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가 다 만들어줌-99화 (99/309)

회귀자가 다 만들어줌 99화

“후우…….”

숲에서 반짝인 검은 마력과 검지 끝에서 느껴지는 아릿한 감각.

회심의 일격이 제대로 먹힌 것을 확인한 이세훈은 재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천으로 뒤덮은 암살자들. 겉보기에는 조금 왜소한 정도로 보이지만, 직접 죽인 이세훈은 그들의 몸이 비정상적으로 말랐다는 것을 파악했다.

‘기형적인 몸에 비정상적으로 뛰어난 은신 능력…… 조율자 그놈 물건인가?’

십악 중 한 명인 ‘조율자調律者’.

살아 있는 생물의 육체를 마구잡이로 개조하던 마인으로 이세훈이 특히나 경계하고 있는 존재였다.

회귀 전에 주시자와 협력하여 육대마신 중 하나, ‘멸검의 마신’을 만들어낸 것이 바로 조율자였기 때문이다.

‘지난번에는 인형사더니 이번엔 조율자인가. 아주 그냥 인기폭발이구만.’

인형사나 조율자나 서로 ‘방향성’이 달라서 그렇지 주재료가 인간이나 마인의 육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자신이 연달아 노려진 것도 그리 이상하진 않다.

십악 중 둘에게 점찍어진 상황에 이세훈이 어처구니없어하고 있을 때.

스스슥

주변에서 다시 느껴지는 인기척.

통솔자가 단숨에 처리됐는데도 당황하지 않고 기회를 살피는 것을 보면 개조와 별개로 훈련도 제대로 된 모양이다.

‘마광수 그 양반이 안 보이는 것도 그렇고…… 생각 이상으로 거물이 와버린 모양이야.’

상황이 정확히 어떻게 흘러가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우선 공방의 박진환,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디론가 사라진 염성하의 안전부터 확인해야 한다.

결론을 내린 이세훈은 작은 글귀가 빼곡하게 새겨진 자신의 검지, 그 안에 들어 있는 ‘불명자의 지골’에 다시금 마력을 불어넣으며 시동어를 외쳤다.

“망자의 부름.”

우웅─

검지 끝에서 퍼져나간 검은 파동.

그 안에 실린 검은 마력이 시체들의 몸 위에 눈동자처럼 생긴 문양을 만들어내더니 천천히 감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문양이 가느다란 실선으로 변해 시체들의 안쪽으로 파고든 순간.

스르륵

시체가 사라지며 여덟 개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암살자들의 그림자가 서 있는 것 같은 기묘한 형태. 그 모습에 이세훈의 눈매가 살짝 찌푸려졌다.

‘부활 쪽인가. 얘들은 효율이 별로 안 좋다던데.’

시체를 고스란히 언데드로 만들어내는 부활계열의 사령마법. 겉보기만 그럴싸하고 본체보다 약화되거나 마력소모가 심해 구시대적인 방식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것저것 따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이세훈은 곧장 언데드들에게 자신을 지키라고 명령한 다음 공방 쪽으로 달렸다.

후웅!

움직임과 동시에 사방에서 쏘아지는 암기와 일제히 덤벼드는 그림자. 자신들의 목숨조차 도구로 사용하는 암살자들의 공격에 이세훈이 오색화도를 움켜쥐었고.

서걱

언데드들에 의해 모든 것들이 잘려나갔다.

촤자자작!

그림자처럼 쭉 늘어나 있는 언데드 암살자들의 육체. 그것들이 채찍처럼 휘둘러지는가 싶더니 소리조차 내지 않고 주인을 위협하는 모든 것을 베어버린다.

본체보다 약해지기는커녕 그림자라는 특성을 보유한 채 B급 수준으로 강화된 언데드들의 모습에 이세훈이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손가락뼈 하나가…….’

예나 지금이나 완등자들은 도대체 어디까지 괴물인지 알 수 없다.

깜짝 놀라면서도 능력을 파악한 이세훈은 단숨에 포위망을 돌파하며 공방까지 달려갔다.

콰앙!

“무, 무슨 일인가?!”

