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가 다 만들어줌 70화
“그럼 다음에 또 찾아뵙겠습니다!”
“그래. 앞으로 기대하고 있을게.”
“가, 감사합니다!”
윗사람 대하듯 90도로 고개를 숙이며 인사한 생도가 자리를 떠났고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렌이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방금 그 친구는 조금 자질이 보이네. 궁술학부쪽에 언질 좀 넣어서 지원을 늘려줘.”
“예.”
“그리고 그 앞에 연금학부 친구는 소질이 없어 보이니까 대폭 줄이고. 혹시라도 매달리면 계약서라도 작성시켜.”
“알겠습니다.”
렌의 지시에 생도를 데리고 왔던 교류회의 회원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신입생들을 대상으로 벌여지는 선별작업.
누군가는 기껏 해봐야 생도들끼리의 줄세우기가 아닌가 할 수 있었지만, 실제로는 달랐다.
교류회에 속한 생도들의 배경, 각종 기업과 길드, 고위 영웅들이 저마다 선별된 생도들을 지원해 줬기 때문이다.
‘이전보다 더 강력해졌어.’
특히나 렌이 교류회를 휘어잡은 이후로는 더욱 조직적으로 변했고 다양한 집단으로부터 후원까지 받기 시작했다.
바벨이라는 출신으로 굳건히 뭉치는 엘리트 집단. 기존에 없던 세력이 새롭게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 광경을 에리카가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때. 시간을 살핀 렌이 미소를 지었다.
“일단은 여기까지 하자. 다들 수고했어.”
“수고하셨습니다.”
고개를 꾸벅인 생도들이 자리를 비웠고 단둘이 남게 된 렌이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내가 4학년이 되면 네가 이어받아야 하니까 오늘 하루 잘 봐두도록 해. 좀 더 기반이 갖춰지고 나면 가문에 큰 힘이 될 테니까.”
“알겠습니다.”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지만 가문에 필요하다면 해야 한다. 에리카의 건조한 대답에 렌이 힐끗 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이세훈 그 친구는 조금 실망이네.”
“…….”
“흑무인 정도는 알아차릴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말이지.”
접촉한 대상과 술자를 연결시키는 비전주술 ‘흑무인黑霧軔’.
그 자체만 놓고 보면 저주로 아무런 효과도 없지만, 그 진가는 다른 주술과 같이 사용할 때 나타난다.
대상과 술자가 흑무인을 통해 연결되면서 저주를 비롯한 주술들이 저항을 뚫고 몸 깊숙이 스며들기 때문이다.
“손가락 하나만 튕겨도 신체의 자유를 빼앗기는데 정작 당사자는 모른다니. 참 우스운 이야기야.”
앞서 연회장 밖으로 쫓아냈던 카터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마음만 먹는다면 이세훈을 불러와 무릎을 꿇릴 수도 있었다.
아직도 유지되고 있는 흑무인과 그 너머로 느껴지는 불안정한 마력에 렌이 실망감을 담아 한숨을 내쉬었다.
“더 살펴볼 필요도 없을 것 같은데…… 네 생각은 어때?”
“…….”
렌의 물음에 에리카는 바로 옆에서 보고 있었던 이세훈의 모습을 떠올렸다.
‘분명히 알아차렸어.’
흑무인이 오른손에 박힌 순간. 아주 잠깐이지만 이세훈의 의식이 그쪽으로 향한 것이 느껴졌었다.
평소에도 관찰하던 사람이 아니라면 알아보기 힘들 만큼 희미한 반응. 그것을 바탕으로 에리카는 이세훈의 의도를 추측했다.
‘이전에 보여준 파훼식의 수준을 생각하면 흑무인 정도는 간단히 없앨 수 있어. 그런데도 남겨뒀다는 건…… 받아치겠다는 뜻이겠지.’
그렇다면 지금 자신이 해야 할 행동은 명확하다. 빠르게 결론을 내린 에리카는 무심하게 대답했다.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그리 하세요.”
무관심한 것 같으면서도 확신이 느껴지는 대답. 그 모습에 렌이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까지 확신하는 건가.’
