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가 다 만들어줌 50화
바벨에는 학과를 불문하고 입학한 지 얼마 안 된 신입생들에게 공통적으로 해주는 조언이 한 가지 있었다.
‘1학기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수업 빼먹지 마라.’
듣기에는 성실하게 공부하라는 흔한 조언. 하지만 본격적으로 바벨에서의 생활을 시작한 신입생들은 그 조언이 무슨 의미인지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부상 때문에 사흘 쉬었던 친구로군. 그동안 쌓인 과제니 전부 가져가서 이번 주까지 풀어오게나.”
“오늘은 오토마톤을 통해 38가지 변칙공격을 막아내는 훈련을 하도록 하지. 저번 수업을 안 들었다고? 그럼 대충 보고 따라 해라.”
며칠을 쉬었을 뿐인데 수십 장의 과제가 쌓여 있거나 아니면 부조리할 정도로 가혹한 수업이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바벨에 입학한 생도들은 하나같이 재능은 출중한 이들이었기에 금방 따라잡았지만, 문제는 그것을 다 따라잡았을 쯤에는 새로운 과제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는 것이다.
“아니. 무슨 수업을 이렇게…….”
“이럴 줄 알았으면 부전공은 하나만 하는 건데…….”
별생각 없이 부전공을 많이 신청한 생도일수록 부담이 늘었고 어려운 수업은 그냥 포기하는 이들도 나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조언을 새겨듣지 않은 생도들에게 낙제라는 업보가 스멀스멀 다가오고 있을 때.
“여기 그동안 밀린 과제다.”
쿠웅!
이세훈 역시 그 업보와 고스란히 마주하게 되었다.
“…….”
눈앞에 산더미처럼 쌓인 종이들을 바라본 이세훈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신청한 것은 분명 결계제어학이었던 것 같은데 왜 이런 종이 덩어리가 마중을 나온단 말인가?
‘2주 사이에 과목을 바꿨나?’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이세훈이 말없이 과제 더미를 바라보고 있을 때. 담당 교수인 로버트가 담담히 이야기했다.
“제출기한은 내일모레까지. 모두 학점에 반영되니 빠짐없이 푸는 걸 추천하지. 물론 1학기 평가시험 때 만회할 자신이 있다면 하지 않아도 좋다.”
“내일모레…….”
“이제 수업을 시작해야 되니 자리로 돌아가라. 지금 상태로는 수업도 이해 못 할 테니 과제를 풀어도 좋다.”
용건은 끝이라는 듯 몸을 돌려 수업을 준비하는 로버트. 그 뒷모습에 이세훈은 멍하니 쌓인 종이들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며 아공간 포켓에 과제들을 쑤셔 넣었다.
‘내가 이래서 학교를 싫어했었는데.’
2주밖에 안 쉬었는데 무슨 과제가 이렇게까지 쌓인단 말인가. 심지어 결계제어학 하나만으로 이런 상태이니 다른 수업에 들어가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제련학부야 실기 위주니 괜찮겠지만…… 쯧.’
회귀 전에 배운 분야라면 평가시험에서 만회하기로 하고 대충 했겠지만 결계는 이번에 처음으로 배우는 분야.
뭘 배우든 두 번 공부할 일이 없도록 확실하게 배우는 것이 이세훈의 지론이었기에 마음을 굳게 먹었다.
‘잠 좀 안 자면 되지 뭐.’
과제를 하나도 빠짐없이 하기로 결정한 이세훈이 비어 있는 자리에 앉았고.
“안녕.”
당연하다는 듯 옆에 앉은 에리카가 인사를 건네 왔다.
“……너 아까 저기 앉아 있지 않았냐?”
“응.”
“왜 옮겼어?”
“네가 여기 앉았으니까.”
여전히 숨길 생각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직설적인 화법. 이세훈이야 정말 별 뜻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옆에서 들은 생도들에게는 달랐다.
“쓰읍…….”
“허…….”
“진짜인가 본데…….”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지 서로 숙덕거리는 생도들.
그중 몇 명은 보물이라도 빼앗긴 것처럼 두 눈을 부릅뜬 채 노려보고 있었는데 모두 주술학부의 생도들이었다.
‘누가 보면 내가 억지로 앉힌 줄 알겠네.’
어이없는 표정으로 주술학부 생도들을 바라보고 있을 때. 수업준비를 마친 로버트가 칠판을 두드리며 시선을 모았다.
“그럼 지난 수업에 이어서 사방에 오행상극을 응용하는 제어법에 대해서 배워보겠다. 우선은 방위를 맞추어…….”
