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가 다 만들어줌 98화
바벨의 입학을 앞두고 있던 2년 전 겨울.
산골짜기는 온통 눈으로 뒤덮여 새하얗게 물들었고 공방의 마당에 놓인 평상에서는 그 풍경이 한눈에 보였다.
그 광경을 말없이 바라보는 작은 등. 그 쓸쓸하기 그지없는 뒷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말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사부님은 어째서 ‘사일射日’을 저곳에 놔두시는 겁니까?”
위험지역을 둘러싼 울타리도, 만마의 늪을 막아서는 순례길이라는 방벽조차 없었던 혼란의 시기에 수많은 몬스터와 마인을 꿰뚫은 창.
자신의 몸처럼 다뤄왔던 그 창을 어째서 이런 산골짜기에 썩어가게 놔두는 것일까.
“음…….”
자신의 물음에 사부님은 손에 든 찻잔을 짧게 기울였다가 천천히 대답했다.
“지나가 버렸기 때문이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을 휘두를 수 있는 힘도, 시간도 내게서 이미 지나가 버렸다는 뜻이지.”
목을 축였음에도 메마른 목소리로 사부가 담담히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래서 이곳으로 돌려보낸 거다. 가만히 썩히느니 녹여서 새로운 물건으로라도 만들어보라고.”
“사일을 녹인다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하핫. 진환이 그 녀석도 그렇게 말하면서 저렇게 박제를 해두더구나. 참 비참…… 쿨럭쿨럭!”
“사부님!”
작게 웃음을 터뜨리던 사부님이 기침을 토해냈고, 그 모습에 황급히 곁으로 달려갔다.
“됐다…….”
하지만 손이 닿기 전 주름진 손이 자신을 멈춰 세웠고, 기침을 가라앉힌 사부님이 평상에서 일어섰다.
“슬슬 마무리됐을 테니 보러 가자꾸나.”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자신을 지나쳐 공방으로 걸어가는 사부님.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다시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에 소용돌이친다.
해가 지날수록 왜소해지는 등. 새하얗게 새어버린 머리카락. 그리고 밤중에 터져 나온 기침 속에 섞여 있던 붉은…….
카앙─!
계속해서 이어지던 상념이 쇳소리에 깨졌고, 평상을 바라보던 염성하가 고개를 돌렸다.
카앙! 카앙!
공방에서 울려 퍼지는 날카로운 쇳소리. 굴뚝의 연기가 방금보다 짙게 피어오르는 것을 본 염성하가 눈매를 찌푸렸다.
‘뭔가 만들고 있는 건가.’
아직 창을 받지 못했으니 어쩌면 그걸 손질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계속해서 들려오는 쇳소리에 염성하가 잠시 고민하다가 공방으로 향했다.
‘어차피 공방도 살피고 사부님의 사일도 볼 생각이었으니…….’
절대 녀석이 자신에게 줄 창이 궁금해서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며 염성하가 공방의 안쪽을 들여다보았고.
“흐읍……!”
붉은 장창, 사일을 망치로 후려치려는 이세훈의 모습이 보였다.
콰앙!
눈앞의 상황을 온전히 이해하기도 전에 몸이 움직였고, 공방을 가로질러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진다.
아무것도 모르는 듯 양손으로 손잡이가 긴 망치를 내려치고 있는 이세훈과 그 얼굴을 후려갈기기 위해 움켜쥐어진 주먹.
“잠……!”
옆쪽에서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지만, 이미 몸이 움직이고 있었기에 의미가 없었다.
그렇게 염성하의 단단한 주먹이 이세훈의 머리를 향해 있는 힘껏 휘둘러졌고.
후웅─
아래로 휘둘러지던 망치의 궤도가 비틀어졌다.
쿠당탕!!
튕겨 나간 몸이 공방의 한쪽을 휩쓸더니 탁자를 박살 내며 그 위에 놓여 있던 재료와 도구를 사방에 떨어뜨렸다.
순식간에 엉망이 되어버린 공방과 천장에 매달려 있는 이세훈. 그 기괴한 광경에 잠시 끊어졌던 염성하의 생각이 다시 이어졌고.
“……뭐.”
자신이 공방의 바닥을 나뒹굴었음을 알아차렸다.
“너 뭐 하냐?”
