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654화 (653/653)

제654화

“네가 별관에 저질렀던 잘못을 밝히고, 용서를 받아라.”

라온은 부원주가 시녀들과 눈을 마주칠 수 있도록 옆으로 물러섰다. 놈이 패악을 부린 대상은 내가 아니라, 실비아와 시녀들이었으니까.

-고작 그게 소원이냐?

라스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헛바람을 내뱉었다.

-다른 거 많잖느냐! 왜 고작 사과인 것이냐!

‘일단 보고 있어.’

라온은 투정을 부리는 라스의 머리를 톡톡 두드린 후 다시 부원주를 보았다.

부원주는 라스처럼 예상보다 소원이 약하다고 생각한 듯 짧게 입맛을 다셨다.

다만 그는 스스로 저질렀던 잘못을 밝히기는 부끄러운지 잘려 나간 손목을 부여잡은 채 시간을 끌었다.

“으음….”

사람들의 시선이 몰렸기 때문인지 마침 실비아가 신음을 흘리며 눈을 떴다.

“후우.”

부원주가 마음을 정한 듯 탁한 숨을 내뱉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불법 행위를 목격했다는 신고를 조작하여 아무런 죄도 없는 별관을 강제로 감찰하고, 괴롭혔다.”

“그 이유는 뭐지?”

라온이 서늘한 눈빛으로 턱을 까딱였다.

“너를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별관이라는 약점을 잡는다면 네 목줄을 쥘 수 있다고 생각했다.”

부원주는 더는 속일 수 없다고 생각한 듯 본인이 저질렀던 일과 생각을 사실대로 밝혔다.

“미안하다. 모두 내 잘못이다.”

그는 무릎을 꿇은 채로 실비아와 시녀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흐윽….”

“괜찮아.”

시녀들은 입술을 깨문 채 흐느꼈고, 실비아는 힘없는 손으로 시녀들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크흠….”

부원주는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그가 잘려 나간 손목을 들고, 대련장을 내려가려고 할 때 라온이 다시 그의 발목을 잡아서 끌고 왔다.

“뭐, 뭐냐!”

부원주가 왜 이러냐는 듯 눈을 부릅떴다.

“사실을 밝히고, 네 말대로 사과도 했잖느냐!”

“난 잘못을 밝히고, 용서를 받으라고 했는데?”

“그, 그게 뭐가 다른….”

“사과는 네가 하는 거지만, 용서는 저들이 하는 거다.”

라온이 손가락을 들어서 실비아와 시녀들을 가리켰다.

“아….”

부원주도 이제 무슨 말인지 알아들은 듯 떨리는 눈동자를 실비아에게 돌렸다.

그만이 아니다. 대연무장에 있는 모든 사람의 시선이 실비아에게 쏟아졌다.

“별관은….”

실비아는 라온, 부원주 그리고 단상 위에 서 있는 글렌과 차례로 눈을 마주치고서 입술을 깨물었다.

“당신의 사과를 받지 않겠습니다.”

그녀는 용서하지 않겠다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왜, 왜….”

“저만 괴롭혔다면 얼마든지 용서했을 겁니다. 제가 먼저 라온에게 조용히 넘어가자고 했겠죠. 하지만 당신들은 내 아이들까지 건드렸어요.”

실비아가 시녀들을 보며 눈썹을 깊게 내렸다.

“저 아이들이 라온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다는 마음을 이용해서 밥도 먹지 못하고, 잠도 잘 수 없게 괴롭혔어요. 제가 적당히 사과를 받고 끝낸다면 또 같은 일이 일어나겠죠.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저는 당신의 사과를 받지 않겠습니다.”

그녀는 오늘로 끝이 아닐 거라며 힘없는 손으로 주먹을 말아쥐었다.

“그렇다는군.”

라온이 실비아를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그렸다.

‘잘 선택하셨어요.’

본래의 실비아는 다툼을 싫어하기에 부원주의 사과를 받고 대충 마무리하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그녀는 껍질을 깨고 밖으로 나왔다. 별관과 시녀들을 지켜야 한다는 의지를 세웠기에 부원주의 사과를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육체만이 아니라, 마음도 강해졌다는 뜻이었다.

-역시 우리 엄마이니라!

‘그러게. 아니, 너희 엄마 아니라고!’

라온은 실비아에게 달려드는 라스를 쳐내고 부원주를 바라보았다.

“그리되었으니, 다른 소원을 말해야겠군.”

“그, 그건 또 무슨 소리냐!”

부원주는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건 아니잖아!”

그가 도와달라는 듯 사회자를 바라보았다.

