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가 다 만들어줌 112화
상아탑에서의 소동이 끝난 뒤.
스피어를 사용하여 폭발을 막아내고 상아탑을 초토화시킨 레아는 곧장 레베카에게 제압당했다.
“아니, 나 멀쩡…….”
짜악!
“그런 미친 짓을 해놓고 뭐가 멀쩡해! 잔말 말고 따라와!”
“악! 이게 더 아파!! 후배 살…….”
등짝을 맞고 귀를 붙잡힌 레아는 순식간에 병동으로 끌려갔고, 이세훈과 루이제는 조사를 위해 우르의 본청으로 향했다.
아무리 상아탑이 별개로 운영되는 재단법인이라 할지라도 바벨의 생도들이 이용하는 시설. 큰 사고로 번질 수 있었던 만큼 즉각 조사에 나선 것이다.
“혹시나 오해할까 싶어서 말하는 거지만 너희 두 사람을 의심해서 심문하려는 게 아니다.”
본청으로 인솔하면서 덩달아 조사까지 맡게 된 사내, 란 페이가 맞은편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어디까지나 상황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너희들이 발견했던 의문점이나 그런 부분들을 우리도 파악하고 추후 조사에 살펴보려는 거니까. 알겠나?”
혹시라도 오해를 살까 봐 퀭한 얼굴을 최대한 부드럽게 풀면서 이야기하는 란 페이.
그 모습에 이세훈이 슬쩍 주변을 살폈다.
‘확실히 별다른 의도는 없어 보이네.’
만약 정말로 자신들을 의심하고 있었다면 심문에 사용하는 설비 몇 가지 정도는 준비해 뒀을 터.
하지만 방 안에는 기본적인 방호설비만 갖춰져 있었고 심지어 장소 역시 손님들을 상대하는 응접실이었다.
별다른 문제가 없는 것을 확인한 이세훈이 대표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좋아. 그러면 우선 처음부터 짚어 가보지. 폭주가 막 일어났을 때 레아 클로델 생도에게 바로 달려갔었는데 어째서…….”
란 페이는 상아탑에서 있었던 몇몇 행동들에 대해서 물었고, 두 사람은 있었던 일을 그대로 설명했다.
레아의 제출품인 스피어가 위험성을 알고 있었기에 막았고, 그 이후에는 이세훈의 제안으로 사건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아 행동했다.
어떻게 보면 생도들끼리 무모하게 일을 벌였다고 할 수도 있었지만 그 덕분에 사태가 잘 해결되었기에 뭐라고 나무랄 수가 없었다.
‘실제로 세 사람…… 특히 이세훈이 즉각 움직이지 않았다면 지금보다 훨씬 피해가 커졌겠지.’
노트북으로 이야기를 받아 적던 란 페이는 문득 궁금해진 표정으로 이세훈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은 어떻게 얻었지? 마도학부의 교수로서 이런 말을 하는 것도 부끄럽지만 내가 보기에도 쉽지 않아 보였는데.”
폭주를 일으키는 제출품들을 부품으로 사용해서 과잉공급된 마력을 제어하는 기계로 만들어낸다.
도중에 갑작스러운 폭발로 실패하긴 했으나 그전까지는 자신도 흠잡을 곳이 없을 만큼 완벽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아무리 제련학부라 해도 벌써부터 술식병장에 대한 이해도가 높기는 힘들 터.’
특히 시험장에 있었던 제출품들은 제련학부보다는 마도학부에서 취급하는 계열이 더 많았기에 좀처럼 믿기지가 않았다.
그런 의문이 담긴 물음에 이세훈이 잠시 고민하다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냥 슥 보니까 알겠더라고요.”
“……그게 다인가?”
“뭐…… 그렇죠?”
정확히 말하자면 회귀 전에 처음으로 폭견한테 무구를 만들어주고 ‘너 술식병장 더럽게 못 만드네’ 한마디 듣고 자존심이 상해서 관련 자료를 마구잡이로 뒤져본 덕분이지만, 그런 괴팍한 경험을 털어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렇기에 이세훈은 아주 간단한 대답을 내놓았다.
“제가 좀 다재다능하게 천재라서요.”
아무튼 천재고, 다 안다.
