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가 다 만들어줌 63화
보통 인챈트는 성질이 고정된 물질 위주로 사용된다.
성질이 유동적일 경우 변동성까지 고려하여 술식을 짜야 했기에 난이도가 기하급수적으로 오를 뿐만 아니라 인챈트를 유지하기 위한 후처리도 필요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휘발성까지 가졌을 경우 술식을 새기던 도중 시도 때도 없이 사라져 인챈터들 사이에서 수명이 줄어든다는 말이 나올 만큼 악명 높았고.
우우웅
이세훈이 내민 거대한 알, 백란화의 불꽃은 유동성과 휘발성 그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다.
“…….”
눈앞에 내밀어진 백란화를 살피던 레아가 조심스레 붓을 들어 준비 중이었던 술식을 새겨 넣었다.
스스슥
백란화의 표면에 새겨지는 인챈트 ‘공간분리’의 뼈대.
확장성이 강한 재료를 공간채로 분리시켜 묶어주는 효과로 가만히 놔두면 자신까지 불태워 버리는 남화우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인챈트였다.
우우웅!
하지만 뼈대를 모두 작성하기도 전에 백란화 안쪽에 있는 붉은 기운, 남화우의 불꽃이 요동치더니 어렵게 새겨 넣은 술식이 모조리 불타버렸다.
깨끗한 백지로 돌아온 백란화의 모습에 레아가 가만히 바라보다 손바닥으로 두 눈을 덮으며 중얼거렸다.
“조졌네…….”
인챈터들 사이에서 화속성 재료가 워낙 악명이 높았던지라 어느 정도는 각오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상황에 레아는 아침의 각오가 무색하게 당장에라도 도망치고 싶어졌다.
‘5초마다 술식을 초기화시키는 재료에다 어떻게 인챈트를 하라는 거야?’
이세훈이 부탁한 ‘공간분리’와 ‘지정각인’은 레아가 알고 있는 인챈트들 중에서도 어마어마한 분량을 자랑하는 인챈트.
그냥 새기기만 해도 몇 시간은 걸릴 텐데 그걸 5초마다 초기화되는 상황에서 한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게 말이 되나? 아무리 생각해도 안 되잖아. 근데 저놈은 도대체 뭐가 가능하다는 거야. 저 사탕발림에 넘어가는 게 아니었는데. 선발대회는 어쩌지? 할머니도 화나신 거 같고. 그냥 내가 먼저 자퇴해 버려?’
눈앞의 문제를 해결하기에도 벅찬데 온갖 쓸데없는 잡생각들이 계속해서 떠오르며 머릿속을 가득 채워간다.
눈앞의 난제를 외면하기 위해 쓸모없는 생각을 되풀이하는 증세. 1년 전의 ‘그 사건’ 이후 자신을 슬럼프로 밀어 넣은 버릇이 다시금 도진 것이다.
“……하아.”
그런 레아의 상태를 알아차린 레베카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과의 약속도 잊고 딴 길에 빠진 것이 마음에 안 들긴 했었지만, 한편으로는 슬럼프를 떨쳐냈나 싶어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역시 무리였나.’
이세훈과의 만남으로 무언가 얻은 듯하지만 슬럼프를 완전히 떨쳐내는 것은 역부족이었던 모양이다.
보르시파의 1학년 학과수석으로서 총기 넘치던 손녀의 모습을 떠올린 레베카가 씁쓸한 표정을 짓다 문득 백란화에 눈길이 닿았다.
‘그나저나 저 애도 참 너무하네. 아무리 인챈트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지만 저런 말도 안 되는 짓을…….’
지금은 어디까지나 감독역할이었기에 가만히 있었지만 만약 수업 중이었다면 호되게 혼을 냈을 것이다.
누가와도 불가능한 주문을 가능할 거라는 듯이 시키다니. 이래서야 괴롭힘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다음 수업에 인챈트를 제대로 가르쳐야겠어.’
손녀와 할머니 모두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며 백란화를 바라보고 있을 때.
“뭐 해?”
이세훈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레아를 바라보았다.
“인챈트하라니까 왜 멍 때리고 있어? 팔 떨어지겠어.”
백란화를 떠받친 두 손을 까닥거리며 재촉하는 이세훈. 그 이야기에 레아의 눈썹이 솟아오르며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방금 술식 날아간 거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5초마다 진행도가 초기화되는 상태에서 공간분리랑 지정각인을 어떻게 새기란 건데!”
