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가 다 만들어줌-58화 (58/309)

회귀자가 다 만들어줌 58화

은월산에서 바벨로 돌아온 뒤.

이세훈은 곧장 류은하에게 안긴 채 아스쿠스 병동으로 옮겨졌다.

폴몬트의 손톱에 베여 피 칠갑이었던 데다 신체 능력을 억지로 끌어올린 반동으로 온몸에 부하가 걸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심각한 수준은 아닌데.’

이세훈에게 부상의 심각함은 오직 제련의 가능 여부로 나뉜다. 그렇기에 지금의 부상은 조금만 조심하면 충분히 제련이 가능했기에 그럭저럭 괜찮은 수준이었다.

“그냥 가만히 계십시오.”

하지만 류은하는 그런 이세훈의 주장을 단숨에 묵살한 채 진료를 진행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결과가 나왔다.

“전치 6주입니다.”

“……예?”

예상과 다른 기간에 이세훈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검사를 맡은 안정완 교수를 바라보았다.

“그…… 6일을 잘못 말씀하신 거 아닙니까?”

“잘못 말한 게 아니라 6주가 맞네.”

“아니, 무슨 이 정도 부상으로…….”

조금 무리하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6주는 너무 길지 않은가.

그런 이세훈의 반응에 안정완은 한숨을 내쉬며 이야기를 이었다.

“일단 이것부터 보게.”

따악─

안정완이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허공에 세 개의 그림이 나타났다.

각각 근육과 뼈, 그리고 마력회로가 그려진 인체도였는데 근육은 멀쩡한 곳이 없을 만큼 구석구석 찢어져 있었고 뼈 역시 사방에 실금이 새겨졌다.

거기에 가장 심각한 것은 마력회로였는데, 얼마나 혹사시켰는지 곳곳이 쪼그라들거나 3분의 2가 막혀 있는 등 상태가 매우 안 좋았다.

“내가 의사 생활만 30년을 넘게 했지만…… 이렇게까지 알뜰살뜰하게 몸을 박살 낸 경우는 난생 처음 볼세.”

보통 신체가 한계에 다다르면 가장 약한 부위부터 무너지면서 중상으로 이어지기 마련.

하지만 이세훈은 모든 피해를 균등하게 나눈 것처럼, 크게 다친 곳이 없는 대신 온몸에 경상을 입어 멀쩡한 곳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지금 자네의 몸은 금이 간 유리나 다름없어. 겉보기에는 멀쩡하지만 조금만 자극이 강해져도 그대로 산산 조각나면서 무너지는 거지.”

“그럼 자극만 안 받으면 되는 게…….”

“치료는 어떻게 진행됩니까?”

류은하의 물음에 안정완이 그림을 지워내며 대답했다.

“마력회로가 전체적으로 약화된 상태라 급속치료는 위험하고, 자연치유력을 활성화시키는 방향으로 갈 것 같습니다. 그리고 몸을 보호하기 위해 특수붕대로 압박시킬 예정입니다.”

“안전하게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니. 제 말도 좀…….”

이세훈의 의견은 무시당한 채 순식간에 치료는 진행되었고, 눈 깜짝할 사이에 전신은 회색 붕대로 꼼꼼히 둘러싸였다.

“신체보조와 마력억제 인챈트가 새겨진 특수 붕대일세. 일상생활에는 크게 문제가 없을 테니 안심하게나.”

전신의 근육에 세밀하게 달라붙은 특수 붕대.

그 불쾌한 착용감에 이세훈이 눈매를 찌푸리고 있는 사이 류은하가 안정완에게 고개를 꾸벅였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고개를 꾸벅이며 안정완이 밖으로 나가자 두 사람만 남은 병실 안으로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

“…….”

은월산에서의 침묵과는 조금 다른 분위기. 그 알 수 없는 불편함에 이세훈이 조심스레 류은하를 바라보았다.

의자에 앉은 채 아무런 말 없이 고개를 살짝 내린 류은하. 어딘가를 보고 있다기보다는 생각에 빠진 듯한 그 모습에 이세훈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네.’

류은하는 어딘가 나사가 하나씩 빠져 있는 고위 영웅들 사이에서 상대하기가 쉬운 편에 속했다.

