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가 다 만들어줌 102화
“흐음…….”
훈련복을 입은 채 뉴스사이트를 살피던 이세훈이 휴대폰에 떠오른 화면을 읽어보았다.
[염화문, 세라핌 길드와 새로운 협력체계 발표.]
[염화문의 최연소 사범 염성하, A급 현상수배범 토벌]
[이원룡 문주. ‘이번 혁신으로 염화문의 새로운 전성기가 펼쳐질 것.]
염화문과 관련된 소식들 사이에 짤막하게 끼어 있는 기사.
안길현이 유명세가 없다 보니 큰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이세훈은 이 소식이 올라온 것만으로도 긍정적이라 생각했다.
‘염화문이 사전에 다 잘라내지 못할 만큼 주목도가 올라갔다는 뜻일 테니까.’
이렇게 되면 이원룡도 이전과 같은 노골적인 노림수는 쉽게 쓰지 못할 터. 이 상태로 차근차근 실력을 쌓고 명성을 퍼뜨린다면 문주의 자리로 조금씩 다가갈 수 있으리라.
‘카사르한테 부탁해뒀으니 염성하는 당분간 괜찮을 것 같은데…… 이쪽이 좀 신경 쓰이네.’
가장 많은 주목을 받고 있는 기사를 눌러본 이세훈은 내용을 살펴보았다.
[세계 100대 길드 중 하나로 뽑히며 S급 영웅 웨폰이터 류은하의 스폰서로 유명한 세라핌 길드가 염화문과 새로운 협력체계를 만들어갈 것을 발표했다.
세라핌 길드의 유리얼 오펜하이머 길드장은 ‘염화문은 염륜잔화창이라는 뛰어난 기술을 보유했지만 무장체계가 제대로 확립되지 않아 큰 손해를 보았다,’ 라고 이야기했으며 모든 체계를 개편하여…….]
염화문을 지원하여 새로운 무력집단을 만들겠다고 발표한 세라핌 길드.
그 내용을 읽은 이세훈이 기억을 더듬었다.
‘여기가 분명 에덴이었지 아마.’
보육기관 겸 영웅 육성기관으로 운영되었던 ‘에덴’.
지금은 경영난으로 문을 닫고 세라핌 길드로 개편되었지만 한때는 세계에서 알아주는 기관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갓난아기 때부터 자라나 최연소로 S급 영웅이 된 사람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류은하였다.
‘유리얼 오펜하이머 저 양반이 재능을 알아보고 투자해 줬다고 했었고.’
적갈색 머리에 50대임에도 불구하고 30대 초반처럼 보이는 외모. 본인부터가 A급 영웅이다 보니 노화가 느려서였는데 머리색 때문인지 몰라도 류은하와 가족처럼 보이기도 했다.
‘실제로는 그런 사적인 교류가 없었지만.’
유리얼은 에덴의 이사장일 때부터 류은하의 재능에 투자했을 뿐이고, 류은하 역시 그 지원을 받으며 성장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사무적인 관계는 지금으로부터 약 5년 뒤에 재계약 없이 관계를 끊는 것으로 끝났다.
‘그 뒤에 세라핌 길드는 경영난으로 사라졌고…… 나랑 만났을 때는 관계가 완전히 끊어진 뒤였지.’
한마디로 이야기로는 들어봤지만 실제로는 만나본 적 없는 이들. 그렇기에 이세훈은 이들이 앞으로 어떻게 움직일지 신경 쓰였다.
‘염화문이랑 협력관계면 내가 류은하랑 가깝게 지내는 게 상당히 불편할 텐데 말이지.’
기본적인 대응이라면 스폰서로서 자신과의 만남을 자중해 달라고 요청하는 거겠지만, 자신의 무구에 맛을 들인 류은하가 그 요청을 잠자코 들어줄 것인가.
다음에 시간이 나면 류은하에게 세라핌 길드에 대해서 물어보자고 이세훈이 결심하던 그때.
“이세훈.”
대련장에 서 있던 거구의 근육질 사내, 리카로스 교수가 이세훈을 호명했다.
“네 차례다. 올라오도록.”
“알겠습니다.”
휴대폰을 아공간 포켓에 대충 집어넣은 이세훈은 대련장 위로 올라와 자신의 상대를 바라보았다.
