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가 다 만들어줌 20화
보르시파의 상점가에 위치한 카페 ‘라일락’.
졸업생이 차린 가게 중 하나로 다양한 꽃들로 화사하게 꾸며져 있기로 유명해 생도들뿐만 아니라 외부에서 찾아온 방문객으로도 늘 북적거리는 곳이었다.
“여기 점장님이 우리 인챈트 학부 졸업생이신데 진짜 장난 아냐. 카페에 있는 꽃들에 전부 인챈트를 해둬서 365일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거든.”
“…….”
“아, 이게 또 인챈트를 모르면 안 와닿을 수도 있는데 꽃처럼 살아있는 생물에 인챈트를 걸어서 그 품질을 유지하는 게 얼마나 어렵냐면…….”
뭐가 그리 할 말이 많은지 재잘재잘 이야기하는 소녀, 레아 클로델의 모습에 이세훈이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대장장이와 자주 협업하는 직종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열에 아홉은 인챈터라고 대답한다. 무구를 만들어내는 대장장이와 완성된 무구의 힘을 더욱더 끌어올리는 인챈터.
정말 외골수처럼 지내는 게 아니라면 엮일 수밖에 없는 것이 대장장이와 인챈터의 관계인 것이다.
‘레아 클로델이라…….’
그렇다 보니 대장장이라면 유명한 인챈터에 대해서는 듣기 싫어도 들을 수밖에 없었고, 눈앞의 레아 클로델 역시 마찬가지였다.
인챈터 업계를 완전히 박살 내버린 천재. 희귀 등급의 무구를 무려 두 단계나 끌어올려 전설 등급의 무구로 탈바꿈시킨 미치광이.
그것이 바로 눈앞의 소녀 레아 클로델의 미래인 것이다.
‘나이 차이가 얼마 안 난다는 건 알았지만 설마 바벨에 있었을 줄이야…… 아니, 어찌 보면 당연한가.’
뛰어난 영웅은 대부분 바벨에서 배출되니 연령대가 비슷하다면 어지간해서는 모두 바벨 내부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세훈 역시 그 정도는 알고 있었으나, 설마 이렇게까지 유명한 인물을 쉽게 마주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에 신기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어찌 됐든 진짜 레아 클로델이라면 나쁠 건 없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몰라도 눈 깜짝할 사이에 인연이 성립된 상황. 미래의 명성을 생각한다면 인연석의 효과 역시 나쁘지는 않으리라.
어느 정도 생각을 정리한 이세훈은 쉴 새 없이 조잘거리는 레아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중요한 건 혈류를…….”
“잡담은 그만하고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지.”
“아. 그럴까?”
“…….”
기다렸다는 듯이 태도를 바꾸는 레아. 그 모습에 이세훈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그녀가 멋쩍게 웃었다.
“아니. 사람이랑 대화하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 쌓아뒀던 이야기들을 꺼내다 보니 나도 모르게…….”
“본론.”
“아. 아. 그래. 본론이지 본론.”
자신의 입을 두드린 레아는 앞에 놓인 커피를 홀짝인 다음 조금 차분해진 목소리로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본론을 말하자면, 네가 만들었다는 그 팔찌에 인챈트하고 싶어.”
“이거 말이야?”
이세훈이 소매를 살짝 걷어 묵주환을 보여주었고, 그 모습에 레아의 두 눈이 다시금 반짝였다.
팔을 살짝 움직이니 그 뒤를 쫓아 고개를 움직인다. 그 푹 빠진 듯한 반응에 이세훈이 피식 웃었다.
‘하긴. 묵중암이면 그럴 법도 하지.’
영웅 등급인 데다 나오는 족족 불티나게 팔려 나가는 묵중암을 일반 생도가 어디 구하기 쉽겠는가.
처음 봤던 탁한 눈은 어디 갔는지 생기가 감도는 눈으로 쳐다보는 레아의 모습에 이세훈이 오른팔에 찬 묵주환을 풀어 내밀었다.
“……어?”
“정보창도 못 봤잖아. 한 번 봐봐.”
