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가 다 만들어줌 117화
둥둥─!
거대한 스피커에서 터져 나오는 노랫소리와 홀 내부를 요란스럽게 밝히는 조명.
방금까지 수백 명이 뛰어놀던 장소인 만큼 그 열기가 선명히 남아 있었지만, 정작 그 당사자들은 한 명도 찾아볼 수 없었다.
술이 남아 있는 잔. 테이블에 놓인 지갑과 휴대폰. 재떨이에 놓인 채 천천히 타오르는 담배.
어디론가 가버렸다기보다는 마치 ‘증발’된 것 같은 그 광경에 절로 눈매가 찌푸려졌다.
“쯧…….”
아무래도 지하에서 물건을 살피는 동안 뭔가 제대로 일이 터진 모양이다.
그 심상치 않은 광경에 손에 쥔 망치를 꽉 움켜쥐며 천천히 걸어나갔고.
뚝
흘러나오던 노래가 멈추며 조명이 홀을 환하게 밝혔다.
숨소리도 선명히 들릴 만큼 고요해진 클럽의 내부. 그 심상치 않은 상황에 신경을 곤두세웠고.
“이것 참.”
옆쪽의 테이블에서 한숨을 머금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반갑다고 해야 할지 지긋지긋하다고 해야 할지…… 뭐라 딱 잘라 말하기가 어렵네요.”
기다란 소파의 중앙에 앉은 채 다리를 꼬고 있는 재수 없는 얼굴. 부하가 변장을 한 게 아닐까 싶었지만 은빛 눈동자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마력이 본인임을 알려주었다.
‘진짜 재수 더럽게 없네.’
그냥 나가기는 글렀음을 깨달으며 소파에 앉은 재수 없는 놈, 아미르 싱을 바라보았다.
“또 너냐?”
“제가 할 말을 하시네요.”
어이없다는 듯이 코웃음 친 아미르가 이쪽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올려다보았다.
“올해 제가 직접 출장을 나온 게 오늘까지 딱 네 번인데 그때마다 자리에 계시고…… 이 정도면 노리신 거 아닙니까?”
“내가 너 같은 미친 살인마 새끼를 왜 노려. 내가 뒤지고 싶어서 환장한 놈으로 보이냐?”
“……그러신 것 같은데요?”
떨떠름해 하는 아미르. 쉽게 보내 줄 것 같지 않은 그 모습에 하는 수없이 허리춤의 아공간 포켓에 손을 가져다 댔다.
스릉
그와 동시에 목 근처에 겨눠지는 수십 개의 칼날.
얼굴까지 검은 복면으로 뒤덮은 놈의 부하들이 숨소리도 내지 않은 채 단검을 겨눴고, 그 틈새로 보이는 아미르를 바라보았다.
“야. 치워.”
“괜찮으니까 물러나 있어.”
아미르의 명령에 주변을 둘러싼 녀석들이 나타났을 때처럼 소리 없이 사라졌고, 아공간 포켓을 눌러 밑에서 챙겨온 물건을 꺼내 보였다.
스아아악
부적으로 떡칠이 되어 있는 검은 상자. 그 틈새로 검은 안개가 조금씩 새어 나왔는데 몸에 닿는 것만으로 피부가 찢어지듯 아려왔다.
“그건 뭡니까?”
“나도 몰라. 사부가 그냥 여기서 받아오랬어.”
내 대답에 아미르의 두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이내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혈공血工의 새로운 무구라…… 그것 참 좋은 정보네요.”
“알았으면 지랄 그만하고 보내줘. 피곤해 죽겠으니까.”
“보내달라니. 그리 말씀하시면 섭섭합니다. 누가 들으면 제가 당신을 죽이려고 한 줄 알잖아요.”
“아, 그러셔?”
시종일관 여유로운 아미르의 모습에 코웃음 치며 손에 쥔 망치를 허공에 휘둘렀다.
파캉!
그와 동시에 산산이 조각나며 부서지는 얼음의 칼날들.
처음에 냅다 달려갔으면 저기에 전신이 난도질당해서 그대로 황천길로 갔으리라.
“역시 감 하나는 좋으시네요.”
“감이 좋기는 지랄. 이러니까 니가 다른 곳에서 빙견이라고 불리는 거야.”
밀려오는 짜증에 톡 쏘아붙이자 아미르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보통은 은영銀影이라고 부르지 빙견 같은 괴상망측한 별명으로 부르는 건 당신밖에 없습니다.”