“…….”
푸른색 레이피어를 쥔 채 긴장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금발 올백머리. 바르무트 가문의 삼남인 한스 바르무트의 모습에 이세훈이 위아래로 가볍게 훑어보았다.
‘평범하네.’
좋지도 나쁘지도 않고 딱 기본기만 갖춘 수준.
그 모습에 이세훈이 소광의 망치를 쥔 오른손목을 가볍게 돌리며 리카로스의 설명을 기다렸다.
“한쪽이 제압당하거나 항복하면 즉시 중단. 대련장 밖으로 떨어졌을 경우에는 장외패니 반드시 명심하도록.”
짧게 설명을 끝낸 리카로스가 뒤로 물러섰고 한스가 레이피어를 앞으로 겨누며 자세를 잡았다.
당장에라도 앞으로 달려 나와 가슴을 꿰뚫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폭발적인 기세.
“흠흠.”
하지만 이세훈은 그 자세를 보고도 소광의 망치를 아래로 늘어뜨린 채 가만히 있었고, 빈틈 가득해 보이는 그 모습에 한스의 눈매가 찌푸려졌다.
‘이 자식이…….’
저 이상한 망치를 무기랍시고 들고 있는 것도 그렇고 도대체 얼마나 자신을 무시할 셈인가.
이세훈을 상대해야 한다는 희미한 두려움이 어느새 깔끔하게 사라졌고 분노와 탐욕이 한스의 눈에 깃들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최근 비에르 형님을 대하는 아버지의 태도가 많이 차가워졌다. 이럴 때 내가 저놈에게 한 방 먹일 수 있다면…….’
아버지도 자신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실지도 모른다. 그 희망찬 미래에 한스가 의욕을 불태우며 자신의 레이피어를 꽉 움켜쥐었고.
“시작!”
“하아앗!!”
리카로스의 외침과 동시에 기합을 내지르며 바닥을 박찼다.
투웅!
꾹 눌린 스프링이 튀어 오르듯 정면으로 쇄도하는 몸. 거기에 한스는 자신의 주력 스킬을 즉각 발동했다.
‘더블 액셀!’
후웅!
전신에 푸른색 마력이 휘감김과 동시에 움직임이 추가로 가속되었고, 이세훈과의 거리가 단숨에 좁혀진다.
그리고 아직도 움직이지 않은 채 여유를 부리고 있는 이세훈을 바라보며 레이피어의 무구 스킬을 발동했다.
“아이싱 니들!”
한스의 외침과 동시에 레이피어의 끝에서 솟아나는 얼음의 칼날. 두 기술의 조합으로 남은 거리가 단숨에 줄어들었고, 이세훈의 명치에 칼날이 쇄도해갔다.
‘됐다……!’
검술학부의 선배들에게도 칭찬받았던 기술.
방심의 대가를 치를 이세훈의 모습에 한스가 두 눈을 번뜩이며 자신의 승리를 확신했고.
후웅!
소광의 망치가 얼음의 칼날을 가볍게 후려쳤다.
파카앙!
단 일격에 산산조각 나며 허공에 흩뿌려지는 얼음의 칼날. 그 모습에 한스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
닿기 직전이었던 공격은 어떻게 받아쳤고, 강철도 꿰뚫는 얼음의 칼날은 왜 이렇게 간단히 부서졌단 말인가.
이세훈이 절묘하게 반걸음 뒤로 물러서 거리를 벌린 뒤 급하게 생성된 얼음의 빈틈을 노려 후려쳤음을 깨닫지 못한 한스가 그저 멍하니 눈앞을 바라보았고.
빠아악!
이세훈의 주먹이 그대로 한스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크윽……!”
실전이었다면 콧대는 물론 이빨이 다 박살 났을 일격. 하지만 대련장의 방호시설 덕분에 한스가 상처 하나 없이 일어서며 다시 자세를 잡았고.
“이세훈 승.”
리카로스의 이세훈의 승리를 선언했다.
“자, 잠깐만요! 저는 아직 더 할 수 있습니다!”
고작 주먹 한 대 맞았다고 끝이라니. 억울해하는 한스의 모습에 리카로스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물었다.
“맨손으로 싸울 생각이냐?”
“예? 그게 무슨…… 어?”