“어? 아. 정보…… 정보창? 이거 설마 고급…… 아니, 희귀 등급?!”
두 눈을 부릅뜨며 손에 들린 묵주환을 내려다보는 레아. 그 호들갑스러운 반응에 이세훈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진짜 별종이긴 하네.’
다른 사람과 대화를 자주 안 했다는 것도 그렇고 학과수석인 자신도 모르는 것을 보면 외부에는 일절 관심이 없고 오직 인챈트와 관련된 것에만 흥미를 보인다.
회귀 전에도 인챈트에 미친 사람이라고 듣기는 했지만 이렇게 보니 확실히 소문이 과장이 아니었음이 느껴졌다.
사람에 따라서 상당히 꺼려질 수도 있었지만 이세훈은 그 모습이 그럭저럭 마음에 들었다.
‘어찌 됐든 실력은 있으니까 말이지.’
쥐뿔도 없으면서 미친놈이면 곧장 망치행이지만, 그만한 능력을 갖추고 있다면 또 이야기가 달라지는 법.
“묵중암으로 만든 희귀 등급의 무구. 게다가 마력 흡수에 저장 기능까지 있다니. 여기에 몇 가지 수식만 더하면…… 아니지, 이걸로 끝내기엔…….”
묵주환을 바라보며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마구 중얼거리는 레아. 그 모습에 이세훈은 재촉하지 않고 앞에 놓인 스무디를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10분, 30분, 1시간이 지나고 점심시간이 되어 주변에 샌드위치를 사 먹는 생도들이 늘어나기 시작했을 때쯤.
“아. 안 돼.”
묵주환을 내려놓은 레아가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반쯤 넋이 나간 듯한 그 모습에 이세훈이 주문해 둔 샌드위치를 먹으며 물었다.
“생각보다 별로야?”
“아니. 무구는 문제없어. 오히려 생각한 것 이상이라서 가슴이 벅차오를 정도야.”
벌써 네 잔째인 커피를 단숨에 들이켜며 레아가 번들거리는 눈으로 이세훈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
“흐음. 그래?”
“그래! 이 팔찌 이상하다고! 묵중암으로 만들었는데 왜 이렇게 호환성이 높은 거야?! 넣을 수 있는 수식이 너무 많아서 되려 뭘 골라서 넣어야 할지 결정이 안 되는…….”
또다시 이야기를 쏟아 내려는 레아의 모습에 이세훈이 미리 주문해 둔 샌드위치를 앞에 가져다 놓으며 말을 잘라냈다.
“한마디로 인챈트할 수 있는 종류가 생각보다 많아서 고민된다?”
“그렇지. 바로 그거야.”
“그런 거라면 딱히 상관없겠네.”
“어?”
의아해하는 레아의 모습에 이세훈은 반대쪽 소매를 올려 묵주환을 보여주었다.
“더 있거든.”
“…….”
“아, 그리고.”
이세훈이 돌려받은 묵주환을 가져다 댔고, 그 사이로 공명 현상이 일어나며 부르르 떨렸다.
“이거 공명 현상도 있어서 인챈트할 거면 참고해.”
“…….”
눈앞의 광경에 레아가 멍하니 바라보았고, 이내 자신의 미간을 매만지다가 블랙커피를 한 잔 더 시켰다.
“잠깐만. 지금 과부하 걸린 거 같아서. 조금만 기다려.”
새로 나온 커피를 마시고 샌드위치까지 꾸역꾸역 먹은 레아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이세훈을 바라보았다.
“너 도대체 뭐야?”
통성명까지 참 오래 걸린다고 생각하며 이세훈이 답했다.
“이세훈. 제련학부 1학년이고, 올해 보르시파 학과수석.”
“1학년? 아, 그래도 학과수석이면 그럴 만한가. 대단하네…….”
이세훈의 소개에 살짝 감탄한 레아는 헛기침을 하며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인챈트 학부 3학년인 레아 클로델이야. 그리고…… 음…… 또 뭐 설명해 줄 만한 게 있나?”
