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51화
라온이 흑룡포를 어깨에 걸치고 별관을 나섰다.
실비아 홀로 정원 앞에 서 있는 게 보였다. 그녀는 차분한 기색으로 죽어버린 꽃과 나무를 바라보고 있었다.
“엄마가 말했었니? 정원을 키우는 게 낙이었다고.”
실비아는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말을 걸어왔다.
“말씀하셨어요.”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실비아는 정원을 직접 가꾸고, 관리했다. 그녀에게 있어서는 정원은 취미이자, 삶을 이어갈 수 있는 원동력 중 하나였다.
“정원은 내게 있어서 보물이었어. 정말 열과 성을 다해서 키웠으니까.”
실비아가 바싹 말라서 색이 변해버린 꽃잎 하나를 주웠다.
“다만 우리 아이들만큼은 아니야.”
그녀가 말하는 아이들은 당연하게도 별관의 시녀들이었다.
“아이들이 고생하는 모습을 보니, 정원이나 별관이 망가지는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어. 아이들을 지키고 싶었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지.”
실비아의 손에 들려 있던 꽃잎이 잘게 바스러졌다.
“마음 같아서는 부원주의 대가리를 깨고 싶었지만, 참을 수밖에 없다는 게. 그리고 싸워서 이길 수 없다는 게 너무 서글펐어.”
그녀는 별관 전체가 부원주의 손에 억눌려 있을 때가 생각난 듯 입술을 깨물었다.
-대, 대가리라니! 머리통도 아니고 대가리라니!
라스가 실비아를 보며 턱을 파르르 떨었다.
-이 천족 같은 놈아! 너 때문에 엄마의 말투가 험악해지지 않았느냐!
녀석은 실비아의 고급스럽고, 부드러운 어투가 양아치처럼 변했다며 비명을 질렀다.
다만 저 천족 같은 놈을 욕으로 받아야 할지 칭찬으로 받아야 할지는 잘 모르겠다.
“내게 그 울분을 풀 수 있는 기회를 줘서 고마워.”
실비아가 꽃잎을 쥐고 있던 손으로 주먹을 쥐며 뒤를 돌아보았다. 영롱하게 빛나는 붉은 눈동자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쩝….
라스도 실비아의 마음을 느낀 듯 콧잔등을 찌푸린 채 입맛을 다셨다.
“이길 자신은 있으세요?”
라온이 실비아의 붉은 눈동자를 마주하며 물었다.
“이기기는 힘들겠지. 다만 그냥은 지지 않아.”
실비아는 담담한 어조 속에 복수의 의지를 담았다.
“내가 내 발로 대련장에서 내려오는 일은 없을 거야.”
그녀는 쓰러질 때까지 싸우겠다며 검병을 말아쥐었다. 3주 동안 밤낮없이 수련시킨 보람이 있는 기세였다.
“그리고….”
실비아가 굳은 다짐을 하듯 입술을 씹었다.
“오늘 이기든 지든 훈련은 끝난 거지?”
“예? 뭐, 그렇죠.”
“으아아아아아아!”
그녀가 갑자기 하늘을 올려보며 괴성을 질렀다.
“드디어 끝났어! 지옥이 끝났다고!”
“어, 엄마?”
당황스러워서 어머니 대신 오랜만에 엄마 소리가 나왔다.
“너무 힘들었어. 오죽했으면 네가 미워질 정도였다고!”
실비아는 정말 죽을 뻔했다며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어….”
라온은 울부짖는 실비아를 보며 눈을 끔벅였다.
‘이런 분위기가 아니지 않나?’
이제 서로 힘내자고 하면서 대연무장으로 가야 하는데, 갑자기 네가 미워질 정도였다는 말이 나오니, 당황스러웠다.
-뭐가 당황스럽느냐! 당연한 거지!
라스가 실비아의 머리를 매만지며 이를 갈았다.
-남의 부모는 욕하고, 제 부모는 칼로 찌르는 놈을 누가 좋아한단 말이냐!
‘누가 들으면 진짜인 줄 알겠네.’
