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가 다 만들어줌 47화
아칼쿠프에 위치한 무학관.
학기 초에는 생도들이 대련을 벌이는 경우가 잘 없어 보통 한적한 편이었지만 오늘은 1,000명이 넘는 생도들이 찾아오며 활기를 띠었다.
“진짜로 올까?”
“대놓고 도발까지 했는데 설마 안 나오겠어.”
“퇴학하기 전에 깽판 치는 걸 수도 있지. 마력결상 때문에 사실상 영웅도 못하게 됐는데.”
무슨 일이 벌어질지 궁금해서 찾아오긴 했지만 그중 루이제가 정말로 대련에 나올 것이라 믿는 이들은 소수였다.
마력결상을 극복했다는 것 자체가 허무맹랑하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상대인 게르윈이 쉽사리 건드릴 수 없는 위치였기 때문이다.
“반년 전의 사건을 재조명받게 하려고 던진 게 맞다니까.”
“벌써 해외로 도망쳤다는 소문도 들리던데.”
“허탕이면 그냥 밥이나 먹으러 가자.”
주말이고 하니 산책 삼아 가벼운 마음으로 찾아온 생도들.
벤치에 앉은 채 그 반응을 살피던 이세훈은 3분의 1쯤 남아 있는 삼각김밥을 털어 넣으며 이야기했다.
“거봐. 너한테 별로 기대 안 한다니까?”
“시끄러.”
퉁명스럽게 대답한 루이제는 손에 들린 삼각김밥을 먹으며 살짝 흐트러진 모자를 다시금 꾹 눌러쓰고 콧대에 걸쳐진 선글라스를 치켜올렸다.
누가 봐도 수상쩍게 보이는 그 괴상망측한 변장에 이세훈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바라보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래 가지고 대련은 어떻게 될지…….”
“아. 시끄럽다고 임마!”
“그래그래. 알았다 알았어.”
남이 보기에 어쨌든 저렇게라도 가리는 쪽이 마음이 편하다니 어쩌겠는가. 바짝 긴장한 루이제의 모습에 이세훈은 말없이 옆에 앉은 채로 새로운 삼각김밥의 포장을 뜯었다.
‘대련까지 30분…….’
이쯤이면 슬슬 안쪽의 대기실로 들어가야 했지만 루이제는 벤치에서 일어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반년의 재활 후 처음으로 벌이는 대련. 거기에 상대는 자신을 쓰러뜨렸던 인물이고 1,000명이 넘는 인파가 그것을 구경하러 찾아왔다.
이쯤 되면 사실 긴장하지 않는 쪽이 문제가 있다고 봐도 무방하리라.
“앞에도 말했지만, 넌 어떤 상황이든 위축되면 안 돼.”
하지만 이세훈은 그것을 이해해 주는 대신 오히려 더욱더 몰아붙였다.
“언령마법은 자신에 대한 확신이 무너지면 그만큼 위력이 떨어져. 이런 대련 하나도 제대로 못 하면 실전에서는 본래 실력의 반의반도 못 꺼내게 될걸.”
좋은 언령술사는 자신보다 강한 상대로 얼마나 싸울 수 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회귀 전 폭견이 입에 달고 다니는 말이었고 실제로도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도 했다.
연습 중에 아무리 뛰어난 실력을 보인다고 한들 실전에서 선보이지 못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도 알아. 잔소리는…….”
불만스럽게 투덜거리던 루이제는 마지막 남은 삼각김밥을 입안에 우겨놓고는 턱 아래로 내려놓은 마스크를 올렸다.
그리고 한참 동안 입을 우물거리더니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물었다.
“내가 이길 거라고 했지?”
“당연하지. 질 이유가 없어.”
“……그래.”
질 이유는 없다. 마스크 안쪽으로 그 말을 중얼거린 루이제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간다.”
“그래. 시작하기 전에 대기실에 갈게.”
“집중 안 되니까 오지 마.”
퉁명스럽게 대답한 루이제가 무학관의 안으로 향했고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이세훈이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으음…….”
순수하게 능력만 본다면 정말로 이번 대련에서 루이제가 질 이유가 없다.
