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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가 다 만들어줌-115화 (115/309)

회귀자가 다 만들어줌 115화

“그럼 준비하고 있을게.”

동행하자는 말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은 에리카가 돌아갔고, 그 뒷모습을 본 이세훈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같이 가자니 뭐니 해도 결국은 부려먹겠다는 건데…… 그것만으로도 좋은 건가?’

처음에는 무구를 안 만들어줘서 심통이 난 건가 했는데 아무래도 그보다는 자신을 따돌리는 듯한 상황에 더 신경이 쓰였던 모양이다.

‘정토석도 가져다 줬고…… 다음에는 무조건 만들어줘야겠네.’

에리카의 무구를 최우선순위로 정해두면서 이세훈은 집어넣었던 휴대폰을 꺼냈다.

‘이제 여기부터 분기점이구만.’

암시장, 블랙 암즈를 가기 위해서 이세훈에게 필요한 것은 정확히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자신을 지켜줄 수 있는 S급 이상의 호위. 두 번째는 자신을 블랙 암즈로 데려가서 안내해 줄 수 있는 암시장 전문가.

하나만 해당된 사람을 찾기도 까다로웠고 둘 모두를 충족하는 사람은 보기가 드물 정도였지만, 이세훈 주변에는 그 조건을 만족하는 사람이 무려 둘이나 있었다.

‘일단 익숙한 걸로 따지면 마광수겠지.’

S급인 데다 오랜 경력 덕분에 죽이는 일이든 보호하는 일이든 능숙하다.

거기에 마광수가 만들어낸 비공식 단체 ‘집행관’은 마인을 추적하기 위해 암시장과 같은 곳에 이 악물고 잠입하기 때문에 정보도 쉽게 얻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문제는 한 번이라도 들키는 순간 귀찮아진다는 점이네.’

마광수와 집행관은 마인을 죽일 때 협력한 이들 역시 문답무용으로 처리해 버리기 때문에 음지에서도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처럼 취급받았다.

그렇기에 이번에 동행했다가 만약에라도 그 정체를 들켰다가는 불가살을 물론 블랙 암즈가 곧장 해산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역시…….’

이번 일에 제격인 사람은 한 명밖에 없음을 다시금 깨달은 이세훈은 곧장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무뚝뚝한 목소리, 류은하의 물음에 이세훈이 진지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학과장님께 한 가지 상담 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 잠시 시간을 좀 내주실 수 있을까요?”

-전화로는 할 수 없는 이야기인가 보군요.

“예. 직접 만나서 조용히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음…….

이세훈의 대답에 류은하가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대답이 돌아왔다.

-곧 점심시간이니 제집에서 이야기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거기라면 조용히 이야기할 수 있을 겁니다.

“아. 그거 좋네요. 주소만 보내주시면 바로 가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집 앞에서 뵙겠습니다.

전화가 끊어지고 약속을 잡은 이세훈이 피식 웃으며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이 양반이 암시장 전문가인 건 예나 지금이나 안 어울린단 말이야.’

흔히 대중들 사이에 류은하의 이미지는 법을 준수하는 모범적인 영웅이며 실제로도 거기에 가까운 사고방식과 생활을 지내고 있었다.

하지만 딱 한 가지 그런 사고방식을 느슨하게 만드는 요소가 있었는데 그게 바로 ‘무구’였다.

‘나 때문에 바르무트 가문을 날려버리겠다고 말한 것도 그렇고 마음에 든 무구만 엮이면 바로 거침없어지니까.’

물론 만마전과 내통하거나 죄 없는 사람을 학살하는 등 일선을 넘지는 않지만, 세간에서 불법으로 규정된 일도 필요에 따라서는 신경 쓰지 않고 저지른다.

그리고 그 연장선으로 가지고 있는 취미 중 하나가 바로 블랙 암즈와 같은 암시장을 탐방하는 것이다.

‘회귀 전에 처음 만난 곳도 멕시코의 암시장이었지…….’

암시장에서 몰래 무구를 팔고 있는데 뜬금없이 류은하가 나타나 거래를 제안해서 얼마나 놀랐던가.

