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가 다 만들어줌 87화
투살법
마광수가 초견살의 검법을 토대로 만들어낸 새로운 기술로, 싸워서 죽인다는 단순한 이름답게 그 구조 역시 단순했다.
상대를 관측하고, 공격과 빈틈을 반사적으로 파고든다. 공격과 회피를 무의식으로 펼쳐내는 일종의 자동 공격.
경험이 부족하거나 관측하는 능력이 떨어진다면 삽질하다가 죽기 딱 좋은 괴팍한 기술이었지만.
투웅!
모든 동작을 효율적으로 펼치는 데만 집착해 온 이세훈에게 이만큼 적절한 기술은 없었다.
‘잔재주를……!’
그물을 돌파하고 다시 호수를 박차며 달려오는 이세훈의 모습에 윌리가 당황하면서도 곧장 공격 방식을 바꿨다.
콰가가각!
다시 한번 수면 아래에서 솟구쳐 올라오는 나무뿌리들.
궤적 자체는 단순하기 그지없었지만, 진짜 공격은 그 겉에 얽매여 있는 ‘연꽃줄기’였다.
파앙!
채찍처럼 사방으로 휘둘러지는 연꽃줄기.
위력 자체는 나무뿌리보다 약하지만 발판을 만들어주거나 서로 부딪쳐서 빈틈을 만들어낼 가능성도 낮고, 무엇보다도 위력이 적절했다.
‘아무리 돌파력이 뛰어나도 체력에 한계는 있겠지.’
이 정도 연꽃줄기라면 아무리 베여도 단숨에 재생할 수 있지만, 이세훈은 한 대라도 스치는 순간 자세가 틀어지거나 경직될 수밖에 없었다.
사실상 혼자서 수십, 수백 명을 상대로 싸워야 하는 상황. 이렇게 붙들고 늘어지다가 체력이 떨어져서 신체 능력이 본래대로 돌아온다면 아주 간단히 제압할 수 있으리라.
그렇게 윌리가 자신의 전략에 확신을 가진 찰나.
후웅!
이세훈의 몸이 연꽃줄기를 눈 깜짝할 사이에 돌파했다.
고개를 까딱이거나 어깨나 몸 곳곳을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종이 한 장 차이로 공격이 빗나갔고, 도저히 피할 수 없을 때는 전부 받아치기보다 몇 개만 베어낸다.
스각─
절반 혹은 곡선을 그리며 잘린 연꽃줄기들이 이세훈이 원하는 ‘방향’으로 휘어지며 서로 뒤엉켜 다시 지나갈 길을 만들어낸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그 광경에 윌리가 경악하며 바라보았다.
‘내 공격을…… 전부 예측했다고?’
마치 자신이 녀석의 움직임에 맞춰주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정밀한 움직임.
공격을 피하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의 공격으로 인해 벌어지는 현상까지 완전히 예측해서 움직였는데 도대체 몇 수 앞을 내다보고 움직이는 것인지 예상조차 가지 않았다.
스각!
연꽃줄기를 돌파해낸 이세훈이 나무뿌리 하나를 잘라내며 그 위를 올라타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끝부분에서 발바닥을 터뜨릴 기세로 마력을 뿜어내며 도약했고.
콰아앙!!!
이세훈의 몸이 한줄기의 화살처럼 신목에 쏘아졌다.
푸욱!
강철보다 단단한 신목의 몸체에 가볍게 파고드는 오색화도의 검신. 그 절삭력에 윌리가 일순간 놀랐으나 금방 상황을 파악하고 입꼬리를 올렸다.
‘멍청한 놈. 그걸로 뭘 하겠다고…….’
아무리 날카로운 검이라 해도 체급 차이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법. 수십 미터에 아우르는 신목을 베어내기에 이세훈의 검신은 너무나도 짧았다.
뿌드득
하지만 이세훈은 물러서는 대신 이빨을 꽉 깨물고 신목에 박힌 오색화도를 역수로 붙잡으며 체내에 한 자루의 검을 벼려냈다.
천충검淺充劍 백광白光
오색화도에서 터져 나오는 새하얀 섬광.
뻑뻑하게 느껴지던 칼날 끝이 자유로워졌음을 확인한 이세훈은 그대로 있는 힘껏 달리기 시작했다.
콰드드득!
벽면을 달리듯 신목을 타고 오르는 이세훈과 그 겉에 새겨지는 궤적.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윌리는 당황하면서도 새로운 공격수단을 꺼내 들었다.
두두두두!
나무껍질을 꿰뚫고 이세훈을 향해 솟구친 연꽃줄기 창.
바로 앞에서 쏘아진 탓에 피하기 어려웠지만 이세훈은 몸에 두르고 있는 보급 망토의 내구도만 믿은 채 계속해서 달렸다.
그리고 신목을 사선으로 가로지르는 흔적, 마력회로를 단칼에 끊어낼 약점을 모두 그려냈고.
