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가 다 만들어줌 116화
암시장暗市場.
공개적으로 거래할 수 없거나, 법적으로 금지된 물건들이 오가는 이 비밀스러운 장소는 오랜 시간 동안 인류의 곁에 늘 존재해 왔다.
그렇기에 누군가는 어째서 이런 장소가 계속해서 생겨나는가 의문이 생길 수도 있겠지만, 그 이유에 대해서 그렇게 깊이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필요하니까.’
불법적으로 얻은 물건을 처리하기 위해서, 금지된 기술을 연구하기 위해서, 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해서.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으니 자연스럽게 그 욕망에 따라서 사람들이 모이며 생겨난다.
그렇기에 몇 번을 단속하고, 토벌해도 어디선가는 다시 모습을 드러냈고.
“어서 오십시오.”
필리핀의 암시장 ‘블랙 암즈’ 역시 마찬가지였다.
찰칵!
가드에게 건네줬던 티켓이 구멍 뚫린 채로 되돌아왔고, 그것을 돌려받은 이세훈이 계단을 타고 배 위로 올라섰다.
승객만 1만 명을 가볍게 수용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호화 여객선. 그 화려하기 그지없는 모습에 이세훈은 천천히 선글라스 너머로 탑승한 승객들을 살펴보았다.
‘이 정도면…… 3분의 2 정도인가.’
겉으로 보기에는 그냥 돈 많은 승객들로 보이지만 움직임도 일반인과 다르고 무엇보다도 귀걸이나 반지 등 액세서리로 꾸며놓은 장비가 한둘이 아니다.
흉흉하기 그지없는 선상의 사람들에 이세훈이 흥미롭게 보고 있을 때.
“한눈팔지 마라.”
뒤쪽에서 딱딱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한 줄기로 묶어서 오른쪽으로 늘어트린 붉은 머리카락과 눈을 가린 검은 선글라스. 거기에 검은 정장과 장갑까지 차려입으니 숙련된 경호원이라는 느낌이 팍팍 들었다.
“잠깐 살펴본 겁니다.”
“그렇다 해도 아가씨 곁에서 떨어지면 안 된다.”
경호원의 지적에 이세훈이 슬쩍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고급스러운 검은 원피스를 입은 장발의 소녀. 새카만 옷과 머리카락에 비해 피부가 창백할 정도로 하얀 탓에 자연스레 시선이 모였는데 얼굴이 명확하게 보이진 않았다.
모자에 달린 작은 베일이 눈가를 가리면서 얼굴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게끔 흩트려 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가씨도 별말씀 안 하는데 왜 대장이 난리입니까.”
“장소를 생각해서 행동하라는 말이다.”
“아, 예예. 알겠습니다.”
건성으로 대답한 이세훈이 아가씨의 곁에 섰고 세 사람이 탑승객들 사이를 지나치며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런 세 사람을 소리 없이 살펴보던 이들이 일행들과 작게 이야기를 나눴다.
“철부지 한 명이 놀러온 모양이군.”
“그래도 경호원 수준은 꽤 되는 것 같던데?”
“그래 봐야 주선인한테 소개받은 용병이겠지. 컨셉도 이상하게 잡혀서 연기도 제대로 못 하더만.”
오랫동안 암시장을 지내온 만큼 같은 부류인지, 아니면 소문을 듣고 찾아온 뜨내기인지 정도는 쉽게 구분할 수 있다.
나중에 될 수 있으면 누군지만 알아보기로 하며 승객들의 시선이 금방 흩어졌고, 세 사람은 그걸 모르는 것처럼 안으로 향했다.
그리고 배정받은 VIP용 객실에 들어선 순간.
“후우.”
선글라스를 벗은 경호원, 류은하가 한숨을 내쉬었다.
“연기도 쉽지 않군요.”
숙련된 경호원, 그것도 A급 수준의 적당한 강함을 연기해야 하다 보니 신경 써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평소와 다른 방식에 류은하가 어색한 표정을 지었고, 그 모습에 이세훈이 피식 웃었다.