“글쎄. 내 무구에 인챈트하고 싶다면 실력을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
어떤 유형의 사람인지는 얼추 파악했으니 이제는 실력을 볼 차례다. 이세훈의 이야기에 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만한 걸 보여줬으니 나도 답례는 해야지.”
딸깍.
땋은 머리카락에 끼워져 있던 헤어핀 중 하나를 뽑은 레아가 의기양양하게 이세훈에게 건네주었다.
푸른색 보석을 중심으로 은빛 몸체를 지닌 헤어핀. 언뜻 보기에는 유성과도 같았는데 그 모습에 이세훈이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생각보다 완성도가 높은데…… 설마.’
혹시나 싶은 생각에 이세훈은 곧장 건네받은 헤어핀의 정보창을 살펴보았다.
[머큐리 Mk.1]
[등급 : 희귀] [품질 : 최상]
수성의 형태를 모방한 헤어핀.
수 속성 마력이 담긴 광석을 가공하여 그 힘을 정제하고 별의 기원을 모방하여 부여된 스킬의 위력을 강화한 물건.
*착용자의 수 속성 저항력, 지배력을 증가시킵니다.
*스킬 ‘워터 코멧’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희귀 등급 최상품이라. 재료도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데 잘 만들었네.’
재료에 비해 등급도 높고 무엇보다도 전체적인 완성도가 훌륭하다. 여기서 조금만 더 감을 잡는다면 당장에라도 영웅 등급의 물건을 만들어내더라도 이상하지 않은 수준.
물론 그 감을 잡는 게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지만 준비가 갖춰졌느냐 마느냐는 차이가 컸다.
‘역시라고 해야 할지…… 대단한데.’
이세훈이 흥미롭게 헤어핀을 살펴보고 있을 때. 카페의 입구 쪽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그냥 단체로 밥을 먹으러 왔겠거니 하며 이세훈은 신경 쓰지 않으려 했지만.
“야야. 뒤.”
“……하아.”
자신을 뒤를 가리키는 레아와 등이 따갑게 쏟아지는 시선들에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어디서 본 적 있는 사나운 인상의 청년. 그 얼굴과 주변에 서 있는 생도들을 훑어본 이세훈은 금방 그들의 정체를 떠올렸다.
‘에리카 부하들이네.’
저들이 왜 갑자기 저런 살벌한 표정을 한 채로 자신을 찾아왔는가.
짚이는 이유가 너무나도 많았기에 이세훈이 뭐라도 말해보라는 듯 그들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할 이야기가 있다. 잠시 나가지 않겠나?”
건네는 말은 권유지만 눈빛만 보면 협박이나 다름없다. 처음 정류장에서 봤을 때와 똑같은 상황에 이세훈이 잠시 고민에 잠겼다.
‘이걸 어떻게 한다.’
눈빛을 보건대 이제 서로 무시하고 지나갈 수 있는 수준은 넘어섰다.
결국 어떤 형태로든 해결을 봐야 할 텐데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이세훈이 여러 방법을 떠올리고 있을 때.
“나가긴 어딜 나가?”
이세훈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레아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부하들을 노려보았다.
“내가 먼저 대화하고 있는 거 안 보여?”
“……조용히 해결하고 싶다. 잠깐이면 되니 부탁하지.”
노골적으로 말을 무시하며 계속해서 이세훈에게만 이야기하는 청년, 세이츠의 모습에 레아의 눈매가 일그러지더니 이내 입꼬리를 비틀었다.
“주인님 말만 듣는 개새끼답게 사람 말은 알아먹지도 못하나 보네.”
“……뭐?”
“알아듣게 말해줄까? 멍! 저리 꺼져 병신아 멍!”
개소리까지 직접 내며 비아냥거리는 레아. 그 노골적인 조롱에 세이츠의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지더니 이를 바득바득 갈며 노려보았다.
“학과수석 자리도 못 지킨 퇴물주제 건방진 건 여전하군.”
“하! 학과는커녕 학부수석도 한 번 못 따본 새끼가 그걸 지금 도발이랍시고 말하는 거냐? 진짜 어이가 없어서…….”