좋은 무구를 만들면 그만큼 대우를 해주고, 반대로 몇 년을 알고 지내도 형편없는 무구를 만들면 칼같이 쳐낸다.

누군가는 냉혈한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지만 기준이 명확하다는 점에서 상대하기 어려울 건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좀 다르단 말이지…….’

류은하는 자신이 마음에 든 대장장이에게 정기납품 계약을 제안하는데 실력에 따라서 그 기간이 달라진다.

회귀 전 이세훈의 경우 일주일에 한 번. 다른 대장장이들은 잘해봐야 한 달에 한 번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수준 자체가 달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이세훈은 이번에도 회귀 전을 기준으로 거리감을 잡으려 했었지만.

‘앞으로 매일 제 식사를 만들어주시지 않겠습니까?’

조금 전의 제안으로 모든 계획이 백지가 된 것이다.

인연레벨이 Lv.4였던 회귀 전에도 일주일에 한 번이 최대였는데, 이제 막 인연레벨이 Lv.2가 된 시점에서 하루에 한 번 무구를 공급해달라니.

‘입맛의 여부가 이렇게까지 차이가 클 줄이야.’

도대체 앞으로 류은하와의 거리감을 어떻게 가늠해야 할까. 이세훈이 곰곰이 생각에 잠길 때.

“이세훈 생도.”

쭉 생각에 잠겨 있던 류은하가 고개를 들며 입을 열었다.

“은월산에서 제가 말씀드렸던 제안. 기억하고 계십니까?”

“예. 매일 식사를 만들어달라고…….”

“…….”

이세훈의 대답에 류은하의 눈매가 살짝 꿈틀거리더니 이내 슬쩍 시선을 내리깔며 이야기를 이었다.

“정확히는 납품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오해할 수 있는 표현을 사용한 것에 대해 사과드리겠습니다.”

“예? 아뇨. 뭘 그런 걸로 사과까지 하십니까. 식사가 틀린 말도 아닌데.”

실제로 류은하는 무구만으로 신체를 유지할 수 있었기에 일반적인 음식은 일체 먹지 않는다.

먹을 수는 있지만 맛도 제대로 안 느껴지는 데다 효율이 매우 떨어졌기 때문이다.

“흠흠…… 그렇게 이해하셨다니 다행이군요.”

헛기침하며 분위기를 다잡은 류은하는 다시금 이세훈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이었다.

“아무튼 갑작스럽게 말씀드리긴 했지만, 납품 제안 자체는 진심으로 드린 말씀입니다.”

“납품이라…….”

“이세훈 생도가 만든 백광장검을 먹으면서 정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무구의 등급을 떠나서, 그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었던 감동이 느껴지더군요.”

“그 정도까지는…….”

“과장이 아니라 진심입니다. 적어도 그 순간에 느낀 만족감만큼은 과거에 먹은 전설 등급의 무구와 견주어도 결코 부족함이 없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

거듭되는 류은하의 칭찬에 이세훈의 얼굴이 씰룩거렸다.

자신도 사람이기에 누군가에 칭찬을 받는 것이 나쁘지는 않지만, 상대가 다른 누구도 아닌 류은하인지라 도저히 적응이 안 갔기 때문이다.

‘좀 더 잘 만들 수 있지 않습니까?’

‘나쁘진 않지만, 인상적이지는 않군요. 좀 더 노력하십시오.’

‘정말 이게 한계라고 생각하십니까?’

좋게 말하면 단점 지적, 나쁘게 말하면 불평불만밖에 없던 평가. 대장장이들이 괜히 류은하를 기피한 데는 이유가 다 있었다.

그런데 그런 류은하가 감동이라는 단어까지 사용하며 극찬하다니.

기쁘면서도 묘한 띠꺼움이 느껴지는 상황에 이세훈이 묘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그래서…… 제안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류은하가 조심스레 이세훈을 살피며 물었다.

“모든 무구는 시세의 최소 10배 이상으로 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재룟값이나 제작에 필요한 공방의 설비 값도 모두 지원해드릴 수 있습니다.”

