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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가 다 만들어줌-121화 (121/309)

회귀자가 다 만들어줌 121화

[관계 : 평가評價]

대상의 값어치에 따라 대우가 달라지는 것은 합리적이면서도 비정하기 그지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매 순간 평가받는 것은 살얼음을 걷는 것과 같겠지만, 그것을 견뎌낼 수 있다면 자신의 가치에 걸맞은 대우를 받을 수 있는 합리적인 관계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대상의 평가가 높아질 때마다 인연석이 생성됩니다.

*대상의 평가가 유지되고 있을 때 인연석의 숙성 속도가 증가합니다.

*현재 생성된 인연석 : 없음.

에리카와의 관계를 읽은 이세훈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평가라…….’

처음에도 어느 정도 능력을 보여준 다음에야 인연이 성립되었으니 어느 정도 납득이 가는 내용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썩 달갑지 않았다.

‘이런 관계는 한 번 고꾸라지면 복구하기가 힘들단 말이지.’

평가가 안 좋은 사람은 뭘 해도 밉보이듯 저런 식의 관계는 한 번 삐끗하는 순간 늪에 빠지듯이 가라앉게 된다.

그리고 이세훈이 무엇보다 신경 쓰이는 것은 에리카가 자신을 평가하는데 삼고 있는 ‘기준’이었다.

‘그냥 다재다능해서 좋다는 건지, 아니면 좀 더 명확한 목표가 있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네.’

에리카는 당주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어떤 포석을 깔고 있는 것일까. 이세훈이 그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을 때.

“왜 그래?”

에리카가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아니. 잠깐 생각난 게 있어서.”

이건 나중에 에리카의 반응을 보면서 차근차근 살펴봐도 늦지 않다.

새로운 인연에 대한 생각을 뒤로 미룬 이세훈은 아미르에게서 빼앗은 검은 상자를 바라보았다.

‘안전장치는…… 따로 설치 안 해도 되겠네.’

검은 상자에 안전장치가 만들어져 있는 것을 확인한 이세훈은 곧장 잠금장치를 풀었다.

촤라락!

겉에 붙어 있던 부적들이 자연스레 떨어지더니 상자의 주변을 회전하면서 반투명한 막을 만들어낸다.

상자를 열었을 때 불꽃이 새어나가는 것을 막아주는 용도로 보였는데 술식의 구조가 상당히 탄탄해 보였다.

“히무라 가문의 주술이네.”

공중에 떠 있는 부적을 보며 담담히 이야기하는 에리카. 그에 이세훈이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삼대가문?”

“응. 술식을 약간 뭉개놓긴 했지만 확실해.”

에리카의 이야기에 이세훈이 눈앞의 주술을 살펴보았다.

만약 상자 자체에 어떤 장치가 된 거라면 예전에 만들어둔 게 우연히 몽환마의 손에 들어가 써먹었다고 할 수도 있지만, 이 경우에는 다르다.

‘부적을 사용한 소모품에 술식까지 뭉개놨다. 이건 무조건 납품이지.’

환락가를 대상으로 했는지, 아니면 음지를 대상으로 했는지 몰라도 뒤쪽으로 팔아치우고 있는 루트가 있는 게 분명하다.

‘케이든에 삼대가문까지…… 오늘따라 건지는 게 많네.’

앞으로 바빠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세훈이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금 상자로 시선을 내렸다.

“그럼 연다.”

끼이익

상자의 뚜껑이 천천히 열렸고, 그 틈새로 드라이아이스의 연기처럼 새하얀 불꽃이 넘실거리듯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화르륵

상자를 감싼 부적과 부딪치자 안개처럼 흩어져 버리는 새하얀 불꽃. 겉보기에는 굉장히 힘없어 보였지만, 그 특유의 형태를 살핀 이세훈이 두 눈을 휘둥그레졌다.

‘이건…….’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이세훈이 재빠르게 반쯤 열렸던 뚜껑을 확 젖혔고, 그와 동시에 상자에 들어있던 물건이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우우웅

주먹만 한 크기에 우윳빛으로 물들어있는 구체.

