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652화 (651/653)
  • 제652화

    라온은 부원주와 마주 선 실비아를 보며 잔잔한 미소를 그렸다.

    ‘상태는 좋아.’

    전력을 다했다고 해도 크리슨을 손쉽게 제압했기에 실비아의 오러와 체력 소모는 크지 않았다.

    반면 부원주는 수많은 관객 앞에서 조롱을 당하여 극도로 흥분한 상태였다. 실비아가 부원주를 상대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상황이 만들어졌다.

    “실비아가 크리슨을 가볍게 꺾은 건 놀랍지만, 이번 경기는 사실 볼 필요가 없네.”

    “그렇지. 마스터와 그랜드 마스터의 싸움이니까.”

    “솔직히 체력이나, 오러를 소모 시키는 것도 쉽지 않을걸?”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크리슨을 저렇게 압도한 것을 보면 가능성은 충분해!”

    “가능성은 개뿔이. 말 같지도 않은 소리 말라고.”

    “돈 걸어놓으니까. 별 행복 회로가 다 굴러가지?”

    관객들 대부분은 검투 자체의 결과는 몰라도 실비아와 부원주의 결투는 이미 끝난 것처럼 여기고 있었다.

    -야.

    라스가 관객들을 노려보다가 라온에게 시선을 돌렸다.

    -네놈은 엄마가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내 대답은 전과 같아.’

    라온이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

    ‘1,000번을 싸우면 999번을 져. 오늘이 유일하게 이길 수 있는 한 번이 아니라면 무조건 지겠지.’

    실비아에게 부원주의 검술을 알려주었고, 그 검술을 깰 수 있는 무학도 전해주었다.

    하지만 상대는 실비아보다 한참 위에 있는 그랜드 마스터다.

    드래곤 하트로 만든 단전이 있고, 그의 모든 무학을 파악했다고 해도 이기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본왕은 천 번을 싸우면 천 번을 진다고 생각하느니라.

    라스가 실비아의 등을 보며 짧게 혀를 찼다.

    -허나 어떻게 지느냐도 중요하다고 했었지?

    ‘그래.’

    -그렇다면 조용히 지켜보겠느니라. 엄마가 어떻게 지는지. 네놈이 바라는 게 무엇인지를.

    녀석은 그리 말하며 어깨에 내려앉았다.

    ‘알겠는데. 너희 엄마 아니라고.’

    라온은 피식 웃으며 대련장으로 한발 다가갔다.

    “엄마.”

    아침에 이어 엄마라고 부르며 손을 흔들었다.

    “라온?”

    실비아가 뒤를 돌아본다. 눈동자가 석고처럼 굳어있다. 상대가 상대다 보니 심하게 긴장한 것 같았다.

    “지금까지 해오신 훈련을 생각해보세요.”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조언을 해주었다.

    “그래. 그렇지.”

    실비아가 입술을 꾹 씹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 지옥 같았던 시간을 다시 겪을 수는 없어.”

    실비아의 굳어진 눈빛이 부드럽게 풀리다가 광기로 채워졌다.

    “어….”

    라온이 떨떠름한 눈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실비아의 긴장이 풀리기를 바랐지만, 저런 방식을 바란 건 아니었다.

    “다녀올게.”

    실비아는 고맙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서 대련장의 중심으로 향했다.

    ‘승리를 원하는 눈빛도, 패배를 걱정하는 눈빛도 아니야.’

    그녀는 이곳에 있는 누구보다도 본인이 이기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패배를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저 보여주겠다는 의지만이 가득했다.

    “두 분 준비되셨습니까?”

    사회자는 본인이 가장 긴장한 듯 숨을 깊게 몰아쉰 후 실비아와 부원주에게 다가갔다.

    “네. 됐어요.”

    실비아가 평온한 어조로 대답하며 검병을 말아쥐었다.

    “됐다.”

    부원주는 조금 전에 실비아에게 당했던 모욕을 계속 떠올리고 있었는지 얼굴을 뻘겋게 물들인 채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시작하라는 듯 이까지 갈았다.