-그럼 안 했느냐?
‘아니, 하기는 했는데….’
부원주는 먼저 실비아를 건드렸고, 실비아를 벤 건 수련 때문이다.
다만 둘 다 사실이기는 해서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에헤헤헤헤!
라스가 실비아의 어깨에 내려앉은 채 비웃음을 흘렸다.
-네놈의 혓바닥도 굳어버릴 때가 있는 모양이군! 본왕의 승리이니라!
녀석은 꼬리를 살랑거리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윽….’
라온이 흐느적거리는 라스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저 녀석에게 말로 진다는 게 분했지만, 다시 생각해도 할 말이 없었다.
“…그만 가요.”
실비아의 옆으로 다가가서 손등으로 라스를 쳐냈다. 꽥 소리를 내며 처박힌 라스를 놔두고 본관을 가리켰다.
“그래. 이제 내게는 무서운 게 없어.”
실비아는 대련하는 것보다 그간의 수련이 끝난 것을 기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우….”
라온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내 편이 없어.’
-네 편은 네가 다 죽였느니라!
‘…….’
***
부원주의 집무실.
전쟁이 터진 듯 난장판이 되었던 방은 본래의 정갈하고 고풍스러운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부원주는 새로 들인 흑단목 책상에 걸터앉은 채 차를 마시고 있었다.
똑똑.
그가 찻잔을 거의 다 비웠을 무렵 문에서 둔탁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라.”
부원주가 고개를 끄덕이자, 문이 열리고 크리슨이 들어왔다. 그는 검투를 위해서 제작한 제복을 입은 채 허리를 굽였다.
“부원주님.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그렇군.”
부원주가 창밖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중천을 향해 나아가는 태양을 보며 조금 남아 있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크리슨.”
“예!”
크리슨이 목소리를 높이며 턱을 바짝 세웠다.
“준비는 되었느냐?”
“물론입니다!”
그가 자신 있다는 듯 흥분이 깃든 음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부원주님께서 하사해주신 영약 덕분에 오러의 질 자체가 달라졌습니다. 절대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흠….”
부원주가 입맛을 다시며 크리슨을 바라보았다.
‘기세와 분위기 모두 달라지기는 했군.’
라온 지그하르트의 검투 신청을 받자마자, 크리슨에게 상급 영약을 내어주고, 원로원 무인 하나를 붙여서 가르침을 내렸다.
덕분에 저 머저리는 3주 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이 정도라면 실비아를 꺾는 데도 문제는 없겠지.’
도괴는 한 말을 지키는 사람이다. 그가 참여하지 않는다고 했으니, 별관에서 선봉으로 나올 사람은 실비아뿐이다.
그녀의 경지가 높다고 해도 검을 놓고 있던 시간이 길기에 크리슨이 방심만 하지 않는다면 비등하게 싸울 수 있을 것이다.
“죽어서라도 이겨라. 너는 이 부원주실의 얼굴이니까.”
부원주가 크리슨의 어깨를 두드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단순히 힘을 내라고 하는 소리가 아니라, 진심이 어려 있었다.
“물론입니다! 이 목숨을 다 바쳐서라도 이기겠습니다!”
크리슨은 부원주실의 얼굴이라는 말에 감동한 듯 눈시울을 붉혔다.
부원주는 주먹을 말아쥔 크리슨을 보며 속으로 비웃음을 흘렸다.
‘그래. 동귀어진을 하더라도 그년을 무너뜨려.’
라온 놈과 싸우기 전에 힘을 뺄 수는 없으니까.
고수의 싸움에서는 아주 작은 차이로도 승패가 갈린다. 쓸데없이 실비아에게 오러를 소모했다가는 라온에게 밀릴 가능성도 있었다.
‘십중팔구는 내가 이기겠지만, 불안 요소는 지우는 게 낫지.’
3주 동안 라온 지그하르트의 자료를 긁어모아서 놈의 검술과 오러를 연구했다.
불과 얼음을 모두 사용하는 건 까다롭지만, 라온의 검술은 아직 체계와 완성도가 부족하다.
