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가 다 만들어줌 104화
고대인챈트학의 강의실.
한쪽 책상에 나란히 앉은 이세훈과 레아가 긴장한 표정으로 맞은편을 바라보았다.
“…….”
한쪽 눈에 단안경을 낀 채 말없이 설계도를 살펴보는 레베카. 그렇게 한참 시간이 지나더니 천천히 입이 열렸다.
“정말로…… 검기를 만들어내는 인챈트군요…….”
최대한 감정을 억눌렀는데도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린다.
손에 쥐어진 설계도, 검기를 만들어내는 인챈트에 레베카는 감탄을 넘어서 경악스러웠다.
‘공용작업실에 이상한 짓을 한다길래 뭔가 했는데…… 설마 이런 인챈트를 만들고 있었다니…….’
각각 10조각으로 나눠진 술식을 3겹으로 쌓아서 완성한 인챈트.
그 형태만 해도 대단했지만 레베카가 무엇보다 놀란 것은 바로 30개의 조각에 만들어진 유기적인 연결구조였다.
‘인챈트가 부여된 물체의 특성에 맞춰서 각 조각의 연결구조가 바뀌고, 그 결과 마력이 최적의 효율로 압축된다.’
일정이상의 마력만 불어넣는다면 무조건 검기가 만들어지게끔 술식의 구조를 바꿔 버리는 인챈트.
작업 과정이 워낙에 복잡하다 보니 범용성은 조금 떨어졌지만 이런 복잡한 방식이 성립되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다.
‘연결패턴을 좀 더 늘리기만 하면 충분히 호환율이 올라가 양산형 인챈트로 인정받을 수 있어. 즉…….’
그 누구도 해내지 못했던 검기 양산화라는 대업을 자신의 손녀가 성공하게 되는 것이다.
그 사실을 확인한 레베카가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레아를 바라보았다.
“이 인챈트 술식을 만든 게 정말 너니?”
“……저 말고 누가 이런 걸 만들겠어요.”
긴장하면서도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하는 레아.
평소 같았으면 우쭐대지 말라고 혼쭐을 냈겠지만, 이번만큼은 레베카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그렇구나.”
인챈트 실력을 떠나서 바라보는 시야 자체가 다르다.
자신이라면 절대로 만들어낼 수 없었을 인챈트. 레아의 재능을 다시금 느낀 레베카는 설계도를 돌려주며 물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라는 게 뭐니?”
“이거 구상하느라 엄청 힘들기도 했고…… 이 정도면 슬럼프가 해결된 증거로도 충분한 것 같거든요. 그러니까…….”
레베카의 눈치를 살피던 레아가 조심스레 이야기했다.
“특기생 선발 대회에 관련된 내기는 없던 걸로…….”
“안 돼.”
고민할 필요도 없다는 듯 딱 잘라 대답하는 레베카. 그 모습에 레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가 애써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했다.
“너무 그렇게 딱 잘라 말씀하지 마시구 조금만 생각을…….”
“내가 아무런 생각도 없이 말했다는 거니?”
“그런 뜻이 아니라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해 보시라는 거죠.”
“신중하게라…….”
두 눈을 지그시 감은 레베카가 3초 정도 생각하더니 다시 눈을 뜨며 대답했다.
“안 돼.”
“……안 되긴 뭐가 안 돼!!”
콰앙!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레아가 두 손바닥으로 책상을 내려찍으며 소리쳤다.
“다른 것도 아니고 검기잖아! 옆에 후배가 조금만 도와주면 양산까지 가능한, 무구 산업의 대업 중 하나를 해결한 거라고! 그런데 그걸 그깟 특기생 선발 대회랑 비교해?”
“…….”
“애초에 내 재능이 한계에 부딪혔는지 시험해 보는 의도라며! 한계를 넘었으니까 그냥 잘했다, 앞으로도 열심히 하렴 하고 허락하면 되잖아! 그런데 왜 안 된다는 건데!!!”
쾅쾅!