수업을 빼먹었거나 따라오지 못하는 이들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수업을 이어가는 로버트.
앞에 한 말이 농담이 아니었는지 정말로 알아들을 수 없는 수업 내용에 이세훈이 한숨을 내쉬었다.
‘과제나 해야겠다.’
아공간 포켓에서 과제의 일부를 꺼낸 이세훈은 종이를 넘기며 그 안에 적혀있는 내용을 읽어보았다.
‘위 예문의 주술식들을 활용하여 16방위 기준 북북서와 남남동에 입구를 형성하게끔 결계를 만들어 기입하라…… 한 마디로 조립하라 이거구만.’
설명서 없이 부품의 형태만 보고 알아서 끼워 맞추는 것이나 다름없는 방식. 그 복잡한 내용에 이세훈이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보자…….’
이세훈이 과제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을 때. 곁눈질로 살펴보던 생도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냥 보고 있는 거지?’
‘설마 저걸 암산으로 하려고?’
로버트가 내준 과제의 주술식은 겉보기엔 멀쩡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각각 중요한 부분들이 몇 개씩 빠져 있었다.
그렇기에 제대로 된 결계로 만들려면 직접 개량해야 했는데 그 변수가 너무 많아 직접 펼쳐보지 않고는 제대로 풀 수가 없었다.
‘수업 중이라 눈치 보여서 그러나…….’
‘쯧쯧. 그러길래 왜 2주나 빼먹어 가지고…….’
모두가 회의적인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 때. 손에 들린 볼펜을 가볍게 돌리던 이세훈이 두 눈을 반짝이며 고쳐 잡았다.
사각사각사각-
단숨에 결계를 작성한 이세훈은 곧장 다음 장으로 넘겨 새로운 문제를 읽어보았다.
‘이번에는 16방위로 남서에 입구, 남남서에 출구…….’
예문에는 앞과 다른 주술식이 적혀 있었는데 그 구조를 자세히 살피던 이세훈이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역시 비슷하구만.’
예문에 적힌 주술식 자체는 앞 문제와 달랐지만 그것을 비틀어둔 방식은 흡사하다.
과제를 만든 사람, 로버트 교수의 ‘버릇’을 파악한 이세훈은 어렵지 않게 비틀린 주술식을 맞춰 결계를 만들어냈다.
사각사각사각─
처음에는 그래도 문제를 보고 몇 분씩 고민하는 시간이 있었지만 풀이를 거듭할수록 점점 간격이 짧아져 갔다.
그리고 마침내 하루 치 과제를 모두 풀어낸 순간. 이세훈은 문제를 읽은 즉시 거침없이 정답을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
“…….”
그 모습을 바라본 다른 생도들은 수업 중인 것도 잊고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자신들은 주술식을 이리저리 펼치면서 끙끙 앓으며 풀었던 문제들을 무슨 답을 옮겨 적는 것처럼 저리 쉽게 풀 수 있단 말인가!
‘허세 부리는 거 아냐?’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런 쓸데없는 짓을…….’
게다가 허세를 부린다고 하기에는 슬쩍슬쩍 웃는 얼굴에서 문제를 풀었을 때의 희열 같은 것이 느껴진다.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광경에 생도들이 당황하고 있을 때. 문득 그 옆에 앉아 있던 에리카에게 시선이 향했다.
“…….”
수업은 쳐다보지도 않고 이세훈의 과제만 지그시 바라보는 에리카. 그리고 순식간에 작성된 답변을 살피더니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반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차린 생도들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진짜 정답이라고?’
‘그런…….’
저렇게 막 휘갈기는 내용들이 모두 정답이라니.
예상치 못한 이세훈의 능력에 모든 생도가 당황한 표정으로 보고 있을 때.
“올해 상급반은 대단하군.”
수업실의 앞에서 감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 정도 수업은 쉬워서 들을 필요도 없다는 건가? 내가 너희들의 실력을 너무 얕본 모양이야.”
“앗…….”
“그, 그게…….”
진심으로 감탄하는 듯한 로버트의 모습에 정신을 차린 생도들이 식은땀을 흘렸다. 주술학부의 교수 중에서도 악독하기로 유명한 것이 바로 눈앞의 사내였기 때문이다.
“걱정 마라. 실력에 맞춰 확실하게 ‘조정’해 줄 테니.”
담담하게 이야기를 끝낸 로버트가 다시 몸을 돌려 수업을 시작했고, 그 모습을 본 생도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결계제어학 수업은 주술학부 내에서도 상당히 난이도가 높은 편이었다. 그런데 거기서 난이도가 한층 더 올라간다?
대충 공부했다가는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낙제점을 받을 수도 있는 수준이었다.