만전 상태에서 싸운다면 이길 자신이 있었다.
“그래. 내 너를 믿지 않는다면 누굴 믿겠느냐.”
속마음과 달리 잔잔한 미소를 그리며 책상에서 일어섰다.
“부원주님….”
크리슨은 또 한 번 감격한 듯 입술을 떨었다.
“그만 가자.”
부원주가 크리슨의 어깨를 두드리며 집무실의 문을 열었다. 그는 복도에 이지러지는 햇살을 바라보며 입매를 말아 올렸다.
“어린놈을 묻기에는 아까운 날이로군.”
***
쿠구구구구!
대연무장의 묵직한 철문이 대지를 진동하며 열린다.
시원하게 벌어진 대연무장의 입구로 수많은 사람이 들어온다.
그들은 차례를 지키는 듯 질서 있게 입장했지만, 입구를 벗어나자마자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보법을 밟으며 관중석으로 뛰어 올라갔다.
대연무장은 그 이름만큼이나 광활한 장소였지만, 오늘은 금세 자리가 차서 벌써부터 서 있는 사람이 나오기 시작했다.
“간신히 자리 잡았네.”
버렌이 얼굴에 손부채질을 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뭔, 인간이 이렇게 많아!”
마르타는 좁은 자리에 짜증이 난 듯 미간을 찌푸렸다.
“이 인간들 다 어디에 있었던 거야!”
“지그하르트 내성만이 아니라, 외성에 사는 주민들도 모두 몰려왔다고 하던데요.”
도리안이 파도처럼 밀고 들어오는 사람들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외성의 주민들까지?”
“네. 라온 님의 패드립. 아니, 그 글이 이쪽만 들린 게 아니래요. 지그하르트 전체에 다 퍼져서 모르는 사람이 없어요.”
그는 라온이 부원주를 욕했던 글은 이제 노래가 되어서 구전되고 있다며 고개를 저었다.
“이래서 곱게 늙어야 한다니까.”
마르타가 대련장 옆에 마련된 부원주의 자리를 보며 비웃음을 흘렸다.
“그 나이쯤 되면 남는 게 명예뿐일 텐데, 그게 땅에 박히다 못해, 똥 범벅이 됐네. 꼴이 좋아.”
그녀는 너무 즐겁다는 듯 히죽거렸다.
“그렇죠. 가만히 있었으면 중간이라도 갈 텐데.”
크레인이 한심하다며 손을 휘휘 저었다.
“따뜻해서 졸려….”
루난은 햇살을 받으며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야! 자지 마! 부원주 영감탱이가 발리는 꼴은 봐야지!”
마르타가 루난의 멱살을 잡은 채 흔들었지만, 그녀는 깨어나지 않았다.
광풍대가 부원주를 조롱하고 있을 때 관객석에서도 오늘 검투에 관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오늘 누가 이기려나?”
“2대2 대장전이라고 했지?”
“부원주실에서는 부원주랑 크리슨이 나올 테고.”
“별관은 광풍대주 고정에 다른 한 명은 누구지?”
“나도 모르지만, 누가 와도 이기기는 힘들지 않으려나?”
“하긴 라온 지그하르트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부원주를 꺾기는 어렵지.”
“아니야. 이번에 도검존의 무학을 얻은 게 광풍대주잖아. 결과는 까봐야 안다고!”
“그거 얻은 지 한 달도 안 됐는데, 뭐가 변하겠냐. 아직은 아니야.”
라온을 응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부원주의 승리를 점치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어이.”
마르타가 뒤를 돌아보며 콧잔등을 찌푸렸다.
“그 늙은이가 우리 대주를 이긴다고? 너희 눈깔은 장식이냐? 앙?”
그녀는 당장 달려들 것처럼 이를 갈았다.
“그, 그게 아니라….”
“저희는 그냥 승패를 따져봤을 뿐이라….”
“너희 목도 따줄까?”
마르타가 입맛을 다시며 검에 손을 올렸다.
“제발 사고 좀 치지 마!”
“그, 그만 하세요!”
“여기서 행패 부리면 난리 나요!”