“내가 장담하는데 몇 년 안에 이쪽으로 굳어질걸? 다들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너 개새끼라고 욕하는 사람 많아.”
“그런 걸로 치면 당신이 더…….”
“아, 됐고. 나 간다.”
언제 마음이 바뀔지 모르기에 손을 내저으며 걸음을 옮겼고, 녀석도 붙잡을 생각은 없는지 더 이상 수작질을 부리지 않았다.
거기에 막 한숨을 내쉬려던 찰나.
“뭐, 좋은 정보도 얻었으니 한 가지만 조언해드리죠.”
자리에서 일어난 아미르가 옷깃을 가다듬었다.
“제가 출장을 나오는 곳들은 다 화약고 같은 곳인데…… 보시다시피 이번에는 지난번과 달리 수습이 안 됐거든요.”
고개를 돌린 아미르가 슬쩍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무사히 돌아가실 수 있기를 빕니다.”
쨍그랑!
그 말을 끝으로 아미르의 몸이 얼음으로 변해 산산이 조각났고, 은근하게 느껴지던 부하들의 인기척도 모두 사라졌다.
“돌입!”
콰앙!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들려오는 고함 소리와 폭발음. 계단을 타고 내려오는 요란스러운 발소리에 나도 모르게 눈가를 가리며 중얼거렸다.
“개새끼.”
그날이 내가 처음으로 지명수배범이 된 날이었다.
* * *
‘또 인가.’
눈 깜짝할 사이에 스쳐 지나간 과거의 기억.
썩 유쾌하지 않은 내용이었지만, 그 덕분에 이세훈은 저 멀리 있는 뺀질이의 존재가 얼마나 위험한지 다시금 깨달았다.
‘저놈이랑 밖에서 만났을 때는 무조건 조심해야 된다.’
아미르의 가문인 ‘싱’은 음지에서 오랫동안 정보 상인을 해왔으며 그 규모는 세계에서 손꼽힐 만큼 거대했다.
게다가 강제이긴 하나 십악 중 하나인 몽환마의 수족으로 움직이고 있는 상황.
그런데 그 두령인 빙견이 이곳에 직접 왔다는 것은 이번 블랙 암즈에 엄청난 일이 잠재되어 있다고 보증한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아니지. 이때는 차기 두령으로 교육받는 중이었던가?’
회귀 전보다 과거의 시점인 만큼 아직 두령의 자리는 물려받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곳의 위험성에 대해서 잠시 가늠을 해보던 이세훈은 이내 결정을 내리며 둘에게 속삭였다.
“저기 은색 눈 한번 떠볼 테니까 맞춰줘.”
류은하와 에리카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이세훈은 빙견, 아미르가 앉아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하아. 게임이 재미가 없…… 음?”
턱을 괸 채 투덜거리던 아미르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이세훈을 발견하며 그 모습을 가볍게 훑어보았다.
‘경호원으로 변장한 도련님인가.’
승객에 대한 정보는 실시간으로 전달받으면서 머릿속에 모두 기억해뒀기에 곧장 떠올랐다.
‘공개 경매가 아니라 개인 경매를 노렸을 줄이야.’
초행길이라 당연히 공개 경매를 노리고 왔을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자신의 예상이 틀렸던 모양이다.
어쩌면 부모의 심부름으로 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미르가 가능성 높은 이들을 추려내고 있을 때.
“재미없으면 나랑 한 판 어때요?”
이세훈이 아미르의 맞은편에 앉았다.
“흐음.”
선글라스를 낀 채 기고만장하게 웃는 이세훈. 그 속내를 알 수 없는 모습에 아미르가 잠시 고민하다가 몸을 바로 폈다.
“보아하니 경호원이신 거 같은데…… 업무 중에 도박 같은 걸 해도 괜찮겠습니까?”
“예? 아. 그…… 괜찮습니다. 저희 아가씨는 제가 게임하는 걸 즐겨보시거든요.”
흠칫 떨다가 다급히 둘러대고는 스스로 잘했다는 듯이 으쓱거리는 이세훈의 모습에 아미르가 쓴웃음을 지었다.
‘첩보 영화만 주구장창 본 모양이네.’
바보 같아서 상대할 가치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 속내와 다르게 아미르는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렇다면야 상관없죠. 한 판 해볼까요.”
무가치하게 느껴지는 상대일수록 신중히 살펴라.