    사회자는 두 사람이 준비됐다는 소리를 듣고, 가장 높은 단상을 올려다보았다. 글렌 또한 시작하라는 듯 눈을 내리감았다.

    “그럼….”

    사회자가 실비아와 부원주 사이로 다가가 손을 올렸다.

    “두 번째 결투를 시작하겠습니다!”

    그가 들어 올린 손을 내리고 물러서자마자, 부원주가 움직였다.

    그는 최대한 빨리 실비아를 처리하려는 듯 사납게 돌진해왔다.

    치이이이잉!

    극한의 속도가 깃든 부원주의 발검술이 실비아의 쇄골을 노리고 뻗어나갔다.

    실비아는 그 움직임을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차분한 눈빛으로 왼쪽 발목을 돌렸다.

    찰랑이는 호수의 물결처럼 몸을 회전시켜 부원주의 검격을 완벽하게 피해냈다.

    “쯧.”

    부원주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혀를 차고서 직선으로 뻗어나가던 검의 궤도를 급격히 꺾었다. 그의 검이 하얗게 번쩍이며 실비아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투웅!

    실비아가 오른발만으로 보법을 밟았다. 그녀의 육체가 빙판에 미끄러지듯 우측으로 흘러갔다.

    쿠와아아앙!

    부원주의 기습은 실비아가 아닌, 바닥을 으깨버린 후 멈춰 섰다.

    “후우….”

    실비아는 조금 거칠어진 숨을 내쉬며 검을 중단에 세웠다.

    “움직임은 제법이구나.”

    부원주가 미간을 찌푸리며 대련장에 박힌 검을 뽑았다.

    그는 눈빛에 서늘함을 담은 채 실비아를 향해 뛰어들었다. 빠르면서도 현묘한 보법이 함께였다. 옆에 있음에도 잔상이 보일 정도였다.

    “흐읍!”

    실비아가 숨을 들이켜며 좌측으로 물러섰다. 그녀는 광속으로 쏘아진 듯한 부원주의 검격을 흘려내고, 반시계 방향으로 움직였다.

    대련장을 넓게 쓰며 상대의 공세를 회피할 길을 만들었다.

    “큭!”

    부원주는 도망치기만 하는 실비아에게 짜증이 난 듯 하얀 이를 드러냈다.

    “미꾸라지 같은!”

    그의 검이 선명한 빛을 뿜어내며 세 자루의 광검을 뽑아냈다. 십종검결의 발현이다. 찬란히 빛나는 세 자루의 검이 실비아의 좌측과 우측을 압박해왔다.

    실비아는 세 자루로 변해버린 부원주의 검을 보며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반 호흡을 벌어서 하단에 기울여둔 검에 도도한 강물의 흐름을 담았다.

    피이이익!

    파도처럼 솟구친 칼날이 광검을 비틀고, 부원주의 어깨를 베었다. 오러의 막을 두르고 있었기에 깊은 상처가 나지는 않았지만, 그의 어깨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후우….”

    실비아는 부원주에게 상처를 입혔음에도 조금도 기뻐하지 않고 자세를 낮춘 채 다음 수를 준비했다.

    “허….”

    부원주는 핏물이 고인 어깨를 보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그의 안구가 시뻘겋게 물들기 시작했다.

    -이제 시작이로구나.

    ‘아니.’

    라온은 실비아의 검극에서 뚝 떨어진 핏물을 보며 입술을 씹었다.

    ‘아직 시작도 안 했어.’

    ***

    부원주 킬루안은 십종검결을 펼치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이건 뭐야.’

    실비아를 최대한 빨리 처리하고 라온과 승부를 보려 했는데, 저 망할 계집은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회피에 능했다.

    아무리 마스터 최상급이라고 해도 베일 수밖에 없는 검격을 펼쳤는데, 그녀는 내 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모든 공세를 흘려냈다.

    ‘힘을 숨기고 있는 건가?’

    아니, 그건 절대로 아니야.

    실비아의 안색은 창백했고,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여유라고는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부원주는 이미 아물어버린 어깨의 상처를 보며 입매를 비틀었다.

    ‘그래. 내가 방심했을 뿐이야.’