콰아앙!
오색화도의 불꽃을 터뜨려 제이크에게 신호를 보냈다.
투웅─!
이세훈이 시선을 끄는 동안 기척을 숨기며 접근했던 제이크가 단숨에 달려 나와 휘광검에 모든 마력을 쏟아 부었다.
까드득
검신만 3m는 족히 되는 거대한 대검.
지금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의 위력을 상상하며 제이크의 두 눈은 이세훈이 새겨놓은 상처를 향했다.
딱 한 번.
죽이지 못하더라도 잠시나마 마력의 운용을 방해한다면 수해 전역에 깔린 안개가 해제될 것이다.
그렇다면 카사르 교수님을 비롯하여 다른 교직원들이 곧장 자신들을 구하러 오리라.
‘성공해야 돼.’
반드시 성공해야만 하는 순간이 있다면, 그게 바로 지금일 것이다.
미친 듯이 두근거리는 심장박동 속에 제이크가 이를 악물며 휘광검의 손잡이를 더욱 힘차게 움켜쥐었고.
쩌적
들려서는 안 될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파카앙!
사방으로 흩뿌려지는 푸른색 조각. 모든 마력을 담아낸 검신이 휘둘러보지도 못한 채 산산조각 났다.
그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제이크의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눈앞의 시간이 느리게 흘러갔다.
‘어째서…….’
반드시 성공해야만 하는데, 절대로 실패해서는 안 되는데 어째서 이렇게 되어버린단 말인가.
그 빌어먹을 무의식은 도대체 무엇이 무섭다고 자신의 힘조차 이끌어내지 못하는가.
찰나의 순간에 밀려드는 수많은 상념 속에 제이크가 그대로 휩쓸려가던 찰나.
푸욱!
어깻죽지에서 느껴지는 화끈한 통증과 동시에 흐트러지던 제이크의 몸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콰앙!!
바로 옆을 스치고 지나가는 연꽃줄기 창.
자신도 모르게 공격에 반응한 제이크는 깜짝 놀라면서 공격이 날아온 위를 바라보았다.
‘이건…….’
자신에게 비수를 던져 공격을 피하게 해준 이세훈.
그 대가로 자신이 공격을 당해 몸 곳곳에서 피가 흘렀지만, 그런데도 묵묵히 아래로 쏘아지는 창들을 쳐내며 계속해서 자신을 지켜주었다.
그 모습을 본 제이크는 이세훈이 자신에게 맡겼던 역할을 떠올렸다.
‘전력을 다해서 휘둘러.’
검신이 깨지든, 마력이 부족하든, 지금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오직 그것뿐이다.
그것을 다시금 깨달은 제이크가 이빨을 꽉 깨물며 다시 앞으로 달려 나갔다.
투두두두!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가는 창들을 무시하며 몸에 남아 있는 모든 마력을 휘광검에 밀어 넣어 검신의 토대를 만들어낸다.
우우웅!
하지만 앞전에 비한다면 터무니없이 작은 크기. 신목을 베어내기에도, 자신의 전력을 모두 담아내기에도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뭔가 다른 재료가…….’
마력으로 생성해내는 결정수 말고도 자신이 압축할 수 있는 무언가가 없을까.
톡─
그런 제이크의 귓가로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고, 그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어깨에서 흘러내려 호수의 물에 흩어지는 피. 마치 ‘하나’가 되는 듯한 그 모습에 제이크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고.
“흐읍……!”
결정수가 맺힌 휘광검의 끝을 수면의 아래로 집어넣은 채 있는 힘껏 달렸다.
콰가가각!
물살을 가르는 불완전한 검신. 그 아래에서 반짝이는 푸른빛을 바라보며 제이크는 자신의 모든 힘을 두 손안으로 욱여넣었다.
두근두근두근─
심장이 터져 버려도, 몸이 박살 나도, 휘광검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이제는 신경 쓰지 않는다.
제이크라는 한 사람을 이루고 있는 모든 힘이 처음으로 두 손안에 압축되었다.
까드득─!
수면 아래에서 빛나는 푸른색 별. 새롭게 만들어낸 휘광검의 검신을 호수 아래에서 전력을 다해 뽑아냈고.
청휘성晴暉星
수십 미터를 아우르는 푸른빛이 모든 것을 베어냈다.
눈이 멀어버릴 것 같던 섬광. 손끝에서 느껴지는 충족감에 제이크는 베어낸 적보다도 자신의 검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우우웅!
호수의 물까지 빨아들여 만들어진 거대한 검. 그리고 그 겉에 맺혀 있는 푸른빛의 선명한 검기.
“……됐다.”
그 모습에 제이크가 지친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고.
쿠구구궁!
궤적을 따라 반으로 갈라진 신목이 천천히 어긋나며 무너져 내렸다.
쏴아아아!