문을 걷어차며 들어가자 깜짝 놀라며 바라보는 박진환.

눈가가 살짝 부은 것을 제외하고는 상처가 없었는데 그 모습에 이세훈이 안심하면서 재빠르게 물었다.

“적들한테 습격당했는데 염성하가 안 보입니다. 녀석이 화났을 때 갈 만한 곳이 있습니까?”

이세훈의 물음에 박진환이 두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이내 사태를 파악하고 재빠르게 대답했다.

“폭포! 여기서 북서쪽으로 올라가면 초대 문주님과 자주 갔던 폭포가 있네!”

“알겠습니다. 호위는 남겨두고 갈 테니까 몸조심하세요!”

언데드 암살자 네 마리를 호위로 붙여둔 이세훈은 다시 공방을 뛰쳐나와 검은 단창을 내던졌던 숲으로 달려갔다.

매복은 마을이 전부였었는지 달라붙는 이들이 없었고, 바위가 놓인 숲에 도착한 이세훈이 불명자의 지골을 통해 사령마법 ‘경계의 눈’을 발동했다.

스스슥

사물의 경계를 나타내는 검은색 테두리. 그중 허공에 그어져 있는 큼지막한 선을 발견한 이세훈이 곧장 왼손을 뻗었다.

후웅!

불명자의 지골이 담긴 왼손 검지가 닿자 공간의 틈새가 벌어지며 앞서 던졌던 검은 단창만 툭 떨어졌다.

‘적은…… 자살한 건가.’

완전히 제압당한 것을 깨달은 순간 시체는 물론이고 입고 있던 옷 한 조각도 남지 않게 철저하게 증거를 없애 버렸다.

아마 조율자가 몸 안에 준비해 준 증거인멸용 장치를 사용한 것이 분명하리라.

‘이래서 암살자 새끼들은 싫다니까.’

철두철미한 움직임에 혀를 찬 이세후은 검은 단창을 회수하여 상태를 살폈다.

창대 곳곳에 혈관처럼 돋아난 검은 줄기. 그 심상치 않은 모습에 이세훈이 정보창을 펼쳤다.

[영암창影唵槍]

[등급 : 영웅] [품질 : 중하]

그림자에 잠식된 단창.

접촉한 대상에게서 생명력을 흡수해 암속성마력으로 치환할 수 있으며 마력을 소모하여 경계를 다루는 힘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단, 특성을 과도하게 사용할 경우 침식 상태가 되어 성능이 떨어집니다.

*생명력을 흡수하여 암속성마력으로 치환합니다.

*스킬 ‘잠영潛影’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스킬 ‘투영投影’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내부가 침식되어 성능이 제한됩니다.

‘투영이 막혔나.’

힘을 저장해서 발현시킬 수 있는 무구스킬 ‘투영’.

그걸 사용해 명안계암을 펼쳤었는데 딱 한 번 만에 침식이 일어나 기능이 떨어진 것이다

‘그래도 잠영이 남아 있으니까 아직은 쓸 만해. 남은 건…….’

폭포가 있다는 북서쪽으로 고개를 돌린 이세훈은 금방 흔적 하나를 발견했다.

숨길 생각도 없는지 고스란히 찍혀 있는 발자국. 이 뒤를 쫓는다면 아마 염성하가 있는 곳을 찾을 수 있으리라.

‘살아만 있어라!’

팔다리 떨어진 것 정도는 어떻게든 해줄 테니. 그리 생각하며 이세훈이 산 안쪽으로 달려갔다.

***

쏴아아아

개울가 위로 떨어지는 작은 폭포.

사방으로 튀어 오르는 물방울이 햇빛을 반사하여 반짝거렸지만, 그 모습을 바라보던 염성하의 눈동자는 더욱 음울해지기만 했다.

‘과거를 떠올리며 위안을 얻는다…….’

박진환에게 내뱉었던 폭언을 떠올리며 염성하가 자신의 손에 쥐어진 사일을 내려다보았다.

사부님과 함께 전장을 누비던 창.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었기에 직접 보진 못했지만, 사일에 남아 있는 흔적만으로도 그 모습을 알 수 있었다.