매끈한 표면이 언뜻 보기에는 진주를 연상케 만들었지만, 자세히 보면 그 표면이 희미하게 타오르며 상자 밖으로 새어 나오는 새하얀 불꽃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마치 눈물이 흘러내리는 듯한 그 모습에 이세훈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누화淚火…….”

눈물 같은 불꽃이라 하여 붙은 별명.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대장장이들 사이에서나 쓰이는 명칭이며 실제로 알려진 것은 따로 있었다.

“이세훈 생도…….”

상자 안의 물건을 알아봤는지 류은하가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았고, 그 시선에 이세훈이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정보창을 펼쳤다.

[남화동南火瞳]

[등급 : 전설] [품질 : 중하]

불을 관장하는 주작의 동공.

막대한 화속성 마력이 잠재되어 있으며 정신계열의 간섭에 저항하고 불꽃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이 서려져 있다.

대상의 죄악감을 불태워 고통을 주는 ‘업화業火’가 담겨져 있다.

*화속성 저항력이 대폭 증가합니다.

*정신계열 저항력이 대폭 증가합니다.

*불꽃에 대한 지배력이 증가합니다.

*내구도를 영구적으로 소모하여 ‘업화業火’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S급 마수 주작의 동공.

회귀 후 처음으로 접하게 된 전설 등급의 재료이지만 이세훈은 기쁨보다 눈매를 찌푸렸다.

‘이 새끼들 도대체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 거야?’

* * *

“이런! 정신 빠진! 밥버러지 새끼들이……!”

빠악! 빠악! 빠악!

해안가에서 쉴 새 없이 울려 퍼지는 고기 두드리는 소리.

모래를 적시는 붉은 피 위로 파도가 무심하게 올라와 씻어 내려갔고, 다시 그 위로 새로운 피가 흩뿌려진다.

“윽……!”

“크윽……!”

몇 시간 째 이어지는 구타에 무릎 꿇은 사내들의 전신은 흉측하게 변했지만, 한 명도 빠짐없이 찢어진 입술을 꽉 깨물며 자세를 유지했다.

빠악!

그러다 쇠방망이에 머리를 후려 맞은 사내 한 명이 의식을 잃으며 모래사장에 넘어진 순간.

퍼억!

머리가 있던 곳 위로 쇠방망이가 떨어지며 다시는 일어설 수 없게 만들었다.

“치워.”

“예.”

쇠방망이를 들어 올린 거구의 사내, 블랙 암즈의 주인인 오너의 이야기에 대기하고 있던 직원들이 재빠르게 달려와 시체를 치웠다.

그것을 확인한 오너는 쇠방망이를 고쳐 잡으며 벌벌 떨고 있는 직원들을 바라보았다.

“이제 10명이다.”

빠악!

오너가 다시 직원들을 두들겨 패기 시작했고, 해안가의 야외 바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던 주홍빛 머리칼의 사내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저건 또 뭐하는 짓거리야?”

“구조조정이라던데. 20명 죽을 때까지 저렇게 팬대.”

칵테일을 홀짝이던 초록빛 머리칼의 여인이 재밌다는 듯 씩 웃으며 대답했고 거기에 사내, A급 마인 불가살이 혀를 찼다.

“쯧. 무식하기는…….”

“어쩌겠어. 다른 것도 아니고 화물선이 털렸는데. 몇 명이라도 살려두는 게 대단한 거지.”

기본적으로 상거래는 무엇보다도 신용이 중요하며 고객들이 매우 예민한 암시장 쪽에서는 두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다른 것도 아니고 승객들 탄 배를 공격당하고 화물도 털렸으니 세력을 넓혀가던 블랙 암즈의 상승세에 브레이크가 제대로 걸리게 되리라.

“그러고 보니 대장은? 오고 나서 안 보이네.”

“회의.”

“아. 맞다. 이번에 대표로 나간다 했었지.”

뒤늦게 일정을 떠올린 여인이 칵테일에 들어가 있던 얼음을 입안에 굴리면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으으…… 십악이랑 회의라니. 나였으면 무서워서 말도 안 나왔을 거야.”