    라온에게 집중하기 위해서 실비아를 무시했던 게 사실이다. 지금부터라도 제대로 싸운다면 10합 안에 이길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강환을 써서는 안 돼.’

    강환이나, 십종검결의 후반 초식은 필살의 위력을 지니지만, 오러 소모가 심하다.

    라온 지그하르트와의 결투가 바로 뒤에 이어지기에 힘은 최대한 아껴야 했다.

    ‘초식 차이로 끝을 내주마.’

    십종검결의 초식은 총 서른여섯 개. 지금까지는 초반 열두 초식만 꺼냈지만, 빠르게 끝을 보기 위해서 중반 열두 초식을 펼치기로 결정했다.

    치이이이잉!

    킬루안의 눈매가 고요하게 가라앉으며 그의 검이 다섯 개의 빛으로 검으로 화하여 뻗어나갔다.

    치이이잉!

    비호처럼 날아든 빛의 칼날이 실비아의 양팔과 다리를 동시에 노렸다. 물러난다면 더욱 빨라지는 십종검결의 은사출람이었다.

    지금까지 보여준 실비아의 움직임이라면 분명 뒤로 물러설 테니, 그녀에게는 최악의 초식이 될 것이다.

    터엉!

    하지만 실비아는 입술을 꼭 깨문 채 물러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앞으로 돌진해왔다.

    ‘어….’

    킬루안이 다가오는 실비아를 보며 눈을 부릅떴다.

    ‘이 무슨!’

    당황하여 물러서는 게 아니라, 검을 향해 달려들다니, 예상을 벗어난 움직임이었다.

    실비아는 단 한 번의 움직임으로 은사출람을 무력화시킨 후 푸른 빛을 일으켰다.

    피아아아앙!

    그녀의 검극에 어린 찬란한 오러가 킬루안의 허리를 향해 쇄도해왔다.

    ‘이런!’

    킬루안이 이를 바득 갈았다. 방어 자체를 생각하지 않았기에 검으로 막기에는 늦었다. 강기를 운용하여 허리 옆에 오러의 벽을 세웠다.

    촤아아악!

    실비아의 검이 오러의 벽을 가르고 허리를 베고 지나갔다. 상처가 벌어지고, 붉은 피가 튀었다. 피는 금세 멎었지만 아려오는 통증이 짜증을 불러왔다.

    “허억!”

    실비아는 온몸으로 숨을 쉬듯이 어깨를 헐떡였다. 그녀의 얼굴 전체에서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속이 더 뒤집혔다.

    “감히!”

    킬루안이 피나도록 입술을 씹으며 보법을 밟았다. 그의 육체가 빛이 된 것처럼 나아가 실비아의 앞에 현현했다.

    파아아아앙!

    다섯 자루의 빛의 검이 피할 시간 자체를 주지 않겠다는 듯 매섭게 번뜩였다. 십종검결의 초식 중에서 극쾌를 담은 무령취선이었다.

    실비아는 달려들지도, 물러나지도 않았다. 왼발을 앞으로 내디딘 채 허리를 뒤로 젖혔다.

    무령취선의 다섯 칼날은 실비아의 코끝을 종이 한 장 차이로 베지 못하고 지나갔다. 검풍 때문에 잘린 금빛 머리카락이 아련히 흩날렸다.

    “좋다! 어디까지 피하나 보자!”

    킬루안이 이마에 핏줄을 세운 채 십종검결의 열다섯 번째 초식 화련선풍을 펼쳐냈다. 여섯 개의 칼날이 바람개비처럼 모인 채 실비아에게 짓쳐 들었다.

    치이이이잉!

    한 몸처럼 회전하던 칼날은 실비아에게 닿기 직전 분열하여 그녀의 팔과 다리, 목을 노렸다.

    캬아아아앙!

    실비아는 이번에도 놀라지 않았다. 입매를 꾹 다문 채 두 손에 든 검으로 원을 그렸다. 물결치는 오러의 파도가 화련선풍의 칼날을 모조리 잠재웠다.

    “허….”

    킬루안은 가라앉는 화련선풍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우연이다.’

