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가 다 만들어줌 28화
아칼쿠프의 4학년 학과 수석인 아리아 마이어스. 그리고 창술학부 3학년 수석인 염성하.
바벨의 현 재학생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명성과 무력을 지닌 두 생도의 등장에 경기장의 열기가 더욱더 후끈 달아올랐다.
-자! 대련을 시작하기에 앞서 전적을 살펴볼까요?
그 분위기에 본인도 신난 것인지 란 팡이 싱글벙글 웃으며 허공에 정보창을 띄웠다.
[아리아 아이어스] - 932전 932승 0무 0패
[염성하] - 1,238전 714승 128무 396패
두 사람의 전적기록이 허공에 떠오른 순간. 경기장에 모인 모든 생도가 탄성을 내뱉으며 아리아를 바라보았다.
염성하의 승률도 랭킹 10위라는 것을 생각하면 결코 낮은 것이 아니었지만, 전승을 거둬온 아리아와는 비교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 두 생도는 유독 서로 간의 대련이 잦았는데 공식적으로만 256전. 여기에 비공식 대련까지 합하면 무려 400전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승률은…….
잠시 뜸을 들인 란 팡은 탁상을 손바닥으로 힘차게 내려찍으며 외쳤다.
-아리아 마이어스의 전승!!!
400전이 넘는 승부에서 무승부조차 내주지 않은 아리아.
그 이야기를 들은 관중석의 사람들이 저마다 감탄했고, 수많은 감정이 담긴 시선이 두 사람을 향해 내리꽂힌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세훈은 자연스레 오늘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
‘저 녀석이 이런 취급도 다 받는구만.’
지금의 염성하도 분명 재능으로나 실력으로나 부족함이 없지만, 이번에는 정말 상대가 나빴다는 말 밖에 나오지 않는다.
-아. 이거 이야기가 너무 길었네요. 그럼 잡다한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잠시간의 정적이 경기장에 맴돌았고,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아리아와 염성하가 자신의 무기를 치켜들며 서로에게 겨눴다.
그리고 두 사람의 몸에서 솟아오른 황금빛과 검붉은빛의 마력들이 대기를 불태운 순간.
-시작!
란 팡의 호령과 동시에 두 사람이 격돌했다.
파아앙!!
검붉은 마력을 휘감은 염성하의 창이 공기를 찢어발기며 내질러진다. 그 무시무시한 기세에 아리아는 뒤로 물러서는 대신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세검을 휘둘렀다.
황금빛의 마력으로 뒤덮인 일검. 그 움직임은 마치 책의 페이지를 넘기는 손길처럼 가볍고 부드러웠지만.
카앙!
염성하의 창날은 폭탄이라도 터진 것처럼 크게 튕겼다.
순식간에 크게 드러난 허점. 그 틈새를 아리아가 곧장 파고들려 했으나 그보다 먼저 염성하의 마력이 움직였다.
화르르륵!
창날이 스쳐 지나간 궤적. 그곳에 흩뿌려진 마력이 일제히 폭발하듯 불꽃을 터트렸고, 그 강렬한 기세에 아리아가 살짝 제동하며 세검을 재차 휘둘렀다.
후웅!
이번에도 가벼운 일검에 불꽃이 흩어졌지만 염성하가 자세를 다잡기에는 충분했다.
회전해서 돌아온 창날이 재차 매섭게 휘둘러졌고, 얇디얇은 세검이 부드럽게 움직이며 거세게 쳐낸다.
콰가가강!
경기장의 중심을 장악하는 불꽃의 창과 그 사이를 누비는 황금빛의 검.
도저히 생도의 수준이라고는 볼 수 없는 그 어마어마한 수준에 멍하니 바라보던 관객석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환호성을 내질렀다.
첫 경기부터 후끈 달아오른 경기장의 열기에 이세훈은 전력을 다해 싸우고 있는 염성하를 바라보았다.
‘역시 어리긴 어리네.’
기본적인 신체 능력부터 기술까지 무엇하나 광견 시절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
31년 전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지만, 문제는 생각 이상으로 수준 이하라는 점이었다.
‘염륜잔화창의 후계자라고 하니 지원도 빵빵하게 받았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전폭적인 지원을 받지 못한 것일까.
나이를 감안하더라도 묘하게 아쉬운 염성하의 상태에 이세훈은 조금씩 변해가는 경기의 판도를 바라보았다.
‘벌써 거리가 좁혀지는 건가.’
창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이점인 거리가 점차 사라져간다.