집안에 내려오는 격언을 떠올리며 아미르가 가만히 대기하고 있던 딜러를 바라보았다.
“그럼 셔플을…….”
“아아. 잠깐만요. 카드보다는 좀 더 재밌는 걸 하죠.”
“음?”
아미르가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이세훈이 살짝 떨어진 곳에 위치한 다트머신을 가리켰다.
“저건 어떻습니까? 저희 대장 말로는 당신 실력이 예사롭지 않다고 해서요.”
호기심과 흥분. 그리고 약간의 호전성이 느껴지는 제안. 그 모습을 가만히 살피던 아미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쁠 건 없죠.”
테이블에서 일어난 아미르가 다트머신으로 향했고, 이세훈이 그 뒤를 따르며 자세를 살폈다.
‘흐음. 약간 느낌이 오긴 하는데.’
하지만 이걸로는 확신하기 부족하다.
다시 철부지 도련님이라는 가면을 뒤집어쓴 이세훈은 정장 상의를 벗고 다트를 하나 집어 들었다.
“이쪽 머신은 써본 적이 없는데 게임 세팅을 좀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럼 제가 자주 하는 걸로 가죠.”
아미르가 허공의 패널을 몇 개 두드렸고, 그 순간 다트머신의 위쪽에 적혀 있던 글자가 변했다.
[HELL MODE]
촤라락!
밑의 바닥이 열리면서 검은 촉수 같은 것들이 솟구쳐 올라오더니 다트판까지 향하는 길을 빽빽하게 가로막았다.
“저 촉수를 피해서 다트에 꽂으면 됩니다. 쉽죠?”
좌우로 쉴 새 없이 움직이며 수시로 앞을 막아대는 촉수들. 그 모습에 이세훈이 입을 떡 벌리며 바라보다가 이내 입술을 꾹 깨물었다.
“해볼 만하네요.”
팔을 치켜든 이세훈이 앞을 노려보았고, 빈틈이 이어진 경로가 만들어진 순간 힘껏 다트를 던졌다.
푹!
하지만 다트판에 닿기는커녕 절반도 지나지 못하고 촉수에 쳐 내지며 발치에 박혔고 그 모습에 화들짝 놀라다가 눈매를 일그러뜨렸다.
“이게 무슨…….”
“그럼 다음은 제 차례네요.”
이세훈의 옆에 선 아미르가 다트를 하나 집어 든 다음 망설임 없이 가볍게 집어던졌다.
탕!
촉수를 피해 다트판의 정중앙에 정확히 꽂힌 다트.
그 모습에 이세훈이 두 눈을 휘둥그레 떴고, 아미르가 옆으로 한 걸음 물러서며 미소를 지었다.
“자. 이어서 하시죠.”
“……알겠습니다.”
그 뒤로 두 사람이 번갈아가며 다트를 던졌고 그 결과는 그야말로 한결같았다.
이세훈이 던진 다트는 다트판까지 가기는커녕 계속 튕겨져 나와 자신의 몸을 찌를 뻔했고, 아미르가 던진 다트는 하나도 빠짐없이 중앙에 꽂혔다.
“호오. 저 녀석 꽤…….”
“아까 전도 그렇고 만만치 않은데…….”
그 극과 극인 결과에 몇몇 이들이 아예 자리를 잡으면서 구경했고 카지노라는 환경에 맞물려 자연스레 두 사람에게 돈이 걸리기 시작했다.
“철부지가 한 번이라도 맞춘다. 능구렁이가 중앙에서 빗겨나간다. 어디에 걸래?”
“뭘 당연한 걸 물어. 무조건 능구렁이지.”
“저렇게 집착하다가 한 번 실패하는 거야. 난 철부지한테 건다!”
“그거 능구렁이가 실패한다고 돈 받는 게 아니라 철부지가 맞춰야 받는 거야.”
“뭐? 그럼 안 해. 취소.”
아무도 이세훈이 맞출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으며 비웃었고, 실제로 20개가 넘는 다트를 던졌지만 나아지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큭…….”
수치심에 얼굴이 붉어진 채로 촉수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이세훈. 그 모습을 곁에서 바라보던 아미르는 쓴웃음을 지었다.
‘연기가 아닐까 싶었는데…… 진짜 철부지였네.’
자세도 형편없고 보는 눈도 안 좋은 데다 주변의 비아냥에 이성을 잃어 판단력까지 흐트러졌다.