“잘하시던데요 뭘. 그 정도면 다 속아 넘어갔을 겁니다.”
“나는?”
베일을 벗은 아가씨, 에리카의 물음에 이세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좋았어. 그 정도면 아가씨인 척하는 경호원처럼 보였을 거야.”
블랙암즈를 방문하기 전. 류은하가 가장 먼저 준비한 것은 이세훈이 연기할 ‘신분’이었다.
‘블랙 암즈는 신용만 보증되면 신분을 요구하진 않지만, 다른 고객들을 대비해서 어느 정도 연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암시장을 주 고객층들이 하나같이 어딘가 구린 구석이 있는 양반들인 만큼 자신의 신분을 숨기는 것만큼이나 다른 이들의 신분에 관심을 가진다.
그렇기에 이세훈은 류은하와 상의한 끝에 그럴싸한 역할을 서로 정한 것이다.
‘경호원으로 변장한 철부지 도련님과 그 어설픈 연기를 받아주는 진짜 경호원 둘. 그럭저럭 있을 법해서 괜찮단 말이지.’
자신이 용의주도하다고, 그렇게 착각하는 풋풋한 애송이의 냄새가 나서 우습게 보이기 딱 좋다.
그렇기에 이세훈은 경호원이면서 제멋대로 움직였고, 류은하와 에리카 역시 자신을 황급히 뒤쫓는 듯 약간 어설픈 모습을 보인 것이다.
“일단 시작은 순조로운 것 같네요.”
“예. 이 정도라면 별 다른 지장은 없을 것 같군요.”
고개를 끄덕인 류은하는 고개를 돌려 이세훈의 곁에 붙어 있는 에리카를 바라보았다.
“에리카 생도도 훌륭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다만 너무 붙어 있는 건 좋지 않을 것 같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사적인 관계를 가진 것처럼 보일 수 있으니.”
담담한 류은하의 평가에 에리카가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경호원이 너무 떨어져 있는 것도 이상하지 않나요?”
“적정 거리를 유지하라는 말이었습니다.”
둘 사이에 흐르는 기묘한 기류. 그 모습에 이세훈이 살짝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 부탁할 때 바로 동행한다고 말할 걸 그랬나.’
처음에는 도련님과 경호원으로 컨셉을 잡았다가 뒤늦게 에리카가 같이 간다는 걸 말해서 이리 변경했었는데 아무래도 연기하기가 까다로워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다.
‘그래도 별말 없이 동행을 허락한 걸 보면 나름 신용은 하는 것 같은데…….’
설마 에리카는 죽든 말든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어서 허락했겠는가. 계속 어색해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이세훈이 재빠르게 끼어들었다.
“그보다 이 다음은 어떻게 움직입니까? 가능하면 불가살에 대해서 알아보고 싶은데…….”
이세훈의 이야기에 류은하가 시선을 돌리며 대답했다.
“그자도 고객으로 참석했으니 직접 수소문하는 건 좋지 않습니다. 지금으로써는 경매에 나오는 물건을 알아보고 어디에 나타날지 추측하는 게 최선이겠군요.”
“아. 그러면 카탈로그를 좀 구해주실 수 있을까요?”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류은하가 안쪽의 책상에 놓인 룸서비스 메뉴판을 살피더니 전화기를 집어 들며 이야기했다.
“여기 수량 한정인 이브닝 디저트 세트를 주문하고 싶습니다. 예, 3인에 하나는 커피, 둘은 홍차로 준비해주시면 될 것 같군요. 선택 디저트는 각각…….”
류은하가 능숙하게 메뉴판 속의 디저트 메뉴를 하나씩 읊었고, 주문을 끝낸 뒤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곧 카탈로그가 도착할 겁니다. 제가 받아둘 테니 그동안 이세훈 생도는 에리카 생도에게 변장이 풀리지 않도록 다시 조정 받아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네. 이쪽으로.”
에리카가 이세훈은 한쪽 방으로 이끌고 갔고 큼지막한 거울이 놓인 화장대 앞에 앉혔다.