학과수석이자 영웅 업계에 주목받고 있는 유망주이기에 당당하게 할 수 있는 말이었고.
“진짜 꿀밤 마렵네…….”
옆에서 듣고 있던 루이제가 진심으로 재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렇군. 알겠다.”
이세훈의 이야기에 란 페이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들였다.
다른 생도였다면 헛소리로 치부하고 넘겼겠지만 이세훈에게는 충분히 그 이야기를 뒷받침할 활약상과 결과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학원장님이 눈여겨보신다는 소문도 돌고 있으니까.’
이세훈은 엄청난 천재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란 페이가 마지막 질문으로 넘어갔다.
“그럼 자네가 스피어를 조작한 다음에 폭발이 일어났던 건 어떻게 된 건가?”
“갑자기 이상한 마력 파동이 느껴져서 그걸 막아낸다고 그랬습니다. 아마 레아가 이야기한 비상 엔진을 폭주시킨 술식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군. 확실히 그 직후 곧장 폭발이 일어났었지.”
자신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이세훈은 현장에서 있었으니 시야가 다를 수밖에 없다.
그 이외에도 자잘하게 몇 가지 질문을 한 란 페이는 모든 답변을 작성한 다음 자리에서 일어섰다.
“조사는 이 정도면 충분하겠군. 생도들의 목숨을 구한 일이니 보고가 올라가면 너희들에게도 약소하게나마 보상이 주어질 거다. 정리되는 대로 연락해 주지.”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나가지.”
본청의 로비까지 배웅을 받은 이세훈과 루이제가 그대로 고개를 꾸벅이며 나가려던 그때.
“아. 이걸 잊었군.”
란 페이가 덧붙이듯이 이야기했다.
“너희들 덕분에 나도 무사히 나올 수 있었다. 고맙다.”
명색에 교수니 제 한 몸 정도는 지킬 수 있었겠지만, 그렇다고 도움을 받지 않은 것은 아니다.
감사를 표한 란 페이가 안으로 들어갔고 루이제가 그 뒷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괜찮은 사람이네.”
“그러게 말이야.”
실력도 나빠 보이지 않으니 자신이 모를 뿐이지 어쩌면 회귀 전에도 나름 이름을 알렸던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다음에 란 페이가 어떤 인물인지 알아보기로 생각하며 이세훈이 고개를 돌려 루이제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이제 어쩔래?”
“그건 내가 물어봐야지. 이번에는 이걸로 끝낼 거야? 표정 보니까 제대로 한 방 먹인 거 같던데.”
상아탑의 관계자가 찾아오자 문제가 생겼다며 곧장 떠난 찰스. 남들이 보기에는 그냥 관계자라서 그런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정을 알고 있는 둘의 눈에는 달랐다.
잠깐이지만 표정 관리가 안 될 만큼 극심한 타격. 지금 어떻게든 몰아넣는다면 찰스를 확실히 보낼 수 있겠지만.
“이번에는 여기서 끝내는 게 좋아.”
이세훈이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기까지는 저쪽에서 여지를 줬으니까 문제없지만, 이 이상 파고드는 건 평범한 생도가 보일 반응이 아니니까.”
“쯧…… 모처럼 빈틈이 생겼는데 좀 아깝네.”
비실거리는 게 눈에 보이는데 때리지를 못한다니. 루이제가 아쉬워하자 이세훈이 피식 웃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이번 일을 그냥 넘길 만큼 바벨이 바보들은 아니니까.”
주시자라는 거대한 몸통을 알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바벨을 위협하는 누군가의 ‘꼬리’가 드러나면 엉덩이까지 같이 작살 낼 정도는 된다.
아마 이번 일로 상아탑 내부에서는 물론 바벨 안에서도 『여명』의 영향력이 상당히 줄어들게 되리라.
“그렇다면야 뭐, 오늘은 돌아가서 쉬어야겠네. 아까 무리했더니 지금 뻐근해 죽겠어.”
눈매를 찌푸리며 목과 팔을 돌리는 루이제. 그 넓은 시험장의 마력을 혼자서 통제했었으니 어떻게 생각해 보면 피곤한 정도에서 끝난 게 대단한 일이었다.
“고생했다. 오늘 네 덕분에 살았어.”