“아뇨. 라온 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사회자가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

“라온 님은 분명 용서를 받으라고 하셨고. 실비아 님은 부원주님의 사과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즉, 아직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냉랭한 음성으로 손을 내렸다.

“으윽, 좋다. 다른 소원을 말해라.”

부원주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다른 소원을 말하라며 입술을 씹었다.

“별관과 정원의 재건축. 원로원의 돈이 아니라, 네놈의 재산으로 전부 처리하도록.”

“하아….”

부원주는 예상했던 소원이 나온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금액은….”

“금화 1만 개.”

“어…?

라온이 금화 1만 개라고 말하자, 부원주의 눈동자가 터질 것처럼 크게 부풀었다.

“무, 무슨 개소리야!”

부원주가 말도 안 된다는 듯 이를 드러냈다.

“그 자그마한 별관에 왜 본관 수준의 건설 비용이 들어간다는 말이냐! 헛소리 마라!”

“네가 망가뜨린 별관의 정원에 내가 해령화의 씨앗을 심어두었으니까.”

“거, 거짓말! 해령화는 전설의 영약이다! 고작 그런 정원에 씨앗을 심을 리가….”

“직접 보든가.”

입술을 떨며 주절거리는 부원주에게 남아 있는 해령화의 이파리를 보여주었다.

“허억!”

“무, 물로 만든 듯한 투명한 잎….”

“진짜다! 진짜 해령화야!”

관객들은 햇살을 담아내는 투명한 이파피를 보며 비명을 같은 소리를 질렀다.

“아….”

부원주도 실제로 해령화의 이파리를 보자 할 말을 잊은 듯 입술을 떨었다.

“거기다 내가 별관 뒤편에 작은 마탑을 건설하려고 드래곤 하트를 묻어놨는데, 그것도 부서졌지.”

“이, 이건 거짓말이다! 드래곤 하트라니! 그런 건 보지도 못했어!”

“아닌데?”

아리스가 의자에서 일어나며 고개를 저었다.

“카이바르의 몸에서 나온 드래곤 하트. 내가 라온에게 줬거든.”

“어윽….”

부원주의 눈동자가 파들파들 떨리기 시작했다.

‘제대로 걸렸군.’

라온이 경련을 일으키는 부원주를 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속지 않으려고 해도 속을 수밖에 없지.’

해령화의 이파리가 눈앞에 있고, 함께 광룡을 잡은 아리스가 드래곤 하트를 넘겨줬다고 하니, 부원주는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따질 수가 없을 것이다.

특히 실비아의 단전을 드래곤 하트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으니, 속는 게 당연했다.

“해령화의 씨앗에, 드래곤 하트면….”

“금화 만 개도 이상하지 않지….”

“아니, 오히려 모자라지 않으려나? 광룡의 드래곤 하트만 해도 그 가격을 쳐줄 곳이 있을 것 같은데.”

“해령화도 제대로 피기만 하면 그 정도 됐겠지.”

관객들은 금화 1만 개면 오히려 싼 가격일 것 같다며 고개를 저었다.

“흐윽….”

발데르가 눈매에 걸쳐 있는 눈물을 닦아냈다.

“너 갑자기 왜 우냐?”

아리스가 어이가 없다는 듯 눈을 끔벅였다. 단상에 있던 모두가 발데르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도 당했으니까….”

“당해?”

“저놈 때문에 진무전의 예산이…크흑!”

발데르는 말을 하다 말고, 눈시울을 붉힌 채 입술을 꾹 다물었다.

구겨진 미간을 보니, 굉장히 힘든 시간이었던 것 같았다.

뿌드득.

부원주의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었다. 그는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임에도 의심할 수 없는 증거 때문에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증인도, 증거도 있으니, 어쩔 수 없군요.”

사회자도 당황한 듯 찬찬히 숨을 내쉬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금화 1만 개면 대략 맞을 듯합니다.”

“자, 잠깐! 아무리 나라고 해도 금화 1만 개는 없다! 있을 리가 없지 않느냐!”

부원주는 본인만이 아니라, 원로원의 1년 예산을 합쳐도 금화 1만 개는 나오지 않는다며 턱을 떨었다.

“결국 못 주겠다는 거네?”

라온이 부원주를 보며 비웃듯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못 주는 게 아니라, 내 재산을 다 합쳐도 금화 5천 개도 되지 않는단 말이다!”

“그럼 전 재산을 압수하는 것으로 하고, 다음 소원으로 가지.”

“다, 다음 소원?”

부원주가 무슨 말이냐는 듯 고개를 떨었다.