“도발이라니. 있는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왜 도발이 되는 건지 모르겠군. 시험마다 실패작을 가져와서 성적이 떨어진 게 거짓말은 아니지 않나.”
빠드득.
세이츠의 비웃음에 레아의 이가 갈리더니 두 눈이 이글거리며 입가가 비틀렸다.
“하. 하. 하. 그래도 아직 상위권이거든? 누가 들으면 실력도 없으면서 졸업하고 일자리 한번 얻어 보겠다고 후배 뒤꽁무니 졸졸 쫓아다니는 개새끼라도 된 줄 알겠어.”
“너…….”
“왜? 있는 사실을 말했을 뿐이잖아. 아, 그 대단하신 ‘도련님’ 종놈 짓 해온 걸 빼먹어서 그래? 미안하게 됐네~”
빠드득.
두 사람 사이로 휘몰아치는 무시무시한 기류.
신경전을 넘어서 당장에라도 치고받을 듯한 그 살벌하기 그지없는 분위기 속에서 이세훈은 담담하게 필요한 정보만 되새겼다.
‘슬럼프라. 이건 좀 의외인데.’
회귀 전의 유명세를 생각하면 당연히 승승장구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힘든 시절이 있었던 모양이다.
레아가 왜 묵주환에 흥미를 가졌으며, 눈 깜짝할 사이에 인연이 성립된 것인지 알아차린 이세훈은 슬슬 대화를 마무리 짓기 위해 입을 열었다.
“거기까지.”
짜악!
가볍게 박수를 쳐서 이목을 모은 이세훈은 눈이 반쯤 돌아 있는 레아를 바라보았다.
“한 가지만 물어보자.”
“뭔데?”
“인챈트 학부 중에 추천해 주고 싶은 부전공 있어?”
조금 둘러서 말하기는 했지만, 그것도 못 알아들을 만큼 눈치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이세훈이 긍정적인 대답에 레아가 언제 그랬냐는 듯 두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고대 인챈트학. 여기가 교수님도 좋으시고 끝내주는 선배님도 한 명 있어서 아주 좋을 거야.”
“참고해 둘게.”
어차피 인연은 성립됐으니 자세한 것은 저 수업을 같이 들으면서 알아봐도 늦지는 않으리라.
인연석도 그때 살펴보기로 한 이세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뒤쪽에 서 있던 세이츠를 비롯한 부하들을 바라보았다.
“조용한 곳에서 말하자며. 안내해.”
“……따라와라.”
“그 새끼가 이상한 짓 하면 나중에 나한테 말해!”
레아의 배웅을 받으며 카페를 나온 이세훈은 부하들을 따라서 쭉 걸음을 옮겼다.
도착한 곳은 상점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저주학부. 보르시파에서 입지가 높은 부서 중 하나였는데 본관도 그렇고 주변 숲도 음산한 느낌이 가득한 장소였다.
“여기서부터는 둘이서 가지.”
다른 부하들을 남겨두고 단둘이서 숲으로 들어가는 이세훈과 세이츠. 그 기묘한 분위기에 이세훈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보는 눈이 없는 으슥한 숲속이라. 참 정석적이구만.’
예상한 그대로의 상황에 이세훈이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뒤를 따르고 있을 때. 앞서 걸어가던 세이츠가 돌연 걸음을 멈추며 뒤돌아보았다.
“입학 첫 일주일이면 한창 바쁠 시기일 테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도록 하지.”
“해봐.”
고개를 까딱이며 재촉하는 이세훈의 모습에 세이츠가 눈매를 찌푸렸다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에리카 아가씨께 무례하게 행동한 것에 대해서 사과해라.”
“난 무례한 행동을 한 적이 없는데.”
이세훈의 태연한 대답에 세이츠가 입술을 꾹 깨물더니 심호흡하며 이야기를 이었다.
“아가씨께서 건네주신 초대장을 두 번이나 남들이 보는 앞에서 찢어발겨 놓고 그런 소리를 하는 거냐?”
“그 아가씨가 찢어 보라고 했다만.”