“선글라스 벗어줘.”
“알았어.”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고 거울을 바라보자 평소와 달라진 얼굴이 제대로 보였다.
본래 얼굴에서 좀 더 부드럽게 풀린 눈에 갸름해진 턱선. 눈에는 보랏빛이 살짝 맺혔는데 그 미묘한 느낌 덕분에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조정할게.”
에리카의 손이 턱 라인을 따라 천천히 움직였고, 얼굴 위로 아주 얇은 마스크가 생겨나는 느낌과 함께 생김새가 다시금 가다듬어졌다.
그 과정을 거울을 통해서 바라보던 이세훈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에리카의 주술을 살펴보았다.
‘인공가죽을 신체에 동화시킨 다음 형태를 자연스럽게 가공한다라…… 저주를 이런 식으로 응용할 수도 있네.’
A급에게도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다더니 괜한 말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혹시 써먹을 구석이 있을지 이세훈이 주술을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을 때.
“류은하 학과장.”
에리카가 거울을 통해 이세훈을 바라보며 물었다.
“친한 사이야?”
“음? 뭐…… 친하다면 친하다고 볼 수 있지. 왜?”
“많이 익숙한 것 같아서.”
이세훈의 아래턱을 쓸어내리며 에리카가 의구심이 섞인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류은하 학과장은 너랑 가까워지고 싶어 하지만, 너는 이미 가까워진 것처럼 보여. 그래서 조금 이상해.”
만나서 보낸 시간은 똑같을 텐데 두 사람이 느끼는 감정에는 차이가 느껴진다. 에리카의 이야기에 이세훈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 녀석…… 생각보다 예리한데.’
그동안 자신의 감정을 크게 숨기지 않긴 했지만 이 정도로 깊게 읽어낸 것은 아리아 이외에 처음이다.
그 예상치 못한 재능에 이세훈이 거울 너머로 에리카를 바라보았다.
“내가 그렇게 대하는 것 같은 사람들이 또 있어?”
“루이제 발렌트와 염성하. 그리고 조금 다르지만 아리아 마이어스에게도 느껴졌어.”
담담하게 이야기한 에리카가 이세훈의 얼굴에서 손을 떼어내며 물었다.
“그런 유형의 사람들이 좋은 거야?”
순수하게 이쪽의 취향을 궁금해하는 모습. 꾸밈없이 직설적인 물음에 이세훈이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그게 궁금해?”
“알아두면 나쁠 건 없어 보여서.”
“흐음. 글쎄다…….”
자신은 어떤 유형이 좋은 것일까. 잠시 고민하던 이세훈은 대강 적당한 대답을 꺼냈다.
“숨김없는 사람이 좋은 것 같긴 하네.”
“숨김없는?”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나도 대응하기 편하니까. 숨기고 있으면 일단 거리감이 느껴지지.”
좀 더 명확히 말하자면 인연이 제대로 성립된 상대를 말하는 거겠지만, 거기까지 또 풀어서 설명할 필요는 없다.
이대로 계속해서 에리카와 시간을 보낸다면 어떤 형태로든 인연이 깊어지며 관계가 성립될 테니.
‘처음부터 특정한 관계를 노려봐야 잘 되지도 않으니까.’
이세훈의 대답에 에리카가 무언가 고민하는가 싶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면 우리 집에…….”
“이세훈 생도.”
에리카의 이야기가 이어지기 전에 류은하가 방으로 들어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카탈로그가 도착했으니 한번 살펴보시죠.”
“아, 예.”
“그리고.”
고개를 돌린 류은하가 평소보다도 무심한 눈으로 에리카를 바라보았다.
“에리카 생도는 제 변장도 조정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
류은하의 이야기에 에리카가 말없이 그 얼굴을 응시하더니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먼저 나가 있을게요.”
류은하에게 자리를 비켜준 이세훈이 객실의 거실로 나오자 탁자 위에 놓인 카탈로그들이 보였다.
“어디 보자…….”