“처음부터 말했을 텐데? 이 검투에서 이긴 승자에게 모든 것을 들어준다고. 즉, 소원 하나가 아니라, 두 개를 말해도 상관없다는 거지.”

“마, 말도 안 되는 소리!”

부원주가 절대 안 된다며 손을 저었다.

“으음….”

사회자도 이건 함부로 결정할 수 없다는 듯 단상을 올려다보았다.

글렌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서 손가락 하나를 들어 올렸다.

“가주님께서 인정하셨습니다. 다만 딱 하나의 소원만 더 말할 수 있다고 하십니다.”

사회자는 글렌의 뜻을 알아듣고서 똑같이 손가락 하나를 들어 올렸다.

“가, 가주!”

부원주가 단상을 올려보며 비명을 질렀지만, 글렌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공허한 눈동자로 대련장을 내려볼 뿐이었다.

“하나인가? 어쩔 수 없지. 그럼 하나만 더 말하겠습니다.”

라온이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킬루안. 지금부터 너와 네 밑에 있던 놈들의 소속을 원로원이 아니라, 별관의 하인으로 바꾸겠다.”

“…어?”

부원주가 라온을 올려다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 그런 말 같지도 않은 일이 이루어질 것 같으냐!”

그는 절대 안 된다며 맹렬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부, 부원주와 그의 무인들을 별관의 하인으로?”

“저게 돼? 정말 되는 소원이야?”

“근데 ‘뭐든’이라는 조건을 걸기는 했잖아.”

“그러네. 처음부터 소원이었지….”

“아무리 그래도 부원주가 하인이 되는 건 심하지 않아?”

“그건 소원을 말하는 사람이 결정할 일이지.”

관객들은 부원주가 하인이 되는 게 일어날 수 있는지를 논의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네가 말해봐라! 이게 말이 되냐고!”

“으음….”

사회자는 부원주의 윽박에 고개를 떨었다. 그는 이 또한 함부로 결정할 수 없는 듯 다시 단상 위를 올려다보았다.

“검투의 조건이 무엇이었지?”

글렌이 짧게 고개를 끄덕인 후 금빛 옥좌에 묻고 있던 등을 세웠다.

“승자가 원하는 어떤 소원이든 패자가 들어주는 내용이었습니다.”

사회자는 처음 라온과 부원주가 약속했던 것을 그대로 읊었다.

“원하는 소원….”

글렌은 소원이라는 단어를 되뇌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부원주가 죄가 있다고 해도 하인으로 강등시키는 건 불가능한 일이지. 허나….”

그의 붉은 눈동자가 고고한 위압을 담은 채 부원주에게 향했다.

“나는 이곳에 있는 것으로 두 사람의 검투 조건을 받아들였다. 승자가 원하는 모든 소원을 들어준다는 조건이라면 부원주의 지위를 박탈하고, 하인으로 만드는 것도 어쩔 수가 없겠지.”

“가, 가주!”

부원주가 각혈을 하면서 악을 질렀다.

“어찌 이러십니까! 아무리 가주라고 해도 원로원의 인사에는 관여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지금 이건 원로원의 인사를 결정하는 게 아니오.”

글렌이 부원주를 보며 차분히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인정한 검투의 결과를 말할 뿐이지. 안 그렇소? 원로원주?”

“맞는 말씀이십니다.”

글렌의 뒤편에서 아릿한 눈웃음을 흘리는 중년의 귀부인이 나타났다.

부채로 코와 입을 가리고 있는데, 우아함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두른 듯했다.

“스스로 결정한 검투의 조건이라면 원로원에서도 관여할 수 없지요.”

귀부인이 부채를 접자, 인자함과 요염함이 조화를 이룬 채 우아한 향을 펼쳤다.

“어?”

라온이 귀부인을 보며 입술을 떨었다.

‘저 사람이 원로원주라고…?’

글렌이 원로원주라 부른 중년의 여성은 예전 광풍단 시절부터 지금까지 제복을 만들어주고 있는 오화단의 단주 시란이었다.

그녀가 원로원 소속인 건 알고 있었지만, 원로원주가 된 건 전혀 몰랐다.

“제가 마실을 다녀오는 동안 많은 일이 있었나 보네요.”

“워, 원로원주….”

시란이 방긋 웃자, 부원주가 턱을 바르르 떨었다.

“이, 일 년은 걸릴 거라고 했는데, 왜 이리 빨리….”

“누군가가 이런저런 일을 잘 해결해준 덕분에 좀 빨리 오게 되었네요.”

그녀는 이쪽을 살짝 본 후 부채를 가볍게 부쳤다. 지금 보니, 부원주는 원주가 외부에 나선 틈을 노리고 별관을 건드렸던 것 같았다.

