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가 다 만들어줌 61화
“…….”
연구자료를 정리하기 위해 밤늦게까지 병동에 남아 있었던 안정완 교수는 얼빠진 표정으로 눈앞을 바라보았다.
“흐읍!”
한 손으로 바닥을 짚은 채 온몸을 대자로 쭉 펼친 이세훈.
겉보기에는 단순한 묘기처럼 보이지만 그 비밀을 알아차린 안정완은 살짝 감탄했다.
‘마력도 없이 저렇게 자세를 완벽하게 유지하다니…….’
바벨의 생도라면 한 손으로 자신의 몸을 지탱하는 것쯤이야 간단하겠지만, 그걸 마력도 없이 ‘전혀’ 흔들리지 않은 채 유지하는 것은 또 별개의 이야기였다.
몸의 중심을 잡는 감각은 물론 육체에 대한 이해도, 그리고 각 근육을 완벽히 통제할 수 있어야만 가능한 수준.
‘심상치 않다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안정완이 신기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을 때. 한창 자세를 유지하던 이세훈이 손으로 가볍게 바닥을 박찼다.
텅─!
1m쯤 떠올랐다가 반 바퀴 돌며 깔끔하게 착지. 자신의 신체 능력을 뽐낸 이세훈이 의기양양하게 안정완을 바라보았다.
“어떻습니까?”
“……확실히 더 입원해 있을 필요는 없겠군. 퇴원 수속 해둘 테니 짐만 챙겨가게.”
처음에 퇴원하겠다고 했을 때는 무슨 소리인가 했지만, 이렇게 증거를 직접 보여준다면 할 말도 없다.
안정완의 허락에 이세훈이 살짝 고개를 꾸벅였다.
“감사합니다.”
“할 일 하는 건데 감사받을 게 있나. 그보다…….”
이세훈의 몸을 이리저리 살펴본 안정완 교수가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회복 스킬과 영약을 이용해서 회복했다고 했었던가?”
“예.”
“혹시 어떤 스킬인지 알려줄 수 있겠나?”
전신이 약화된 상태에서 영약을 부작용 없이 섭취하게 만들어줄 정도라면 평범한 스킬은 아닐 터.
깊은 흥미를 드러내는 안정완의 모습에 이세훈이 잠시 고민하다 대답했다.
“심신연마라는 B급 스킬입니다.”
영연신마법은 자신과 사부만 알고 있는 스킬인 만큼 지금 공개했다가는 귀찮아질 가능성이 높다.
그렇기에 이세훈은 알려진 스킬 중에 효과가 비슷한 걸로 둘러댔고, 그 이야기에 안정완이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심신연마 스킬? 그걸로 영약을 섭취했다고?”
“맞습니다.”
“허…….”
이세훈의 대답에 안정완이 믿기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B급 스킬 ‘심신연마’.
이름 그대로 자신의 몸을 갈고닦는 육체조작계열의 스킬로 영약을 사용해 신체를 회복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다.
하지만 그것이 쉬운 일인가? 라고 한다면 절대로 그렇지 않았는데 심신연마는 다른 스킬들과 달리 모든 과정을 사용자가 ‘직접’ 조정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신체에 대한 이해도는 물론이고 영약의 성분과 작용과정 역시 완벽히 이해해야 한다. 그 정도면 재생치료학부의 2학년…… 아니, 3학년 수석도 힘들어.’
자신이 가르치는 생도들의 실력을 떠올리던 안정완은 무언가 고민하다가 이세훈을 바라보았다.
“자네 육체진화학을 들어볼 생각은 없나?”
“예?”
“내가 가르치고 있는 수업일세. 심심연마를 다루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거야.”
안정완의 제안에 이세훈이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그쪽은 영연신마법 때문에 질리도록 배웠었는데…….’
배운 적 없던 분야라면 모를까 이쪽은 배울 이유도 없고 흥미도 없다. 그렇게 거절하기로 결정한 이세훈이 막 대답하려던 찰나.
“내키지 않는다면 임시조교는 어떤가?”
그 낌새를 알아차린 안정완이 다른 조건을 제시했다.
“……임시조교요?”
올해 입학한 1학년, 그것도 재생치료학부가 아니라 제련학부의 생도에게 맡기겠다니.