다른 잡다한 건 모두 신경 끄고 무구를 만들기만 하면 되는 조건. 어떤 의미에서는 바벨에서 생활하는 것보다 빠르게 성장할 수도 있었지만.

“죄송합니다.”

이세훈은 곧장 고개를 가로저으며 거절했다.

“혹시 조건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면 높여드릴 수도…….”

“조건은 충분합니다. 다만 한 곳에 얽매이기보단 다양한 경험을 하고 싶어서요.”

“……그렇군요.”

무슨 뜻인지 이해한 듯 씁쓸하게 중얼거리는 류은하. 그 모습을 바라본 이세훈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구라지만.’

바벨이 아무리 좋은 교육기관이라고 해도 저만한 조건을 거절할 만큼 엄청난 경험을 안겨줄 수 있는 곳은 아니다.

그런데도 이세훈이 정기납품을 거절한 이유는 단 하나. 상대가 다른 누구도 아닌 ‘류은하’였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감동이라고 하지만 익숙해지면 바로 돌변하겠지.’

오랫동안 타지에서 생활하다가 집밥을 먹으면 그 순간은 감동할 수 있겠지만, 그것도 몇 달이고 계속 먹다 보면 결국은 다시금 적응되며 감흥을 잃기 마련.

지금 저 조건에 혹해서 무구를 매일 공급하다 보면 언젠가는 맛에 익숙해져 ‘질린다’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좀 더 지켜볼 필요도 있고.’

무구의 맛을 이해했기에 류은하와 맺어진 인연의 관계도 회귀 전과 다르게 ‘공감’으로 바뀌었다.

이게 긍정적일지 부정적일지는 알 수 없는 법. 그러니 지금은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가며 류은하의 변화를 살펴보는 것이 좋으리라.

‘두 번이나 후회시키는 건 그러니까.’

회귀 전의 기억을 잠시 되새기던 이세훈은 금방 기억을 밀어내며 고개를 꾸벅였다.

“모처럼 제안해 주셨는데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생각해 보니 하루에 무구를 하나씩 만들어달라는 건 너무 과한 부탁이었던 것 같군요. 제가 죄송합니다.”

살짝 의기소침해진 류은하의 모습에 이세훈은 대신 미리 생각해두고 있던 이야기를 꺼냈다.

“납품 대신 연구를 같이해 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연구라면?”

“학과장님이 느끼시는 무구의 맛에 관한 연구 말입니다.”

정기납품은 서로 거래 관계이기에 조금 엄격해지지만, 모든 것이 실험의 일종인 연구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실패해도 연구 과정이라고 둘러대면 되니까.’

거기에 연구라는 빌미로 바벨한테서 예산도 타 먹을 수 있으니 그야말로 일석이조 아닌가.

이세훈의 제안에 류은하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것도 나쁘지는 않군요. 그런 주제라면 학원장님도 승인하실 가능성도 높고 실패작들도…… 흠흠.”

다시 헛기침하며 입가를 가린 류은하는 이야기를 이었다.

“아무튼 괜찮은 것 같습니다.”

“그럼 나중에 결과가 나오면…….”

“마침 학원장님이 치료가 끝나는 대로 부르신다고 하셨으니 그때 바로 이야기하시면 될 것 같군요.”

“……예?”

누가 부른다고? 이세훈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으려던 찰나.

후웅!

전신을 휘감은 기묘한 기시감.

반응하기도 전에 침대에 누워 있던 이세훈의 몸이 똑바로 서 있었고 병실이었던 주변이 익숙한 공간으로 바뀌었다.

골동품 가게를 연상케 하는 낡고 고풍스러운 공간.

마두르크 저택에 있는 학원장실로 이동된 이세훈은 자신을 부른 노인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이로군. 그동안 잘 지냈는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맞이하는 노인, 루트비히의 모습에 이세훈이 살짝 경직된 표정을 지었다.

‘누가 완등자 아니랄까 봐…… 아주 거지 같은 방법으로 불러내는구만…….’

자신을 병실에서 학원장실로 강제로 이동시킨 것도 엄청난데 누워 있던 자세를 자연스럽게 서 있는 자세로 만들어냈다.

공간을 옮길 뿐만 아니라 그 과정도 자유자재로 조작할 수 있다는 증거.