버렌과 도리안, 크레인이 마르타의 팔을 잡고 말렸다.
“누가 이길지 확신이 있다면!”
관객석 아래에서 바람을 탄 듯한 경쾌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 확신대로 돈을 걸어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별관, 부원주실. 그리고 무승부까지! 당신의 판단이 미래의 집을 결정합니다!”
리메르다. 언제 만들었는지 판자로 도박장을 차리고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었다.
“아….”
“저 인간. 아니, 저 망할 엘프가!”
“차, 창피해….”
광풍대는 전문적인 딜러까지 고용해서 돈을 받는 리메르의 모습에 고개를 숙였다.
“오오!”
“검투의 도박장이 열렸다!”
“가자!”
누가 이길지를 떠들던 사람들은 아래로 내려가 금화를 뿌리기 시작했다.
“우헤헤헤헤!”
리메르는 몰려드는 사람들을 보며 입매를 길게 찢었다. 그의 눈동자가 금화의 모양으로 바뀐 것처럼 보였다.
“어휴, 저거 누가 안 잡아가나.”
마르타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을 때였다.
이제는 한적해진 성문으로 장포가 펄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웅성거리던 관객들의 소리가 확 가라앉았다.
저벅.
자연스레 귀를 기울이게 만드는 걸음 소리와 함께 검은 장포를 두른 라온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뒤를 따라오는 실비아 역시 옷을 맞춘 듯 검은 무복을 입고 있었다.
햇살이 맺힌 대해의 파도처럼 영롱한 금발과 혼을 빨아들이는 듯한 적안. 지그하르트 내에서도 미려함으로는 손을 꼽는 라온과 실비아의 자태에 관객들은 순간 말을 잊었다.
라온은 고요해진 대연무장의 분위기를 즐기듯 은은한 미소와 함께 대련장 앞에 놓인 의자에 등을 묻었다.
“분위기 잡는 거 하나는 뭐 있다니까.”
마르타가 라온을 보며 피식 웃었다.
“오늘 라온 존잘. 오늘 라온 엄마 존예.”
루난은 언제 일어났는지 라온과 실비아를 보며 눈을 끔벅이고 있었다.
“넌 언제 일어났냐.”
마르타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나는 다른 것보다 실비아 님이 라온의 수련을 버텼다는 게 신기해.”
버렌이 무섭다는 듯 입술을 떨었다.
“3주 동안 저놈이랑 개인 훈련을 하라고 하면 난 진즉에 도망쳤을 텐데.”
그는 절대 못 견딘다며 고개를 저었다.
“야. 우리 대주가 아무리 미친놈이라고 해도 설마 자기 엄마를 똑같이 굴리겠냐?”
마르타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콧방귀를 뀌었다.
“맞아요. 마왕도 자기 엄마는 알아보겠죠.”
크레인이 키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도리안이 실비아를 보며 입술을 떨었다.
“실비아 님 눈동자 어딘가 익숙하지 않아요?”
“그게 무슨 말이야?”
“눈동자?”
광풍대가 도리안의 말을 따라 실비아의 눈을 바라보았다.
투명한 아지랑이 같은 게 흩날리는 듯한 눈빛. 정상을 살짝 벗어난 광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저거 설마 우리….”
“마, 맞아요. 집중력 강화 훈련을 받았을 때의 우리 눈이에요!”
“미친….”
“진짜 엄마까지 굴린 거야?”
버렌과 마르타가 어이가 없다는 듯 입을 떡 벌렸다.
“…저게 사람이야?”
“지, 진짜 마왕이다. 아니, 마왕도 학을 뗄 거야!”
***
“에휴.”
라온은 도박판을 벌린 리메르와 미쳐서 날뛰는 광풍대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쪽에는 왜 침착한 사람이 없는 건지 모르겠어.’
-네가 할 소리냐….
라스가 어이가 없다는 듯 헛바람을 흘렸다.
‘내가 뭐 어때서.’