본인의 기량과 자신이 만들어준 바르그의 성능. 그리고 상대와의 ‘상성’까지 생각한다면 절대로 질 수가 없는 것이다.
‘문제는 실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냐는 건데…….’
자신이 알고 있는 루이제, 폭견의 성질을 생각한다면 지금은 긴장하더라도 실전에 돌입하면 머리에 피가 쏠려서 미친 듯이 날뛸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지금의 루이제는 산전수전을 다 겪은 폭견과 달리 애송이나 다름없는 상태.
즉, 이렇게 다 깔린 판에서도 실수할 가능성도 없지 않아 있는 것이다.
‘흐음…… 좀 더 격려를 해줘야 하나.’
폭견이라면 지랄 말고 꺼지라고 했겠지만 루이제라면 투덜거리면서도 내심 좋아할지도 모르겠다.
조금 낯부끄럽긴 하지만 루이제를 개과천선시키기 위해 노력하기로 한 이세훈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좋아. 까짓것 좀 해주지 뭐.”
회귀 전에 너는 어디 가서 칭찬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몇 번 듣긴 했지만 진심을 담아 이야기한다면 저쪽도 어련히 알아먹을 것이다.
결정을 내린 이세훈이 무학관의 안으로 들어선 순간.
삐이이───
귓가에 울리는 기이한 이명.
집중하지 않으면 제대로 들리지 않을 만큼 희미한 이명이었지만, 이세훈은 전신의 감각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뭐지?’
지금 자신의 신체 능력은 바벨에서도 하위권. 청각만 따진다면 주변에 있는 생도들이 훨씬 뛰어날 텐데도 이명을 들리는 듯한 반응이 아예 없다.
무언가 괴리감이 느껴지는 그 풍경에 이세훈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은 척 자연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귀에 문제가 생긴 것도 아니야. 그렇다면 무언가 조건을 만족한 사람에게만 들리는 거다.’
평상시라면 이 정도로 예민하게 반응하진 않겠지만 오늘은 루이제의 대련이 벌어지는 날.
그리고 『여명』이라면 루이제가 대련에서 승리하여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것을 절대 원치 않을 것이다.
소리의 근원을 찾아내기로 한 이세훈은 곧장 마력을 운용하여 청각을 끌어올렸다.
삐이──
하지만 주변의 소리가 선명해진 것에 비해 이명은 더욱 작아졌고 그 반응에 이세훈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이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간 가능성에 이세훈은 재빠르게 마력을 가라앉히고 영연신마법을 운용했다.
촤르륵─
체내에 펼쳐지는 임시통로. 아직 마력이 정착하지 않은 텅 빈 통로가 자리 잡은 순간 귓가에 들려오던 이명이 다시금 변했다.
삐이이이───
방금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선명해진 이명. 그리고 텅 빈 통로 곳곳에서 무언가 파고드는 듯한 기분이 느껴졌다.
그 반응에 이세훈은 귓가에 들리는 이명의 ‘조건’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마력침식!’
자신의 체내에 뿌리내렸던 녹빛의 마력. 그 잔재가 이명에 반응하여 체내에서 발버둥치고 있는 것이다.
진상을 알아차린 이세훈은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재빠르게 이명이 들리는 곳을 향해 달렸다.
‘뭘 노리는 건지 몰라도 빨리 멈춰야 해.’
루이제 몰래 마력침식기를 몇 번 더 사용하긴 했었지만 그때마다 홍련을 사용해서 나름대로 정리했었다.
그 얼마 안 되는 잔재가 이렇게 반응할 정도라면 장기간 침식당한 루이제에게는 더욱 영향이 강할 터.
어떤 효과일지는 몰라도 최대한 빠르게 원인을 제거하고 루이제의 상태를 확인해야만 했다.
‘이런 방식이면 대기실이나 경기장 근처일 거야.’
루이제의 대기실이 있는 장소는 3층.
계단을 타고 단숨에 올라온 이세훈은 팔다리에 채운 묵주환에 억지로 마력을 집어넣으며 체내의 마력침식을 더욱 가속시켰다.
삐이이이─────!
희미하던 이명이 이제는 귓가를 긁어대듯이 더욱 선명해진다. 그리고 동시에 어디 쯤에 있는 것인지 대략적으로 방향이 잡혔다.