답답해 미치겠다는 듯 책상을 두들기며 소리치는 레아. 그 모습에 레베카가 조용히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것도 맞는 말이구나.”
“그러면…….”
“하지만 약속은 약속이란다.”
흔들림 없는 눈으로 레아를 바라본 레베카가 왼손 검지에 낀 아공간 반지에 마력을 불어넣어 한 물건을 꺼냈다.
후웅
깔끔하게 코팅되어 있는 종이. 딱 봐도 중요해 보이는 종이에 말없이 앉아 있던 이세훈이 내용을 슬쩍 훑어보았다.
[서약서]
나 레아 클로델은 이번 상아탑 특기생 선발 대회에서 3학년 특기생으로 뽑히지 못할 경우 어떠한 변명도 하지 않고 바벨에서 자퇴한 뒤 본가로 돌아갈 것을 맹세합니다.
‘서약서인가…… 골치 아프구만.’
저주를 응용해서 만들어진 물건으로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경우 제약을 가하는 물건.
물론 행동을 강제시킬 만큼 강력하지는 않지만 마력제어 같은 세밀한 행동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그냥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여기에 네가 직접 적었잖니. 특기생으로 뽑히지 못한다면 어떠한 변명도 하지 않고 본가로 돌아가겠다고.”
“그렇게 적긴 했지만 맥락은 그게 아니잖아!”
“맥락이라…….”
레아의 이야기에 레베카가 담담히 물었다.
“그럼 바벨에 입학할 때 했던 약속도 맥락에 따라 고쳐도 되겠구나.”
“그, 그건…….”
거세게 반발하던 레아의 말문이 처음으로 막혔고, 책상을 두들기던 두 손이 꽉 쥐어진 채 파르르 떨렸다.
그리고 한참 동안 입술을 달싹이는가 싶더니 눈매를 일그러뜨리며 버럭 소리쳤다.
“나도 몰라!!”
콰앙!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이 강의실 밖으로 뛰쳐나가는 레아. 그 뒷모습을 바라본 레베카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다른 때 같았으면 평범하게 기뻐했을 일이 어쩌다가 이렇게 된 것일까. 지끈거리는 머리에 눈매를 매만지던 레베카가 앞을 바라보았다.
“안 쫓아가나요?”
“그래봐야 바벨 안일 텐데요 뭘.”
바벨 밖으로 도망치는 건 어떤 의미에서 레베카 뜻대로 되는 걸 테니 그럴 리도 없다.
심드렁한 이세훈의 대답에 레베카가 살짝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전에도 느꼈지만…… 뭔가 이상한 애야.’
검기 양산화를 같이 준비하고 있다는 것도 그렇고, 레아를 슬럼프에서 이끌어내 저런 인챈트를 만들게 한 것도 그렇고 아무리 봐도 평범하지가 않다.
고마우면서도 원망스러운 행동에 레베카가 복잡하게 바라보고 있을 때.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만.”
이세훈이 궁금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혹시 레아의 재능이 너무 뛰어나서 본가로 돌려보내시려는 겁니까?”
“…….”
예상치 못한 질문에 레베카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고, 어떻게 대답할지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티가 났나요?”
“너무 뛰어나도 사는 게 피곤하다는 걸 최근에 깨달았거든요.”
세계적으로 주목받는다는 것은 결국 만마전에게 주목받는 것이나 마찬가지니 가족, 그것도 영웅으로 활동해 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걱정할 수밖에 없다.
‘이쪽은 그것 말고도 있는 것 같지만.’
이전에 몽환규도를 통해 빙견이 쌓아둔 자료를 살폈을 때. 이세훈은 레아와 관련된 정보도 발견했었다.
[갤럭시 컴퍼니의 레아 클로델 사장. 십악 중 인형사와 은원관계 존재. 세부사항 확인 필요.]
회귀 전 어느 날 갑자기 행방불명된 레아.
그때는 흔히 있는 만마전의 암살이라고 추측했었지만, 몽환규도에서 얻은 정보가 사실이라면 새로운 추측이 가능했다.