라온이 짧게 고개를 젓고 있을 때 대연무장의 입구에서 묵직한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부원주와 크리슨이 새하얀 백의를 걸친 채 걸어오고 있었다. 입에 걸린 여유로운 미소와 당당한 걸음걸이는 개선장군을 연상케 했다.
“흥.”
부원주는 짧은 비웃음을 흘리고서 본인의 자리가 있는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그가 도착할 때쯤 관중석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들도 알고 있는 자연의 법칙을 모르는 늙은이가 있다. 이유가 무엇일까!”
“그 나이가 될 때까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모른다면 부모가 교육하지 않았기 때문임이 분명하다!”
3주 전 지그하르트의 하늘을 가득 채웠던 글이 어린아이들의 입에서 노랫말처럼 울려 퍼졌다.
“크윽!”
부원주의 평온했던 안색이 급격히 붉어지며 눈동자에 핏줄이 섰다.
“히익!”
“어….”
노래를 불렀던 아이들은 부원주d의 살기에 질린 듯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부, 부원주님! 참으십시오! 아이들일 뿐입니다! 그리고 곧 검투가 시작되지 않습니까!”
사회자가 부리나케 달려가서 부원주를 말렸다.
“쯧.”
부원주가 혀를 차고서 살기를 가라앉혔다. 대신 그는 라온을 죽일 듯이 노려보며 입매를 비틀었다.
라온은 살기등등한 부원주의 눈을 마주하며 눈웃음을 쳤다. 능구렁이 같은 영감이 열을 내는 모습을 보니, 속이 시원했다.
다만 실비아는 웃지 않고, 고요한 기세로 부원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곳에 오기 전에 말했던 의지를 다지는 것처럼 보였다.
쿠우우웅!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연무장 입구에서 장대한 울림이 일어났다.
“북방의 하늘. 글렌 지그하르트 가주께서 입장하십니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문지기들이 목이 터져라 글렌의 이름을 외치자, 대연무장에 있는 모든 사람이 입구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라온은 머리를 조아리면서 대연무장으로 들어오는 글렌을 살폈다. 그는 아무런 눈길도 주지 않고, 단상 위로 향했고, 그 뒤에 있는 셰릴과 로엔, 아리스가 잘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시작하라.”
글렌은 가주전에서 보여주는 건조한 눈빛으로 라온과 실비아, 부원주와 크리슨을 차례로 살피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사회자가 고개를 숙인 후 대련장 위로 올라갔다.
“지금부터 별관과 부원주실의 2대2 검투를 시작하겠습니다!”
그가 힘차게 손을 들어 올리자, 관객석에서 대련장이 뒤흔들릴 정도의 함성이 들려왔다.
“본래 검투는 패자가 승자에게 들어주어야 할 약조를 걸고 진행하지만, 아직 그 약조가 정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회자가 라온과 부원주를 차례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지금 여기서 그 소원을 정하고….”
“그건 끝난 뒤에 말하는 게 어떨까요?”
라온이 부원주를 보며 가볍게 턱짓했다.
“승자가 원하는 모든 것을 들어주는 겁니다.”
“…좋다.”
부원주는 자신이 있다는 듯 단호히 대답했다.
“으음….”
사회자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단상을 올려다보았다. 글렌이 괜찮다는 듯 눈빛을 보내고 나서야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오늘 검투의 패자는 승자가 원하는 모든 것을 들어주어야 합니다. 다만 스스로 목숨을 끊어라 같은 명령은 불가합니다.”
“알겠습니다.”
“알겠다.”
라온과 부원주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선봉부터 대련장 위로 올라와 주십시오!”
사회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크리슨이 대련장 위로 올라왔다.
실비아는 바로 올라가지 않고, 관중석에 서 있는 시녀들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기도하듯 두 손을 모은 채 입술을 깨물고 있는 시녀들에게 고개를 끄덕여주고서 대련장에 올라섰다.
“시, 실비아?”
“실비아가 선봉이야?”
“허, 인공단전을 얻었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검투에 나오다니?”
“그러게. 아직 단전이 안정되지도 않았을 텐데,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선봉은 무조건 부원주실이 이기겠군.”