아직 자신이 보지 못한 무언가가 있는 것일까. 흑무인을 해제하려 했던 렌은 잠시 고민하다가 생각을 고쳤다.
‘좀 더 살펴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무심하게 서 있는 자신의 동생, 에리카를 바라본 렌이 신중히 생각하고 있을 때.
촤자자작!
연회장 한쪽에서 솟구치는 빛과 웅성거림. 그리고 흑무인을 통해 전달되는 마력의 움직임.
빛이 터져 나온 위치가 바르무트가 준비한 시연회장임을 알아차린 렌은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어렵지 않게 깨달았다.
“비에르…….”
자신이 나선 것을 봤는데도 손을 대다니. 치밀어 오르는 불쾌감에 눈매를 찌푸린 렌이 곧장 시연회장을 향했다.
그리고 수많은 인파를 가로지르며 도착한 순간.
찰칵찰칵
허공에서 새롭게 조립되고 있는 무구가 보였다.
* * *
연금무구.
각 부품을 상황에 맞춰 조립하여 다양한 형태로 사용할 수 있는 범용성 높은 무구로 미래의 무구 산업에 큰 자리를 차지하는 종류였다.
하지만 초창기에는 그리 주목받지 못했는데 그 이유로는 크게 두 가지가 뽑혔다.
“일단 성능이 거지 같고, 안정성을 밥 말아 먹었지. 내 가슴팍에 흉터 이것도 몬스터가 아니라 시제품 하나 잘못 썼다가 생긴 거야.”
이세훈의 단골 중 한 명인 S급 영웅 ‘웨폰마스터’는 연금무구를 주력으로 사용했었는데 과거에 지원받은 시제품 하나 때문에 황천길을 건널 뻔했다고 자주 불평을 터뜨렸었다.
이세훈은 그 이야기를 잊을만하면 들었기에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눈앞의 ‘철장’인 것이다.
‘확실히…… 이건 터질 만하구만.’
영웅 등급답게 출력도 뛰어나고 변형개수도 18개로 준수하다. 전체적으로 나쁘지 않았지만, 문제는 그 구조가 너무나도 위태롭다는 것이었다.
‘제련이 개판이라 내구성도 많이 떨어졌고, 변형개수를 늘린다고 무리하게 마력회로를 늘려서 역치가 너무 낮아졌어.’
간단하게 비유하자면 블록을 접착제 없이 역피라미드 형태로 쌓은 상황.
겉모습이 웅장하긴 하지만 실상은 툭 건드리기만 해도 무너질 만큼 위태로운 것이다.
‘내구도가 너무 떨어지니 일반적인 냉병기로 써먹긴 그렇고…… 무구 스킬을 특화시키는 쪽이 좋겠어.’
개선 방향을 정한 이세훈은 즉각 철장에 연결되어 있는 흑령사를 조작하기 시작했다.
찰칵! 끼리릭─
완벽히 분해되었던 조각들이 이세훈에 의해 재배치되고 다시금 조립되기 시작한다.
악어의 꼬리처럼 작은 칼날이 겹겹이 이어지는 검. 상당히 기형적인 형태였지만 어디 한군데 불안정한 부분이 느껴지지 않았다.
철컥!
마지막 조각까지 모두 조립시킨 이세훈은 곧장 완성된 검을 낚아챘다.
“보자…… 웨이터. 여기 와봐”
지나가던 골렘을 부른 이세훈은 쟁반 위에 놓인 과일 조각을 하나 집어 들었다.
그리고 허공에 집어 던짐과 동시에 손에 쥐어진 철장을 가볍게 휘둘렀다.
파앙─!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바람의 칼날이 과일을 반으로 갈라냈다.
쿠구궁!
과일을 갈라내고도 뻗어 나가 연회장 천장의 방호 마법과 부딪친 바람의 칼날. 가볍게 휘둘렀는데도 저만한 위력이라니.
그 모습에 모두가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
“이리 내놔라!”