그때 반사적으로 망치를 휘둘렀다가 역으로 두들겨 맞고 입원한 상태에서 거래를 시작했는데 오랜 기억이지만 첫 만남인 만큼 기억이 선명했다.

‘그때 분명히 오래된 취미라고 했으니까 지금도 다니고 있을 게 분명해. 게다가 블랙 암즈는 만마전이랑 연결고리도 적고 유통되는 무구도 많으니 VIP일 수도 있고.’

즉 이번에 류은하의 협조만 받아낸다면 블랙 암즈를 안전하게 돌아다니면서 불가살에 대해 알아볼 수 있다.

어떻게든 잘 구슬려서 데리고 가보자고 이세훈이 막 다짐하고 있을 때.

우웅

진동과 함께 도착한 메시지. 류은하의 집 주소를 확인한 이세훈은 살짝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흐음. 바벨에서는 어떻게 하고 지내려나.’

회귀 전에는 매번 외곽지역에 집을 구했기에 삭막한 느낌이 없잖아 있었지만, 바벨은 그래도 도시 안쪽이니 다를지도 모른다.

택시 한 대를 부른 이세훈은 곧장 메시지에 적힌 주소로 향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거지역이 아니라 업무지구였네.’

바벨과 협력을 맺은 각종 기업과 길드의 사옥들이 자리 잡은 업무지구. 중앙광장에 인접해 있다 보니 보르시파의 본청과도 가까운 편이었다.

‘바벨에 작은 곳이 어디 있겠냐만…… 여긴 다른 의미로 크단 말이지.’

전 세계에서 알아주는 기업과 길드의 사옥이 한데 모여 있다. 그 사실만으로도 대단했지만, 더 놀라운 것은 해마다 이 구성원이 조금씩 바뀌고 있다는 점이었다.

바벨에서 책정한 막대한 임대료, 혹은 일정이상의 실적을 내지 못할 경우 계약조건에 의해 곧장 밖으로 퇴출당했기 때문이다.

‘더러워서 안 들어가기에는 아공간 터미널의 경유지라서 잠재력을 무시할 수 없고. 그야말로 슈퍼 갑질이지.’

생도와 교직원, 그리고 길드와 기업까지 바벨 안에서는 루트비히의 평가를 받아야만 머무를 수 있다.

이런 점을 보면 세상 사람들이 바벨을 승천제의 정원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리라.

“수고하세요.”

탕─

주소에 도착한 이세훈이 택시에서 내렸고, 바로 앞에 보이는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업무지구 구석진 곳에 자리 잡은 5층짜리 건물. 깔끔한 외관과 달리 아무런 간판도 없어 겉보기에는 지어진 지 얼마 안 된 빈 건물처럼 보였다.

“으음. 이건…….”

이세훈이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눈앞의 건물을 올려다보고 있을 때.

“이세훈 생도.”

한발 늦게 도착한 류은하가 고개를 꾸벅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업무가 살짝 남아 있어서 그것까지 처리하고 오느라 조금 걸렸습니다.”

“저도 방금 도착했는데요 뭘. 그보다…… 여기가 학과장님 집입니까?”

아무리 봐도 사람이 사는 곳처럼 안 보이는 건물. 그 물음에 류은하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렇군요.”

아직 안을 보지도 않았지만 대충 어떤 느낌일지 감이 온다. 이세훈을 힐끔 본 류은하가 헛기침하며 앞을 가리켰다.

“일단 들어가시죠.”

오른편에 있는 건물의 입구로 다가간 류은하가 옆에 붙어있는 패널에 손을 가져다 댔고, 잠금이 풀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양옆으로 열렸다.

“실례하겠습니다.”

류은하와 함께 건물의 안쪽으로 들어선 이세훈은 탁 트인 내부를 살펴보았다.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각종 무구 박스. 유명기업부터 시작해 중소규모의 공방까지 제조사들이 매우 다양했는데 집보다는 창고에 가까운 그 모습에 이세훈이 쓴웃음을 지었다.

‘바벨에서도 집을 창고처럼 쓰는 건 똑같았네.’