호들갑을 떠는 여인, 드리아스의 모습에 불가살이 같잖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블랙 암즈에 건너오기 전에 사람을 다섯 명이나 찢어 죽인 놈이 저런 소리를 하다니.

‘아니, 그거랑은 상관없나.’

그 괴물들 앞에서 태연하게 떠들 수 있는 이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밖에서야 자신이나 드리아스나 A급 마인이라며 경계 받지 그들 앞에서는 길가의 돌멩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걸리적거린다 싶으면 툭 걷어차서 자신의 눈앞에서 치워 버리리라.

‘……빨리 성장을 해야 하는데.’

몇 년째 정체된 상황에 불가살이 눈매를 찡그리고 있을 때. 칵테일을 다 비운 드리아스가 자연스럽게 유리잔을 깨물었다.

카득 카드득

이빨 자국에 따라 깔끔하게 잘려나가는 유리. 그것을 얼음처럼 씹어 먹던 드리아스가 불가살에게 물었다.

“그래서 결국 이번에는 도대체 뭐하는 거야? 그 우울증 환자도 쓴다는 거 같고. 거기에 이번에 받은 주작의 심…….”

“그만.”

드리아스의 말을 잘라낸 불가살이 담담히 말했다.

“대장이 정리해서 말해줄 때까지 떠들지 마라.”

“쳇…… 재미없기는.”

투덜거린 드리아스가 유리잔을 계속해서 씹어 먹었고, 불가살은 마음에 안 드는 표정으로 오너의 구조조정을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들이 앉은 바의 뒤편에 자리 잡은 작은 별장. 그 거실에서 보랏빛 연기가 내부를 자욱하게 채웠다.

스스스

완성된 그림 위에 보라색 물감을 마구 덧바른 것처럼 윤곽이 흐릿해진 거실. 겉보기에는 시야를 가린 것처럼 보였지만, 그 안쪽은 완전히 달랐다.

붉은색의 고급스러운 벽지와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샹들리에. 직사각형의 고급스러운 탁자에는 10개의 의자가 놓여 있는데 서로 손을 뻗어도 닿지 않을 만큼 간격이 매우 넓었다.

“흐음…….”

별장의 거실보다 여섯 배는 족히 되는 공간.

안과 밖이 일치하지 않는 그 풍경에 의자에 앉아있던 중년의 사내, 불가살과 드리아스가 속한 ‘벨로즈’의 대장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가 그 소문의 몽환성夢幻城인가.’

몽환마가 오랜 기간 공들여 만들어낸 꿈과 현실의 경계에 세워진 성.

초대받은 이들이라면 어디에서든 들어올 수 있으며 완등자조차 찾아내기 어려웠는데 그 특성 덕분에 십악의 회의 장소로도 쓰이는 곳이었다.

자신이 그 안에 들어왔다는 사실에 대장이 흥미로워하고 있을 때.

후웅!

비어 있던 의자에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늦어서 미안해요. 잠시 이야기를 듣고 오느라 늦었네요.”

진한 보랏빛 머리카락에 어깨가 드러나는 드레스. 검게 물든 눈동자에는 샛노란 동공이 달처럼 빛났고, 관자놀이에는 산양의 뿔처럼 동그랗게 말린 검은 뿔이 자리 잡았다.

그리고 피부에는 머리카락보다 옅은 보랏빛이 희미하게 감돌았는데 그 모습에 대장의 눈이 가늘어졌다.

‘선명히 보이는데도 어딘가 흐릿하게 느껴지는군.’

사람의 꿈을 뭉쳐 미인의 형태로 빚어낸다면 딱 저런 형태가 아닐까. 회의실에 나타난 여인, 몽환마를 바라본 대장은 자연스레 뿔을 살폈다.

‘마인의 육체에 무의미하게 생성되는 부위는 없다던데…… 저 뿔은 과연 어떤 역할을 할까.’

몽환마의 위상을 생각한다면 맥의 어금니인 몽상아와는 비교도 안 되는 몽환의 마력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그 탐구심이 대장의 머릿속에서 일시적으로 펼쳐졌을 때.

후웅

시야의 절반이 갑작스레 사라졌다.

“……!”