만약 루트비히가 적이었다면 이동하는 과정에서 전신이 갈기갈기 찢어지고도 남았으리라.

“흐음.”

그런 이세훈의 표정을 읽은 루트비히는 살짝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공간이동에 대한 이해도가 상당히 높군.’

보통 생도들이 이렇게 불려오면 그저 신기하게만 생각할 뿐. 이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바로 떠올리는 경우는 드물었다.

어떻게 보면 상상력이 풍부하고, 어떻게 보면 모든 것을 경계하는 모습. 그에 루트비히가 재밌어하고 있을 때.

투웅─

공간이 일그러지며 류은하가 튕기듯 학원장실에 착지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닐세. 제대로 부르지 못한 내 부족함이지.”

저항할 새도 없이 끌려온 자신과 달리 류은하는 어느 정도 반발작용이 생기는 모양이다.

‘S급이면 어느 정도는 버틸 수 있단 거구만.’

이세훈이 그 모습을 세밀히 살피고 있을 때. 루트비히가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은월산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해 줄 수 있겠나? 바깥에서 계속 문의가 들어와 슬슬 정리를 좀 해야 할 것 같군.”

어지간한 수준이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넘길 수도 있겠지만, 위험지역의 산봉우리 하나가 통째로 증발해 버렸으니 숨길 수도 없었다.

“우선 제가 먼저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이세훈의 옆에 선 류은하는 은월산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 간략하게 정리해서 이야기해 주었다.

그 내용을 조용히 듣고 있던 루트비히는 설명이 끝나자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D급 위험지역에 A급 수준의 던전이 숨겨져 있었다…… 아무래도 평범한 던전이 아니었던 모양이군.”

곰곰이 생각하던 루트비히는 이세훈을 바라보았다.

“류은하 학과장이 무력화되어 있는 동안 몬스터를 상대했다고 들었는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해 줄 수 있겠나?”

“알겠습니다.”

루트비히의 물음에 이세훈은 위르겐 크루거의 손가락만 쏙 빼놓고 이야기했다.

완등자와 관련된 물건인 만큼 루트비히가 빼앗아갈 가능성도 충분했기 때문이다.

“손가락을 잘라내니까 이상한 물건이 나오면서 폭주를 일으켰는데…… 그 물건이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흐음…….”

이세훈의 이야기에 루트비히가 가만히 바라보았다.

마치 그것이 전부이냐는 듯한 시선. 다른 생도들이라면 위축될 수도 있었지만 이세훈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그 시선을 마주 보았다.

그리고 그 시선이 조금 더 길어지려던 찰나.

슬쩍─

옆에 서 있던 류은하가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듯이 끼어들었다.

“아직 이세훈 생도의 몸 상태가 좋지 않으니 빠르게 정리해 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호오…….”

류은하의 행동에 루트비히가 두 눈을 반짝이더니 이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내가 너무 무신경했어. 미안하네.”

“아닙니다.”

“일단 상황은 모두 이해했네. 지금 상황대로라면…… 던전의 존재는 아예 없던 걸로 하는 게 좋겠군.”

두 사람을 바라본 루트비히가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교수들이 찾아내지 못했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지만, 증거가 사라진 지금은 증명할 방법이 없네. 이대로라면 바벨의 무능함으로만 취급될 가능성이 높겠지.”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신입생들이 막 입학한 시기에 괜한 잡음을 만들 필요는 없지 않겠나. 그러니 이번 일은…… 그렇지. 마인의 습격으로 바꾸는 게 가장 적당하겠군.”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사건은폐와 조작을 지시하는 루트비히. 상당히 익숙한 모습에 이세훈은 신기한 표정을 지었다.

‘마냥 깔끔한 양반은 아닐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아주 닳은 양반이었네.’

필요하다면 법의 테두리도 벗어날 수 있는 인물. 회귀 전에는 몰랐던 승천제의 모습에 이세훈이 유심히 살피고 있을 때.

“그나저나 이렇게 되면 자네만 아쉽게 되겠군.”

이세훈을 바라본 루트비히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교수들이 찾아내지 못한 A급 던전을 발견하고, 약화되었다곤 하나 A급 몬스터와 대등하게 싸운 일화가 모두 없던 일이 될 테니.”