염성하 역시 그 사실을 알기에 어떻게든 간격을 유지해 보려고 했지만 아리아는 가볍게 그 저항을 뚫고 차근차근 따라 잡아갔다.
‘이것 참.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그 누구보다도 염성하와 가깝게 지냈기에 이세훈은 고쳐야 할 점들이 속속들이 보였다.
염성하의 고질적인 버릇과 염륜잔화창이 지닌 단점. 그리고 그로 인해 벌어지는 불협화음 등등.
지적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거슬리는 것은 역시나 자신의 분야인 무구였다.
‘공격과 방어를 능숙히 펼칠 수 있는 열십자 형태. 창대에 유연성을 가미해 지금처럼 상대가 거리를 좁혀왔을 때도 쉽게 대응할 수 있도록 만들었군.’
창대에 소용돌이치는 검붉은색 마력이나 주변에 간간이 터져 나오는 파동을 보건대 저장된 마력을 사방에 흩뿌리는 효과를 지닌 것으로 보였다.
완성도로만 따지자면 이세훈도 크게 나무랄 부분이 없는 그럭저럭 쓸 만한 창이었지만.
‘하여간 보는 눈이 없다니까.’
광견 염성하와 어울리느냐고 하냐면 전혀 아니었다.
카앙!
창날이 다시 한번 쳐내졌고, 앞전과 같이 궤적을 따라 흩뿌려진 마력이 불꽃을 토해내려 한다.
파앙!
하지만 그보다도 먼저 황금빛으로 빛나는 아리아의 손날이 잔류한 마력을 베어 넘기며 거리를 단숨에 압축했다.
자세는 무너졌고 염륜잔화창이 만들어내는 불꽃의 ‘궤적’ 역시 끊어졌다.
이미 결착이 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 속에서 염성하의 눈동자가 이글거렸다.
투웅!
창대를 과감하게 포기하며 자세를 다잡고 주먹을 휘두르려는 염성하. 승리에 대한 집착이 엿보이는 그야말로 악착같은 한 수였으나.
스윽─
그 몸이 움직이기도 전에 아리아의 황금빛 세검이 목에 닿았다.
마지막까지 저항하려 했지만 그조차도 허락받지 못했다. 그 상황 속에서 염성하는 가만히 목에 겨눠진 세검을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졌다.”
“수고했어요.”
짧게 이야기한 아리아가 세검을 거뒀고,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란 팡이 우렁차게 소리쳤다.
-대련 종료!! 승자 아리아 마이어스!!!
선언과 동시에 터져 나오는 우렁찬 함성.
같은 바벨의 생도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수준 높은 대련에 생도들이 두 눈을 반짝이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만약 현역 영웅들이 찾아와 똑같은 대련을 펼쳤다면, 그냥 먼 미래라고 생각하며 대단하다는 반응만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기껏 해봐야 2~3년의 차이밖에 나지 않는 같은 생도들. 그 신분에서 느껴지는 친근감이 관객석에 있던 이들의 승부욕과 향상심을 자극한 것이다.
‘다들 기운차군 그래…….’
누군가는 훗날 재능의 차이를 깨닫고 좌절하겠지만, 그래도 바벨인 만큼 몇 명은 저 뒤를 따라갈지도 모른다.
참 신기한 장소다 싶어 주변을 둘러보던 이세훈은 문득 이상할 정도로 조용한 옆을 바라보았다.
“…….”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무심히 바라보는 에리카. 그 무미건조한 반응에 이세훈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재미없었냐?”
“응. 분야가 다르니 참고할 게 그리 많지 않네.”
“……그럴 거면 왜 찾아온 거야?”
이세훈이 어이없다는 듯이 묻자 에리카가 담담히 대답했다.
“네가 누굴 보러왔는지 궁금해서.”
“…….”
처음부터 조금 이상한 녀석이었는데 어째 인연이 성립되고 나니 더욱더 이상해진 것 같다.
이세훈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을 때. 경기장에서 란 팡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자. 그럼 지금부터 두 선수의 인터뷰를 진행하…… 기로 하였으나 염성하 생도에게 개인적인 사정이 생긴 관계로 아쉽지만 아리아 마이어스 생도의 인터뷰만 진행하고 다음 대련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란 팡의 안내와 함께 염성하가 고개를 꾸벅이는 것으로 스포트라이트가 사라졌고, 대련장 위의 모든 빛이 아리아를 향해 쏟아졌다.
마치 그녀가 진정한 주인공이라는 듯한 광경. 실제로 오늘 열린 이벤트전의 명칭이 ‘아리아 마이어스의 9연전’이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리라.