자신에게 기대해 주는 것은 좋긴 하지만 그래도 정도라는 게 있지 않은가. 불가능한 일을 시키려 드는 이세훈의 행동에 레아가 계속해서 항의하려 할 때.
“그럼 5초 안에 인챈트를 완성시키면 되잖아.”
이세훈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게 어려워?”
“어렵지 이 미친놈아!”
“흐음. 그래?”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레아의 모습에 이세훈이 진심으로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이미 할 줄 알면서 왜 못한다는 건지 모르겠네.”
“……뭐?”
그건 또 무슨 헛소리인가. 그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레아는 그것을 내뱉지 못했다.
이세훈의 그 심드렁한 한 마디에 불현듯 자신이 한 달 동안 머리를 쥐어짜며 구상했던 인챈트 ‘백광’의 구조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통째로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겹겹이 쌓는다.’
수십 개의 층을 이룬 그림이 겉에서 보면 하나의 그림으로 보이듯 분리되어 있으면서도 맞물리게끔 설계한다.
그 구조를 떠올린 레아는 재빠르게 백란화 위로 붓을 휘둘렀다.
스스슥
공간분리를 만들어내기 위한 뼈대. 그 일부분을 별도의 부품으로 완성시켜 하나의 인챈트로 새겨 넣는다.
우우웅!
단숨에 완성되어 마력이 순환되는 인챈트. 그리고 5초가 지나자 백란화에 담겨 있던 남화우의 불꽃이 인챈트에 맞닿았다.
본래라면 그대로 불타서 사라져야 했지만 인챈트가 조금씩 붉은 빛으로 물들었고.
화르륵!
불꽃이 피어남과 동시에 백란화 위에 선명히 새겨졌다.
“!!!!”
새하얀 도화지 위에 새겨진 붉은 글귀. 자신의 인챈트가 성공적으로 안착한 것을 본 레아가 두 눈을 부릅뜨며 이세훈을 바라보았다.
이래도 괜찮은 것인지 확인을 구하는 눈빛. 그 시선에 이세훈이 씩 웃으며 백란화를 내밀었다.
“빨리해. 팔 빠져.”
“……좋아.”
불가능한 일은 몰라도 가능한 일이라면 겁낼 것도 없다.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잡생각을 고이 접어 구석에 내던진 레아는 공간분리와 지정각인의 술식을 머릿속에서 낱낱이 해체했다.
‘불필요한 술식은 쳐내고 기본적인 뼈대들만 압축한다.’
로봇 장난감을 발끝부터 머리까지 차근차근 조립하는 것이 아니라 내키는 대로 조립하고 마지막에 사지를 결합시키듯 각 부품의 역할을 제대로 살리는 데 집중하는 것이다.
키잉!
자르고, 붙이고, 덧씌우고 마지막으로 결합시킨다.
레아의 붓이 백란화를 스쳐 지나갈 때마다 술식이 빼곡하게 새겨졌고 남화우의 불길이 그 위로 피어오르며 백란화의 곳곳에 금이 퍼져나갔다.
쩌적!
부화를 앞둔 알과 같이 거세게 흔들리는 백란화.
그 심상치 않은 모습에 김인철과 레베카가 자리에서 일어나 지켜보았지만 정작 그것을 바로 눈앞에 둔 두 사람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조금만…… 조금만 더……!’
이세훈이 부탁한 술식은 모두 새겼지만, 남화우의 힘은 아직 남아 있었다.
이대로 완성한다면 남은 부분들은 허무하게 흩어져 버리고 말 터. 그렇기에 레아는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들을 계속해서 붓으로 그려냈다.
‘형상고정. 의식투영. 정신동기화…….’
완성된 술식에 몇 가지 부품을 추가하는 것으로 새로운 기능을 만들어내고 서로 증폭하게 만든다.
그리고 마침내 레아가 새겨 넣은 술식이 백란화를 가득 채운 순간.
파각
모든 잠재력을 이끌어낸 남화우가 껍질을 부쉈다.
우우웅!
백란화가 무너짐과 동시에 중심부로 빨려 들어가듯이 압축되는 불꽃들.
본래라면 불타버렸을 남화우의 잠재력이 레아의 인챈트를 기반으로 재탄생하려는 것이다.
‘이대로 만들어도 그럭저럭 쓸 만한 물건이 되겠지만…….’