과거의 사부님이 어떻게 창을 휘둘렀었는지. 그리고 그 힘과 기세가 얼마나 용맹했는지 머릿속에 자연스레 그려졌던 것이다.

‘나도 다를 바 없었군…….’

해가 지날수록 쇠약해져 가는 사부님의 모습을 보기가 괴로워서, 그리고 언젠가 그것조차 볼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이 두려워 과거를 붙들고 뛰쳐나왔다.

그 꼴사나운 행동에 눈매를 일그러트린 염성하가 개울가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내가 정말 문주가 되어도 되는 건가?’

사부님의 뜻대로 염화문의 문주가 된다. 그것은 변치 않는 목표지만, 그에 대한 의문이 없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정말 사부님과 같이 염화문을 이끌어갈 수 있을지. 그리고 염륜잔화창을 계승하여 그 뜻을 이어갈 수 있을지.

문주가 되는 것과 사부님의 명성에 먹칠하지 않는 훌륭한 문주가 되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이야기였다.

‘꺼져. 너 같은 새끼한테 줄 건 없으니까.’

차가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던 이세훈. 그 안에 담긴 실망감을 느꼈던 염성하는 자신도 모르게 손에 들린 사일을 꽉 움켜쥐었다.

“나는…….”

평상시라면 이렇게 고민하기 전에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을 텐데, 오늘은 어째서인지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다.

그렇게 염성하가 하염없이 자신의 얼굴을 보고 있을 때.

“사일인가.”

반대편에서 이죽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 구닥다리 물건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니. 박진환 그 노친네도 참 구질구질하군 그래.”

검붉은 언월도를 어깨에 걸친 채 맞은편에서 걸어 나오는 중년의 사내. 그 얼굴을 본 염성하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안길현…….”

과거 위험지역에 같이 파견을 나갔던 사범을 죽이고 증거인멸을 시도했다가 발각되어 파문당한 제자.

몇 년 만에 갑자기 나타난 그의 모습에 염성하가 긴장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사범님을 붙여야지. 여전히 버르장머리가 없구나.”

“파문당한 놈에게 그럴 이유는 없다.”

날카로운 염성하의 대답에 안길현이 개울가 앞에서 걸음을 멈추며 혀를 찼다.

“쯧쯧. 문주가 되겠다는 놈이 이리 눈치가 없어서야…… 내가 여기에 나타난 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나?”

한심하다는 듯이 이야기한 안길현이 어깨에 걸친 언월도를 천천히 아래로 늘어뜨렸다.

“꽉 막힌 전대문주들과 다르게 우리 4대 문주님께선 내 억울함을 인정해 주셨다는 뜻이다.”

4대 문주, 이원룡이 안길현에게 복귀를 약속했다. 그 이야기에 염성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군. 파문당한 그때부터 이미 이원룡과 손을 잡은 상태였던 건가.”

“글쎄. 예전에 죽인 놈이 차기 문주랍시고 기대를 많이 받긴 했었지.”

카드드득

언월도로 바닥을 찬찬히 긁은 안길현이 염성하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지금처럼 말이야!”

“……!”

콰앙!

두 사람이 동시에 바닥을 박찼고 개울가 위로 붉은 창날이 서로 맞부딪쳤다.

콰아아앙!!

창날이 충돌한 직후 연이어 터져 나온 폭발.

서로를 집어삼키려 듯 뒤엉키던 불꽃이 서로 물러섰고, 이어서 두 사람이 각각의 불꽃을 휘감은 채 창을 휘둘렀다.

화르륵!

염륜잔화창의 기본적인 전투법은 창으로 공간을 장악하고 뒤따라오는 불꽃 ‘잔화殘火’로 상대를 찍어 누른다.

그렇기에 보통 거세게 몰아치는 상황이 자주 일어났는데 같은 염륜잔화창끼리 싸울 때는 양상이 조금 달라졌다.

카가가강!

먼저 공간을 차지하기 위해 창날이 딱 붙어 있다시피 서로를 튕겨내며 부딪쳤고, 큰 폭발을 일으키던 잔화 역시 소규모로 터져 나왔다.