오른손에 쥐어져 있어야 할 레이피어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그에 한스가 반사적으로 정면을 바라보았고.
“흐음…… 좀 휜 것 같은데…….”
탐탁지 않은 눈으로 레이피어를 살피는 이세훈을 발견했다.
“……졌습니다.”
레이피어를 돌려받은 한스가 대련장 아래로 내려갔고, 먼저 내려가서 풀이 죽어 있는 생도들 옆에 앉았다.
모두 이세훈과의 대련에서 일격에 제압당한 생도들이었는데 유일하게 자신들이 앞섰던 신체 능력까지 따라잡히면서 의기소침해져 있는 것이다.
‘이게 제련학부인지 무기학부인지…….’
쓸데없는 일에 집착하는 생도들의 모습에 이세훈이 어이없어하고 있을 때. 곁으로 다가온 리카로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마광수 교수님께 잘 배운 모양이군. 설마 이렇게까지 실력이 늘었을 줄이야…….”
“그래 봐야 호신술 정도인데요 뭘. 그나저나 이 정도면 충분하겠습니까?”
이세훈의 물음에 리카로스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 수준이면 확실히 1학기 수업은 굳이 들을 필요 없겠지. 학부에는 내가 보고해둘 테니 자유롭게 보해라.”
“감사합니다.”
전공수업 중 하나인 도구 이해. 거기에 수업면제를 받은 이세훈은 리카로스에게 인사한 다음 밖으로 나왔다.
‘이걸로 도구 이해 수업도 앞으로 패스인가.’
금속제련 수업도 전에 과제를 전부 제출해 수업을 면제받은 상태였기에 남은 전공수업은 광물분석 하나뿐.
그 이외에 부전공 수업들이 있긴 하지만 이쪽은 수업빈도가 적은 터라 자유 시간이 많이 늘어났다.
‘이 틈에 밀린 일을 처리해두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뭘 먼저 처리하는 것이 좋을까. 이세훈이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우웅─
주머니에서 울리는 진동.
휴대폰을 꺼내든 이세훈은 전화를 걸어온 상대의 이름을 살펴보았다.
[아리아 마이어스]
“음…….”
슬슬 연락이 올 때가 됐다고는 느꼈지만 막상 이렇게 받게 되니 기분이 영 탐탁지 않다.
계속 진동을 울리는 휴대폰을 바라보던 이세훈은 이내 한숨을 내쉬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오랜만이네. 잘 지냈니?
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아리아의 부드러운 목소리. 그 껄끄러운 안부 인사에 이세훈이 담담히 대답했다.
“저야 뭐, 평소처럼 지내고 있죠. 선배는 어떠십니까? 제이크한테 물어보니 조금 어려운 임무에 나가셨다던데.”
-표적이 A급 마수 세 마리를 테이밍한 상태라 조금 길어지긴 했지만 잘 끝났어. 남은 일들만 처리하면 바벨로 돌아갈 거야.
본래 표적이었던 A급 마인과 A급 마수 세 마리를 혼자서 추적하고 처리하는 데 성공한 아리아.
시간이 오래 걸린 것을 보아 아마 마인 쪽에서 필사적으로 도망치다가 결국 궁지에 몰려 목이 날아간 것이 분명하리라.
‘이 정도며 이미 A급에서도 상위권이라고 봐야겠네.’
영웅의 탑을 몇 단계 오르는 데 성공한다면 S급도 충분히 노릴 수 있는 수준. 4학년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실력에 이세훈이 혀를 내둘렀다.
‘앞으로 1~2년 뒤면 최연소 S급 영웅 기록도 깨지겠구만.’
류은하 성격상 이런 기록 같은 것에 관심을 두진 않겠지만, 그래도 실제로 어떻게 반응할지 살짝 궁금해졌다.
그렇게 이세훈이 머릿속으로 류은하의 반응을 상상하고 있을 때.
-별로 관심 없구나.
휴대폰 너머로 담담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목에 칼이라도 겨눠진 것 같은 그 오싹한 감각에 이세훈은 헛기침을 하며 대답했다.
“흠흠. 그게 아니라 잠깐 생각할 게 있었습니다.”
-그래? 무슨 생각이었을지 듣고 싶지만…… 이 뒤에 일정이 빠듯하니까 그냥 본론으로 넘어갈게.