부서진 신목이 아래로 무너져 내리자 호수가 거대한 파도를 만들어내며 주변을 후려쳤다.
인근에 있던 모든 나무가 쓸려갈 만큼 어마어마한 물살. 그리고 그 여파가 잠잠해졌을 때쯤에 수면 위로 두 개의 그림자가 동시에 솟아올랐다.
“푸하! 후우…… 후우…….”
“콜록! 콜록!”
거칠어진 숨을 고르는 이세훈과 기침과 함께 물을 토해내는 제이크. 수면 위에 서 있을 힘도 없어 두 사람 모두 물살에 쓸려갔던 것이다.
“살아 있냐?”
“살아만 있다는 느낌…….”
심장에 무리가 갔는지 가슴 쪽이 쥐어짜이듯 아팠고 그 이외에 몸은 힘이 쭉 빠져 움직이기도 힘들었다.
거기에 생각조차 제대로 안 이어질 만큼 멍한 기분이었는데 정말로 힘이란 힘은 다 쏟아낸 듯한 상태였다.
‘이게 전력인가…….’
탈력감이 너무 심해 이대로 죽어버리는 게 아닌가 싶어 오싹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만큼 쏟아냈다는 후련함도 느껴졌다.
호수 위에 둥둥 뜬 채로 제이크가 멍하니 안개가 남아 있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을 때.
“야야. 정신 차려. 아직 안 끝났으니까.”
옆에 있던 이세훈이 제이크의 볼을 찰싹 찰싹 때렸다.
“안 끝났다고……?”
“방금 잘라낸 건 손발 같은 거니까. 핵은 멀쩡할걸?”
“그게 무슨…….”
당연히 쓰러뜨렸을 거라고 생각한 제이크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보고 있을 때.
콰드득!
신목이 무너진 잔해. 그 속에서 거대한 연꽃 봉오리 하나가 줄기와 함께 솟구쳐 올랐다.
그리고 절반이 검은색으로 물들어 있는 잎이 활짝 펼쳐지더니 중심부에 위치한 거대한 눈동자가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
[손상률 95%…… 수해 제어불가…… 공간 능력 사용 불가…… 양분 필요…….]
머릿속에 직접 울려 퍼지는 이질적인 음성. 그것이 연꽃에게서 들려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제이크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고?’
같은 등급의 몬스터라 해도 보유한 능력과 지능에 따라서 그 위험도가 천차만별로 달라지기 마련.
눈앞의 몬스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은 제이크가 억지로 혈류를 가속시키며 움직이려던 그때.
“뭐 하냐?
옆에 떠 있던 이세훈이 제이크의 몸을 툭 치면서 혈류를 강제로 가라앉혔다.
“저렇게 노려보는데 공격이든 방어든 해야 할 거 아냐!”
“그럴 힘도 없잖아. 무리하지 말고 그냥 가만히 있어. 안개도 사라졌으니까.”
“……안개가 사라졌다고?”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하는 이세훈의 모습에 제이크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하늘 위를 올려다보았다.
하늘을 뒤덮고 있던 자욱한 안개. 그 색이 처음에 봤던 것보다 조금 탁해졌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투웅─
거대한 대검 한 자루가 연기 속에서 빠져나와 연꽃의 몸통을 꿰뚫었다.
[────!!!]
귓가를 울리는 비명과 고통에 몸부림치는 연꽃의 줄기들. 그 모습에 제이크가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하늘에서 떨어진 대검을 바라보았다.
탁한 회색빛을 띤 사각형의 검신과 숯처럼 곳곳이 갈라진 검은 손잡이.
“회연灰煙…….”
완등자인 ‘성화공星火工’ 리 켄세가 카사르의 재능과 인품을 인정하며 만들어줬다는 전설 등급의 검.
그 갑작스러운 등장에 제이크가 당황하고 있을 때. 이세훈이 피식 웃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명색에 S급 영웅인데 놀고만 있었겠냐.”
쿠르르릉─
하늘을 뒤덮은 연기가 크게 요동쳤고 이내 회연과 비슷한 검의 형상으로 변하며 수해 전역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쿠구궁!
연군검 카사르의 주력기술인 ‘연천우煙天雨’.
회연을 통해 연기를 퍼뜨리고 그 형상을 조정하여 광범위에게 폭격을 가하는 것인데, 규모뿐만 아니라 정밀도도 매우 뛰어난 기술이었다.
[안──…… 생명─…… 이어──…….]
콰가각!
마지막까지 재생하며 저항하던 신목의 핵 위로 수십 자루의 대검이 떨어지며 완전히 제압했고, 그 모습을 본 제이크가 작게 중얼거렸다.
“해치웠나…….?”
죽은 적도 부활시킨다는 주문.
하지만 그 유명세와 달리 더 이상 귓가에 울리는 소리는 없었고.
“해치웠네.”
신목은 완전히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