‘망했다.’
‘미친…….’
갑작스레 들이닥친 재앙에 생도들이 아연실색해 하고 있을 때. 두 사람은 자신의 할 일에만 계속해서 집중했다.
사각사각사각─
쉬지 않고 과제를 풀어가는 이세훈과 그 옆에서 그 내용을 살피며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에리카.
그렇게 상반된 분위기 속에서 2시간이 지난 뒤. 알림벨과 함께 로버트가 수업을 마무리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앞에 과제를 준비해뒀으니 나가면서 챙겨가도록.”
조교수가 들고 온 두꺼운 과제를 본 생도들이 한숨을 내쉬며 일어섰고, 이세훈도 바쁘게 움직이던 손을 멈췄다.
“후우…….”
2시간 동안 이어진 과제 풀이. 익숙하지 않은 분야라 머리가 절로 지끈거렸지만 그래도 그만큼 고생한 보람이 있었다.
‘설마 하루 만에 끝날 줄은 몰랐네.’
옆자리에 산더미처럼 쌓인 과제. 2주간 쌓인 과제를 모두 풀어버린 이세훈은 뿌듯해하면서도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근데 이거 이렇게 풀어도 되나?’
출제자인 로버트의 버릇을 파악해서 주술식을 끼워 맞췄다 보니 어째 결계에 관한 공부를 했다기보다는 퍼즐을 맞췄다는 느낌이었다.
이게 정말 도움이 되긴 하는 건지 이세훈이 긴가민가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다 풀었나?”
이세훈에게 다가온 로버트가 산더미처럼 쌓인 과제를 바라보았다.
“아, 예. 다 풀었습니다.”
“흐음…….”
이세훈을 힐끗 보던 로버트는 과제들 몇 개를 꺼내 그 답변을 가볍게 훑어보았다.
별다른 시행착오도 없이 깔끔하게 완성된 결계. 답안지를 고스란히 작성해둔 듯한 그 모습에 로버트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그 짧은 시간 안에…… 이만큼 완벽하게 이해했다는 건가.’
단순히 결계를 작성하는 것을 넘어서 그 기반을 만든 술사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했다.
이 정도라면 비슷한 기반의 결계들은 지난번처럼 아주 간단하게 파훼식을 만들어 부숴 버릴 수 있으리라.
‘아가씨가 지켜보고 있는 이유가 있었군…….’
이세훈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에리카를 슬쩍 본 로버트는 손에 들린 과제를 내려놓았다.
“수고했다. 오늘 과제도 잊지 말고 챙겨가라.”
“예. 수고하셨습니다.”
고개를 꾸벅인 이세훈이 과제를 챙겨 나왔고 그 뒤로 당연하다는 듯 에리카도 따라 나왔다.
자연스럽게 나란히 걷는 두 사람과 사방에서 쏟아지는 시선. 이제는 익숙한 그 상황에 이세훈은 신경 쓰지 않고 뒤에 있을 수업을 떠올렸다.
‘이다음은…… 무구근원학인가.’
제련학부의 지도교수인 김인철이 맡은 수업. 수업을 듣기 직전에 입원해 버려 오늘에서야 처음 듣게 된 것이다.
‘이것도 좀 궁금하긴 했지.’
회귀 전에는 별 볼 일 없는 가설 중 하나였지만 또 바벨에서 연구 중인 지금 시점에서는 또 다를지도 모르지 않는가.
이세훈이 수업에 대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나한테도 무기를 만들어줄 수 있어?”
옆에서 걷던 에리카가 자연스럽게 물었다.
“무기?”
“응.”
“갑자기 왜? 너 무기도 안 쓰잖아.”
입학식의 시연회에서도 평범한 까마귀를 사역마로 쓴 게 전부였고 부적 같은 보조도구를 사용하는 것은 본 적도 없다.
맨손으로 싸우던 제이크만큼이나 무기와 거리가 멀어보이던 것이 바로 에리카였던 것이다.
“나도 네가 만든 무기를 가지고 싶어서.”
“여태 별 관심도 없더니…… 아, 너 혹시 루이제 걔 때문에 그러냐?”
다른 사람들이야 그냥 루이제가 강해져서 돌아온 것처럼 보이겠지만 에리카는 바르그를 만들어내고 그 효과가 얼마나 강한지 직접 눈앞에서 본 인물 중 한 명이었다.
그러니 무기에 대한 관심이 없다가도 그런 광경을 보면 흥미가 생길 수밖에 없으리라.
“……조금은.”
잠시 뜸 들이다가 긍정하는 에리카의 모습에 이세훈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애도 결국은 생도구만.’