아쉽게도 이번에 만들 물건의 주재료는 남화우가 아니다. 두 손에 홍륜염을 두른 이세훈은 곧장 압축되는 불꽃을 뒤덮었다.
화르르륵!
손 틈새로 새어 나오는 불꽃. 안쪽에서 날뛰는 거센 불길에 이세훈은 홍륜염의 흐름으로 고삐를 잡아냈다.
촤르륵
이세훈이 만들어낸 흐름을 따라 남화우의 불꽃이 서로 얽히고 매듭지어지며 조금씩 진정되어갔다.
그리고 새어 나오던 불꽃과 손바닥을 두드리던 진동이 멎으며 은은한 빛이 흘러나온 순간.
화아아악
이세훈의 손이 펼쳐지며 붉은색 글귀가 허공에 수놓아졌다.
하나로 연결된 채 끝없이 순환하며 유지되고 있는 불꽃의 술식. 그 화려하면서도 유려한 모양새에 레아가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저게…… 내가 새긴 것들인가.’
사전검증도 없이 떠오르는 대로 새겨 넣었던 인챈트.
그 엉망진창이었을 술식들이 남화우의 불꽃과 완벽히 맞물리며 생생하게 움직인다.
‘……오랜만이네. 이런 기분.’
슬럼프에 빠지기 전. 자신의 재능에 확신을 가지며 거침없이 인챈트하던 시절을 떠오르게 만드는 광경.
그 모습에 레아는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끼면서 한편으로는 아쉬움을 느꼈다.
‘조금 더 하고 싶었는데.’
이런 순간이 또 언제 찾아올까. 갑작스레 찾아온 만큼 금방 잊혀져 가는 감각에 레아가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잘 만들었네.”
남화우의 불길을 올려다보던 이세훈이 씩 웃었다.
“이거면 바로 시작할 수 있겠어.”
“……?”
뭘 시작하냐는 듯이 바라보는 레아의 모습에 이세훈은 설명 대신 작업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기형학적인 무늬가 새겨진 새하얀 상아. 현실과 꿈의 경계를 오가는 마수 맥의 어금니, 몽상아를 본 이세훈은 곧장 왼손을 뻗었다.
화르륵
흐트러짐 없이 뻗어 나간 붉은 인챈트들이 몽상아를 휘감더니 천천히 공중으로 들어 올렸다.
남화우의 불꽃을 신체의 일부처럼 컨트롤하는 이세훈. 그 모습에 모두가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을 때.
우우웅
몽상아에서 보랏빛 마력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화질이 흐려지는 것처럼 테두리가 흐릿해지기 시작하는 몽상아.
불꽃에서 느껴지던 무게감이 가벼워진 것을 본 이세훈이 감각을 더욱 곤두세웠다.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몽환의 마력이 가진 가장 기본적인 특성인 ‘꿈 치환’.
사물을 꿈의 경계로 밀어 넣는 이 힘은 몽상아의 가공작업을 힘들게 만드는 일등공신이었는데 그 이유는 간단했다.
이 상태에 들어간 몽상아는 불로 달구든 칼로 깎아내든 모든 자극을 신기루처럼 흘려보냈기 때문이다.
‘그러는 사이 몽환의 마력은 팍팍 깎여나가고 정신 차리고 보면 평범한 상아로 변해 있지.’
까딱 잘못하면 억 단위 돈이 공중분해되는 악랄한 재료. 그 특성 때문에 몽상아를 가공해서 사용하는 이들은 드물었지만.
‘가만히 놔둔다면 말이야.’
이세훈은 망설임 없이 몽상아를 달구기 시작했다.
화르르륵
보랏빛 마력을 집어삼키며 더욱 격렬하게 타오르는 불꽃. 보통 같았으면 몽환의 마력이 모조리 증발했겠지만 남화우의 불꽃은 달랐다.
몽상아에서 흘러나오는 보랏빛 마력, 몽환의 마력을 고스란히 빨아들이며 흐릿하게 변해가는 것이다.
“이게…… 뭔…….”
몽환의 마력을 저렇게 다루는 방법도 있단 말인가? 혹시 자신만 몰랐던 것이 아닌가 싶어진 레아는 고개를 슬쩍 돌려 뒤쪽의 교수들을 바라보았다.
“…….”
“…….”
자리에서 일어선 채 멍하니 바라보는 김인철과 레베카.
그 모습만으로 상황을 파악한 레아는 헛웃음을 지으며 눈앞의 괴물 같은 후배를 다시금 바라보았다.