    저런 겁쟁이가 십종검결을 부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이를 바드득 갈면서 중반 십이 초식 중 가장 강한 현철곤옥을 펼쳐냈다. 허공을 자욱하게 채운 광검의 궤적이 실비아의 양쪽 어깨 위로 쏘아졌다.

    치이이잉!

    실비아가 가늘게 비튼 검을 비상하는 매처럼 일으켰다. 벼락을 땅으로 가라앉히는 피뢰침처럼 킬루안의 검격이 그녀의 검날을 타고 땅을 후려쳤다.

    쿠와아아아앙!

    위력은 조금도 죽지 않았기에 현철곤옥이 쏟아진 대련장의 중심이 아예 박살이 나버렸다.

    “으윽….”

    실비아가 내상을 입은 듯 가슴을 매만지며 신음을 토했다. 다만 계속 싸우겠다는 듯 검을 다잡은 채 진중한 시선을 보였다.

    ‘한 끗 차이.’

    킬루안은 곧게 가라앉은 실비아의 눈동자를 보며 주먹을 말아쥐었다.

    ‘아까부터 계속 한 끗 차이야.’

    몇 번은 우연이라고 할 수 있지만, 중반 십이 초식까지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해내는 것을 보면 절대 우연이 아니다.

    ‘내 검술을. 십종검결을 알고 있는 거야.’

    그게 아니고서는 지금까지 이루어진 경합 자체가 불가능했다.

    ‘설마….’

    킬루안이 실비아의 뒤에 있는 라온을 보았다. 그는 여유롭게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가주에게 부탁한 무학서가 십종검결이었나?’

    이제야 알겠다. 라온은 소원권으로 다른 무학이 아닌, 내 십종검결을 원했던 것이다.

    ‘미친놈이다. 아예 정신이 나간 놈이야!’

    십종검결은 분명 나쁜 무학이 아니지만, 초월에 닿을 수 있는 최상승의 무학도 아니다.

    훨씬 뛰어나고 본인에게 맞는 무학을 얻을 수 있음에도 십종검결을 받아서 이런 일을 벌였다는 게 믿기질 않았다.

    킬루안은 ‘이제 알았어?’라고 말하는 듯한 라온의 눈을 마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처음부터 놈들의 함정에 빠졌군.’

    흥분하게 만든 것, 뒤에 이어질 전투 때문에 힘을 아끼도록 한 것 모두 라온 지그하르트와 실비아의 계략이었다.

    ‘망신은 당했지만, 아직 늦지는 않았어.’

    숨을 고르며 흥분한 마음을 가라앉혔다.

    ‘확실하게 끝을 내주지.’

    이 이상 힘을 아끼려고 하다가는 오히려 더 힘을 쓰게 될 것 같았다.

    후반 12초식만이 아니라, 검환을 사용해서라도 최대한 빨리 실비아를 끌어내려야 했다.

    “꽤나 머리를 썼구나. 하지만….”

    킬루안의 섬뜩한 안광이 실비아를 담았다.

    “네게 주어진 기회는 끝났다.”

    그의 검날에서 강기가 나선으로 응집되다가 강대한 빛의 폭발을 일으켰다.

    ***

    ‘강환….’

    실비아는 부원주의 검에서 타오르는 거대한 강환을 보며 입술을 씹었다.

    ‘지금부터가 진짜라는 건가.’

    부원주는 다음에 상대할 라온 때문에 지금까지 힘을 아꼈다.

    하지만 내가 십종검결을 파악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빠르게 끝을 내기로 결심한 것 같았다.

    쿠구구구.

    본래 강기로 이루어졌던 빛의 검이 강환이 되어 타오르고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 숨이 쉬어지지 않는 것처럼 심장이 꽉 조여들었다.

    솔직히 지금까지 싸운 것만으로 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내상도 입어서 복부와 가슴에 심한 통증도 일었다.

    하지만 아직은 쓰러질 때가 아니다. 내 눈으로 이 싸움의 끝을 보지 않을 테니까.

    촤아아아악!

    부원주가 경호성 하나 없이 달려든다. 그의 검날이 전보다 배는 빠르게 짓쳐 들었다.

    ‘휘아마결!’