화가 났다기보다는 정말로 크게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대답한 아리아가 본론을 꺼냈다.
-지난번에 제이크를 도와줘서 고마워. 들어보니까 우리 동생이 발목을 잡았던 것 같은데 무구를 손봐준 것도 그렇고 신세를 많이 졌네.
“저도 제이크한테 도움을 많이 받았으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럼 이전에 받았던 의뢰는 해결된 걸로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그 정도면 완벽하다고 생각하지만 또 아리아의 눈에는 차지 않을 수도 있으니 확실하게 확인해야 한다.
이세훈의 물음에 아리아가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이지. 그 겁쟁이가 검술학부로 전과할 정도라면 완벽하게 해결됐다는 뜻일 테니까. 나중에 딴소리 안 할 테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
제이크에 대한 믿음이 느껴지는 아리아의 대답에 이세훈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평상시에는 회귀 전처럼 어딘가 비틀린 느낌이 가득하지만 유독 제이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조금이나마 인간미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도 동생은 동생이라는 건가.’
회귀 전 아리아와 만났을 때는 제이크가 죽은 지 오래되었기에 어떤 사이였는지, 그리고 어떻게 생각하는지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제이크도 별다른 가치가 없는 게 아닐까 생각했지만, 어쩌면 자신이 너무 섣부르게 생각한 걸지도 모르겠다.
‘이쪽으로도 한번 지켜봐야겠어.’
새로운 관찰 거리를 확인한 이세훈은 어느 정도 생각을 정리한 다음 물었다.
“그러면 보상은…….”
-전에 이야기한 대로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이번에 도움을 받은 만큼 최대한 도와줄게. 뭘 부탁할지는 잘 생각해 봐.
강하긴 하지만 아직 S급에는 도달하지 못한 아리아. 호위로 써먹기에는 불안요소가 있었지만, 한 물건을 ‘확보’하는 데는 매우 적합했다.
‘회귀 전에도 요긴하게 써먹었는데…… 일단 어디에 있는지부터 찾아봐야겠네.’
어디서 알아봐야 할지 이세훈이 고민하고 있을 때.
-아. 맞아.
무언가 떠올린 아리아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검기 양산화 작업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니?
“아. 그건…….”
자신이야 옛날 옛적에 준비가 다 끝났지만 동업자인 레아가 다 끝났을지 알 수 없는 상황.
혹시라도 레아에게 불똥이 튈까 봐 이세훈이 잠시 고민하자 아리아가 이어서 이야기했다.
-재촉하려는 건 아닌데 아버지한테서 연락이 왔거든.
“아버지라면…… 아론 가주 말씀입니까?”
-맞아.
마이어스 가문의 현 가주이자 S급 영웅으로 활동하고 있는 ‘광룡검光龍劍’ 아론 마이어스.
강함은 물론이고 영향력 또한 무시할 수 없는 거물이 자신에게 관심을 드러냈다는 것에 이세훈이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여름쯤에 가문에서 준비 중인 행사가 있거든. 그전에 생산라인 확보하고 제조에 들어갔으면 한다는데…… 맞출 수 있을 것 같아?
“흐음…… 조금 애매하네요.”
사실 마음만 먹으면 당장에라도 진행할 수도 있지만, 이세훈은 조금 말끝을 흐리기로 했다.
너무 강하게 말을 했다가 차질이 생기면 낭패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저쪽에서 어떤 조건을 추가로 제시할지 먼저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일정을 맞춰줄 수 있으면 아버지가 보수와 별도로 한 가지 혜택을 주신다고 했으니까 한번 힘내봐.
“그 혜택이라는 게 정확히 뭡니까?”
과연 마이어스 가문의 스케일은 어느 정도인가. 이세훈의 물음에 아리아가 슬쩍 웃으며 대답했다.
-창고야.
“……창고?”
-가문의 창고에서 하나를 골라갈 수 있게 해주신다네.
수십 년간 검술명가의 자리에 올라 막대한 부와 명성. 그리고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수많은 재물을 쌓아온 마이어스 가문의 창고.
회귀 전에도 방문한 적 있는 그 비밀스러운 창고의 이용권에 이세훈의 눈이 반짝였고.
“일단 시제품부터 완성해서 보여드리겠습니다.”
재빠르게 인챈트학부의 본관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