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49화
라온은 선명하게 빛나는 지도를 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무덤에 들어가기 전에 광풍대를 풀어서 구해주었던 마을끼리 선이 이어져 지그하르트와 도검존의 무덤을 잇는 하나의 길이 되어 있었다.
‘저게 저렇게 이어졌다고?’
지그하르트의 영역이 아니라고 해도 눈앞의 사람을 구하고 싶었을 뿐인데, 이런 결과가 일어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표정을 보니, 너희도 몰랐던 모양이군.”
글렌이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결과는 바뀌지 않는다. 지그하르트에 투신한 마을은 모두 광풍대의 이름을 꺼냈으니까.”
그의 음성에서 드물게도 대견함이 느껴졌다. 표정도 평소보다 부드럽게 풀린 것처럼 보였다.
“가주님의 말씀이 맞다.”
셰릴이 한 발 앞으로 나왔다.
“촌장과 시장 모두 전부 너희에게 고맙다고 하더구나.”
그녀는 본인의 가슴이 따스해졌다며 웃었다.
“영토의 확장. 그건 가문과 왕국을 따질 것 없이 대단한 업적이다. 그 업적을 자그마한 피해도 없이 평화적인 방식으로 진행했으니, 그건 위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지.”
글렌의 목소리는 평온했지만, 그의 입꼬리는 다른 사람이 들어 올리기라도 한 것처럼 격하게 떨렸다.
“그 위업을 높게 사. 광풍대 전원에게 금패와 영약을 하사한다.”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안쪽 방에서 로엔이 금패와 은패가 놓여 있는 판을 가지고 나왔다.
“가, 감사합니다!”
“영광입니다!”
광풍대가 가슴을 움켜쥔 채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검사들은 금패를 받은 것보다 본인들이 한 일이 지그하르트에 큰 도움이 되었다는 것에 더욱 감명받은 것 같았다.
“도검존의 무덤에서 고군분투하여 광풍대를 지켜낸 공검대 전원에게도 은패를 하사한다.”
글렌은 공검대에게도 상을 내리겠다고 말하고서 옥좌에서 일어나 단상 아래로 내려왔다. 사람이 많기에 직접 움직이려는 것 같았다.
“가, 감사합니다!”
가장 먼저 금패와 영약을 받은 버렌은 눈물을 참으려는 듯 입술을 꾹 내리눌렀다.
“감사합니다!”
마르타는 당연히 받아야 한다는 표정을 하면서도, 글렌에게 직접 금패를 받는다는 감격 때문인지 홍당무처럼 안색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감사합니다.”
다만 루난은 눈빛과 표정 모두 변하지 않았다. 평소의 맹한 눈으로 금패와 영약을 받았다.
글렌은 광풍대 전원에게 금패를, 공검대 전원에게 은패를 하사한 후 다시 앞으로 돌아왔다.
“공검대주.”
“예. 가주님.”
“실수가 있었다고 해도 끝까지 버텨서 수하들과 광풍대를 살린 건 대단한 일이다.”
그는 그 말과 함께 공검대주에게 금패와 영약을 내려주었다.
“내상에 좋은 영약이니, 돌아가는 대로 취하도록 하라.”
“감사합니다….”
공검대주는 조금 떨리는 손으로 금패와 영약을 받았다.
“마지막으로 광풍대주.”
“예.”
라온이 한 발 앞으로 나왔다.
“설괴후, 6사도, 귀마검주를 벤 공, 도검존과 무덤의 정체를 밝힌 공, 그의 유산을 가져온 공, 마지막으로 지그하르트의 땅을 되찾은 공까지.”
글렌은 차분하게 라온이 그간 해온 일들을 읊었다. 음성은 낮았지만, 그의 입매와 눈꼬리는 천천히 하늘을 향해 솟구쳤다.
“무엇 하나 쉬이 볼 수 없는 업적이다. 이 정도라면 그간의 공과 합쳐 별관을 본관에 편입하고, 실비아와 너를 직계로 올리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
그의 나지막한 선언에 알현실에 있는 모두가 눈을 부릅떴다.
“가, 가주님!”
“그건….”
“입 다물도록.”
글렌은 입을 벌리는 직계들에게 사나운 눈빛을 보낸 후 고개를 저었다.
“다만 그건 너와 내가 약속을 한 바가 있지.”
“그렇습니다.”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직계는 부왕을 꺾고 직접 얻어내겠다고 선언했었다.
“일이 그리 되었으니, 이번에는 네가 원하는 소원을 들어주겠다.”
“지, 지금 소원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그렇다. 모든 것을 다 해줄 수는 없다만 할 수 있는 범위에서는 노력해보마.”
글렌은 본인이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들어주겠다며 눈빛을 가라앉혔다.
“…….”