“아니, 뭐…….”

실제로 이번 사건이 외부에 알려진다면 어느 정도 명성을 얻을 순 있겠지만, 마냥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재수 없으면 주시자들한테 주목받을 수도 있으니까.’

이번 사건에 관련된 『탈각』은 몬스터 쪽에 더 관심이 많은 녀석이지만, 어쨌든 본인들의 실험체 하나가 죽고 완등자의 육체까지 분실했으니 상당히 화가 나 있을 터.

그렇기에 이세훈으로서도 던전에 관한 이야기가 은폐되는 것은 잘된 일이었지만.

“조금 아쉽기는 하네요…….”

이 상황에서 그걸 티 내는 것만큼 바보 같은 행동은 없었다.

“모처럼 절 무시하는 사람들한테 뭔가 보여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무시하는 사람들?”

옆쪽에서 들려오는 낮게 깔린 목소리. 울림이 상당히 불길했지만 이세훈은 애써 시선을 주지 않고 루트비히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흐음…….”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던 루트비히는 이내 결론을 내렸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냥 넘기는 건 조금 그렇군. 혹시 필요한 게 있나?”

“필요한 거라면……?”

“말 그대로 자네가 필요한 거라면 뭐든지 상관없네. 본래 자네가 받았을 명성만큼 내가 보상해 주지.”

상당히 두루뭉술한 답변이었지만, 상대가 바벨의 학원장이자 승천제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받았을 명성만큼이란 말이지…….’

아마 루트비히 머릿속에서 나름대로 계산이 깔려 있을 터. 필요한 것들을 점검하던 이세훈은 가장 가치가 낮은 것부터 꺼내 들었다.

“류은하 학과장님이 느끼시는 무구의 맛에 대해서 연구하고 싶은데 승인해 주실 수 있나요?”

“호오…… 류 학과장과?”

루트비히가 사실이냐는 듯 바라보자 류은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러면 이 친구가 자네의 입맛을 맞췄다는 건가?”

“예. 한 번이라 확신은 할 수는 없지만…… 그동안 먹은 무구 중에는 가장 근접했습니다.”

류은하의 대답에 루트비히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거라면 당연히 연구해야지. 이 부분은 이번 일과 별개로 승인하겠네. 그다음은?”

보상으로 치지 않겠다는 이야기에 이세훈은 속으로 쾌재를 내지르며 다음 보상안을 꺼내 들었다.

“곧 있을 토벌 실습지를 ‘검은 연꽃 수해’로 지정해 주셨으면 합니다.”

이세훈의 이야기에 루트비히가 살짝 의외라는 듯이 바라보았다.

“조금 예상 밖의 요구로군. 이유라도 있나?”

“거기라면 이번에 얻지 못한 명성을 얻어낼 수 있을 것 같아서입니다.”

물론 진짜 목적은 그곳에 숨겨져 있는 특수한 재료를 독점하기 위해서지만, 굳이 그것까지 설명할 필요는 없다.

이세훈의 대답에 루트비히가 고개를 끄덕였다.

“보상이 아니라 기회를 요구한다……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네. 다음은?”

수업에 영향일 끼치는 거라 상당히 클 거라 생각했는데 루트비히에게는 별거 아니었던 모양이다.

생각보다도 후한 책정에 이세훈은 본격적으로 필요한 것을 꺼내 들었다.

“주작의 깃털인 ‘남화우南火羽’가 필요합니다.”

그동안 준비와 설계도가 완벽하지 않아 쭉 미루고 있던 ‘기억’을 살펴볼 장비.

그것을 완성하기 위한 마지막 재료가 바로 영웅 등급의 재료인 남화우였다.

‘근데 이걸 구할 수 있을까?’

앞에 받았던 몽상아나 묵중암도 상당히 구하기 힘든 물건이긴 했지만, 남화우는 그 둘과 차원이 달랐다.

우선 재료 자체가 S급 마수인 주작의 부산물. 거기에 이놈의 특성 때문에 더 골치가 아팠다.

고생이란 고생은 다해서 겨우 토벌에 성공해도 전신이 갑자기 불타면서 육체의 9할이 증발해 버렸었기 때문이다.

