히 훑어보고 있을 때. 옆에서 같이 보던 루이제가 잠시 고민하다가 이야기했다.
“내꺼도 좀 골라줘.”
“음? 갑자기 왜?”
“이거다 싶은 것도 없고, 나보다 네가 더 잘 보잖아.”
“그래? 그러면…….”
루이제의 이야기에 이세훈이 리스트를 다시 살펴보던 그때. 이곳으로 건너오면서 했던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마공학부 교수면 박람회 쪽으로도 뭔가 있을 수 있지 않을까.’
밑져야 본전이다 싶어진 이세훈이 맞은편에서 서류를 보고 있던 란 페이에게 물었다.
“교수님. 혹시 다음 주에 열리는 마공학 박람회에 맡으신 업무 같은 게 있으십니까?”
“업무?”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는지 란 페이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대답했다.
“시설 확인이나 그런 걸 내가 전체적으로 담당하기는 하지. 기업에서 나온 녀석들은 자기 물건들 밖에 관리할 줄 모르니까.”
마공학계열의 물건이 한 장소에 가동되다 보면 마력 파장 같은 것이 흘러나와 서로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이런 박람회에서는 반드시 장소 전체를 관리하는 사람이 필요했는데 란 페이가 그 역할을 맡은 것이다.
‘역시 실력이 나쁘지 않나 보네. 그리고 시설 관리라면…….’
잠시 머리를 굴리던 이세훈이 적절한 방법을 떠올렸다.
“혹시 박람회에 현장 스태프로 들어갈 수 있게 해주실 수 있습니까?”
“현장 스태프? 왜지?”
란 페이의 물음에 이세훈이 슬쩍 미소를 지었다.
“전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기업들의 물건이지 않습니까. 가능하면 좀 더 가까운 곳에서 여러 가지를 보고 싶어서요.”
일반 관람객들에게만 보여주는 정보와 내부에서 일하면서 접하는 정보는 다르다.
물론 그런 경우를 대비해 기업에서도 보안을 신경 쓰긴 하겠지만, 어느 정도는 노출될 수밖에 없다.
‘허술하면 더 노출될 수도 있고 말이야.’
입장권만 얻을 수 있다면 그 뒤는 쉬운 일이다.
“흐음…….”
이세훈의 제안에 란 페이가 말없이 바라보다가 물었다.
“혹시 산업스파이인가?”
“아뇨.”
“아니면 박람회에 참가하지 못한 기업에게 고용됐다거나?”
“아닙니다.”
“그러면 정말 단순히 대기업이랍시고 거들먹거리는 녀석들의 기술 수준이 얼마나 대단한지 이번 기회에 슬쩍 훔쳐보고 싶을 뿐인 건가?”
“맞습니다.”
이세훈의 대답에 란 페이가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괜찮겠군. 마침 일손도 부족했으니 받아주지.”
“감사합니다.”
“대신.”
몸을 앞으로 살짝 기울인 란 페이가 탁상에 놓인 보상 리스트를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렸다.
“상아탑에서 제시한 보상의 절반은 입장권값으로 내가 가져가마. 이 정도는 괜찮겠지?”
너무 과하지도, 적지도 않게 자기 몫을 정확히 챙긴다. 그런 란 페이의 모습에 이세훈이 슬쩍 웃었다.
‘역시 쓸 만한 인간이야.’
어느 정도 대범하고 욕심도 과하지 않으며 융통성이 있어서 이야기를 척하면 척하고 알아듣는다.
아마 아는 것도 많고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신이 있기에 이런 일을 벌일 수 있으리라.
“그 정도라면 충분하겠네요.”
“좋아. 일손이 필요할 때만 연락해서 부르마.”
“예. 저희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은 란 페이와 이세훈이 서로 악수를 나눴고.
“……저희?”
얼떨결에 보상을 절반 날리게 된 루이제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