후웅!
아공간 포켓에서 제이크에게 받은 흑염의 망치를 꺼내 고쳐 잡은 이세훈은 3층 복도의 구석진 곳에 위치한 창고의 문을 향해 있는 힘껏 후려갈겼다.
콰아앙!
잠겨져 있던 문고리가 단숨에 박살 나고 동시에 비품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창고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 안의 물건들을 재빠르게 훑어본 이세훈은 그중 커다란 종이 박스 하나에 시선이 꽂혔다.
‘저거다.’
귓가에 들리는 이명의 원인.
그것을 알아차린 이세훈이 곧장 망치를 움켜잡으며 걸음을 옮기는 순간.
“개꿈을 참 오래도 꾸는구나.”
뒤쪽에서 들려오는 여인의 목소리. 익숙하지만 반대로 이곳에서 절대로 들릴 리 없는 목소리에 이세훈의 몸이 일순간 굳어졌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유치한 장난을 하고 있을 셈이냐? 보는 내가 다 쪽팔린다.”
“…….”
“네가 생각해도 우습지 않느냐? 그딴 쓰레기 같은 단검이 너를 먼 과거로 보내줬다는 게.”
이죽거리는 여인의 물음에 이세훈이 담담히 대답했다.
“그럴 수도 있죠.”
“아니. 그럴 수 없어. 넌 늘 되도 않는 상황에서 억지를 부리는구나.”
목소리가 점차 가까워졌고 주변의 풍경이 흐려진다. 그리고 들리는 것은 역시 익숙한 소리.
쏴아아─
저 멀리 밀려오는 검은 파도가 주변의 풍경을 천천히 쓸어내린다. 그리고 젊은 시절로 돌아온 몸 역시 파도 앞에서 허물어져 갔다.
피투성이로 엉망진창인 몸. 그리고 눈앞에 힘없이 앉아 있는 세 명의 뒷모습. 멸망해가던 세계의 모습이 다시금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꿈이란 것이 그렇지. 꾸고 있을 때는 한없이 길게 느껴지지만 깨어나고 나며 덧없이 짧아.”
“…….”
“파도가 밀려온다. 추하게 살아 있을 테냐.”
등 뒤까지 다가온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이며 손에 들린 망치의 손잡이를 부드럽게 움켜쥔다.
저 파도에 집어 삼켜지기 전에 머리를 깨부숴라. 그렇게 부추기는 여인의 목소리에 이세훈이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한 가지 고칠 점.”
그리고 자신의 등 뒤에 있을 사부의 환영에게 이야기했다.
“사부는 나가뒤지라는 말을 그렇게 길게 하지 않아.”
후웅!
마력을 한껏 실은 망치가 앞으로 날아갔고 눈앞을 가득 채운 환각이 찢어 발겨진다.
콰아앙!!
굉음과 함께 짓이겨진 종이상자. 귀에 들리던 이명과 함께 모든 것이 사라졌음을 확인한 이세훈은 천천히 숨을 골랐다.
“후우…….”
마력을 머금은 묵주환이 팔다리를 끌어당겼고 마력이 바닥난 몸이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웠다. 이곳이 꿈이 아니라고, 현실이라고 이야기해 주는 것이다.
물론 그조차도 거짓된 것일 수도 있었지만 이세훈은 이어지는 생각을 끊어냈다.
‘뭐가 됐든 지금은 현실이야.’
아침에 확인했으니 오늘은 더 이상 고민할 필요도, 이유도 없다. 그 확신에 이세훈의 몸 곳곳에 남아 있던 녹빛의 마력이 완전히 녹아들어 사라졌고.
[스킬 ‘깨어나는 꿈(C)’을 습득하셨습니다.]
처음 보는 스킬이 새롭게 습득되었다.
‘이건……?’
회귀 전에도 본 적 없는 스킬. 의아한 표정으로 보던 이세훈은 이내 자신의 상황을 깨닫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건 나중에.’
몸에 문제가 없는 것을 확인한 이세훈은 곧장 종이 박스를 깔아뭉갠 망치를 치우고 안쪽을 살펴보았다.
치지직─
원형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처참하게 부서진 기계장치. 그 모습을 본 이세훈이 자세히 살피기 위해 손을 뻗은 순간.