이세훈에게 달려들다시피 다가간 비에르가 손에 들린 철장을 빼앗으며 정보창을 살펴보았다.
[철장 : 절풍]
[등급 : 영웅] [품질 : 중상]
파문수정으로 만들어낸 연금무구.
유기적으로 연결된 관절로 인해 채찍처럼 유연한 움직임을 펼칠 수 있으며 마력회로가 검풍을 가속시켜 바람의 칼날을 만들어냅니다.
*마력을 부여하여 바람의 칼날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스킬 ‘절풍’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다른 무구로 변형이 가능합니다.
“…….”
본래 철장은 영웅 등급 하품의 무구였고, 어떤 형태로 변형되든 간에 품질이 떨어지면 떨어졌지 오른 적은 없었다.
그런데 이세훈이 만들어낸 철장은 품질이 무려 중상급으로 올랐다. 그 말인즉 정말로 그 한순간에 철장의 문제점을 ‘개선’해냈다는 뜻인 것이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이번에 철장을 미끼로 고른 것은 결함을 쉽게 알아볼 순 있지만, 고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연구진들도 어찌하지 못한 결함을 처음 보고 바로 개선해 버리다니.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그 사실에 비에르의 두 눈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반드시 처리해야 한다.’
지금 이 순간을 놓친다면 다음에는 더욱 건드리기 힘든 위치로 가 있을 것이다.
빠르게 판단을 내린 비에르는 표정을 가다듬으며 이세훈을 노려보았다.
“속임수군.”
“뭐?”
“안정성은 생각지도 않고 출력만 높여 등급을 올린 거겠지. 이런 편법에 내가 속을 거라고 생각한 건가?”
속임수란 말에 주변이 술렁인다. 그 분위기에 비에르는 곧장 이어서 이야기했다.
“설마 내가 보는 앞에서 이렇게 당당하게 속이려 들다니. 내가 그렇게 우습게 보였나.”
적의를 넘어 혐오감마저 느껴지는 비에르의 목소리. 진심으로 경멸하는 듯한 그 태도는 다른 생도들에게도 마치 사실인 것처럼 느껴지게 만들었다.
“진짜 속임수인가?”
“그래도 품질이 올랐다잖아.”
“출력만 높인 편법이라잖아. 연금무구는 안정성이 중요한데 그게 떨어지면 의미가 없지.”
제련학부 3학년 수석이자 바르무트의 차기 후계자라는 배경을 지닌 비에르. 그리고 1학년 학과수석이지만 부상을 비롯하여 여러 논란을 가지고 있는 이세훈.
생도들의 믿음이 어디로 갈지는 뻔한 일이었고 점차 이세훈을 향해 의문과 의심이 담긴 시선이 쏟아졌다.
제대로 된 증거를 보이지 않는다면 정말 그렇게 될지도 모를 상황. 그 광경에 이세훈은 비에르가 노리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어떻게든 물고 늘어지겠다 이거구만.’
그리고 어떤 식으로 물고 늘어질지도 대강 예상이 간다. 그렇기에 이세훈은 피식 웃으며 바라보았다.
“정 불만이면 실험해 봐.”
“…….”
“네가 말한 대로 편법을 썼으면 마력을 단숨에 불어넣었을 때 과부하가 일어나잖아. 그 방법으로 검증해 보면 되겠네.”
자신감 넘치는 이세훈의 모습에 모두가 긴장한 표정으로 보고 있을 때. 철장을 움켜쥔 비에르가 싸늘하게 이야기했다.
“후회하지 마라.”
우우웅
비에르의 손에 모여드는 회색빛의 마력. 그동안 먹어온 영약이 적지 않음을 보여주듯 양이 상당했고 철장이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아직 제대로 마력을 집어넣지 않았는데 불안정한 모습. 이대로 집어넣기만 해도 부술 수 있겠지만 비에르는 확실하게 하기 위해 자신의 스킬 ‘광원공명鑛原共鳴’을 사용하였다.
키이잉─
자신의 마력과 금속의 근원을 공명시켜 제어할 수 있는 A급 스킬. 보통은 제련 중에 사용하지만 방법에 따라서 무구를 자연스럽게 ‘파손’시키는 데도 이용할 수 있다.