사실 여기까지는 자신처럼 겉모습을 속이는 데 이골이 난 사람이라면 얼추 꾸며낼 수 있지만 한 가지는 달랐다.
스아아아
은빛을 머금은 아미르의 두 눈 ‘동천안冬天眼’을 통해서 이세훈의 내면이 겨울의 하늘처럼 선명히 비친다.
당장에라도 다트를 내동댕이칠 것처럼 격분한 겉모습과 다르게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 상대가 아무것도 숨기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저렇게 생각 없이 살 수 있는 것도 부럽네.’
뒤쪽의 경호원들은 본인 때문에 초조해하고 있을 텐데. 거기에 생각이 닿은 아미르가 뒤쪽을 힐끗 보았다가 눈을 살짝 크게 떴다.
‘과연…….’
아무래도 자신이 생각한 것과는 조금 달랐던 모양이다.
다시 고개를 돌린 아미르는 필사적으로 빈틈을 찾는 이세훈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세상 사는 게 참 쉽지 않아.’
자신도 이렇게 예상치 못한 결과에 놀라는데 마음을 엿볼 수도 없는 이들은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는 것일까.
이제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아미르가 잠시 생각에 잠겨 있을 때.
투웅!
촉수에 튕겨져 나온 다트가 그를 노리며 매섭게 쏘아졌다.
카앙!
카지노에 울려 퍼지는 쇳소리. 반사적으로 오른손에 얼음의 칼날을 만들어냈던 아미르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붉은 머리의 경호원을 바라보았다.
“죄송합니다. 저희 부하가 실수를…….”
“…….”
아미르의 눈이 바닥에 부러진 다트를 향했고, 이어서 저 멀리 서 있는 이세훈을 향해 다시 움직였다.
“자, 잠깐. 나는 고의가 아니라…… 그게…….”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연신 주변을 살피는 이세훈. 거기에 모여들었던 구경꾼들도 혀를 차거나 그 모습을 비웃었다.
“점수도 못 낼 것 같으니 아예 상대를 죽이려고 하네.”
“저쪽이 그나마 가능성이 있어 보였나 보지. 크하핫!”
“어이 능구렁이! 이거 그냥 넘겨주면 얼굴 못 들고 다니는 거 알지?”
“무슨 소리를…… 고의가 아니었다니까!”
주변의 부추김에 이세훈의 안색이 더욱 창백해졌고, 아미르가 말없이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동천안으로 보이는 이세훈의 속내에 아무런 꾸밈이 없음을 확인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만둡시다. 이젠 상대해 주기도 피곤하네요.”
“뭐? 재미없게 그러기냐?”
“우리들 내기는 어쩔 건데!”
주변의 아우성에 아미르가 남은 다트를 집어 들어 가볍게 내던졌다.
타다닥!
정중앙에 정확히 꽂히는 세 개의 다트. 그 모습에 주변에 모인 이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고, 아미르가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이거면 됐죠?”
“좋았어! 못 맞춘다고 했던 놈들 이리와!”
“한 번에 던지는 건 반칙이잖아!”
“쫌생이처럼 굴지 말고 내놔!”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주변이 떠들썩해졌고 그 모습을 한심스럽게 바라보던 아미르가 이세훈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창백해진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무슨 거창한 소문을 듣고 왔는지 모르겠지만 이런 곳에서 시간 낭비하지 마세요. 그렇게 재밌는 곳은 아니니까.”
“예,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딱 봐도 심상치 않은 사람한테 괜히 실력 한 번 떠보겠다고 덤비지 말고요.”
툭툭
이세훈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준 아미르가 주변에 있던 류은하와 에리카를 바라보았다.
“당신들은 경호원이면 경호원답게 행동해.”
그 말을 끝으로 아미르는 몸을 돌려 카지노 밖으로 향했다.
방금 소란으로 주목받은 탓에 더 이상 살펴보기도 힘들어졌고, 무엇보다도 그럴 기분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지…….’
저런 얼간이들에게서 정보를 빼내고 활용하는 게 앞으로 자신이 지겨울 만큼 해야 할 일일 텐데, 무심코 옛 기억이 떠올라 표정 관리에 실패해버렸다.
‘제가 한 일이 아니에요! 뭔가 잘못된……!’
억울함을 외쳤지만 아무도 들어주는 이들이 없다.
그리고 그들 역시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진실을 외면하고 대신 자신들을 물어뜯는다.
“……쯧.”
너무 맑은 하늘을 봐버린 탓일까.