라온은 조용히 알현실을 돌아보았다. 놀란 듯 눈을 부릅뜬 직계와 원로원을 조져달라고 요청하라는 듯한 리메르와 셰릴, 아리스를 보며 짧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저는 별관에 합당한 방어권을 원합니다.”
“방어권?”
글렌이 의외라는 듯 한쪽 눈썹을 올렸다.
“진무전주의 특별 감찰 때도 그렇고, 이번에 원로원 감찰도 그렇고 두 번 다 아무 의미도 없는 저격이었습니다. 별관만 크게 피해를 보았고, 시녀들만 고생했죠.”
“무슨 소리냐! 나는 그때 들어간 돈이 몇십 배 더 많았어! 너한테 뜯겨서 한동안 풀만….”
그 말을 할 때 발데르가 앞으로 튀어나왔다.
“뒤질래? 입 안 다물어?”
“크음….”
아리스가 눈매를 찡그리자, 발데르가 어깨를 떨면서 다시 뒤로 물러섰다.
“감찰을 하는 것 자체는 그렇다 쳐도 그저 괴롭히기 위해서 연속으로 감찰을 하는 것, 본인들이 감찰하면서 별관의 시녀들을 사용하는 것 모두 불합리하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라온이 직계 간부들이 있는 곳을 보며 입매를 비틀었다.
“별관의 자치권을 원합니다.”
“자, 자치권?”
가장 먼저 반응한 건 직계 간부들이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별관에 자치권을 주다니! 절대 안 됩니다!”
“가주님!”
그들은 절대 불가하다며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
글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시선을 돌렸다.
“너희는 내가 스스로 한 말을 어기길 바라는 것이냐.”
“아….”
“그게 아니고….”
그의 눈빛을 마주한 직계들이 입술을 떨며 뒤로 물러섰다.
“확실히 자치권이 있다면 지금까지 일어났던 일들은 해결할 수 있겠지. 허나 자치권은 쉽게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지그하르트의 보호를 포기한다는 것도 될 수 있음이니.”
글렌은 눈빛 하나 변하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별관에 대한 감찰과 조사 그리고 접근은 무기한으로 중지시켜주마. 자치에 관한 건 한동안 생각을 해본 후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라온은 짧게 숨을 내쉰 후 고개를 숙였다.
‘이거면 됐어.’
처음부터 자치권 따위는 노리지 않았다. 글렌의 말대로 별관이 지그하르트의 보호를 받지 못하면 그건 그거대로 문제였으니까.
자치권이라는 큰 소원이 거절되었기에 방어권이 생겼어도 직계 놈들은 투정을 부리지 않았다. 딱 내가 원했던 결과였다.
“네가 원한 것을 이루어주지 못했으니, 혹여 다른 소원이 있다면 말해보아라.”
글렌은 조금 서늘해진 눈빛을 보였다.
‘부원주에게 복수라도 하라는 것처럼 보이네.’
그의 눈빛은 소원권을 이용하여 별관을 괴롭힌 부원주를 역으로 공격하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나와 별관이 직접 해야 할 일이다. 글렌이나, 아리스에게 부탁해서는 평생 같은 꼴을 당하게 될 테니까.
거기다 내가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에 굳이 소원권을 쓸 필요는 없었다.
“그럼 저는 무학서를 몇 권 받고 싶습니다.”
“무학서?”
글렌은 이 부탁도 의외라는 듯 눈매를 찌푸렸다.
“어떤 무학서를 말하는 거지?”
“그건 따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가주님께 전해야 할 일이 있기도 해서.”
“그러도록 하지.”
글렌이 좌우에 선 간부들을 향해 손을 저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다. 모두 돌아가도록.”
간부들과 광풍대 공검대는 글렌에게 고개를 숙이고 문밖으로 나섰다. 직계들은 조금 떨떠름한 눈빛을 보였지만, 어쩔 수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가주전에 남은 건 셰릴과 로엔, 아리스, 리메르뿐이었다.
“라온!”
아리스가 옆으로 다가와서 소리를 질렀다.
“거기서는 부원주와 그놈 따까리들의 머리통을 따고 싶다고 말했어야지!”
“그럼 이뤄졌을까요?”
라온이 옅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루어지지는 않았어도 뭐 하나는 잘리지 않았을까?”
아리스는 직접 움직이기라고 할 생각이었는지 검병을 매만졌다.
“일단 라온의 말을 들어보죠.”
셰릴이 옅게 웃으며 아리스에게 고개를 저었다.
“허허허.”
로엔도 라온이 다 생각이 있을 거라며 허허 웃었다.
“일단 이것을 좀 봐주십시오.”
라온은 먼저 데루스 로베르트의 암류가 깃든 검집 조각을 꺼내서 글렌에게 내밀었다.