빈말이 아니라 루이제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렇게 매끄럽게 상황을 해결하진 못했을 것이다.
진심이 담긴 이세훈의 감사에 루이제의 눈동자가 살짝 떨리더니 슬쩍 시선을 피했다.
“알면 잘해. 일 있을 때만 불러서 부려먹지 말고.”
“크흠.”
까칠한 루이제의 대답에 이세훈이 헛기침을 하며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듣고 보니 근래 루이제를 불러서 한 일들이라고는 죄다 무구를 만들거나 선발 대회를 준비하는 등 부려먹은 것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살짝 찔리긴 하네.’
다음에 시간 내서 챙겨주기라도 할까. 그런데 뭘 어떻게 챙겨줘야 할지 이세훈이 고민하고 있을 때.
“그래도 뭐.”
힐끗 본 루이제가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오늘 일은 나쁘진 않았어.”
“……그래? 그냥 귀찮았을 줄 알았는데.”
“귀찮기야 했지. 내가 왜 이런 짓을 해야 하나, 저놈 때문에 개고생하네 같은 생각도 들었고.”
예전의 자신이라면 마지못해 나섰어도 원치 않은 일에 휘말렸다고 짜증만 났을 것이다.
‘가,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어.’
‘고맙다.’
하지만 자신에게 도움을 받은 이들이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을 때. 왠지 모르게 마음속에 느껴지던 짜증이 누그러졌다.
어째서 자신이 이렇게 변한 것일까. 그 대답은 굳이 고민해 보지 않아도 금방 알 수 있었다.
“근데 의외로 괜찮더라고.”
피식 웃은 루이제가 모든 원흉인 이세훈을 바라보았다.
“누구처럼 사람 도와주는 것도.”
[대상 ‘루이제 발렌트’를 바르게 인도했습니다.]
[대상 ‘루이제 발렌트’에게 인연석이 생성됩니다.]
“…….”
눈앞에 떠오른 알림창.
그 내용과 방금 이야기에 이세훈이 멍하니 바라보자 루이제 돌연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나 간다! 다음에도 일만 시키면 죽을 줄 알아!!”
퍽!
어깨를 세게 때린 루이제가 저 멀리 달려서 도망갔고,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이세훈이 피식 웃었다.
“진짜 세상 오래…… 아니, 두 번 살고 볼 일인가.”
다른 누구도 아닌 폭견이 모르는 사람을 돕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이야기하다니.
아마 당사자가 보면 비명을 내지르면서 목격자를 모조리 터뜨려서 죽이려고 하지 않을까.
“푸흐흐.”
그 우스꽝스러운 생각에 이세훈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고, 어째선지 평소보다 가벼워진 걸음으로 걸어나갔다.
* * *
불이 꺼진 연구실의 안.
별빛이 들어오는 창가의 바로 옆에 의자를 가져다 놓은 찰스가 어두컴컴한 내부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
어떠한 생각도, 목적도 없이 그저 시간만을 보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새벽이 끝나며 저 멀리 지평선으로부터 ‘여명’이 찾아온 순간.
우우웅─
창가를 통해 들어온 여명의 빛이 연구실 전체에 펴졌다.
본래 조교들이 사용하는 빈 책상. 거기에 차오른 빛이 조금씩 형상을 갖추더니 이내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의 형상으로 띤 네 개의 빛. 마네킹처럼 전체적인 외관은 동일했지만, 그들에게는 각각 차이점이 있었다.
왼팔과 오른팔. 눈과 몸통. 그리고 두 다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깔끔하게 도려내져 있었던 것이다.
그 기괴한 모습을 찰스가 가만히 보고 있을 때.
[찰스.]
왼팔이 없는 빛으로부터 머릿속에 뜻이 전해졌다.
[승천제의 정원에서 움직일 때는 분명 신중을 기울이라고 했을 텐데. 네놈의 욕심으로 지금 얼마나 큰 피해를 입었는지 알고 있나?]
분노가 느껴지는 상대, 좌완의 추궁에 찰스가 담담히 대답했다.
“필요로 했던 일입니다.”
[필요? 어처구니가 없군.]
헛웃음을 터뜨린 좌완이 분노와 적의를 담아 찰스에게 자신의 뜻을 쏟아부었다.