화르륵!
갑자기 불이 붙더니 재도 남기지 않고 타버리는 기계장치. 눈앞에 있던 증거가 갑자기 사라져버려 허탈할 법도 했지만 이세훈은 오히려 두 눈을 번뜩였다.
‘여명 그 새끼들 맞구만.’
추적을 방지하기 위해 『여명』에서 사용하는 특수한 술식처리.
회귀 전에도 몇 번 본 적 있었기에 이세훈은 바로 알아본 것이다.
‘증거를 놓친 건 아쉽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나쁘지 않아.’
그동안 추측만 하고 있던 적들의 배후를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아쉬움을 털어낸 이세훈은 시간을 확인했다.
‘대련까지 남은 시간은 10분.’
이명의 효과는 마력이 침식된 대상의 트라우마를 자극해 자해하게 만드는 것. 침식을 가속시켰다 해도 자신이 이 정도라면 루이제는…….
‘아니…… 괜찮을 거야.’
이전이라면 몰라도 2주간 성장한 루이제라면 견디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믿으며 이세훈은 다시금 지친 몸을 이끌고 밖으로 달려나갔다.
* * *
“후우…….”
대기실에 도착한 루이제는 자리에 앉아 눈앞의 거울을 바라보았다.
초조한 머릿속과 달리 차분한 얼굴. 스스로도 놀랄 만큼 안정된 그 모습에 긴장이 조금 누그러드는 것이 느껴졌다.
‘괜찮아.’
몸 상태도 좋고 정신도 말끔하다. 그러니 질 이유가 없다.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며 루이제는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할 수 있어.”
설령 그럴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믿는 것이 언령술사로서의 마음가짐. 이세훈의 조언을 떠올리며 루이제가 계속해서 자기암시를 걸고 있을 때.
삐이이이───
귓가에 희미하게 울리는 이명.
그리 크지 않은데도 묘하게 거슬리는 소리에 루이제가 눈매를 찌푸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건가?’
천장에 붙어 있는 스피커. 곧 대련이니 그전에 테스트를 하다가 무언가 문제가 생긴 것일지도 모른다.
조금 있으면 바로 잡히겠거니 생각하며 루이제는 귀를 막고 다시금 정신을 가다듬었다.
삐이이이───
하지만 이명은 도통 멈출 생각을 않았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 소리가 점점 커지며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아 진짜…….”
이대로면 대련이고 뭐고 아무것도 안 된다. 신경질적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루이제가 대기실 밖으로 나가려던 순간.
“……어?”
돌연 사라진 이명.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조용해진 주변에 루이제가 묘한 표정으로 스피커를 바라보았다.
“대체 뭐야……?”
분명히 해결됐는데도 묘하게 꺼림칙한 기분이 든다.
고개를 가로저으며 잡념을 털어낸 루이제는 잡았던 문고리를 놓으며 몸을 돌렸고.
“…….”
새하얀 붕대를 두른 자신의 목이 보였다.
씻을 때도, 잠들 때도 절대로 풀지 않았던 붕대. 이제는 한 몸처럼 익숙하게 느껴졌지만, 어째서인지 루이제는 자신의 모습이 갑갑하게 느껴졌다.
‘이미 다 나았는데 둘러매고 있어서 그런가.’
아무리 자신이 다 나았다고 말해도 이런 모습을 해서야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것이다. 그 생각에 루이제는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결심을 내렸다.
‘……괜찮아.’
혼자서 붕대도 못 갈던 과거와는 다르다.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린 루이제는 테이프를 떼어내고 몇 겹으로 둘러싸인 붕대를 천천히 풀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른 곳보다도 새하얀 피부가 모습을 드러냈고.
스륵─
목의 절반을 가로지르는 흉터가 거울 너머로 비쳤다.
진찰 중에 사진으로밖에 보지 못했던, 아니, 그조차도 제대로 볼 수 없어 결국 설명으로만 들었던 흉터.
‘괜찮아…….’
이미 완치된 상처였고 자신에게 해를 끼칠 일은 없다.
그 당연한 사실을 몇 번이고 속으로 되새겼지만 루이제는 자신의 몸이 떨리고 있는 것을 느꼈다.