카강─쾅!

폭발의 반동을 이용해 창날의 궤도를 변칙적으로 비틀거나 불꽃으로 시야를 가려 빈틈을 만들어낸다.

공격을 퍼부을 수 있는 흐름을 차지하기 위해 펼쳐지는 치열한 공방. 그 격전 속에서 조금씩 밀려나는 것은 당연하게도 염성하였다.

“반응이 느리군 그래……!”

카앙!

“큭……!”

안길현의 언월도가 점점 공간을 차지하며 위력이 더해지기 시작했고, 염성하는 뒤로 물러서며 필사적으로 그 힘을 흘려냈다.

10년도 전에 칠륜에 올라 사범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A급 영웅으로 활동했었던 안길현.

경력으로나 힘으로나 염성하가 밀리는 것이 당연했지만, 거기에는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이 자식…… 한 명만 죽인 게 아니었나……!’

염륜잔화창으로 같은 염륜잔화창의 사용자를 죽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고뇌와 경험이 창끝에 녹아내려 자신의 창술을 근본부터 찢어발긴다.

카가각!

몇 번이고 급소를 향해 파고드는 안길현의 ‘파훼식’에 염성하는 상대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이해했다.

오래전부터 이원룡과 손을 잡고 염화문을 장악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이들을 죽인 사냥개. 그것이 바로 안길현의 정체였다.

“염진현한테 배웠다더니 창술도 딱 그 짝이군. 그딴 낡아빠진 것 말고 문주한테 보였던 쌍창술이나 꺼내봐라!”

자신의 창술을 비웃으며 철저하게 파훼하는 안길현. 그 상황에 염성하는 두 가지의 감정이 교차했다.

정말로 쌍창을 사용했더라면 좀 더 버텨냈을 거라는 생각. 그리고 자신의 창술이, 사부님이 뒤처졌을 리 없다는 생각.

그 상반되는 감정 속에 염성하가 이를 악물며 사일의 안쪽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우우웅!

창날에서 피어오르는 거대한 불꽃. 한때 수많은 몬스터와 마인을 꿰뚫었던 ‘염마炎魔’ 염진현의 찌르기가 염성하의 손에서 재현되었고.

후웅!

안길현의 언월도가 그보다 빠르게 몸을 베어냈다.

파캉!

창날이 스쳤는지 가슴 부근이 불에 지져진 것처럼 아파 온다. 하지만 염성하는 그 통증보다도 자신의 손에 쥐어져 있던 사일을 바라보았다.

“…….”

창대가 잘려 반으로 나눠진 사일.

내부의 마력회로에도 문제가 생겼는지 창날이 탁하게 변했고 마력을 불어넣어도 아무런 반응이 오지 않는다.

완전히 죽어버린 사일의 모습에 염성하가 두 눈을 휘둥그레 떴고 안길현이 혀를 찼다.

“쯧. 두 자루로 만들어주려 했더니 그새 고장 나버리다니…… 제 주인이랑 다를 게 없군그래.”

“……!”

핏발이 선 눈으로 노려보는 염성하의 모습에 안길현이 피식 웃었다.

“틀린 말도 아니지 않나.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노친네. 공방에 처박혀 있다가 반 토막 나버린 창. 그 주인에 그 창 아닌가?”

“닥쳐라……!”

“젊은 놈이 앞뒤가 꽉 막혔군…… 아, 그래. 그럼 특별히 네가 모르고 있을 이야기를 하나 해주지.”

흐트러진 염성하를 바라보며 안길현이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사실 사일은 3대 문주 때까지만 해도 대대로 전해져오던 무기였다. 염진현 그 양반도 지금보단 멀쩡해서 창술을 전수한답시고 가르쳐주고 말이야.”

“닥쳐!!!”

바닥을 박찬 염성하가 망가진 사일을 휘둘렀고, 그 모습에 안길현이 가볍게 피하며 옆구리를 걷어찼다.

퍼억!

“컥……!”

“끝까지 들어봐라. 근데 4대 문주, 이원룡이 취임할 때 그 전통이 사라지고 사일은 공방에 처박히게 됐지. 그 이유가 과연 뭘까?”