다른 이들이 듣는다면 깜짝 놀랄 일이었지만 안정완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곧 영약에 대한 수업을 진행할 예정인데 생도들에게 정확한 사례를 보여주고 싶어서 말일세. 심신연마에 능숙한 자네라면 큰 문제 없이 해낼 수 있을 것 같고.”
다른 생도들이 보는 앞에서 영약을 섭취하고 그것이 적용되는 과정을 보여달라.
좋게 말하면 시범을 보이는 셈이고 삐딱하게 말하면 실험체가 되어달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무리 대비를 해둔다고 해도 영약의 위험성을 생각한다면 꺼려질 사항이었지만.
“수업에 사용될 영약은 희귀 등급으로 다섯 종류. 그리고 답례로는 그에 버금가는 물건들로 마련해 주겠네. 어떤가?”
“언제든지 불러주십시오.”
맨몸으로 영약을 씹어먹는 이세훈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조건이었다.
* * *
보르시파의 기숙사 인근에 위치한 작은 공원.
퇴원 수속을 마치고 그 구석진 곳에 도착한 이세훈은 벤치에 걸터앉으며 안정완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희귀 등급 영약 다섯 개라…….’
이번에 섭취한 영웅 등급 영약인 ‘음양환’보다야 못하겠지만 어떤 종류냐에 따라 그에 버금가는 효능을 볼 수도 있다.
아직도 신체 능력이 바벨의 중하위권 수준이기에 좋은 기회라 생각해 냉큼 받아들이긴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의문이 피어났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일까.’
회귀 전. 대장장이로서 수많은 이들을 만나온 이세훈은 상대가 어떤 인물인지 어렴풋이 구분할 수 있었다.
싸가지는 없지만 아군인 사람. 예의는 바르지만 뒤통수칠 생각밖에 없는 사람. 그리고 자신에게 의뢰를 맡길지 고민하는 예비손님 등등.
방금 안정완은 그중에서 고민하는 예비손님의 느낌이 물씬 풍겨났었던 것이다.
‘루이제가 말하는 걸 보면 아스쿠스 병동에서도 좀 알아주는 양반 같던데…… 생도한테 맡기려는 이유가 뭐지?’
지금 추측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밖에 없다.
안정완이 자신을 그만큼 높게 보고 있다거나, 아니면 일반적인 대장장이에게는 맡길 수 없는 종류의 일이거나.
쉽사리 짐작 가지 않는 이유에 이세훈이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
파치직
돌연 스파크를 튀기며 꺼지는 가로등.
이어서 주변의 조명들도 하나둘씩 꺼지면서 순식간에 이세훈이 앉은 벤치 일대가 어둠에 잠겼다.
그 갑작스러운 상황에 이세훈이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주변을 살피고 있을 때. 저 멀리 수풀에서 무언가가 재빠르게 날아왔다.
푸욱!
이세훈이 앉은 벤치 뒤쪽의 나무에 박힌 거무튀튀한 비수.
무광처리를 해뒀는지 어둠 속에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어렴풋이 보이는 크기나 그 파공음이 어딘가 익숙했다.
‘저건…….’
그 정체를 이세훈이 알아차린 순간. 수풀 너머에서 재차 비수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두두두!
눈 깜짝할 사이에 나무에 꽂힌 열 자루의 비수. 그 충격에 나무가 크게 뒤흔들리더니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졌다.
그리고 그것들이 이세훈의 머리 위로 떨어지려던 그때. 비수의 손잡이 끝에 매달린 실을 타고 재빠르게 마력이 스며들었다.
우우웅
마력이 주입됨과 동시에 비수에 나타난 새하얀 문양들.
톱니바퀴처럼 맞물린 문양이 주입된 마력을 날카롭게 회전시키더니 이어서 그 성질이 변화되기 시작했다.
보기만 해도 베일 것 같은 섬뜩한 예기. 그 익숙한 기운이 어둠 속에서 새하얗게 발광하며 손잡이 끝의 실에 맺혔고.
파사삭!
스쳐 지나간 나뭇잎들이 수십 조각으로 갈라졌다.
후두두득
머리 위로 떨어지는 나뭇잎 조각들.
평범한 실을 떨어지는 나뭇잎도 베어낼 만큼 날카롭게 만들어낸 새하얀 예기에 이세훈이 두 눈을 휘둥그레 떴고.