‘예정보다 크게 다치겠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다.’
어떤 의미에서 의심을 제대로 피해갈 수 있을 테니 나쁠 건 없다. 각오를 다진 비에르는 단숨에 철장의 안으로 마력을 불어넣었다.
끼기기긱─!
당장에라도 터질 것처럼 쇳소리를 내기 시작하는 철장.
마력을 모두 담아내지 못한 검날들이 파르르 떨렸고 곧 부서질 것처럼 그 사이가 벌어져갔다.
그 모습에 비에르는 마지막 쐐기를 박듯 근원을 파괴하여 검신을 폭발시키려 했고.
촤자자작!
회색빛의 검신이 눈앞에 펼쳐졌다.
“……?”
척추처럼 이뤄져 있던 검날들이 모두 분리되어 허공에 펼쳐졌고 그 사이사이에 비에르가 불어넣은 회색빛의 마력이 검신을 만들어냈다.
예상한 것과 너무나도 다른 광경. 그 모습에 모두가 넋을 잃고 있을 때, 누군가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검기……?”
단순히 마력이 뭉친 것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선명한 형태. 검기라고밖에 볼 수 없는 그 형태에 모두가 멍하니 바라보았고, 비에르 역시 믿을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양산화에 실패했을 뿐이지 검기를 만들어내는 무구 자체는 이미 존재한다. 그런데도 다른 이들이 이렇게 놀라는 이유는 그 제작 과정 때문이었다.
‘검기무구를 만들기 위해서는 검기를 다룰 수 있는 영웅이 마력회로를 가공해줘야 할 텐데…….’
똑같은 마력회로라고 해도 검기 사용자의 가공을 받지 않으면 검기를 만들어낼 수 없다. 이 특수성이 바로 검기의 양산화를 가로막는 장애물 중 하나인 것이다.
그런데 이세훈은 그 장애물을 간단히, 그것도 자신들이 실패작이라 불렀던 무구를 고쳐내는 것으로 만들어냈다.
“…….”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비에르는 망설임 없이 두 눈을 회색빛으로 물들이며 광원공명을 전력으로 끌어올렸다.
쿠구궁
선명하게 유지되어 있던 검기가 흐트러지더니 파열음과 함께 내부에 순식간에 균열이 퍼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철장에도 그 균열이 퍼지며 부서진 순간.
콰아아앙!
폭발음과 함께 회색빛의 검기들이 사방으로 쏘아졌다.
‘그렇게 나오는구만.’
개인적인 감정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설마 주변의 다른 생도들에게 피해를 줄 방법을 고르다니.
예상을 넘어선 비에르의 대응에 이세훈이 두 눈을 차갑게 빛내며 준비해뒀던 마력을 끌어올리려던 순간.
“흐음.”
새하얀 손이 옆에서 뻗어 나왔다.
촤악
손끝이 잔상을 흩뿌림과 동시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검기의 조각들. 그 압도적인 광경에 이세훈의 두 눈이 휘둥그레져 있을 때. 손의 주인이 옆에서 걸어 나왔다.
또각또각
어깨에 걸친 하얀 자켓과 몸을 감싼 우아한 붉은 드레스. 그리고 스스로 빛을 내뿜는 듯한 긴 금발 머리.
그 존재감에 누구도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고 여인만이 아무렇지 않게 손에 쥔 검기의 조각을 만지작거렸다.
“진짜 검기구나…….”
흥미롭다는 듯이 검기의 조각을 살피던 여인은 이내 가볍게 움켜쥐었다.
파각─
어지간한 강철보다 단단하고 날카롭다는 검기의 조각이 먼지처럼 부서져 흩어진다.
방금 터져 나왔던 검기의 조각들을 어떻게 없앴는지 보여준 여인. 미래의 완등자이자 멸광의 마신이 되는 현 바벨 최강의 생도.
“우리 이야기 좀 할까?”
아리아 마이어스가 이세훈을 향해 싱그럽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