“이건….”
글렌은 검집 조각을 받아들고서 눈매를 찌푸렸다.
“죽음의 기운인가.”
“맞습니다.”
라온이 검은빛이 많이 옅어진 검집 조각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무덤을 나온 후 무인들을 몰아낼 때….”
글렌과 셰릴, 로엔에게 데루스 로베르트에게 습격받았던 일을 말해주었다.
“그런….”
“허어….”
셰릴과 로엔이 깜짝 놀란 듯 눈을 부릅떴다.
“위험했어요. 검귀 영감이 아니었다면 저 혼자는 막지 못했을 겁니다.”
아리스가 아직도 분하다는 듯 이를 갈았다.
“제가 보기에는 육황의 수장급에도 안 밀릴 것 같아요.”
“그런 놈이 라온을 노렸다….”
글렌의 붉은 눈동자가 섬뜩한 빛으로 번뜩였다. 시뻘건 뇌광이 치는 듯했다.
“도검존의 무덤을 지옥으로 바꾼 놈들의 수장으로 생각됩니다. 일을 망친 저를 죽이려고 했겠죠.”
“그렇겠지.”
그는 검집 조각에 깃든 죽음의 기운을 절대 잊지 않겠다는 듯 눈을 떼지 않았다.
“알겠다. 이쪽은 비연회주에게 조사를 내리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라온이 글렌에게 고개를 숙였다.
‘이걸로 됐어.’
육황 중 셋에게 데루스가 숨겨둔 암류를 보여주었으니, 기대 이상의 수확이다.
데루스 놈이 참지 못하고 힘을 드러내기만 한다면 놈의 명성과 평판을 모두 깨부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네가 원하는 무학서는 무엇이냐.”
글렌은 검집 조각을 품에 넣고서 턱을 끄덕였다.
“제가 원하는 무학서는 중산검, 천성검 그리고….”
라온은 먼저 도검존의 무학서를 해체하고 분석하는데 필요한 무학서를 말한 후 조금 뜸을 들이다가 마지막 책의 이름을 꺼냈다.
“십종검결입니다.”
“십종검결. 그건….”
“부원주의 검술이잖아.”
마지막 무학서를 들은 셰릴과 아리스의 눈동자에 차가운 빛이 맴돌았다.
“검투를 신청할 생각이로군.”
리메르가 팔짱을 풀고 앞으로 나왔다.
“네. 싸워야지요.”
“그 영감은 강하기도 하지만, 능구렁이야. 자기가 너보다 강한 것을 알고 있는데도 절대 싸워주지 않을걸? 이겨도 얻는 게 없으니까.”
그가 답답할 거라며 고개를 저었다.
“싸울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야죠.”
“어떻게?”
리메르만이 아니라, 이곳에 있는 모두가 마른침을 삼켰다.
“부대주님.”
라온은 리메르를 보며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부탑주 베르빈 님과 친분이 있으시죠?”
베르빈은 지그하르트 내부 마탑의 부탑주로 리메르와 술집에 있는 모습을 자주 보았었다.
훈련생 시절 실전 훈련 때 오크를 소환한 마법사도 그의 수하였다.
“베르빈? 술친구긴 하지.”
리메르는 갑자기 나온 베르빈의 이름에 눈을 끔벅였다.
“내일 그분을 좀 빌리고 싶은데요.”
라온이 금화를 꺼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
“용살자라….”
원로원 부원주 킬루안이 라온의 모습을 떠올리며 진한 비웃음을 그렸다.
“얼마나 수준이 높은가 했더니, 아직 어린놈이었군.”
“어리다니요?”
가주전에서 돌아온 크리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영약해보이지만, 어리숙해. 이용해먹기에 딱 좋은 수준이다.”
“음….”
“이해가 안 되는 모양이군.”
“예. 오늘 놈이 해온 업적을 듣다 보니, 저도 모르게 감탄해서….”
“그건 확실히 대단하지. 다만 내가 말하는 건 그런 게 아니다.”
킬루안이 흑목을 통째로 베어서 만든 책상을 두드리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가주께서 소원을 들어준다고 했을 때 놈이 우리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지?”
“예. 저도 의외였습니다. 우리 쪽에 복수를 하려고 했다면 섬뜩했을 텐데….”
“그게 어리다는 거다.”
그가 의자 깊숙히 등을 묻으며 어두워지는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놈은 본인의 힘만으로 나를 노리려는 생각을 하고 있을 테니까.”
“노린다는 건 설마….”
“그래. 검투다.”
킬루안이 본인의 왼손 검지와 오른손 검지를 맞댔다.
“놈은 내게 검투를 신청하려고 하고 있어.”
“아!”