“연달아 랭킹 9위와 싸우는 건 아무래도 힘드니까…… 빈 인터뷰 시간은 생략하는 대신 제 질의응답으로 대신할까요?”
아리아의 물음에 관객석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고, 그 사이 염성하가 대련장 아래로 터덜터덜 걸어 내려간다.
겉보기에는 평소와 비슷해 보이지만 오랜 시간 염성하를 봐온 이세훈은 그게 기분이 상했을 때의 걸음걸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차렸다.
‘새끼…….’
여러 방면으로 미숙하던 시절이긴 한 모양이다.
피식 웃은 이세훈은 곧장 몸을 돌렸고, 그 모습에 에리카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가려고?”
염성하를 보러 온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것일까. 에리카의 물음에 이세훈이 대련장 아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환한 조명 아래서 찬란하게 빛나듯 서 있는 아리아. 인류의 희망이라 불리던 미래의 성검사 시절에나, 아직 생도인 시절이나 그 존재감은 여전했다.
처음 보는 사람들조차 절로 경외심을 품게 만드는 카리스마. 바벨의 생도라면 동경하지 않을 수 없는 인물이었으나.
“난 저런 스타일 별로 안 좋아해.”
이세훈은 꺼림칙한 눈으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드는 아리아를 내려다보았다.
“재수없거든.”
그 이상 말할 필요도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려 밖으로 나가는 이세훈. 그 뒷모습을 본 에리카의 표정이 조금 가라앉았다.
그동안 이세훈이 저렇게까지 격렬한 감정을 드러낸 적이 있었던가. 언제나 여유로움이 느껴졌던 이세훈이었기에 더더욱 이상하게 느껴졌다.
‘오라버니를 보러온 게 아니라 다행이긴 하지만…….’
지금 저 모습도 조금이지만 신경 쓰인다. 예정을 바꿔 그 뒤를 따라가기로 한 에리카가 걸음을 옮기려던 순간.
“…….”
뒤쪽에서 느껴지는 기묘한 감각. 그에 에리카가 천천히 연무장을 향해 고개를 돌렸고.
“흥미 있는 신입생? 글쎄요…….”
이쪽, 정확히는 이미 밖으로 나간 이세훈의 등을 쫓던 아리아와 눈을 마주쳤다.
“어쩌면 생겼을지도 모르겠네요.”
* * *
와아아!
뒤쪽에서 울려 퍼지는 환호성. 랭킹 9위와의 전투가 시작된 거 같지만, 그쪽은 우선순위에서 한참 밀렸기에 이세훈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놈 성격상 바로 돌아갈 리가 없는데…….’
염성하는 눈이 돌아가면 광견이라는 별명 그대로 완전히 미친개가 되지만, 평소에는 자존심이 강하고 싸가지만 없는 그럭저럭 멀쩡한 녀석이었다.
그리고 체면을 굉장히 중요시하기에 기분이 좋지 않을 때는 그게 다 가라앉을 때까지 혼자 있는 버릇이 있었다.
‘녀석이 좋아할 만한 장소가…….’
회귀 전의 기억을 되짚으며 이세훈이 무학관 근처를 돌아다녔고, 이내 근처의 공원 구석진 곳에서 한 청년을 발견했다.
“후우…… 후우…….”
두 눈을 감은 채로 숨을 가다듬고 있는 염성하. 좀 더 가까운 곳에서 보게 된 이세훈은 조금이지만 묘한 기분을 느꼈다.
‘살아 있는 건가…….’
조금 개 같은 녀석이긴 했지만 이러나저러나 결사대의 기둥 중 한 명이었으며, 마지막에는 기어코 목숨을 던져 멸해의 마신을 쓰러뜨리기까지 했다.
성격이나 행실이 어찌 됐든 자신과 뜻을 함께했던 사람이었다보니 여러 생각이 들게 만드는 것이다.
‘뭐…… 그래도 아직은 삐뚤어지기 전이니 이번에는 조금 원만하게 되려나.’
어느 정도 대화의 물꼬를 틀기만 한다면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들을 이용해서 회귀 전과 같이 인연을 성립시켜 인연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이세훈이 막 다가가려던 찰나.
“신입생인가”
두 눈을 감은 채 염성하가 담담히 입을 열었다.
“대련을 보고 있었나?”
“……예. 뭐.”
염성하의 물음에 이세훈이 눈매를 살짝 일그러뜨리며 힘겹게 대답했다.
‘저놈한테 존댓말을 해야 한다니.’