“아, 돈 잘못 걸었어!”
관객들은 실비아의 패배를 확신하며 고개를 저었다.
“오랜만이로군.”
크리슨이 실비아를 바라보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이전과는 다를 거다. 이번에는 내가 네 턱을 부숴주지.”
그는 방심하지 않겠다며 조금 틀어진 듯한 턱을 매만졌다.
“…….”
실비아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부원주를 매섭게 노려보다가 크리슨의 앞에 섰다.
“그 표정이 언제까지 가나 보자.”
크리슨이 빨리 시작하라는 듯 사회자에게 눈빛을 보냈다.
“크흠.”
사회자가 헛기침을 하고서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럼 선봉 대결을 시작합니다!”
그가 벼락처럼 손을 내리고 뒤로 물러섰다.
“흐아아아아아!”
크리슨이 대련장을 부술 것처럼 진각을 밟으며 실비아에게 돌진했다. 맹수가 먹잇감을 노리고 도약하듯 매서우면서도 표홀한 움직임이었다.
실비아는 검을 뽑은 채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크리슨의 검이 턱밑까지 짓쳐들어와서야 그녀가 촛불이 훅 꺼지듯이 급격히 상체를 숙였다.
후우우웅!
날카롭게 파고들어 온 크리슨의 검격을 머리카락 한 올 차이로 피해낸 후 오른발을 틀어 좌측으로 나아갔다.
“크윽!”
실비아는 당황하며 물러서는 크리슨에게 따라붙었다. 억지로 반격을 가하는 그의 검을 손등으로 밀어내고, 우수에 든 검을 아래에서부터 쳐올렸다.
뻐어어어어어억!
실비아의 검신에 턱을 얻어맞은 크리슨의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오른다. 그의 턱뼈가 바스러지고, 입에서는 피에 젖은 이빨이 우수수 튀어나왔다.
“커헉….”
크리슨은 추락할 때 실비아가 검을 휘돌려 그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뿌드드드득!
크리슨이 정수리에서 분수 같은 피를 뿜어내며 바닥에 꼬꾸라졌다. 기절했는지 미동조차 없었지만, 그의 입과 머리에서는 끊임없이 피가 흘러나왔다.
“어어….”
“허….”
“이, 이게….”
관객들은 실비아가 승리하는 것에도 놀라고, 결투가 초고속으로 끝난 것에도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스, 승자. 실비아 지그하르트!”
사회자는 본인의 뺨을 쳐서 정신을 차린 후 실비아의 이름을 외쳤다.
“크으….”
부원주는 경련하는 크리슨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실비아만을 바라보았다. 악에 받친 듯한 표정이었다.
“계속하실 수 있겠습니까?”
사회자가 실비아에게 다음을 물어보았다.
“네.”
실비아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부원주실의 대장 나와주십시오.”
“후우….”
부원주가 사회자의 말을 들으며 대련장 위로 올라갔다.
“계속하겠다고? 네가 나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가 입매를 비틀며 미간을 구겼다.
“네게 승산은 없어. 헛짓거리 말고 물러나라.”
부원주는 협박을 하는 것처럼 섬뜩한 안광을 일으켰다.
“승산이 없다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실비아가 고요한 눈빛으로 고개를 저었다.
“무인은. 아니, 사람은 진다는 것을 알아도 싸워야 할 때가 있으니까요.”
그녀는 부원주의 매서운 기세에도 지지 않은 채 당당히 허리를 펴고 목을 세웠다.
“부원주님은 모르실 수도 있겠네요. 비천하고, 무지하고, 부모에게 배우지 못한… 아. 여기까지만 하죠.”
실비아가 입은 가린 채 후후 웃었다.
“이년!”
부원주는 역린을 건드린 용처럼 어깨를 떨며 악을 질렀다.
-아아아악! 안 돼!
라스가 머리를 부여잡은 채 비명을 질렀다.
-네놈 때문에 엄마가 타락했느니라! 저건 우리 엄마의 모습이 아니니라!
반면 라온은 그 모습을 보며 실비아에게 박수를 보냈다.
“브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