과거에 어리숙하던 시절을 떠올린 아미르가 신경질적으로 기억을 털어내며 객실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이세훈 역시 주변의 비웃음을 받으며 카지노에서 자신의 객실로 돌아왔고.
“그놈 뭔가 심상치 않은 물건을 가지고 있네요. 그거나 한번 털어보죠.”
선글라스를 벗으며 의기양양하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정말 연기가 맞았군요.”
사람이 바뀐 것처럼 순식간에 태도를 고치는 이세훈의 모습에 류은하가 살짝 놀란 눈으로 보았다.
도중부터 연기가 아니라 진짜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보이기에 이중인격이 아닌가 싶을 만큼 진지하게 고민했는데 정말로 연기였던 것이다.
“아아. 에리카의 주술이 생각보다 응용이 잘되더라고요. 학과장님이 그렇게 느끼실 정도면 다 속았겠네요.”
“어떻게 응용했어?”
“뭐, 그런 게 있어. 이건 비밀이야.”
에리카의 물음에 이세훈이 씩 웃으며 자신의 얼굴을 매만졌다.
*마력회로 [인공 면피] : 인공 면피를 다룰 수 있습니다.
인공 가죽과 주술을 활용해 만들어낸 가짜 얼굴.
그것도 어찌 보면 무구의 일종이기에 이세훈은 영연신마법의 임시회로를 활용해 동화율을 100%까지 이끌어냈고, 그 힘을 이용하여 자신을 완벽하게 타인으로 만들었다.
그 결과 사람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는 아미르의 동천안까지 속인 다음 빈틈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솔직히 이 정도로 효과가 좋을 줄은 몰랐는데…… 이건 앞으로 두고두고 써먹을 수 있겠어.’
회귀 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사용법. 예상치 못한 수확에 이세훈이 만족하고 있을 때 류은하가 궁금하다는 말투로 물었다.
“그런데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건 어떻게 확신하시는 겁니까? 제가 보기에 그런 움직임은 따로 보이지 않았습니다만.”
“아까 튕겨져 나온 다트에 반응할 때 반사적으로 가슴을 보호하듯이 움직이는 거 보셨죠? 그 가슴 부근에 어떤 물건을 숨겨놔서 그렇게 움직인 겁니다.”
“그건 그냥 급소를 보호한 걸 수도 있지 않아?”
에리카의 물음에 이세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움직임을 살펴봤는데 그런 식으로 움직일 녀석이 아니야. 그만큼 녀석도 평소보다 긴장했고, 본인의 버릇보다도 우선되는 물건이 있다는 거지.”
정확히는 회귀 전에 빙견의 움직임을 알고 있었던 덕분도 있었지만, 아직 미숙한 시절이라 그런지 실제로 빈틈이 보이기도 해서 금방 알아차렸다.
‘거기서 조금만 시간이 더 걸렸어도 변장이 부서지거나 의심받았겠지. 딱 좋게 풀렸어.’
정보는 알아차렸으니 이제 남은 것은 아미르가 어떤 물건을 숨기고 있는지, 그리고 그게 불가살과 연관이 있는지 확인한 다음 챙겨서 도망치면 된다.
“…….”
“…….”
자신만만한 이세훈의 모습에 류은하와 에리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그래도 처음 만난 상대를 그 짧은 시간 안에 저렇게 완벽하게 파악할 수 있는가.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슬쩍 떠올랐지만, 금세 그것이 가라앉았다.
‘이세훈 생도는 원래 그랬었지.’
‘평소랑 크게 다를 게 없네.’
오늘이 처음이라면 모를까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본 것이 한두 번이 아니지 않은가.
어쩌면 파검 마광수에게서 엄청난 스킬을 배워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그리 생각하며 두 사람이 화제를 넘겼다.
“이세훈 생도가 그 자와 불가살이 연관됐을 거라고 추측하는 걸 알겠지만…… 그렇다 해도 기습이 쉽지 않습니다. 특히 블랙 암즈라면 저와 버금가는 강자가 있을지도 모르고요.”
“뭔가 생각해둔 방법이 있어?”
류은하와 에리카의 물음에 이세훈이 씩 웃어보였다.
“아까 카지노로 내려가는 길에 보니까 꽤 쓸 만한 재료들이 있더라고.”
아공간 포켓을 두드린 이세훈이 황금색 반지, 승천제의 반지를 오른손 약지에 끼우며 미소를 지었다.
“이번에 미로나 한번 만들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