소파에 앉은 이세훈은 곧장 카탈로그 하나를 집어 들어 경매에 출품되는 물건들을 살펴보았다.
‘대부분 영웅등급이네.’
희귀등급도 몇 개씩 나오긴 했지만 그쪽은 제작자가 유명하거나, 아니면 제대로 만들지 못했을 뿐이지 재료는 값비싼 걸 사용한 물건들이었다.
블랙 암즈의 규모가 큰 편이다 보니 경매에 나올 물건들도 전체적으로 품질이 높은 것이다.
‘전설등급 재료는 하나도 없나.’
A급 몬스터에게서는 나오는 경우가 잘 없고 S급은 개체수가 워낙 적다 보니 보기가 어려운 편이었다.
딱히 건질 게 없어 보이는 카탈로그의 목록에 이세훈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뭔가 팍하고 오는 물건이 없는데.’
사실 별다른 목적 없이 놀러 온 것일까, 아니면 아직 이 카탈로그에 올라오지 않은 물건일까.
이세훈이 곰곰이 생각에 잠긴 채 카탈로그를 다시 살피고 있을 때. 방문이 열리며 조정을 끝낸 류은하가 에리카와 함께 나왔다.
“의심 가는 물건은 있습니까?”
“으음. 제가 볼 때 뭔가 이거다 싶은 건 없네요. 전체적으로 평범하다고 해야 할지…….”
“흐음.”
이세훈의 대답에 류은하가 잠시 고민하다가 물었다.
“그럼 고객들 사이에서 열리는 개인 경매를 알아보는 게 좋겠군요.”
블랙 암즈에 존재하는 거래 형태는 크게 세 가지.
첫 번째는 주최 측에서 상시로 판매하는 오픈 마켓. 두 번째는 신용이 확인된 이들만 참여할 수 있는 경매.
그리고 마지막이 블랙 암즈에 참가한 고객들이 장소만 빌려서 여는 개인 경매였다.
“그쪽은 섬에 도착하는 즉시 열리는 경우가 많아서 지금부터 어떤 물건이 나왔는지 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죠. 근데 어디서 알아보나요?”
이세훈의 물음에 류은하가 다시 선글라스를 쓰며 대답했다.
“아래입니다.”
* * *
블랙 암즈로 향하는 여객선에는 두 개의 카지노가 존재했다.
하나는 일반 여행객들이 이용하는 일반적인 카지노. 그리고 다른 하나는 안쪽에 숨겨져 있는 VIP 카지노였다.
삐빅
엘리베이터 안쪽의 패널에 VIP카드를 가져다대자 층수를 표기하던 패널에 ‘VIP’란 글자가 떠오르면서 소리 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래로 내려가다가 좌우로 복잡하게 움직이는 엘리베이터. 선박 내부에 걸려 있는 공간마법을 통과하고 있는 것이다.
‘흐음…….’
이세훈이 그 희미한 파동을 주의 깊게 살피고 있을 때. 엘리베이터가 돌연 움직임을 멈췄다.
띵!
청명한 알림음과 함께 열린 문.
그리고 세 사람의 앞에 나타난 것은 붉은색과 황금색으로 꾸며진 화려하기 그지없는 카지노였다.
눈으로 보기만 해도 돈이 물처럼 쓰일 것 같은 사치스러운 환경. 실제로 각 테이블에서 오가는 도박의 금액이 엄청났는데 가장 낮은 칩이 무려 100만 원으로 이뤄져 있었다.
“쯧. 오늘 끗발 안 받네.”
“에잇. 다 먹어라 다 먹어.”
한 판 한 판에 억에서 많게는 수십억이 오가는 도박. 블랙 암즈의 규모를 짐작게 해주는 그 광경에 이세훈이 두 눈을 반짝거렸다.
“대, 대장! 빨리 들어가죠!”
“조금 침착해라. 어차피 시간은 넉넉하니…….”
“알았으니까 얼른 움직이자고요. 아가씨도 얼른 구경하고 싶어 하시잖아요.”