    십종검결의 휘아마결은 상대의 허리와 하체를 동시에 노리는 초식으로 어마어마한 속도와, 정확히 어디를 노리는지 파악할 수 없게 만드는 환상과 변화까지 담고 있었다.

    실비아는 맹렬하게 파고들어 오는 부원주의 검을 보며 검을 쥔 손을 떨었다.

    ‘집중해.’

    한순간의 판단 착오로 승패가 갈릴 수도 있다. 끝까지 집중해서 그가 노리는 곳을 찾아야 했다.

    치이이이잉!

    코앞까지 다가온 부원주의 칼날이 뇌운을 그리듯 날카롭게 떨어진다. 그가 보고 있는 곳은 우측 허리였다.

    터어엉!

    실비아가 왼발 진각을 밟았다. 왼쪽 발목을 축으로 우측 상반신을 뒤로 젖혔다.

    치이이이잉!

    부원주의 검격이 허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살점이 떨어져 나간 듯 지독한 통증이 찾아왔지만 무시했다.

    뒤로 빠져 있던 오른발을 앞으로 내밀며 나아가 부원주의 허벅지를 향해 검을 찔러넣었다.

    피이이익!

    부원주도 강환에 집중을 하고 있었기 때문인지 이전보다 오러의 막이 약했다. 어깨나 허리의 상처보다 조금 더 칼날이 들어갔다.

    하지만 이쪽의 상처가 훨씬 컸다. 내상도 더 심해져서 전신이 타오르는 듯한 고통이 일었다.

    하지만 몸을 추스를 여유는 없었다. 부원주가 이번에 끝을 내겠다는 듯 상처를 무시하고 돌진해왔다.

    강환으로 이루어진 그의 칼날이 여덟 개로 늘어났다. 후반 12초식을 사용한다는 뜻이었다.

    화아아아아!

    하얀빛을 머금은 강환이 무희의 손끝처럼 우아한 투로로 내려섰다. 저걸 그대로 막았다가는 몸이 으깨질 것이다.

    라온에게 배웠던 유랑보법을 운용했다. 다섯 개의 강환은 몸을 비틀어서 피해내고 머리와 가슴으로 파고든 강환은 강기를 응집시켜 흘려냈다.

    쿠우우우웅!

    강환과 정면에서 부딪치지 않고, 흘리기만 하는데도 손목이 꺾이고 구역질이 나온다. 억지로 가라앉혔던 내상이 심해졌다.

    ‘아직….’

    실비아는 고통이 뇌리를 잠식하고 있음에도 물러서지 않았다.

    ‘아직이야.’

    살기와 악의로 가득한 강환의 파도를 밀고 나가 반격을 가했다. 찰나의 틈을 꿰뚫은 칼날이 부원주의 팔뚝을 갈랐다.

    “커헉….”

    공격을 한 건 실비아였지만, 피를 토하는 것도 그녀였다. 검게 죽은 피가 그녀의 입가를 적셨다.

    “어디 끝까지 발악해봐라!”

    부원주의 검이 찬연한 빛이 되어 번뜩였다. 의념이 실린 여덟 개의 칼날이 실비아의 사위를 휘감았다.

    실비아가 혀를 씹었다. 극한의 상황에도 침착함을 잃지 않은 채 피할 수 있는 강환과 쳐내야 하는 강환을 구분했다.

    투웅!

    눈 한 번 깜빡하기 어려운 시간에 계산을 마치고 유랑보법을 밟으며 우측과 전방으로 검막을 그렸다.

    파아아아악!

    하지만 시간이 너무 촉박하고, 힘에서 밀렸기에 쇄골과 허벅지를 베였다.

    강환에 당했기에 오러의 막을 둘렀음에도 살이 한 움큼씩 파여나갔다. 오러로도 막기 힘든 핏물이 뿜어져 머리와 옷을 적셨다.

    “발악도 끝이로군.”

    부원주가 다 끝났다는 듯 입매를 비틀며 사선으로 검을 그어 내렸다.

    십종검결의 절기 참예중선. 날카롭게 떨어지는 칼날을 따라 대련장을 가득 채우는 듯한 부채꼴 형태의 강환이 뻗어나갔다.

    “후욱….”