“도대체 어떻게 한 거야?”
“주작의 불꽃이 인간의 정신까지 불태우는 걸로 유명하잖아. 그래서 그걸 듣고 떠올린 거야.”
당장에라도 흩어지려는 보랏빛 불꽃을 붙잡은 채 이세훈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런 불꽃이라면 몽환의 마력이 다루는 ‘꿈’에도 달라붙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꿈도 따지고 보면 정신의 일부니까.”
“…….”
“물론 몽환의 마력이 다루는 꿈은 조금 다를 수도 있으니 그냥은 안 되지. 그래서 지정각인 인챈트로 달라붙기 쉽게 만들고, 공간분리 인챈트로 태워 먹지 않게 코팅한 거야.”
몽환의 마력을 완벽히 집어삼킨 보랏빛 불꽃을 바라본 이세훈이 만족스럽게 이야기했다.
“의도한 대로 잘됐네.”
다른 사람들이 듣는다면 깜짝 놀랄만한 방법을 아무렇지 않게 떠올리고, 또 성공해내는 이세훈. 그 모습에 레아는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안 무서워?”
“뭐가?”
“네가 확신하고 있는 그 생각이 틀릴지도 모른다는 게.”
눈앞의 불꽃을 바라본 레아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실패하면 전부 사라지잖아.”
두 눈은 불꽃을 향하고 있지만 그 시선은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다. 처음으로 보게 된 레아의 모습에 이세훈은 슬럼프의 원인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아차렸다.
‘지독한 꼴을 봤었나 보구만.’
도전에는 실패의 위험이 따르며, 실패에는 대가가 따른다. 당연한 이야기였지만 그 무게감은 저마다 다르다.
다시는 되찾을 수 없는 소중한 무언가. 그것을 대가로 치른 이들은 결코 실패를 가볍게 여기지 못하는 것이다.
‘재능에 대한 의심이 아니라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라…….’
다른 이들에게서도 보고, 직접 겪어도 보았기에 이세훈은 그 절망감이 얼마나 뿌리 깊게 남는지 알고 있었다.
자신의 한 마디가 마에스트로라 불렸었던 거물의 미래를 바꿀 수도 있는 상황. 신중하게 말을 고르던 이세훈은 이내 결정을 내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하지 마.”
“……뭐?”
“말 그대로 무서우면 하지 말라고.”
두 손 위로 피어오르는 불꽃을 바라보며 이세훈이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위험한 길이 더 좋으리라는 보장도 없는데 왜 굳이 그런 방법을 선택해? 변태도 아니고.”
“하지만 너는…….”
“나는 이 길밖에 없으니까.”
곁에 서 있는 레아에게만 들릴 만큼, 작으면서 또렷한 목소리로 이세훈이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안전한 길만 골라서 가기에는 시간이 모자라거든.”
지금도 회귀자인 자신으로 인해 미래가 시시각각 변하고 있을 터.
그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변수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여력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너…….”
이세훈의 중얼거림에 레아가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이미 다른 생도들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성장해나가고 있음에도 시간이 부족하다니. 도대체 어디를 바라보고 있기에 저런 말을 하는 것일까.
무언가에 쫓기는 듯한 그 모습에 레아가 조심스레 물어보려던 그때.
“그래서 어쩔 거야?”
이세훈이 레아를 바라보며 물었다.
“원치 않는다면 굳이 할 필요는 없어. 어떤 길을 고를지는 네 선택이니까.”
“…….”
“그리고 개인적인 경험으로 말하자면, 안전한 길이든 위험한 길이든 중요한 건 한 가지밖에 없어.”
누군가에게 인생을 조언해 줄 만큼 훌륭한 삶을 살지는 않았지만, 딱 한 가지 뼈저리게 느꼈던 것은 있었다.
그 조언이라면 아마 자신의 진심과 생각이 그대로 전달되지 않을까. 그리 생각하여 이세훈이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후회가 남지 않는 길을 고르는 것. 그것뿐이야.”
“…….”
그동안 지겹게 들어왔던 사람들의 조언 중에서도 가장 간단하며, 무거운 조언. 그 이야기에 레아는 다시금 눈앞의 불꽃을 바라보았다.
신기루처럼 흐릿하게 타오르는 보랏빛의 몽환적인 불꽃. 남화우의 불꽃에는 더 이상 인챈트할 여력이 없었지만, 몽환의 마력이 꿈 치환을 일으키며 달라졌다.