망치를 어깨에 걸친 채 한심스럽다는 듯이 바라보는 이세훈의 모습에 염성하가 재빠르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슨 짓을…….’
어떻게 먼저 주먹을 휘두른 자신이 바닥을 나뒹굴고 있는가. 그 의문 속에 염성하의 눈이 자신의 바지로 향했다.
바닥을 뒹굴어 더러워진 옷들 사이에서도 유독 검댕이가 묻어 있는 무릎부위. 그것을 본 염성하는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명확히 이해했다.
‘망치로 무릎을 후려쳐서 중심을 무너뜨린 건가.’
통증도 거의 느껴지지 않을 만큼 아주 작은 비틀림이었지만 그것 하나 때문에 주먹이 빗나가고 중심이 완전히 틀어져 바닥을 나뒹굴게 되었다.
이성을 잃었다곤 하지만 본래 자신과의 격차를 생각한다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상황.
눈앞의 이세훈을 바라본 염성하는 믿을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 짧은 기간 동안 도대체 얼마나 강해진 거지……?’
신체 능력도 그렇지만 기술이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갈고닦아졌다. 터무니없는 성장에 염성하가 뭐라 말을 잇지 못하고 있을 때.
“아. 혹시 이거 때문이냐?”
이세훈이 모루에 놓여 있던 사일을 집어 들었다.
“뭔가 오해가 있었나 본데 전부…….”
타악!
말을 끝내기도 전에 성큼성큼 다가와 사일을 낚아채 가는 염성하. 그 모습에 이세훈이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뭐 하냐?”
“네까짓 게 함부로 손댈 물건이 아니다.”
“허락받았는데?”
“나는 허락한 적 없다.”
두 사람 사이로 싸늘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을 때. 뒤늦게 정신을 차린 박진환이 염성하를 붙잡았다.
“내가 허락했다. 네 창을 완성하는데 사일의 창날을 이용하면 좋을 것 같다고 해서…….”
“그래서 어쩌라는 겁니까.”
고개를 돌린 염성하가 분노에 찬 눈으로 박진환을 노려보았다.
“나를 위해서 쓰려고 했으니 고마워하라는 겁니까?”
“그게 아니라…….”
“사부님께서 녹이라고 할 때는 결사반대하더니 이렇게 손바닥 뒤집듯이 태도를 바꾸다니…… 정말 어처구니가 없군.”
사부님을 기억하려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기에, 염성하는 더더욱 배신감을 느끼며 박진환에게 분노를 토해냈다.
“사일을 놔둔 것도 네 욕심 때문이었나? 이제는 영웅 등급의 무구도 제대로 만들지 못하니까, 과거의 작품을 보며 위안이라도 얻으려고?”
“…….”
“그렇다면 지금 상황도 설명이 되는군. 이번 기회에 새로 만들어서 나한테 쥐여주면 이세훈 저 녀석이랑 같이 당신 이름도 떠돌 테니까. 참 좋은 기회야.”
아무런 부정도 하지 않는 박진환의 모습에 염성하가 눈매를 일그러뜨렸다.
“뭐라고 말을…….”
“야.”
공방에 낮게 깔리는 목소리. 그에 박진환에게 폭언을 퍼붓던 염성하가 흠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꺼져. 너 같은 새끼한테 줄 건 없으니까.”
방금보다 차분하게, 그리고 깊이 가라앉은 이세훈의 눈. 거기서 느껴지는 알 수 없는 압박감에 염성하는 자신도 모르게 사부님의 모습을 떠올렸다.
아무리 강해져도 언제나 자신의 위에 서 있는 눈. 그 모습에 염성하가 눈매를 한껏 일그러졌다가 고개를 돌렸다.
“쯧…….”
사일을 들고 밖으로 나가 버리는 염성하.
얼어붙었던 공방의 분위기가 다시 풀어졌고, 눈에서 힘을 푼 이세훈이 한숨을 내쉬었다.
“저 싸가지 없는 새끼…….”
염진현이랑 관련돼서 눈이 돌아간 건 알겠지만 그래도 말은 좀 가려가면서 해야 할 것 아닌가.
‘그래도 주먹을 안 휘두른 걸 다행이라 생각해야 하나.’
광견 시절의 행동과 비교하며 그래도 양반이다 보니 이세훈이 이걸 기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떨떠름해 하고 있을 때.