그 갑작스러운 상황에 대장이 깜짝 놀라며 자신의 얼굴을 만졌고, 오른쪽 눈 안이 텅 빈 것을 깨달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상황에 대장이 당황하고 있을 때.

“집중을 못 하는 것 같으니 이건 회의가 끝날 때까지 제가 들고 있을게요.”

몽환마가 자신의 손에 들린 새하얀 덩어리, 대장의 오른쪽 눈을 가볍게 움켜쥐었다.

사르르륵

손바닥을 폄과 동시에 허공을 날아가는 보라색 나비.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자신의 오른쪽 눈에 대장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 여기는 몽환마의 뱃속과도 같은 곳이었지.’

같은 십악이나 완등자 같은 괴물이라면 모를까 자신처럼 어중간한 녀석은 단숨에 꿈으로 변해 흩어질 것이다.

자신은 어디까지나 대리인이라는 사실을 떠올린 대장이 더욱더 솟구치려는 탐구욕을 가라앉히며 고개를 꾸벅였다.

“죄송합니다. 마담.”

“괜찮아요. 저 때문에 시간도 지체됐으니 얼른 시작하죠.”

짜악

몽환마의 손뼉이 가볍게 쳐졌고 그동안 흐릿하게만 보이던 윤곽들이 의자 위로 선명하게 드러났다.

입을 제외한 다른 구멍이 모조리 꿰매져 있는 기괴한 구체관절 인형. 검은 모자에 로브, 그리고 새부리 마스크를 착용하여 피부를 모두 가린 2M가 넘는 거구. 그리고 부드러운 인상의 노인.

새롭게 나타난 세 사람을 훑어본 사내가 어렵지 않게 상대를 알아차렸다.

‘인형사와 조율자. 그리고 『여명』의 대리인이겠군.’

아마 자신처럼 중간쯤에 위치한 간부일 터. 참가자가 모두 온 것을 확인한 몽환마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일단 모두 연락을 넣긴 했는데…… 안타깝게도 다른 분들은 흥미가 없다고 하시네요.”

몽환마의 이야기에 새부리 마스크의 거구, 조율자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야 그렇겠지. 하여튼 마인이라는 녀석들은 하나같이 협조성이 없다니까.”

거대한 체구와 달리 가벼운 말투로 투덜거리며 고개를 가로저은 조율자가 참가한 멤버를 살펴보았다.

“뭐, 그래도 이 정도면 최소치는 모인 거 같으니까…… 발안자로서 진행을 맡도록 하지.”

의자에 몸을 기댄 조율자가 자리에 앉은 이들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요즘 바벨, 정확히 말해서 승천제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 인형사 저 녀석이야 먼저 들쑤셨으니까 그렇다 쳐도 『탈각』의 연구시설을 3분의 1이나 좀 과하지.”

같은 주시자가 언급되자 『여명』의 대표로 나온 노인, 찰스와 『공양』의 대표로 나온 대장이 그를 바라보았다.

“아마 불명자의 몸 가지고 장난질 친 게 마음에 안 들었던 모양인데 뭐, 거기까지도 좋아. 화는 나지만 그거만 가지고 덤비기에는 솔직히 쫄리거든. 아깝기도 하고.”

십악의 힘이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완등자에 비한다면 턱없이 부족하다. 그렇기에 조율자는 이번 사태를 그냥 넘기려 했지만, 상황이 바뀌었다.

“그런데 알아보니 승천제한테 불만…… 이라고 해야 하나 용건을 가진 사람들이 꽤 많더라고.”

어깨를 으쓱이며 재잘거리던 조율자가 자리에 앉은 이들을 둘러보았다.

이들 모두 목적은 달랐으나 그것을 이루기 위한 과정은 같다.

그렇기에 조율자는 본래라면 불가능했을 계획에 가능성을 느꼈고, 이렇게 자리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래서 다들 힘내서 으쌰으쌰 해보자 이건데…… 말재주가 없으니까 계획은 간단명료하게 말하지.”

십악 셋과 주시자 둘.

완등자라도 쉽게 대응할 수 없는 그 세력을 바라보며 조율자가 축제를 선언하듯 양팔을 벌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 잘난 정원. 한번 성대하게 불태워 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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