‘술식이 꿈의 경계로 넘어가면서 공간이 생겼어.’
마치 이면지를 뒤덮어 새로운 여백을 만들어낸 것 같은 상황. 추가로 인챈트가 가능하단 점에서는 좋았지만 또 마냥 쉽지는 않았다.
얇은 이면지에 반대편 그림이 비치듯 앞서 새겨진 인챈트 술식이 희미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앞서 새겨 넣은 인챈트에 영향이 가지 않도록 침식강화와 마력증폭 인챈트를 더한다…… 완전히 미쳤구만.’
앞서 작업한 남화우의 작업보다 어려우면 어려웠지 절대 쉽지 않은 난이도.
성공보다 실패의 가능성이 높은 그 작업에 레아가 숨을 골랐다.
‘후회…… 후회란 말이지.’
실패하기에 후회한다고 생각했었다. 대가로 지불한 것이 돌아오지 않는 것을 봤었기에.
하지만 눈앞의 작업을 외면한다고 해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 번뜩이는 영감을 부정한다고 해서 후회하지 않을까.
눈앞의 난제를 바라보며 레아는 자신이 인챈트에 빠져들게 된 계기를 다시금 떠올렸다.
‘좀 더 느슨하게 쥐는 거야.’
어린 시절 마석가루로 집을 더럽혔던 자신에게 조심스레 붓을 쥐여주었던 새하얀 손.
‘부족했어…….’
온몸을 아버지의 피로 물들인 채 자신을 스쳐지나 그대로 집을 떠나버렸던 여인.
“……그러네.”
이제는 볼 수 없는, 그리고 반드시 찾아내야 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며 레아가 손에 들린 붓을 꽉 움켜쥐었고.
“이것저것 따지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어!!”
촤아악!
한 줄기의 굵은 선이 불꽃을 가로질렀다.
희미하게 비치는 술식들을 무시하듯 내질러진 선. 그것을 중심으로 레아의 붓이 새로운 인챈트를 새겨 넣기 시작했다.
우우웅!!
가장 먼저 새겨지는 것은 침식강화. 현실에 희미하게 걸쳐져 있던 몽환의 불꽃이 더욱더 꿈에 파고들며 흐려져 간다.
자칫 잘못하면 영웅 등급 재료 두 개가 날아갈 상황이었지만 이세훈은 침착하게 대응했다.
‘분위기를 깨면 안 되지.’
이번에 새롭게 얻은 암속성 마력 ‘월영’. 달빛 아래의 그림자처럼 얇고 가느다란 마력이 쏜살같이 몽환의 불꽃에 파고들었다.
월영月影 흑령사黑靈絲
촤자작!
월영으로 강화한 흑령사가 불꽃에 달라붙어 옭아맸고 레아는 즉각 그 상황에 맞춰 구도를 모조리 뜯어고친 다음 인챈트를 계속해서 새겨 넣었다.
‘약간의 오류 정도는 상관없어.’
눈앞의 후배가 자신의 실력을 믿어주듯, 자신 역시 후배의 실력을 믿고 맡긴다. 뒷감당을 모조리 이세훈에게 떠넘기기로 마음먹은 레아의 붓놀림에 더 이상 망설임은 없었다.
우우웅!
날뛰는 불꽃을 억누르는 이세훈과 거침없이 인챈트를 새기는 레아.
오랜 시간 동안 호흡을 맞춰온 것처럼 두 사람의 작업이 서로 맞물렸고, 보랏빛 불꽃에도 빼곡하게 글귀가 새겨져 갔다.
그리고 마침내 레아의 붓이 마지막 방점을 찍은 순간.
“끝!!!”
짜악!
레아의 외침과 함께 이세훈의 두 손바닥이 경쾌하게 맞부딪쳤다.
몽상아는 물론 공방을 은은하게 밝히던 몽환의 불꽃마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텅 빈 광경에 레아가 자신도 모르게 긴장한 표정으로 이세훈을 바라보고 있을 때.
“잘했어.”
두 손바닥이 열리며 완성된 단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구 ‘몽환규도夢幻窺刀’가 완성되었습니다!]
[뛰어난 대장장이와 새로운 길을 찾은 인챈터가 협력하여 만들어낸 예술적인 단검! 다루기 힘든 두 재료의 잠재력을 완벽히 이끌어낸 두 사람의 실력은 갈채를 받아도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판정 결과 ‘몽환규도’의 등급은 ‘영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