‘특히 깃털을 거의 못 건진다고 했었지…….’

당장 회귀 전의 이세훈조차 구경 한 번 못 해봤을 만큼 희귀한 재료.

혹시 승천제라면 가지고 있지 않을까 싶어 호기심에 물어본 것이었지만.

“남화우라…… 잠시 기다리게.”

루트비히는 대수롭지 않게 허공에 손을 휘둘렀다.

철컥─

지난번과 같이 허공에 황금색 열쇠 구멍이 생겨나더니 90도로 회전하며 위아래로 갈라졌다.

어디와 이어졌는지 알 수 없는 새하얀 구멍. 그 안에서 무언가 요동치는가 싶더니 이내 한 물건이 아래로 떨어졌다.

쿵─

직사각형으로 깔끔하게 재단되어 있는 푸른색 결정. 안쪽에는 손바닥만 한 붉은 광석이 담겨 있었는데 그 모습에 이세훈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마…….”

“확인해 보게나.”

책상 앞으로 내밀어진 결정. 그 앞으로 다가간 이세훈은 살짝 긴장한 표정으로 상태창을 살펴보았다.

[남화우南火羽]

[등급 : 영웅] [품질 : 최상]

불을 관장하는 주작의 깃털.

강력한 화속성 마력이 잠재되어 있으며 정신계열의 간섭에 저항하는 힘이 서려져 있다.

*화속성 저항력이 증가합니다.

*정신계열 저항력이 증가합니다.

“…….”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는 남화우.

쉽게 구할 수 없는 재료를 아무렇지 않게 내미는 루트비히의 능력에 이세훈은 그에 대한 평가를 다시금 고쳤다.

‘뭔가 구리지만, 가까이 둬야 한다.’

대장장이에게 있어 필요한 재료를 잘 구해다 주는 거래처 혹은 고객만큼 중요한 인물이 또 어디 있겠는가.

이세훈이 두 눈을 반짝거리며 남화우를 바라보자 루트비히가 담담하게 물었다.

“그 정도 품질이면 되겠나?”

“아, 예. 충분합니다. 감사합니다.”

“다행이군.”

이거라면 회귀 전 기억을 살펴볼 수 있는 장비를 만들 수 있다. 그렇게 적절한 거래였다고 이세훈이 만족하던 찰나.

“그래서 그다음은?”

루트비히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았다.

“……예?”

“다음으로 필요한 게 뭔지 물었다네.”

“…….”

루트비히의 물음에 이세훈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남화우만 하더라도 금전적인 가치로 따지자면 수십억은 그냥 넘길 물건. 그런데 이걸 주고도 아직 값이 남아 있다니?

잠시 고민하던 이세훈은 그다음으로 필요했을 물건을 요구했다.

“용폐석도 있을까요?”

제이크와 내기대련에서 받아낸 영웅 등급 장비 ‘흑염의 망치’를 개량하기 위한 재료.

이것도 구하기 까다로운 재료였기에 염성하에게 시킬까도 했지만, 남화우도 그냥 가져다주는 루트비히라면 그냥 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쿠웅─

그 예상이 맞았다는 듯 책상에 떨어지는 검붉은색의 광석. 그것을 책상 끝으로 밀어낸 루트비히가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살펴보게.”

[용폐석龍肺石]

[등급 : 영웅] [품질 : 상]

화속성 마력을 축적하는 광석.

일정한 경로로 내부의 마력을 자극할 경우 보관된 화속성 마력을 단숨에 방출할 수 있다.

*화속성 마력을 저장, 방출할 수 있습니다.

“오…….”

이 정도라면 흑염의 망치를 개량하는 것도 충분하다.

영웅 등급 재료만 두 가지. 이 정도면 얻을 건 다 얻었다고 이세훈이 만족하던 그때.

“……?”

어째서인지 미소를 지은 채 이쪽을 가만히 응시하는 루트비히.

마치 이쪽의 말을 기다리고 있는 듯한 모습에 이세훈은 루트비히에 대한 평가를 간단하게 수정했다.

“다음은?”

이 각박한 세상에서 보기 힘든 아주아주 좋은 사람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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