[네놈의 그 필요 때문에 몇 년에 걸쳐 바벨에 연결해 둔 공급망의 절반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 남은 절반조차 지금은 의심의 눈초리를 받고 있지.]
“…….”
[자칫 잘못하면 상아탑의 장악에도 지장이 생길 만큼 큰 문제를 일으켜놓고 필요했다라…… 도대체 뭐가 그렇게 필요했었는지 궁금하군. 어디 한번 말해봐라.]
좌완의 추궁을 말없이 듣고 있던 찰스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새로운 ‘리전region’의 후보들을 찾아냈습니다.”
[……!]
찰스의 이야기에 침묵을 지키던 빛들에게서도 동요가 흘러나왔고, 이내 좌완이 다시 물었다.
[누구지?]
“루이제 발렌트와 이세훈. 각각 ‘목소리’와 ‘심장’에 자질을 보였습니다.”
[허. 목소리에 심장이라니.]
[그렇게 찾아도 보이지 않던 후보들이 하필 바벨에서 같이 나타났다고? 농담이 좀 심한 거 같은데.]
오른팔이 없는 빛, 우완의 믿기지 않는다는 물음에 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한 것은 직접 보신다면 아실 겁니다.”
찰스가 두 눈을 감았고, 그의 안쪽 깊은 곳에서부터 녹빛의 마력이 모습을 드러냈다.
콰드드득
전신에 내린 뿌리와 어디론가 연결되는 감각. 그리고 잠시 후 곳곳의 빛들로부터 탄성이 흘러나왔다.
[아니, 진짜잖아. 둘 다 재능은 충분한데?]
[정화! 심장의 정화는?!]
몸이 없는 빛, 그릇이 흥분하며 소리치자 찰스가 공손히 대답했다.
“심장은 아직 기회가 없어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목소리는…… 이전에 정화 후 동화까지 이어지고 있었다던 그 아이로군요. 루이제 발렌트였던가요?]
“맞습니다.”
찰스의 대답에 두 다리가 없는 빛, 발걸음이 감탄했다.
[그럼 그 아이는 이미 확정된 것이나 다름없군요. 왜 그렇게까지 했었는지 알겠어요.]
자신들 역시 ‘그분’의 일부를 받아들이고 마법의 진리에 다가섰지만 그래 봐야 신체의 말단.
의사를 전달하고 생명을 상징하는 목소리와 심장에 비한다면 자신들은 리전이라고 표현하기에도 부끄러울 정도였다.
그런데 그 귀중한 후보를 찾아냈으니 그까짓 공급망 따위 전혀 아까울 게 없었다.
[심장.]
두 눈이 비어 있는 빛, 눈이 찰스를 바라보았다.
[이미 확정된 목소리보다 그쪽이 더 중요하겠구려.]
[하지만 그 이세훈이라는 아이는 조금 위험하지 않나요? 승천제는 물론이고 엮여 있는 S급이 한둘이 아니에요.]
[듣기로는 인형사와 조율자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데. 그 미친놈들이면 갑자기 우리랑 싸우려고 해도 안 이상하지.]
[정화! 빨리 정화시켜 줘!]
빛들의 의사가 머릿속에서 동시에 얽혔고 거기에 찰스가 눈매를 살짝 찌푸리면서도 천천히 입을 열었다.
“거기에 한 가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뭐지?]
“인형사에게서 협력 제안이 왔었습니다.”
[인형사한테서?]
의아해하는 빛들의 모습에 찰스가 다시 녹빛의 마력을 끌어올리며 저녁에 있었던 만남을 떠올렸다.
‘너 운이 좋네.’
상아탑에서의 일을 수습하고 돌아가던 길. 갑자기 자신을 찾아온 검푸른 머리칼의 청년, 보르시파의 3학년 학과 수석인 하워드 그랜트.
‘원래 죽여서 돕게 만들 생각이었는데…… 옛날 기억이 나서 기분이 조금 좋아졌어. 그러니까 특별히 제안을 할게.’
그, 아니, 그의 몸을 빌려서 이야기한 인형사가 불길한 미소를 지었다.
‘너희도 같이 정원 한번 안 털어볼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