심기가 불편하다 못해 뒤틀리는 기분이지만, 지금은 자신이 알던 염성하와 다를 수 있으니 신중하게 대응해야 한다.
이세훈이 속으로 참고 있는 사이 염성하가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나를 찾아내다니. 꽤 실력이…….”
담담하게 이야기를 꺼내던 염성하가 이세훈의 얼굴을 바라보았고, 이내 말을 멈추며 눈매를 살짝 찌푸렸다.
‘왜 저래?’
누가 봐도 썩 좋지 않은 반응. 예상과 달리 묘하게 돌아가는 분위기에 이세훈이 잘못되었음을 느끼던 찰나.
“보르시파의 학과 수석인가.”
조금 가라앉은 염성하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긴 뭐하러 온 거지?”
“이야기를 조금 나눴으면 해서…… 요.”
염성하가 몸담고 있는 염화문의 미래. 염륜잔화창의 개선점. 그리고 오직 삼견만이 지니고 있는 특수한 ‘자질’.
한 번에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앞으로 풀어나가야 할 것이 그야말로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렇기에 이세훈은 조금이라도 빨리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었지만.
“가라.”
염성하는 그럴 생각이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고개도 돌리고 다시 눈을 감은 채 숨을 고르기 시작한 염성하. 이쪽을 아예 없는 사람 취급하는 그 모습에 이세훈의 눈매가 살짝 일그러졌다.
“선…… 배에게도 나쁘지 않을 이야기입니다. 한 번 들어나…….”
“모르는 것 같으니 딱 한 번만 말해주지.”
이세훈의 말을 툭 잘라낸 염성하가 눈을 감은 그대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약한 녀석을 싫어한다.”
“…….”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하는 주제 같잖은 재주가 있다고 나와 비슷하거나 대등하다고 여기는 녀석은 더욱이 그렇지.”
담담하면서도, 그 경멸감이 느껴지는 단호한 목소리에 이세훈은 불현듯 회귀 전의 기억 하나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네 역할은 뒤에서 무구를 만드는 것뿐이다. 주제넘게 앞으로 나서지 마라.’
회귀 전. 인류의 연합전선에 들어온 염성하와 처음 만났을 때 들은 이야기. 그때는 그냥 성격이 더러운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세훈은 그것이 자신의 착각임을 깨달았다.
“그러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는 몰라도 돌아가라.”
염성하는 단순히 성격이 더러운 것이 아니었다.
“대장장이.”
자신보다 약하면 사람으로도 취급해 주지 않을 만큼 편협한 사고방식을 지닌 성격 더러운 개놈이었던 것이다!
‘……그래. 그렇겠지.’
그 모습을 본 순간. 이세훈은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삼견도 어린 시절에는 괜찮았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믿고 있었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참으로 안일한 생각이었다.
그 글러 먹은 놈들이 단순히 어리다고 해서 착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 사실을 뼈저리게 느낀 이세훈은 다시금 염성하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광견 시절에 비하면 양반이네.’
회귀 전이었다면 가라고 했는데 다시 말을 건 시점에서 창으로 배때지를 쑤셨을 텐데 한 번 더 설명해 주는 인내심을 가지고 있다니.
개과천선의 가능성을 조금이나마 엿본 이세훈은 어떻게 대응할지 고민했다.
‘저 꼬라지를 보니 말로 풀릴 가능성은 없겠지.’
지금 염성하는 일단 한 대 정도는 갈겨놔야 대화가 성립된다. 문제는 자신이 염성하에게 한 대를 갈길 수 있냐는 것.
빈틈이야 노리려면 얼마든지 노릴 수 있지만 신체 능력이 또 발목을 붙잡는 것이다.
‘탐철로 끌어올릴 수 있어도 마땅한 물건이…… 아.’
불현듯 오른손에 시선이 향하고, 이세훈은 자연스럽게 방금까지 만났던 정신 사나운 소녀에 대해서 떠올렸다.
자신의 재능을 숨기지 않으며 도움이 될 이에게 서슴없이 접근하는 성격. 그런데도 희미하게 자신에 대한 불신을 지녔지만, 이제는 그것이 사라져가고 있다.
우웅─
그 이해도를 따라 이세훈의 손아귀에서 은은한 빛이 흘러나왔고, 이내 하나의 광석으로 빚어져 모습을 드러냈다.
[인연 - 착폭화錯爆化]
[등급 : 고급] [품질 : 최상]
여러 색이 뒤섞인 형형색색의 광석.