그나마 회귀 전에는 집 옆에 초대형 창고를 따로 만들어두고 사용했으니 그쪽이 조금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박스들을 가볍게 훑어본 이세훈은 이내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하며 물었다.

“전부 일반등급 무구들이네요?”

“예. 4층까지는 이렇게 층별로 등급을 나눠서 창고로 쓰고 있고 5층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층별로…….”

“올라가는 건 이 계단을 사용하면 됩니다.”

담담히 설명한 류은하가 현관 앞에 있던 계단을 올라갔고, 별도의 외벽이 없는 탓에 각 층에 도착할 때마다 내부의 모습이 훤히 보였다.

1, 2층은 등급이 낮다 보니 상자들이 종류별로 쌓인 상태였고, 3층부터는 큼지막한 철제진열장이 줄지어 놓여 희귀등급 무구들이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그리고 4층, 영웅등급의 무구들은 모두 개별적으로 장식장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그 수가 상당히 많았다.

“영웅등급 무구도 꽤 많네요.”

“예. 지금 보유하고 있는 건 총 89개입니다.”

영웅등급의 무구가 89개. 평범한 생도가 듣는다면 그야말로 깜짝 놀랄 양이었지만 이세훈은 큰 감흥이 없었다.

‘학과장을 하고 있어서 그런가. 얼마 없네.’

회귀 전에는 최소 100개 이상을 유지했었는데 아무래도 토벌을 잘 나가지 않는 만큼 비축분에도 여유를 두는 모양이다.

4층을 가볍게 훑어본 이세훈은 류은하의 뒤를 따라서 마지막 5층에 올라섰다.

“여기가 제집입니다.”

“…….”

아래와 마찬가지로 벽 하나 없이 뻥 뚫린 내부.

나름 장소를 구분하긴 하는지 침대와 책상, 식탁과 욕조 등등 가구들이 띄엄띄엄 놓여 있었지만 벽에 장판도 제대로 안 깔려 있다 보니 큰 의미가 없었다.

‘……회귀 전보다 심한데?’

그때도 인테리어에 큰 관심이 없긴 했지만, 여기는 아예 폐건물에 생활용품만 가져다 놓은 수준이 아닌가.

삭막함을 넘어서 무언가 결여된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이질적인 풍경에 이세훈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류은하가 살짝 멋쩍게 이야기했다.

“복잡한 걸 싫어해서 간단하게 꾸려놨습니다. 조금 이상하더라도 양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뭐…… 취향은 다양하니까요.”

어쨌든 있을 건 다 있지 않은가. 그리 생각한 이세훈은 곧장 화제를 돌렸다.

“일단 이야기하기 전에 점심부터 먹을까요?”

“알겠습니다.”

두 사람이 한쪽에 놓인 식탁으로 가서 앉았고, 류은하가 아공간 포켓에서 무구 두 개를 꺼냈다.

고급등급의 검과 활, 양산형이라 별다른 특이점은 없었는데 굳이 비유하자면 삼각김밥과 라면 같은 느낌이었다.

“음. 학과장님.”

“……말씀하시죠.”

무언가 기대감이 담긴 눈으로 바라보는 류은하. 그 모습에 이세훈이 상대가 기다리고 있을 말을 꺼냈다.

“이번에 괜찮은 스킬이 생겨서 그런데 괜찮으시다면 무구의 맛에 대한 실험을 해봐도…….”

“얼마든지 하셔도 됩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점심을 넘겨주는 류은하. 그 모습에 이세훈이 슬쩍 웃으며 건네받은 검과 활에다가 언령각인을 사용했다.

“<예기강화>, <명중보정>…….”

우웅!

무구의 겉면에 착 달라붙는 언령각인.

이전에 사용했던 ‘언령 : 부여’보다 쉽게 달라붙을 뿐만 아니라 활성화를 통해 원하는 기능만 사용할 수 있어 서로 충돌을 일으키는 효과도 얼마든지 넣을 수 있었다.

‘전투 중에 충격을 받아서 지워질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초반에는 강하게 밀어붙일 수 있겠는데.’