“미안하군.”
아무런 말도 하지 않던 박진환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렇게 될 거라고 알고 있었는데…… 성하 저 녀석이 반대하면 못할 것 같아서 말하지 않았네.”
“사과하실 필요 없습니다. 저놈이 잘못한 거니까요.”
“그건 아닐세. 녀석의 말이 완전히 틀린 것도 아니니까.”
엉망이 된 공방을 바라본 박진환이 씁쓸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나도 알고 있었네. 사일을 바라보며 떠올리던 것이 초대 문주님의 모습이 아니라 그 곁에 있었던 내 모습이라고.”
“…….”
“이미 지나가 버린 걸 아는데도…… 도저히 없앨 수가 없더군. 그 기억을 떠올릴 때면 그래도 그때만큼은 그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으니까.”
의자에 힘없이 앉은 박진환이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세월이 지나 주름지고 삐걱거리며 떨리는 손. 그 형편없는 모습에 눈을 질끈 감으며 중얼거렸다.
“그 모습이 더 비참한 줄도 모르고 말이야…….”
짙은 후회가 담긴 박진환의 목소리에 이세훈이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사람들 고민이 다 거기서 거기구만.’
지나간 시간에 대한 그리움과 되돌릴 수 없다는 후회.
영웅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가질 수 있는 고민이었으며, 그것은 이세훈 역시 마찬가지였다.
‘참 어려운 문제야.’
후회만 한다고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그걸 몰라서 얽매이는 것이 아니다.
더 이상 벽을 넘어 앞으로 나아갈 힘이 없었기에 제 자리에서, 그저 자신이 지나온 길을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뚜렷한 해답도 없고, 누구든 언젠가 맞이할 수밖에 없는 순간. 자신이 대답을 미뤄둔 그 고민을 바라보며 이세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무 몰아붙이지는 마세요.”
“……?”
의문에 찬 박진환의 시선에 이세훈이 쓴웃음을 지었다.
“자의든, 타의든…… 가만히 서 있는 것도 힘든 일이잖습니까.”
“…….”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기 스스로만큼은 그 고통을 이해하고, 보듬어주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를 연마하고 갈고 닦아도, 그 끝이 모두 닳아 없어진다면 부질없는 이야기다.
“자네…….”
“아래쪽 설비는 혼자서 점검하겠습니다. 잠시 쉬고 계세요.”
재료가 담긴 아공간 포켓을 챙긴 이세훈이 공방의 밖으로 나갔고, 그 뒷모습을 바라본 박진환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을 위로하려고 한 말 같은데 어째서인지 다른 누군가에게 이야기하는 것 같기도 했다.
“저 친구는 도대체…….”
***
“쯧…….”
공방 밖으로 나온 이세훈은 괜한 멋쩍음에 턱을 긁적였다.
쓸 만한 재료가 있어서 좀 써보려고 했을 뿐인데 이게 도대체 무슨 난리란 말인가.
‘괜히 옛날 생각만 나고…… 짜증 나네.
처음에는 광견보다 나으니까 낫지 않나 싶었지만, 생각할수록 염성하의 행동이 괘씸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본인 창을 만드는 데 사용하겠다는 그게 그렇게 문제란 말인가.
‘듣자 하니 염진현도 진작 허락한 거 같더만 혼자서 난리야. 저걸 확 그냥.’
속으로 욕지거리를 중얼거리며 언덕에서 내려온 이세훈이 텅 비어 있는 마을에 들어선 순간.
스르륵
주변이 어둠으로 뒤덮였다.
직접적으로 시야를 차단하는 대신 주변의 빛을 통째로 차단하는 마법. 일정 공간에만 적용되는 것이기에 곧장 벗어나면 그만이었지만.
후웅!
숙련된 암살자들은 그럴 틈도 주지 않았다.
이세훈을 둘러싼 장막 내부로 달려드는 다섯 개의 그림자. 어둠 속에서 녹아들 듯 그 기척이 사라졌고 안쪽에서 섬뜩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푸욱!
다섯 개의 칼날이 살을 꿰뚫는 소리.
대낮에 벌어진 그 대담한 습격에 산 위에서 내려다보던 중년의 사내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나쁘지 않군.”