겉으로 잘 드러내지 않지만 역시 무력에도 관심이 있기는 있었던 모양이다.
가문의 당주 자리를 차지하려면 무력도 어느 정도 받쳐줘야 할 테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리라.
“정확히 어떤 무기를 가지고 싶은데?”
“네가 만든 거라면 뭐든 좋아.”
“……그러냐.”
에리카의 대답에 이세훈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보통 초짜들이 이럴 때 정말 뭐든지 만들어줘도 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저게 가장 복잡하고 짜증 나는 주문이었다.
‘뭐가 필요한지 모르지만 아무튼 도움이 되고 걸리적거리지 않는 적절한 무기를 알아서 잘 만들어 달라, 라는 뜻이지.’
정말 별생각 없이 이 정도면 괜찮겠지 하고 만들어줬다가는 바로 쓴맛을 보게 되는 게 저 주문법이었는데 회귀 전 이세훈도 초짜 시절에 그런 경험이 있었다.
‘이 녀석한테 어울리는 무기라…….’
이런 경우에는 타고난 재능이나 마력. 그리고 전투 스타일을 관찰해서 견적을 뽑아야 한다.
하지만 에리카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 왜냐하면 회귀 전 에리카가 S급 영웅으로 활동할 때 어떤 무기를 사용했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충 그때 사용한 신화 등급 무기랑 비슷한 느낌으로 만들어주면 되겠지.’
물론 재료를 구하는 게 쉽지는 않겠지만 그거야 의뢰한 본인이 알아서 할 일 아니겠는가.
머릿속에서 순식간에 완성된 설계도의 초안. 만들어주는 것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음을 확인한 이세훈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에리카를 바라보았고.
“좀 힘들겠네.”
곧장 거절했다.
“……왜?”
“선약도 있고, 지금 만들어야 할 것들이 꽤 쌓여 있거든.”
당장 몽상아를 이용한 기억 보조장비. 제이크의 검. 거기에 염성하의 쌍창과 루이제의 장비도 새로 만들어야 했다.
그나마 염성하나 루이제는 인연석이 준비될 때까지 시간이 있지만 몽상아나 제이크는 그동안 여러 이유로 미뤘던 만큼 이번에는 꼭 만들어야만 했다.
“…….”
거절당할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지 살짝 충격받은 표정으로 바라보는 에리카. 생각보다 기대가 커 보였던 반응에 이세훈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던 그때.
“아. 여기 있네!”
저 멀리서 금발의 청년, 제이크가 활기찬 표정으로 재빠르게 달려왔다.
“네가 말한 재료 전부 구해왔어! 이제 만들 수 있는 거지?”
얼마나 흥분했는지 옆에 있는 에리카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이야기하는 제이크. 그 모습에 이세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됐으면 바로 가능하지. 아, 근데 전에도 말했지만 지금부터 제작에 들어가도 완성될 때까지 일주일은 걸린다?”
“그 정도야 상관없어. 근데 어떤 검인지 설명을 좀……?”
환하게 웃으며 이야기하던 제이크는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한기에 반사적으로 옆을 돌아보았다.
“…….”
그러자 보이는 것은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지 않은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응시하는 에리카의 모습.
동심원을 그린 채 낮게 가라앉은 두 눈동자에 제이크는 자신도 모르게 움찔거렸다.
‘뭐, 뭐지?’
대화 중에 자신이 갑자기 끼어든 것이 불쾌했던 것일까.
이세훈에게 연락이 안 올 때만큼이나 뒤숭숭해 보이는 모습에 제이크가 당황하자 에리카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이세훈을 바라보았다.
“선약이라는 게…… 마이어스?”
“하나는 그렇지.”
“저쪽은 왜 받아준 거야?”
의도가 다분히 보이는 에리카의 질문에 이세훈이 슬쩍 웃으며 대답했다.
“영웅 등급 아이템에 좋은 정보를 알려줘서. 그만한 의뢰비를 받았는데 답례를 안 할 순 없잖아.”
“의뢰비…….”
작게 중얼거린 에리카가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나중에 다시 올게.”
제이크를 한 번 바라본 에리카가 어디론가 걸어갔고, 그 뒷모습을 본 이세훈이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지난 경매 때 보여준 화끈한 모습을 생각하면 다음에 다시 찾아올 때는 어느 정도 쓸 만한 물건들을 가지고 오리라.
‘그 정도면 예약은 걸어줄 만하지.’
어떤 걸 가져다줄지 이세훈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옆에서 같이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제이크가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내가 뭐 잘못한 거 있어?”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는 듯한 제이크의 물음에 이세훈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조금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