처음에는 가볍게 할 생각이었지만 어느새 검과 활에 언령각인이 빽빽하게 들어찼다.

그리고 무구의 중심을 무너트리지 않는 선에서 한계까지 쑤셔 넣은 이세훈이 완성된 무구를 다시 건넸다.

“여기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보물이라도 건네받는 것처럼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아가는 류은하. 그리고 검과 활을 내려다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군침을 삼켰다.

“그럼…… 잘 먹겠습니다.”

콰드득─콰득!

가장 먼저 먹는 것은 언령각인이 새겨진 검.

아껴 먹겠다는 듯 잘게 씹어 먹었는데 그 맛을 느낀 류은하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

한 번 씹을 때마다 머리카락 끝이 살짝 주홍빛으로 물들며 일렁이고 이내 눈 깜짝할 사이에 검 한 자루가 사라진다.

남은 맛까지 모조리 음미한 류은하는 조금 들뜬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뭔가 굉장히 자극적인 맛이군요. 마치 여러 가지 토핑을 다양하게 넣어둔 것 같습니다.”

라면에다가 청양고추와 계란, 대파와 콩나물 등 여러 부재료를 섞어서 보다 깊은 맛을 낸 느낌.

꽤 마음에 들었는지 류은하는 맛평가를 끝내자마자 활을 씹어먹기 시작했고 그 모습에 이세훈이 자신도 모르게 씩 웃어 보였다.

“마음에 드세요?”

“아주 맛있습니다. 점심마다 이런 걸 먹을 수 있다면 업무에 더 집중을…… 크흠. 아닙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혹여나 매일 만들어달라는 뜻으로 들렸을까 봐 곧장 정정하는 류은하. 그 모습에 이세훈은 기회가 왔음을 깨닫고 입을 열었다.

“만들어드릴 수도 있어요.”

“…….”

활을 먹던 류은하의 움직임이 일순간 멈췄고, 이내 두 눈이 천천히 이세훈을 바라보았다.

“정말이십니까……?”

“안 될 건 없죠. 금방 만드는 거 보셨잖아요.”

“그래도 매일 하는 건 귀찮으시지 않겠습니까. 방금 한 말 때문이라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대신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류은하를 바라본 이세훈이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암시장, 블랙 암즈라는 곳에 저를 데려가…….”

“안됩니다.”

이세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류은하가 단칼에 거절했고, 방금까지 풀어졌던 얼굴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냉정하게 변했다.

“어디서 그런 이야기를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그곳은 일개 생도가 갈 곳이 아닙니다. 하물며 이세훈 생도처럼 세간에 주목을 받고 있는 유망주라면 더더욱.”

“하지만…….”

“이번만큼은 절대로 허락할 수 없습니다.”

회귀 전의 류은하가 생각날 만큼 쌀쌀맞은 태도. 그 예상치 못한 반응에 이세훈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진짜 만족했으면 류은하가 이렇게 거절할 리가 없는데…… 아, 잠깐. 설마 내가 생도라서 그런 건가?’

회귀 전에야 이미 현역인 상태에서 만났으니 어떤 부탁을 하든 결국 자신의 책임인 법. 하지만 지금 자신은 이제 막 성장하기 시작한 생도에 불과했다.

즉 제정신이 박힌 교육자라면 아무리 좋은 조건을 제시한다고 해도 암시장처럼 흉흉한 장소로 데려가 주겠다고 말할 리가 절대로 없는 것이다.

‘그래도 진짜로 맛있었다면 눈 돌아가서 데려다줬을 텐데…… 실력 부족이구만.’

무구를 미끼로 부탁하는 것은 아무래도 어려워 보인다. 어떻게 류은하를 설득할지 잠시 머리를 굴리던 이세훈은 이내 다른 방법을 떠올렸다.

“이 이야기는 이제 그만…….”

“중학생 때.”

류은하의 말을 자른 이세훈이 슬쩍 시선을 내린 채 이야기했다.

“학교를 마치고 밤늦게 돌아가는데 저희 집 대문 앞에 피투성이로 쓰러져 있던 남자랑 만났었습니다.”

“…….”