‘레아가 인챈트에 매달렸던 이유가 인형사에게 복수하는 것이라면…….’
지금 저렇게 초조해하는 것도, 레베카가 레아를 본가로 돌려보내려는 것도 어느 정도 설명이 된다.
이세훈이 어느 정도 확신을 하고 있을 때. 잠시 고민하던 레베카가 진지하게 물었다.
“이세훈 생도. 레아를 설득해 줄 수는 없나요?”
“흐음…….”
“검기 양산화나 그런 걸 막으려는 건 아니에요. 그냥…… 레아가 스스로 자립할 수 있을 때까지, 그때까지만 바깥에 드러내지 않고 보호하려는 거예요.”
걱정만큼이나 두려움이 깊게 느껴지는 목소리.
초조해 보이는 레베카의 모습에 이세훈이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는 레아의 뜻을 존중하고 싶습니다.”
“……그렇군요.”
어느 정도 예상했다는 듯 씁쓸하게 중얼거린 레베카가 한결 차분해진 눈으로 바라보았다.
“거기까진 저도 말리지 않겠어요. 하지만 레아가 약속을 어기는 것을 돕겠다면…… 저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
“그 뜻도 존중하겠습니다. 그럼…….”
레아가 놓고 간 설계도를 챙긴 이세훈이 고개를 꾸벅이며 강의실 밖으로 나갔고, 홀로 남은 레베카가 의자에 몸을 기대며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리고 두려움과 그리움이 담긴 목소리로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레이나…….”
***
“거기서 한참 전 이야기를 끌고 오는 게 어디 있어? 그리고 할머니는 재능이 없으니까 돌려보내겠다고 확실히 말했었지만 나는 예전에 그런 말 안 했었다고!!”
퍽퍽!
답답해 죽겠다는 듯 침대에 엎드려 누운 채 매트리스를 주먹으로 마구 두들기는 레아.
의자에 앉은 채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세훈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그때 바로 그렇게 말했어야지.”
“……몰라!!”
퍽퍽!
애꿎은 매트리스만 마구잡이로 두들겨 패는 레아. 그 모습에 이세훈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주변으로 시선을 돌렸다.
‘공방이라길래 더러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단 깔끔하네.’
보르시파의 상점가에 인접한 곳에 있는 작은 주택.
가정용으로 만들어진 집을 공방으로 개조해서 쓰고 있었는데 이세훈이 생각했던 것보다는 깔끔했다.
책상에는 각종 설계도와 책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긴 했지만 팔을 올린 공간은 남아 있었고, 바닥도 이런저런 잡동사니들이 떨어져 있긴 했지만 걸을 공간은 남아 있는 것이다.
‘난잡하긴 하지만…… 더럽지는 않다는 느낌이구만.’
예상한 것과 다른 내부의 모습에 이세훈이 찬찬히 살펴보고 있을 때. 탁자 위에 놓인 액자가 눈에 들어왔다.
‘저건…….’
젊은 사내와 어린 아이가 찍힌 사진.
딱 봐도 레아가 어릴 때 찍은 가족사진으로 보였는데 이세훈은 그중에서 아버지로 보이는 사내의 어깨를 살폈다.
‘보아하니 어머니 손 같은데…… 왜 안 보이게 해둔 거지?’
저런 사진 밖에 없는 걸까, 아니면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일까. 이세훈이 사진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을 때.
“……뭐야.”
고개를 돌린 레아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남의 방을 그렇게 막 뚫어져라 보고…… 너무 매너가 없는 거 아니야?”
“초대한 사람이 그런 말 하는 건 좀 치사하지 않나?”
“달래달라고 부른 거지 구경하라고 부른 게 아니거든? 아까 뛰쳐나올 때도 바로 안 쫓아오고 하여튼 센스가 없어.”
“드라마 좀 작작 봐.”
심드렁한 이세훈의 대답에 레아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다시 침대에 얼굴을 파묻더니 잠시 후 조용히 입을 열었다.
“복수하고 싶은 사람이 있어.”
“…….”