“제 이야기는 나중에 천천히 하기로 하고. 부원주.”

시란이 옅게 웃으며 손을 들었다.

“원로원의 힘을 이용한 것도 좋고, 부원주의 권한을 사용한 것도 좋아요. 다만….”

초승달을 그린 듯한 그녀의 눈매 사이로 섬뜩한 안광이 번뜩였다.

“하려면 제대로 하셨어야죠. 그 강대한 권력을 지니고도 무엇 하나 제대로 이룬 게 없군요.”

시란은 부원주의 패악보다, 본인이 하고자 했던 일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것을 타박하는 것 같았다.

“워, 원주! 제발!”

“부원주라고 부르는 것도 이게 마지막이겠네요.”

시란이 방긋 웃으며 손을 저었다.

“원로원은 오늘 검투의 결과를 인정하고, 승자 광풍대주의 조건을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뒤로 물러섰다.

“원주! 내게 이러고도….”

라온이 부원주에게 다가가서 손바닥으로 그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커헉!”

호두가 깨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부원주가 그대로 바닥에 얼굴을 찧었다. 그의 코에서 피가 줄줄이 흘러내렸다.

“하인 놈이 어딜 감히 원주님께.”

라온이 킬루안의 목덜미를 잡아서 일으킨 후 원로원주에게 강제로 인사를 시켰다.

“죄송합니다. 아직 교육이 덜 되어서.”

“괜찮아요.”

시란이 호호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끄으으윽….”

부원주는 괴상한 신음을 흘리며 입술을 질겅질겅 씹었다.

“이, 이게 뭐야?”

“나도 몰라….”

“머리가 상황을 따라가지를 못하겠어.”

“그건 광풍대주만 나오면 항상 그랬지….”

관객들은 갑작스럽게 달라진 상황에 적응을 못 하고 헛바람만 흘렸다.

“이예에에에에에!”

리메르가 두 팔을 번쩍 든 채 괴성을 질렀다.

“난 부자다! 이번에는 절대로 안 뺏….”

쿠와아아아앙!

그가 외침을 다 끝내기도 전에 벼락이 떨어져서 도박장 자체를 덮쳤다. 벼락이 어디서 떨어졌는지 알고 있기에 누구도 그쪽을 바라보지 않았다.

“후우….”

라온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서 부원주의 눈을 내려보았다.

“넌 누구지?”

“…….”

“다시 묻지. 넌 누구냐.”

“으윽….”

부원주가 손을 떨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벼, 별관의 하인….”

“하인?”

“…입니다.”

“그래.”

라온이 피식 웃으며 부원주의 복부에 손을 얹었다.

파지지지직!

만화공의 불꽃과 글래시아의 냉기, 그리고 분노까지 얹어서 그의 단전 자체를 봉쇄시켰다.

내가 허락하지 않는 이상 그는 절대 오러를 사용할 수 없을 것이다.

“커헉!”

부원주가 검은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덜덜 떠는 눈동자로 올려보는 그에게 손가락을 까딱였다.

“별관에 온 것을 환영한다.”

라온이 부원주를 굽어보며 섬뜩한 미소를 그렸다.

-별관이 아니라, 지옥이겠지….

라스는 저놈이 불쌍해 보일 줄은 몰랐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다음날.

라온은 킬루안과 부원주실의 무인들과 함께 별관 앞에 섰다.

그는 페드릭의 치료 덕분에 손목은 붙였지만, 단전 자체가 닫혔기에 여전히 창백한 표정이었다.

“보이지?”

“무슨 말… 씀이십니까?”

밤샘 교육 덕분에 킬루안은 존댓말과 나름의 존중을 보이고 있었다.

“너희가 망가뜨린 정원과 집 말이다.”

라온은 폭격을 맞은 듯 뒤집힌 정원과 외곽 부분이 아예 무너져 버린 별관을 가리켰다.

“저, 저희가 있을 때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요.”

턱에 붕대를 칭칭 감은 크리슨이 입술을 떨었다.

“그럼 내가 망가뜨렸다는 건가?”

“아, 아닙니다!”

라온이 차게 입맛을 다시자, 킬루안이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네가 망가뜨린 거 맞잖아!

라스가 빽 소리를 질렀다.

-밤에 직접 다 때려 부숴놓고 무슨!

‘시끄러워.’

라온은 정확한 사실을 말하는 라스를 쳐내고, 킬루안과 부원주실의 무인이었던 놈들에게 턱을 까딱였다.

“지금부터 저것들 다 고쳐.”

“어어….”