“그때는 아무것도 모르던 때라 깜짝 놀라서 구급차를 부르려니까 그 사람이 괜찮다고, 마실 게 있으면 그거나 좀 달라고 하더라고요. 나중에 꼭 사례를 하겠다고.”

흐릿하면서도 결코 지워지지 않는 기억. 그 순간을 되새기며 이세훈이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래서 가방에 넣어둔 텀블러를 꺼내서 줬는데…… 그 뒤에 협회소속의 영웅이 나타났습니다. 알고 보니 그 피투성이의 남자가 ‘불가살’이라고 불리는 A급 마인이었거든요.”

“……!”

계속되는 이야기에 류은하가 무언가 깨달은 듯 두 눈을 휘둥그레 떴고, 이세훈이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 보았다.

“그 직후의 기억은 없습니다. 벽돌 파편에 머리를 맞아서 기절해 버렸거든요. 그리고 나중에 정신을 차렸을 때는…… 모든 게 끝나 있었죠.”

불가살을 죽이려 했던 영웅은 사지가 뜯겨 나가 죽었고, 둘이 벌였던 전투의 여파로 인근의 건물이 모두 무너졌다.

그리고 저녁을 차려놓고 자신이 오기만을 기다리던 부모님은 그 잔해에 깔려 짓뭉개져 버렸다.

“그때 살아남은 게 저 한 명뿐이었는데…… 그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

“물 때문이었어요. 그놈한테 건네줬던.”

무너진 건물의 잔해와 그 아래에 깔린 시체. 그 비현실적인 풍경 위에 서 있던 사내, 불가살은 자신을 바라보며 담담히 이야기했었다.

‘너는 살려주마. 그리 약속했으니까.’

앞서 건네준 텀블러. 그때 약속한 사례로 불가살을 자신만 살려두고 그렇게 떠나갔다.

오랜만에 그 기억을 처음부터 떠올린 이세훈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아주 웃기는 새끼였지.’

코흘리개 중학생에게 물 한 모금 받아먹었다고 영웅과 싸우는 와중에 꾸역꾸역 자신을 살려놓다니. 그야말로 어처구니가 없는 놈이었고, 그래서 더 미쳐 버릴 것 같았다.

그딴 놈에게 부모님이 허무하게 죽임당했다는 사실이 너무 억울했고, 그딴 놈이 결과적으로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은인이라는 사실에 너무 화가 나서.

“조금 이야기가 샜는데…… 아무튼 지금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그거에요. 그놈이 블랙 암즈에 나타났다는 것.”

“…….”

“물론 학과장님에게 그놈을 죽여 달라는 건 아닙니다. 다른 건 몰라도 그놈은 무조건 제힘으로 잡아 죽여야 속이 풀릴 것 같거든요.”

말이 그렇지 지금은 그렇게까지 절박하진 않았지만, 회귀 전의 이때는 정말로 그랬었다.

아마 그때 당시의 자신이라면 불가살이 다른 사람에게 토벌당하기만 해도 화병으로 죽어버렸을지도 모르리라.

“그러니까 그놈이 거기서 뭘 하는지…… 그리고 아직 살아 있는지만 확인하게 해주세요. 그것만 확인하면 얌전히 돌아올게요. 앞으로 말도 잘 듣고요.”

자신에게는 이미 수십 년 전의 과거이지만,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불과 몇 년 전의 과거다.

이 이야기를 듣고도 과연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사람이 과연 어디에 있을까.

‘류은하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지만…….’

여기서는 자신의 무구가 류은하의 감정을 풍부하게 만들었기를 빌 수밖에 없다.

그렇게 이세훈이 간절하게 대답을 기다렸고.

“……후우.”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뜬 류은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블랙 암즈 내에서는 제 지시를 최우선으로 따를 것. 무슨 일이 있어도 정체를 드러내지 않을 것. 대상을 확인하는 즉시 귀환할 것.”

“학과장님……!”

“그리고 마지막.”

안도한 이세훈을 바라본 류은하가 타협은 없다는 듯이 엄격한 눈으로 이야기했다.

“야근하는 날에는 저녁 도시락도 만들어줄 것. 이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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