“할머니는 그 사람이 무서워서 나를 본가에 숨겨두려고 했지만…… 나는 그렇게 숨고 싶지 않아.”
시트를 움켜쥔 레아가 분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이름을 알리고…… 돈을 벌고…… 명성을 얻어서 그놈한테 알려주고 싶어. 지금 내가 너를 뒤쫓고 있다고.”
“흐음…….”
레아의 이야기에 이세훈의 머릿속으로 단어가 맞춰졌다.
복수하고 싶은 사람. 어머니만 잘려나간 사진. 인형사와의 은원관계. 그리고 회귀 전이나 지금이나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아버지의 존재.
‘그런 거였나…….’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레베카가 레아를 뜯어말리는 것도 이해가 갔다.
아버지를 죽이고 떠난 어머니, 인형사를 죽이겠다는 것만큼 비극적이고 위험한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럼 회귀 전에는 결국 실패한 건가.’
레아는 행방불명되어 사라졌고, 인형사는 영웅들에 의해 토벌당했다.
정확히 어떻게 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복수를 이루지 못했다는 점에서 레아로서는 최악의 결말이었으리라.
‘그럼 이걸 어쩐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그에 대해서 고민하던 이세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특기생으로 뽑혀야겠네.”
회귀 전 이세훈은 레아에 대한 이야기를 몇 가지 들었지만 그중 바벨에 관련된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 말인즉 회귀 전에는 슬럼프를 극복하지 못해 특기생 선발대회에서 떨어지고 자퇴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
‘그러면 이번에는 자퇴하면 안 되지.’
복수를 위해서라도, 그리고 회귀 전과 다른 길을 걷기 위해서라도 이번에는 바벨에 남아야만 한다.
이세훈의 이야기에 레아가 부들부들 떨다가 이내 축 늘어지며 힘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의욕이 안 나…….”
검기 양산화 인챈트를 만들 때는 그렇게 머리가 번뜩였는데 지금은 무언가 꽉 막힌 것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자괴감마저 느껴지는 레아의 한탄에 이세훈이 담담하게 물었다.
“그 특기생 선발 대회. 신청 기간이나 자격 같은 건 있어?”
“없어. 바벨 출신이라면 마법, 그러니까 마력을 이용한 술식이나 물건을 제한 기간 내에 제출하면 돼.”
“좋아. 그럼 나도 나간다.”
“……뭐?”
깜짝 놀란 레아가 침대에서 고개를 들며 바라보았고, 그 모습에 이세훈이 담담히 대답했다.
“나도 나간다고. 그러면 너도 의욕이 좀 날 거 아냐.”
“아니…… 그게 내 의욕이랑 무슨 상관인데.”
“저번에 자신만만하게 말했잖아. 내가 울부짖으며 기립 박수 치게 만들겠다고.”
인연이 성립되어 만들어지는 관계. 겉보기에는 그저 자신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만으로 보이겠지만, 거기에는 한 가지 요소가 더 있다.
“그게 나를 넘어서겠다는 뜻이니까…… 이번에 나보다 점수를 높게 받으면 그렇게 되는 거 아니겠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만드는 ‘동기’. 그것이 바로 인연의 대장장이가 나타내는 자신과 대상과의 관계인 것이다.
“……나 참.”
이세훈의 이야기에 레아가 피식 웃으며 침대에 앉았다.
“그런 말장난 같은 걸로 간단히 의욕이 생길 것 같아? 내가 무슨 세 살짜리 애도 아니고 말도…… 어라? 아니, 말도 안 되는…… 그게…….”
무언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더듬거리던 레아가 이내 두 눈을 파르르 떨었고.
“이런 미친……!!”
쿠당탕!
침대에서 뛰쳐나와 책상의 설계도 하나를 뒤집어 무언가 미친 듯이 끼적거리기 시작했다.
책상에 앉을 생각도 못 하고 어정쩡하게 선 채로 떠오르는 영감을 마구 그리기 시작하는 레아. 그 모습에 이세훈이 의자에서 일어섰고.
“단순하기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조용히 방 밖으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