시킨 대로 했을 뿐인데 그걸 왜 이쪽에 따진단 말인가. 이세훈이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세이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말도 일리는 있지…….”
그리고 싸늘한 눈으로 이세훈을 바라보았다.
“제이크 마이어스에게 초대장을 받지만 않았다면.”
“그건 또 뭔…… 아.”
영문을 알 수 없는 세이츠의 이야기에 이세훈이 눈매를 찌푸리던 찰나. 제이크가 해준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노블레스 교류회란 생도 중에서도 휘황찬란한 배경을 지닌 녀석들이 모이는 장소.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들 모두가 한편이라는 보장은 없었다.
한 분야에서 경쟁하는 관계도 있을 것이고, 개인적인 은원으로 얽힌 관계도 있을 터.
‘마이어스랑 이노우에가 썩 사이가 안 좋나 보구만.’
이노우에 에리카가 두 번이나 권유한 초대장은 찢어서 내다 버리고는 제이크 마이어스가 건네준 초대장은 받았다.
상황만 놓고 보면 우연에 지나지 않지만, 저런 교류회에 참석하는 음습한 놈들이 그만한 가십거리를 놓칠 리가 없다.
‘그거 때문에 체면이 상해서 이렇게 찾아온 건가.’
이세훈의 입장에서는 우습기 그지없는 일이지만, 자신보다 집단을 중시하는 녀석들에게는 참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대강 상황을 파악한 이세훈은 잠시 곰곰이 생각하다가 세이츠에게 물었다.
“에리카가 시킨 거냐?”
“아가씨께선 상관없다. 내 독단으로 벌인 일이다.”
세이츠의 대답에 이세훈이 피식 웃었다.
‘퍽이나 그러겠다.’
집단의 명성을 중시하는 녀석이 독단으로 이런 짓을 벌인다? 있을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눈앞의 세이츠가 그 정도로 멍청해 보이진 않았다.
잠깐 머리를 굴리던 이세훈은 금방 주동자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도련님인가 뭔가 하는 그놈인가 보네.”
“……아가씨께 사과해라. 그러면 그냥 끝날 거다.”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다.
세이츠의 이야기에 이세훈은 그 도련님이라는 녀석이 누구였는지 기억을 더듬었다.
‘아마도…… 차기 당주인 이노우에 렌이겠지.’
에리카의 오빠이자 먼 미래에 이노우에 가문을 지휘했던 식신술의 천재.
영웅 중에서도 뒤가 구리다는 이야기를 종종 빙견 아미르에게서 들은 적이 있었는데 아무래도 헛소문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 녀석이 먼저 나선 건가.’
확실히 회귀 전 행보를 생각해 보면 가문의 체면에 신경을 많이 쓸 법도 하다. 모든 상황을 이해한 이세훈은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숲 주변을 살폈다.
“안 한다고 하면 뭐, 여기서 죽나?”
“아무리 그래도 그런 짓까진 하지 않는다. 다만…….”
따악.
세이츠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긴 순간. 숲 곳곳에서 마력이 솟구치더니 스산한 공기가 주변을 둘러싼다.
결계가 발동되었음을 알려주는 현상. 적의를 드러낸 세이츠가 싸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우연히 저주학부의 시설에 들어가 버려서 상처를 입은 채로 발견될 수는 있겠지.”
티가 안 날 정도로 두들겨 패서 정신을 번쩍 들게 해주겠다. 세이츠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완벽히 이해한 이세훈은 피식 웃었다.
“그래. 뒤탈 없게 다 준비해 뒀다 이거구만.”
그렇다면 이쪽도 굳이 참을 필요는 없다. 결론을 내린 이세훈은 세이츠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너. 내가 무구 다음으로 잘 만드는 게 뭔지 알아?”
“…….”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한 세이츠의 눈길에 이세훈이 생도복 자켓을 벗으며 담담하게 이야기를 이었다.
“사람.”
“……뭐?”
당황한 세이츠의 되물음에 이세훈이 자켓을 뒤로 내던졌다.
“멍청한 새끼 사람 만들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