크리슨이 이제야 알겠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가주의 힘을 빌리지 않고, 직접 해결하겠다는 뜻이지. 그러면 별관에 주어진 방어권 말고도 건드릴 수 없는 벽이 생기는 거니까. 다만….”
킬루안은 대고 있던 두 손가락을 가볍게 뗐다.
“검투는 상대가 받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지. 놈은 오늘 주어진 기회를 놓친 것을 평생 후회하게 될 것이야.”
그는 라온의 일그러진 눈동자를 떠올리며 키득 웃었다.
“하지만 이제는 저희도 별관을 건드릴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크리슨은 아직 붙지 않은 턱을 매만지며 미간을 구겼다.
“방법은 만들면 그만이다. 괴롭히는 방법은 감찰이나, 조사만 있는 게 아니야.”
킬루안이 손가락을 흔들며 별관에 시비를 걸 수 있는 방법을 가볍게 읊었다.
“역시 대단하십니다!”
크리슨은 감탄을 했다는 듯 킬루안을 보며 헛바람을 흘렸다.
“일주일 정도 아이들에게 휴식을 지시하도록.”
킬루안의 탁해진 눈동자가 사이함으로 번들거렸다.
“그 후에는 다시 별관에 가야 하니까.”
***
다음날 오전.
검사들이 아침 식사를 마치고, 일과에 들어가는 시간에 본관의 하늘 위로 하얀 장막이 펼쳐졌다.
“저게 뭐야?”
“마법 같은데?”
“맞네. 마탑에서 움직이고 있어. 오늘 행사가 있었나?”
“무슨 종이처럼 펼쳐지네.”
검사들과 사용인들은 모두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우우우우웅!
하얀 장막 위로 검은 글씨가 춤을 추듯이 펼쳐진다. 꼭 종이에 글을 쓰는 듯한 모습이었다.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새끼를 달고 있는 짐승에게는 절대 다가가지 말라는 교육을 받는다. 지켜야 할 자식이 있는 짐승은 극도로 예민하고, 그들의 이빨과 발톱은 평소보다 배 이상 날카롭기 때문이다.]
단순히 글자만 적히는 게 아니다. 본관 전체로 낭랑한 여성의 목소리가 울렸다.
글을 읽을 뿐인데, 신기하게도 시를 외거나, 노래를 부르는 듯 생생하게 귀에 박혔다.
[허나 아이들도 알고 있는 자연의 법칙을 모르는 늙은이가 있다. 이유가 무엇일까. 그 나이가 될 때까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모른다면 부모가 교육을 하지 않았기 때문임이 분명하다.]
[인성 교육을 포기한 부모에게 자랐고, 스스로 좋은 가정을 이루어 본 적이 없기에 다른 이의 가정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르는 것이다.]
[무지한 자는 열등감을 남에게 표출하는 법이고, 성인은 스스로의 부족함을 깨닫고 마음을 단련한다. 비천한 자는 자기보다 모자란 자를 찾아 조소를 그리고, 존귀한 자는 부족한 자에게 지식과 마음을 나누는 법이다.]
[지그하르트의 부원주라는 자가 부모에게 교육을 받지 않아 무지하고, 비천한 자가 되었으니 통탄할 노릇이다.]
[본 대주는 지그하르트의 검으로서 원로원의 부원주를 비천하고, 무지하며, 부모에게 교육받지 못한 아집 강한 늙은이로 놔둘 수가 없다.]
[따라서 직접 부원주에게 부모 대신 세상에 대한 가르침을 내리고자 한다. 부원주가 이 이상 비천하고, 무지하고, 부모에게 배우지 못한 자가 되고 싶지 않다면 3주 후 정오에 대연무장으로 나오도록 하라. - 광풍대주 라온 지그하르트.]
마지막으로 광풍대주 라온 지그하르트라는 이름이 적히고, 여성의 낭랑한 목소리도 끝이 났다.
“아….”
“어어….”
본관 앞에는 수를 헤아리기 어려운 사람들이 나와 있었지만, 누구 하나 입을 열지 못했다.
“역시 유아의 목소리는 끝내주네.”
본관에서 멀리 떨어진 저택의 지붕 위에서 라온이 박수를 보냈다.
-그러게 말이다. 파인애플 소녀의 음성은 꾀꼬리…가 아니라! 저거 부모욕이잖아!
라스가 턱을 바들바들 떨며 손을 들어 올렸다.
‘맞아.’
라온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야 임마! 마족도 부모 욕은 안 해!
‘먼저 부모를 건드린 건 그 늙은이야.’
-아니, 다른 걸 다 떠나서 본왕이 본 것 중에 가장 참신하면서도 우아한 부모 욕이니라….
녀석은 어이가 없다는 듯 눈을 끔벅였다.
“그래야 먹히지.”
라온은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리는 원로원의 건물을 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검투 신청은 끝났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