뒤섞인 재료의 잠재력을 한계까지 끌어올리는 증폭제로서 탁월한 성능을 지니고 있다.
*합성된 재료의 잠재력을 끌어올려줍니다.
인챈트 팔레트의 마석 가루를 마구잡이로 뭉쳐둔 것 같은 형형색색의 광석. 잡스럽지만 고급스러워 보이는 그 형태에 이세훈은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좋은데.’
이거라면 지금도, 앞으로도 유용할 인연석이다. 자신의 예상을 뛰어넘은 이득에 이세훈이 미소를 짓고 있을 때.
“……아무래도 갈 생각이 없나 보군.”
마력의 움직임을 느낀 염성하가 다시금 눈을 떴다.
“네가 자초한 일이다.”
이제는 참지 않겠다는 듯 몸을 돌리는 염성하. 그것만으로도 전신이 무겁게 짓눌렸지만, 이세훈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마주 보았다.
“들은 게 있으니 나도 딱 한 번만 말해주지.”
뭐라 말하든 신경 쓰지 않겠다는 듯 무심하게 걸어오는 염성하. 그 차분하면서 무거운 모습에 이세훈이 입꼬리를 올렸다.
“염륜잔화창의 역사는 너 때문에 끊어질 거야.”
그 말이 끝난 순간. 천천히 걸어오던 염성하의 몸이 굳었고,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숨이 멎었다.
올해 입학한 후배, 거기에 자신보다 한참 약한 이에게 그런 말을 들을 것이라고는 상상치도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 말뜻을 오해 없이 완벽히 이해한 염성하의 몸이 재차 움직였고.
쿠웅-!
단 한 걸음만으로 이세훈의 코앞까지 쇄도해 왔다.
꽉 움켜쥔 주먹과 그 궤적을 뒤쫓아 흩뿌려진 마력. 이대로 적중한다면 머리가 박살 나고 몸뚱이는 뒤따르는 불꽃에 흔적도 없이 폭발해 버릴 것이다.
[인연각인 ‘탐철’이 발동됩니다.]
어디까지나 바보처럼 맞아줬다는 가정하에.
투웅!
앞으로 뻗은 이세훈의 양 손바닥이 염성하의 주먹과 맞닿음과 동시에 부드럽게 공격을 오른쪽으로 흘려보냈다.
손바닥에 맺힌 마력으로 힘을 흘려낸 뒤 이어서 왼손으로 손목을 밀어낸다. 그 깔끔한 방어에 염성하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흘려냈다고?’
가볍게 내지른 일격이었다고 해도 자신의 마력이 담겼던 주먹. 아칼쿠프의 1학년 학과 수석이라면 모를까 보르시파가 막을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하지만 눈앞의 대장장이는 자신의 공격을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아주 태연하게 흘려보낸 것이다.
‘그래도 학과 수석이다, 이거군.’
머리카락의 끝이 불꽃처럼 일렁이며 체내에서 희미한 열기가 느껴지는 것이 아마 신체를 강화한 것이 분명할 터.
상황의 파악을 끝낸 염성하는 이세훈이 자신에게 말을 붙일 자격 정도는 있었다고 뒤늦게 인정하며, 두 눈을 빛냈다.
‘그걸로 끝이다.’
주먹은 빗나갔지만, 그 궤적을 뒤따르는 마력 ‘잔화殘火’는 여전히 남아 있다. 여기서부터 피어올라 폭발하는 불꽃이야말로 염륜잔화창의 진정한 힘.
그렇기에 염성하는 폭발에 휩쓸려 바닥을 나뒹구는 건방진 신입생의 모습을 자연스레 떠올렸고.
우웅!
홍련을 끌어올린 이세훈의 오른손이 폭발 직전인 잔화와 맞닿았다.
콰아아아앙!!!
두 사람 사이에서 터져 나온 어마어마한 불꽃.
염성하가 마력을 조절해 온도를 낮춰뒀기에 주변이 그을리는 일은 없었지만 충격파만으로 꽃들이 꺾이고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졌다.
폭탄이라도 터진 것처럼 요란하기 그지없는 여파. 그 중심지에서 피어오르던 연기가 조금씩 잦아들었고, 이내 두 사람의 모습이 드러났다.
“후우…….”
충격파로 머리와 옷이 한껏 흐트러진 이세훈.
“…….”
그리고 폭발에 휩쓸려 옷 곳곳이 그을려 있는 염성하.
자신이 예상한 것과 전혀 다른 결과에 염성하가 굳어 있을 때. 이세훈이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넘기며 씩 웃었다.
“내 말 맞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