거리가 있긴 했지만 움직이는 걸 직접 보고 있었는데도 그 기척이 흐릿하게 느껴질 정도라니.
A급인 자신의 눈조차 속이려 드는 그 기묘한 특성에 사내가 고개를 돌려 나무의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저 ‘적영대寂影隊’라는 녀석들. 신체 능력이 전부 C급 정도라 했던가?”
“그렇소.”
“그런데 기척을 숨기는 건 B급도 간단히 속여 넘길 정도라…… 그 개조라는 것도 참 신기하군 그래.”
감탄하면서도 말투에서 느껴지는 꺼림칙함. 이쪽을 바라보는 시선 역시 곱지 않았지만, 그림자는 괘념치 않았다.
“다른 능력도 많소. 표적이 저항했다면 보여줄 수 있었을 텐데 아쉽게 됐구려.”
“뭐, 그거야 차차 보면 될 일이지. 문주께 잘 말씀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라.”
시선을 돌려 산 위를 힐끗 쳐다본 사내가 재차 그림자에게 물었다.
“결계는?”
“올라갔을 때 바로 발동시켰소.”
“좋아. 그럼 공방의 영감은 그쪽에게 맡기지.”
그 말을 남긴 사내가 산 위로 걸음을 옮겼고, 잠시 후 그림자의 속에서 방금과 다른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누가 거래를 해주고 있는지도 모르는군요.”
“파문당한 사범 따위가 뭘 알겠느냐. 쓰다 버리는 말들이 대개 그런 법이지.”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사내의 뒤쪽에 놓여 있던 바위 위에 걸터앉아 있던 노인이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일이 끝나고 나면 예정대로 녀석도 같이 정리하거라. 액막이 부적을 들고 있었으니 확인사살을 해야 할 거다.”
“알겠습니다.”
그림자의 대답을 들은 노인은 다시금 아래쪽에 만들어진 어둠을 바라보았다.
“헛걸음만 했군…….”
짧게 중얼거리며 사라진 노인. 그 이후 그림자에 몸을 숨기고 있던 복면의 사내, 적영대주가 동네로 시선을 돌렸다.
‘암습까진 좋았는데 뒤처리가 형편없군…….’
도대체 뭘 하기에 아직까지 나오지 않는단 말인가.
어르신께 부족한 모습을 보여준 것 같아 짜증이 난 적영대주가 곧장 다른 부하들에게 손짓했다.
스스슥
그러자 마을에 숨어 있던 그림자들이 모습을 드러내며 재차 장막 속으로 들어갔고.
서걱!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장막 속에서 굴러 나왔다.
검은 천으로 둘러싸인 공. 그것이 방금 들어간 부하의 머리라는 것을 깨달은 적영대주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뭐…….’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그 갑작스러운 상황에 적영대주가 당황하면서도 반사적으로 남은 부하들에게 손짓을 보냈고.
꿀렁─
장막의 안쪽에서 검은 창이 쏘아져 나왔다.
창날부터 창대까지 온통 검은색인 날렵한 단창. 그것이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가 싶더니 돌연 사라진다.
모습을 감췄다기보다는 마치 이 세상에서 사라진 듯한 상황. 감쪽같이 사라진 검은 단창에 적영대주의 사고가 일순간 멈췄다.
‘마력으로 만들어냈다가 힘이 부족해서 사라진 건가?’
그렇다면 피하겠다고 움직이기보다는 이대로 기척을 숨긴 채 은밀하게 움직이는 것이 맞지 않을까.
그 생각이 적영대주의 반응을 느리게 만들었고.
사륵
눈앞의 허공에 그어진 실선의 틈새에서 검은 단창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푸욱!!
“크윽……!?”
뒤늦게 몸을 날려보았음에도 허벅지를 꿰뚫은 단창.
그 통증에 적영대주가 경악하면서도 다급히 마을을 향해 재차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사라진 장막. 급소를 찔렸거나 목이 사라진 부하들의 시체가 처참하게 널브러져 있었고 단 한 사람만이 중심에 서 있었다.
스윽
처음 장막에 둘렸던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은 이세훈.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상대가 자신을 향해 자잘한 글귀가 새겨진 검지를 겨눴고.
“명안계암瞑眼界唵.”
검은 단창에서 터져 나온 어둠이 적영대주를 휩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