    실비아는 지혈을 포기했다. 지혈하던 오러까지 끌고 와 검날 위에 담았다.

    ‘참예중선은 범위가 넓기에 틈이 있어.’

    극한으로 집중했기 때문일까.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 마지막까지 회수하지 않았던 기감이 참예중선의 빈틈을 찾아냈다.

    “으아아아아!”

    실비아가 악과 같은 기합을 지르며 기감으로 파악한 빈틈을 향해 강기를 내리찍었다. 푸른 광채가 장대한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콰드드드득!

    참예중선의 우측 날개가 얇은 유리창처럼 깨져나간다.

    쿠웅!

    실비아는 그 틈으로 몸을 빼낸 후 부원주의 우측으로 들어가 검을 내질렀다.

    검극에서 번뜩이는 청광이 부원주의 오러의 막을 뚫고 그의 복부를 갈랐다. 작은 구멍이 뚫리고 그의 배에서 핏물이 흘러내렸다.

    “크아아아아!”

    부원주가 괴성을 지르며 검을 휘저었다. 강환이 폭격처럼 떨어져 내렸다.

    “허억….”

    실비아가 몸을 던졌지만, 강환의 폭격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그녀의 허리와 종아리가 거칠게 뜯겨나갔다.

    “네년, 어디까지!”

    부원주는 질린 듯한 표정으로 실비아를 바라보았다.

    “하아….”

    실비아는 일그러진 부원주의 표정을 보며 옅게 웃었다. 시야가 흐릿했음에도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훤했다.

    ‘이제 좀 속이 시원하네.’

    별관에서 시녀들을 괴롭힐 때부터 저런 표정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라온이 아니라, 내가 저 표정을 만들었다는 것이 기뻤다.

    라온의 가르침과 드래곤 하트로 이루어진 단전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 순간 아들이 너무도 고마웠다.

    “절 쉽게 봐줘서 고마워요.”

    실비아는 지독해진 내상 때문에 울대를 타고 올라온 핏물을 다시 삼키며 웃었다.

    뒤로 묶은 머리는 풀어 헤쳐졌고, 빨간 물감을 부은 듯 전신이 피에 젖었다.

    그럼에도 검을 든 손은 아래로 내리지 않았다. 손아귀가 뜯겨나갈지라도 끝까지 검을 세웠다.

    “닥쳐. 닥치라고!”

    부원주가 포효를 터트리며 돌진해온다. 성난 황소와도 같은 모습. 이제 그의 검에도 여유 따위는 없었다. 전력을 다해 이긴다는 의념만이 가득 차 있었다.

    피아아악!

    방어를 했음에도 어깨 위로 핏물이 튀어 올랐다. 부원주의 칼날이 깊게 스치고 지나갔다.

    ‘달라졌어….’

    부원주가 전력을 다하자 다 알고 있는 십종검결의 초식이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로 빠르고 난해해졌다.

    실비아는 머리 위로 떨어지는 강환을 머리카락 한 올 차이로 피하며 입술을 씹었다. 정말 극한이다. 한순간의 판단 착오가 패배가 아닌 죽음으로 이어질 것 같았다.

    피이익!

    복부를 베였다. 그대로 쓰러지고 싶을 정도로 아팠지만, 입술을 씹으며 부원주의 허리를 갈랐다.

    허벅지의 살점이 떨어져 나가며 기절할 정도로 많은 피가 흘러내렸다. 등골 사이로 오싹한 소름이 돋았지만, 혀를 씹으며 부원주의 발목을 갈랐다.

    살을 베고, 뼈를 잃는 손해가 계속 이어졌다.

    오러에 여유가 있는 부원주는 피륙의 상처만 돋았지만, 나는 검을 맞을 때마다 생명 자체가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고통스럽다. 지독하고 지독한 고통이다.

    하지만 견딜 수 있다. 육체의 고통은 정신적인 통증을 이길 수 없으니까.

    가족을 지키지 못한 고통, 내 아이들이라 생각한 시녀들을 지키지 못한 아픔에 비하면 지금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실비아는 핏물을 뒤집어쓴 채로 웃었다. 혈귀의 외양 속에서 자애로운 미소가 피어났다. 아름다우면서도 섬뜩한 자태였다.