개울가에 처박힌 염성하에게 다가간 안길현이 씩 웃었다.

“염진현이 사일을 통제하는 데 실패해서다.”

“……뭐?”

“시범을 보인답시고 사일을 휘두르다가 불꽃을 통제하지 못했고, 그 결과 자기 자신이 휩쓸려 더 크게 다쳐 버렸지.”

“그런 거짓…….”

“오른팔과 가슴의 흉터. 너도 염진현이랑 같이 지냈으면 봤을 텐데?”

안길현의 물음에 염성하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부님의 몸에 난 상처 중에서 가장 큰 흉터. 전장에 입었을 것이라 생각한 그게 실수로 인한 부상이었다니.

“염진현 그 노친네도 포기하는 게 너무 늦었어. 얌전히 처박혀 살았으면 지금보다는 건강했을 텐데…… 과거에 사로잡히는 바람에 제 몸만 잡아먹었지.”

안길현의 비아냥에 염성하는 문득 사부님이 자신에게 해준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것을 휘두를 수 있는 힘도, 시간도 내게서 이미 지나가 버렸다는 뜻이지.’

과거를 떠나보낸 듯한 이야기. 하지만 그 실체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더 이상 타오를 수 없게 재만 남아버린 자신에 대한 이야기였던 것이다.

“…….”

박진환도, 자신도, 그리고 사부 역시 과거에 얽매여 있었다. 그 사실에 염성하는 깊은 수렁에 빠져드는 것 같았다.

사부님을 위해서 문주가 된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로 해결책이 될 수 있는 것일까.

‘나는…….’

확고한 믿음에 차 있던 염성하의 눈이 처음으로 흔들렸고, 그 모습에 안길현이 마지막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고 이젠 늘그막에 거둔 양아들의 개짓거리 때문에 덩달아 죽게 생겼군.”

“……!”

“뭐, 그래도 마지막에 협조를 잘했다고 한다면…… 문주가 자비를 발휘할 수도 있겠지. 안 그런가?”

안길현의 은근한 이야기에 염성하의 손이 다시금 사일을 꽉 움켜쥐었고, 이내 천천히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저항할 의지가 사라진 모습. 그 반응에 안길현이 씩 웃었다.

“현명하군.”

염성하의 곁에 다가선 안길현은 그 늘어진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죽이는 거야 목을 쳐내든 심장을 꿰뚫든 간단하지만, 무엇이든 그 과정이 중요한 법.

그런 면에서 염성하는 시간을 투자한 바람이 느껴질 만큼 아주 만족스러운 결과물이었다.

‘쌍창술을 못 본 게 조금 아쉽군그래.’

사일 같은 싸구려 장창을 사용했기에 이렇게 쉽게 제압했지 만약 문주와의 대련에서처럼 쌍창을 사용했다면 좀 더 버텼을지도 몰랐으리라.

그것까지 꺾어야만 제대로였겠지만, 안길현은 그 아쉬움을 눌렀다.

‘그래도 죽일 수 있을 때 죽여야 한다.’

내색은 안 했지만 자신의 파훼식을 즉각 알아차리고 대응할 때 얼마나 놀랐던가. 이번에 죽이지 않는다면 다음에 위험한 것은 분명 자신이 될 것이다.

그렇게 판단한 안길현이 천천히 언월도를 치켜들었고.

스륵

영암창의 창날이 소리 없이 머리를 향해 쏘아졌다.

“……?!”

의식 밖에서 소리 없이 파고드는 소름 끼치는 창날. 그 모습에 안길현이 깜짝 놀라면서도 재빠르게 언월도를 휘둘렀다.

기회는 완벽했지만 속도가 느렸기에 충분히 막을 수 있다. 그렇게 안길현이 안심하며 반격을 준비했고.

‘잠영潛影.’

영암창의 창날 끝이 흐릿하게 물들었다.

후웅

그림자처럼 변해 언월도를 통과해 버리는 창. 자신의 앞으로 쇄도해 오는 창날의 모습에 안길현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고.

푸욱!

오른쪽 눈이 단숨에 꿰뚫렸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