파앗!
주변의 빛이 돌아오며 한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땋아둔 것이 풀어지기 직전인 갈색 머리카락과 얼룩덜룩해진 의사가운에 지저분하게 붙은 풀잎들.
눈가에 자리 잡은 다크서클이나 창백한 안색은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처럼 보였지만 입가에는 자신만만한 미소가 맺혀 있었다.
“후후…….”
의기양양하게 미소를 지어 보이지만 어딘가 맛이 가 있는 소녀, 레아 클로델이 팔짱을 끼며 이세훈을 바라보았다.
“자 어때!”
밑도 끝도 없이 소감을 물어보는 레아.
그 모습에 이세훈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뒤쪽에 박혀 있는 비수를 바라보았다.
우웅!
주술학부 3학년이자 이노우에 가문의 앞잡이였던 세이츠에게서 화해의 증거로 양도받은 비수들.
본래 방호술식을 비롯해 간단한 인챈트가 새겨져 있었는데 레아의 손을 거치면서 완전히 다른 물건으로 변해 있었다.
[백광비수白光匕首]
[등급 : 희귀] [품질 : 최하]
새하얀 예기를 머금은 검은색 비수.
특별할 것 없는 무구지만 인챈트 ‘백광’이 부여되어 날카로운 예기를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단 백광을 사용할수록 내구도가 빠르게 감소합니다.
*인챈트 ‘백광’이 부여되어 있습니다.
두 겹으로 새겨진 인챈트들이 스며든 마력을 가속, 압축시켜 이세훈이 펼쳐 보였던 스킬 ‘백광류’의 예기를 고스란히 재현한다.
간단하게 시범으로 보여줬던 것을 인챈트로 완벽하게 만들어낸 레아의 실력에 이세훈은 살짝 감탄했다.
‘고급 등급에 아슬아슬하게 걸쳤던 물건을 희귀 등급까지 올리다니…… 꽤 하는데.’
물론 내구도도 떨어지고 새겨진 인챈트가 훼손되면 다시 등급이 떨어지겠지만, 한 단계 올린 대가라고 생각한다면 나름 싸게 먹힌 편이었다.
‘미래에 인챈트 업계를 다 먹어치운 이유가 있었구만…….’
이전에는 조금 애매했지만, 이걸로 레아가 가진 잠재력이 어느 정도인지 확실하게 확인했다.
“호, 혹시 별로야? 나, 난 잘 만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이세훈이 아무런 말 없이 쳐다만 보자 위축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레아.
자신 없어 하는 모습을 보니 아직 슬럼프를 완전히 극복한 것은 아닌 것 같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문제는 없다.
“아니.”
자리에서 일어난 이세훈이 레아를 바라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아주 훌륭해. 솔직히 기대 이상이라 조금 놀랐어.”
“……그래?”
“참고하라고 보여준 걸 이렇게 인챈트로 완벽하게 만들어올 줄 누가 알았겠어. 이 정도면 연락할 여유가 없을 만도 했네.”
“크흠…… 그렇지? 그놈의 예기가 얼마나 만들기 까다로운지 다른 식칼에 실험하다가 100개 넘게 부숴 먹었다니까.”
이세훈의 아낌없는 칭찬에 언제 주눅 들었냐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자신의 고생담을 털어놓는 레아.
그 기운찬 모습에 이세훈이 나무에 박힌 비수들을 챙기며 담담하게 바라보았다.
“이 정도면 검기 양산화도 시도해 볼 수 있을 것 같아. 다음에 시간 나면 한번 해보자고.”
“좋아. 그 정도쯤이야…… 잠깐, 검기 양산화? 그게 가능하다고?”
영웅업계의 오랜 과제 중 하나이자 수많은 기업과 연구가들이 시도했다가 실패의 쓴맛과 적자만 떠안게 된 기술.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는 후배의 모습에 레아가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았고, 이세훈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안 될 게 뭐 있어. 이미 반쯤 완성했는데.”
“……그게?”
“그래. 이게.”
레아는 자신이 만들어낸 인챈트에 어떤 잠재력이 숨어 있는지 모르는 듯하지만 이세훈은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다.