    “이, 이 미친년이!”

    부원주가 이빨을 떨며 뒤로 물러섰다.

    “네. 네놈 뭐 하는 것이냐! 저 꼴을 보고도 말리지 않을 것이냐!”

    그가 라온에게 실비아를 말리라며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라온은 팔짱을 낀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실비아를 믿는다는 듯 눈빛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대련장을 응시했다.

    “크으! 좋다! 아예 끝을 내주마!”

    부원주는 식은땀을 흘리며 십종검결의 절기 풍마괴참을 펼쳐냈다. 열 개의 광검이 천공을 휘돌며 거대한 칼날의 폭풍을 일으켰다.

    강환의 폭풍은 그대로 실비아를 집어삼키겠다는 듯 대련장 전체로 번지며 빛의 조각들을 뻗어냈다.

    실비아는 몸을 옥죄이는 듯한 빛의 폭풍을 마주하며 입술을 씹었다.

    ‘풍마괴참.’

    풍마괴참은 라온이 가장 주의 깊게 알려주었던 십종검결의 절기다.

    상대를 몰아붙인 후 한순간에 숨통을 끊어버리는 필살의 무학. 막기 위해서는 오러가 모여드는 찰나의 순간을 노려야 했다.

    죽음을 기다리는 것처럼 눈을 내리감고, 감각을 세웠다. 고통 때문에 극한으로 다듬어진 기감이 풍마괴참의 흐름을 모조리 읽어냈다.

    쿠우우우우우웅!

    천공과 대지를 휘젓던 빛의 칼날이 실비아의 머리 위에서 압축된다.

    그 순간 실비아가 검을 세웠다. 흐릿했던 눈동자가 붉은 빛으로 번뜩였다.

    그녀의 칼날을 타고 올라간 푸른 광휘가 우아한 춤사위를 펼쳤다. 푸른 칼날이 빛의 칼날 사이를 파고들며 풍마괴참의 중심을 꿰뚫었다.

    쿠와아아아아아앙!

    검격이 제 모습을 갖추기 전에 폭발하며 대연무장 전체로 퍼지는 거대한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아….”

    부원주는 초식을 이루는 중에 충격을 받아 움직이지 못했다.

    “흐으윽….”

    실비아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나아갔다. 걸음마다 핏물이 바닥을 적셨다.

    경련이 이는 팔로 검을 들어 그대로 부원주의 머리를 내리쳤다.

    하지만 손에서 힘이 다했다. 칼날은 부원주의 머리를 가르지 못하고, 가볍게 두드리기만 한 채 떨어졌다.

    캬아아앙!

    실비아의 검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녀는 한계라는 것을 느낀 듯 부원주를 보며 미소를 그렸다.

    “…제가 진 겁니다. 휘광류는 지지 않았어요.”

    그녀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뒤로 넘어갔다. 다만 그녀의 등이 땅에 닿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어느새 나타난 라온이 실비아의 등을 받치고 있었다.

    “너, 너희는 대체….”

    라온은 부원주를 바라보지 않았다. 핏물로 범벅이 된 실비아의 얼굴을 손으로 닦아준 후 그녀를 데리고 대련장을 내려왔다.

    그의 손길은 너무도 고귀했기에 대련장에 있는 수많은 사람 중 그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시간이 멈춘 듯했다.

    “수고하셨습니다.”

    라온은 본인이 말했던 대로 스스로의 발로 걸어 내려오지 않은 실비아를 보며 작게 웃었다.

    승자와 패자는 갈렸다. 다만 승자의 얼굴은 일그러졌고, 패자는 한껏 웃고 있었다. 승패가 바뀐 것 같았다.

    “휘, 휘광류가 무엇이냐.”

    부원주는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한 줄의 핏물을 닦으며 뼈를 씹듯이 외쳤다.

    “별관의 무학이자….”

    라온은 실비아의 머리를 쓸어 올려주며 답했다. 뒤를 돌아보는 그의 눈동자 위로 붉은 뇌광이 번졌다.

    “너를 쓰러뜨릴 무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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