“하아…… 하아…….”
숨이 거칠어지고 전신에 오한이 들며 시야가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치밀어 오르는 불쾌감에 다른 곳을 보려고 했지만 어째서인지 두 눈이 흉터로부터 떨어지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후읍…… 큭…….”
거칠어진 호흡은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전신에 오한이 들며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두통과 속이 뒤틀리는 듯한 구토감.
당장에라도 끊어질 듯한 의식 속에서 루이제는 반사적으로 자신의 손에 들린 붕대로 목을 졸랐다.
“컥…….”
뒤엉킨 붕대가 목을 파고들었지만 두 손은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손에 남아 있는 붕대가 없어졌을 때. 루이제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얼굴. 그리고 처음보다 더 꽁꽁 싸매진 목. 그 형편없는 모습에 루이제는 자신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나는…….’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다.
이세훈이 알려준 신비로운 언령마법도, 그 힘을 비약적으로 상승시켜준 바르그도 자신을 바꿔내지 못했다.
그것을 깨달은 루이제의 마음속에 한 의문이 피어났다.
‘정말로 괜찮은 건가?’
지금의 자신이 정말로 게르윈 크루거를 이길 수 있을까.
녀석 혼자만이라면 몰라도 그 배후에는 비에르 바르무트. 그리고 자신이 믿고 의지했었던 은사인 찰스 교수도 있었다.
“…….”
경기장에 무슨 술수를 써뒀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이 대기실 안에도 자신 몰래 무언가를 준비해뒀을지 모른다.
끝없이 피어오르는 의심과 공포가 루이제의 마음을 갉아먹었고 거울 너머로 보이던 대련실의 풍경이 일그러져갔다.
그 광경에 루이제의 시선이 자연스레 자신의 목을 향했고.
콰득─
꽉 둘러맨 목의 붕대가 붉게 물들었다.
“큭…….”
이미 다 나은 상처가 갑작스레 벌어질 일은 없다.
눈앞의 광경이 발작에 의한 환각임을 알고 있음에도 루이제는 반사적으로 자신의 목을 양손으로 강하게 움켜잡았다.
꽈아악─
지혈을 위해 목을 조르다시피 눌렀지만 손 틈새로 계속해서 피가 흘러내린다.
모든 것이 환각이다. 자신은 피를 흘리지 않는다. 그 중얼거림이 무안하게 거울에 비친 루이제의 얼굴은 이미 핏기가 사라지고 있었다.
‘안 돼…….’
눈으로 보이는 풍경을, 자신의 감각을 믿을 수 없게 되었다.
어쩌면 상대의 기습에 당해 정말로 상처가 벌어진 것이라면, 환각이 아닌 사실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 생각에 루이제는 더 이상 눈앞의 광경을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상처를 막아야 해…… 지혈을 할 만한 게…….’
주변을 살피던 루이제는 거울 앞에 놓인 수건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것을 잡기 위해 오른손을 황급히 뻗었고.
으직─
갈기갈기 찢긴 오른손 너머로 반 이상 뜯겨나간 목이 비쳤다.
“───!”
피인지 위액인지 알 수 없는 것이 입 밖으로 토해내고, 중심을 잃은 채 바닥에 쓰러진 루이제는 몸을 웅크린 채 눈을 감고 귀를 틀어막았다.
‘싫어.’
저것이 이세훈이 극복해야 한다고 말한 자신의 트라우마다.
넘어서야 하는 난관이 눈앞에 찾아왔지만 루이제는 맞서 싸우는 대신 외면해 버렸다
‘실패하고 싶지 않아.’
달라진 것 하나 없는 자신이 저런 것을 극복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분명히 실패하고 다시 비참해질 텐데 어떻게 하란 말인가.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이번에 실패한다면 과연 이세훈은 자신을 도와줄까.
녀석이 가치 있게 여겼던 것은 자신의 재능. 그런데 그 재능이 실은 보잘것없었다면 과연 어떻게 할까.
수렁에 빠진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며 계속해서 이어진다. 그리고 점차 그 의식이 깊이 가라앉으려던 순간.
콰앙!
부서져라 열린 문이 그 상념을 단숨에 끊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