‘아직 고칠 부분들이 많지만, 조금만 더 압축하면 양산화를 시작할 수 있어.’
회귀 전 갤럭시 컴퍼니가 대중들에게 최초로 선보였던 양산검기 ‘스타라이트’ 시리즈.
무명 인챈터였던 레아 클로델이 ‘마에스트로’라고 불리게 된 전설적인 시리즈의 시제품이나 다름없는 물건이 바로 이 백광비수인 것이다.
“내가 만든 인챈트로 검기 양산화…… 상용화되면 로열티가…….”
며칠 동안 철야를 해서 머리가 잘 안 돌아가지만, 성공한다면 천문학적인 돈을 벌어들일 것은 확정이나 다름없다.
돈에 깔려 죽는 환각을 보며 레아가 입을 떡 벌리고 있을 때. 곁으로 다가온 이세훈이 눈앞에 손뼉을 쳤다.
짝!
“으갹!”
“정신 차려. 지금 수준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니까.”
“아, 응. 쓰읍…… 그렇지.”
아직은 검기라고 하기엔 위력도 형편없고 내구성이나 인챈트의 취약점 등 부족한 점이 너무 많다.
이세훈의 말대로 성급한 이야기라는 것을 깨달은 레아는 머릿속에 가득한 잡생각을 모조리 접어 한쪽에 밀어 넣은 다음 정신을 차분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문자로 이야기했던 부탁할 일은 뭐야?”
스위치라도 켠 것처럼 깔끔하게 태세를 바꾸는 레아. 그 모습에 이세훈도 곧장 본론을 꺼냈다.
“무구를 하나 만들 생각인데 원하는 성능을 이끌어내려면 인챈트도 새겨넣어야 할 거 같아서. 도와줄 수 있어?”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환영이지. 근데 재료랑 새겨 넣을 인챈트 종류는 뭔데?”
똑같은 인챈트라고 해도 사용될 재료나 효과에 따라 수많은 변수가 생겨난다. 눈앞의 괴팍한 후배의 성정이라면 만만치 않은 종류임이 분명할 터.
‘상아탑의 특기생 선발대회를 생각하면 조금 빠듯하긴 하지만…… 오히려 잘 됐어.’
이번에 백광 인챈트를 만들어내면서 슬럼프를 조금 걷어낸 듯하니 이 기세를 몰아서 쥐어짜 내다보면 완전히 극복할 수 있을 것 같다.
의욕을 불태우는 레아의 모습에 이세훈이 기특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일단 몽상아에 ‘침식강화’와 ‘마력증폭’ 인챈트를 새겨 넣을 거야.”
“……모, 몽상아?”
이세훈의 이야기에 레아의 눈매가 파르르 떨렸다.
몽환의 마력을 품은 몽상아는 다루기가 까다로운 재료였는데 특히 인챈트 업계에서 그 악명이 엄청났다.
조금만 실수를 하거나 한눈을 팔면 몽환의 마력이 겉에 새겨진 인챈트를 통째로 없애 버렸기 때문이다.
‘심지어 침식강화에 마력증폭. 하나만 해도 힘든데 그걸 같이 새겨 넣어야 한다니…….’
자신이 정말 해낼 수 있을까. 절로 망설임이 생겨났지만 레아는 곧장 그 잡생각들을 단숨에 접어 머리 한구석에 패대기쳤다.
‘아니, 반드시 해낸다!’
이 지긋지긋한 슬럼프에 계속해서 이끌려 다닐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 무슨 일이 있어도 성공하기로 결심한 레아가 이세훈을 바라보았다.
“좋아. 한번 해볼…….”
“그리고 남화우도 사용할 건데 ‘공간분리’와 ‘지정각인’ 인챈트를 새겨넣어야 해.”
“……나, 남화우? 주작의 깃털?”
돈이 있어도 구하지 못한다는 희귀한 재료이자, 인챈트를 새기는 족족 불태워 버려 작업을 초기화시킨다는 악랄한 재료.
그런 흉악한 물건에다가 술식만 새기는 데 몇 시간이 걸린다는 공간분리와 지정각인의 인챈트를 새겨야 한다.
“자. 할 수 있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후배의 모습에 레아가 눈동자를 뒤룩뒤룩 굴리다가 대답했다.
“다른 사람 알아보면 안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