어설픈 도련님의 연기를 하며 이세훈이 카지노의 안쪽으로 성큼성큼 들어갔고, 류은하와 에리카도 한숨을 내쉬며 그 뒤를 바르게 따라붙었다.
‘첫인상은 제대로 박아넣은 거 같고…….’
주변에 경계 섞인 시선이 상당히 사라진 것을 깨달은 이세훈이 차분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서로 잡담을 떠들며 평범하게 도박을 하는 이들. 하지만 그 대화나 눈빛, 몸짓을 살펴보면 분위기가 다른 곳들이 몇 군데 있었다.
“예전이었으면 하루 종일도 할 수 있었을 텐데. 몸이 예전 같지가 않군그래.”
“그런가? 마침 섬에 내가 아는 가게가 있는데 원한다면 소개해 주지. 하루 쉬기에는 나쁘지 않아.”
이야기와 함께 테이블을 몇 번 두드리고 배팅을 가장하여 오가는 칩들.
그 자잘한 수신호 하나하나가 서로 간의 소개와 거래가 이뤄지고 있음을 실시간으로 이야기해 주었다.
‘대충 어떤 느낌인지 알겠네.’
수신호에 대해서는 류은하에게 대강 들었기에 구분하기 쉽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이 중에서 뭔가 있어 보이는 녀석들을 자신의 눈썰미로 찾아내는 것.
그렇게 이세훈이 카지노를 오가며 살펴보려던 그때.
“아아.”
묘하게 얄미운 목소리가 이세훈의 귓가에 들려왔다.
“도박하는 사람 어디 갔나?? 그림 맞추기나 다를 게 없는데 왜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리는지 모르겠네.”
“큭…….”
상대의 이죽거림에 중년 사내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바닥에 깔려 있던 자신의 카드를 연신 만지작거렸다.
여기서 배팅을 더 해야 할지 망설이는 모습. 그 반응에 맞은편에 앉은 상대, 새카만 흑발에 갈색 피부를 지닌 청년이 피식 웃어 보였다.
“그런다고 문양이 지워지겠어요? 지문이 닳으면 몰라.”
찰칵찰칵
붉은색 칩 두 개가 손안에서 현란하게 움직였고, 그 소리에 중년 사내가 몸을 부들부들 떨다가 소리쳤다.
“좀 닥치고 있어!”
블랙 암즈의 VIP 카지노에 내려온 만큼 중년 사내도 평범한 인물은 아니다.
치솟은 분노와 맞물려 거센 마력과 살의가 맞은편의 청년을 향해 매섭게 쏟아졌지만.
“흠.”
파앙─
청년이 튕겨낸 칩 하나에 흔적도 없이 무너져 내렸다.
“……!”
그 모습에 중년 사내가 무언가 깨달은 듯 흠칫거렸고 그 반응을 살핀 청년이 슬쩍 웃었다.
“워워. 진정하세요. 그냥 게임이잖아요.”
부드럽게 웃어 보인 청년이 턱을 괴더니 손가락 사이에 끼워져 있던 카드 두 장을 요령 좋게 뒤집으며 보여줬다.
클로버 A, Q. 그리고 테이블에 공개된 다섯 장의 카드 중 세 장은 클로버 K, J, 10.
“로열 스트레이트 플러쉬…….”
똑같은 문장과 순서대로 이어지는 숫자.
절대로 이길 수 없는 패에 중년 사내가 허탈한 표정으로 만지작거리던 카드를 놓아버렸다.
그리고 그 반응을 살핀 청년이 은빛을 머금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만족스럽게 웃어 보였다.
“물론 제가 이긴 게임이지만.”
이미 다 끝난 게임인데 애써 머리를 굴리던 모습이 상당히 유쾌했다는 듯, 그렇게 노골적으로 비웃는 청년.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악질과도 같은 그 모습에 이세훈이 두 눈을 휘둥그레 떴고.
‘……빙견?’
삼견 중 마지막 한 명, 아미르 싱이 카지노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