“저, 저희끼리요?”

“그럼 누가 해.”

라온이 미간을 구기자, 따지려던 킬루안과 무인들이 고개를 떨궜다.

“자재와 도구는 저 녀석이 줄 거야.”

손가락을 들어서 우측에 있는 도리안을 가리켰다.

“자자, 이쪽으로 오세요! 아니, 와!”

도리안이 배 주머니에서 삽과 곡괭이를 꺼내주며 으르렁거렸다.

“너희가 제대로 일하는지는 저쪽에서 봐줄 거다.”

이번에는 반대편에 있는 헬렌과 시녀들을 가리켰다.

“크윽….”

“으으….”

부원주실의 무인들은 본인들이 괴롭혔던 헬렌과 시녀들에게 감시당한다는 것에 당황한 듯 삽을 잡은 손을 떨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라온이 의자에 등을 기대다 못해 거의 누워있는 도괴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아, 걱정말고 가봐.”

도괴는 믿고 맡기라고 말하며 손을 휘휘 저었다.

“크으, 표정 한번 맛있네. 이 안주 계속 시키고 싶어.”

그는 킬루안의 일그러진 표정을 즐기며 술병을 이빨로 까서 그대로 들이켰다.

라온은 피식 웃고서 별관을 벗어났다. 다만 그대로 떠나지 않고, 나무 위에 올라서 킬루안과 무인들을 지켜보았다.

킬루안은 단전이 모두 잠겼고, 감시자들까지 있기에 시녀들의 지시에 따라 정원의 땅을 파기 시작했다.

표정은 죽고 싶을 만큼 일그러졌지만, 손은 부리나케 움직이고 있었다.

라온은 삽질을 하는 킬루안과 무인들을 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꼴이 좋네.’

본인들이 했던 방식 그대로 당하는 모습을 보자, 이제 속이 좀 풀렸다.

-이제 속이 풀린다고? 네놈의 지랄 맞은 성격은 본왕도 감당이 안 되느니라!

라스는 마왕도 질려 버릴 성격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 정도는 아니…’

아니라고 하며 고개를 저을 때였다. 어디선가 온 고양이가 삽질하는 킬루안에게 다가갔다.

“저리 가라!”

킬루안은 삽질에 방해가 된다며 손을 저었지만, 고양이는 꼬리를 길게 들어 올린 채 애교를 부리듯 그에게 달라붙었다.

“으음….”

킬루안은 어제부터 계속 사람에게 시달렸기 때문인지 애교를 부리는 고양이를 보며 짧게 입맛을 다셨다.

그가 삽질을 멈추고 허리를 숙일 때 고양이가 폴짝 뛰어올라 날카롭게 세운 발톱으로 그의 얼굴을 마구잡이로 할퀴고, 간신히 붙은 손목을 물어뜯었다.

“끄아아아악!”

킬루안이 발악을 하듯 손을 휘저었지만, 오러가 막혔고 부상을 입었기에 고양이는 그의 공격을 여유롭게 흘려낸 뒤 훌쩍 물러섰다.

“이런 망할 고양이가!”

“어허!”

킬루안이 고양이를 잡으려고 할 때 헬렌이 다가가서 길을 막았다.

“헛짓하지 말고 이쪽으로 와요!”

헬렌은 킬루안의 상처를 빠르게 돌봐준 후 다시 일을 시켰다. 착한 건지 나쁜 건지는 모르겠다.

“끄으윽….”

킬루안은 이를 바득바득 갈다가 다시 정원으로 들어가서 삽질을 시작했다.

다만 물어뜯긴 통증이 심한지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이건 또 무슨 일이래?”

라온은 기이한 상황을 보며 헛바람을 흘렸다.

‘저거 고양이가 아니라, 삵인가?’

-삵?

‘고양이랑 비슷하게 생겼는데. 훨씬 사납고 강한 동물이 따로 있어.’

-그 삵인지 칡인지 지금 이쪽으로 오는 것 같은데?

‘에이, 아니겠지.’

고개를 젓고 있는데, 라스의 말대로 정말 삵이 이쪽으로 오는 것 같았다.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숨을 죽인 채 가만히 있었다.

‘사라졌네… 음?’

반대편 수풀 사이로 들어가서 아예 사라졌다고 생각하는데, 갑자기 아래쪽에서 삵의 기척이 느껴졌다.

“나 잘했지!”

날카롭게 세운 발톱을 막으려고 손을 들었는데, 삵은 나무 위로 폴짝 뛰어오르며 방긋 웃었다.

-끄에엑!

“허억!”

그랜드 마스터와 마왕이 나무에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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