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48화
라온은 타들어 가는 모닥불을 보며 차분히 눈을 내리감았다.
‘도검존의 무학을 이대로 사용하기에는 좀 애매한데.’
도검존이 워낙에 예전의 인물이었고, 높은 경지에 있었기에 광풍대에게 전해주기에는 맞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정말로 내가 건드려볼까?’
도검존의 무학을 모두 외우고 있고, 직접 싸워보기도 했기에 광풍대에게 맞는 무학을 직접 만드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냐?”
어떻게 할까 고민하고 있을 때 우측에서 경쾌한 음성이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리메르가 천막에서 나오며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올렸다.
“안 주무십니까?”
“낮에 도리안의 등에 업혀서 잤더니, 잠이 안 오네.”
그는 조금씩 밝아지는 하늘을 보다가 옆자리에 와서 앉았다.
“도검존 님의 무학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도검존의 무학?”
“예. 광풍대에게도 전해주고 싶은데, 이대로는 쓸 수 없을 것 같아서 제가 만들어볼까 하고….”
“그거 좋네!”
리메르가 좋은 생각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알겠지만, 상승의 무학을 익힌다고 무조건 강해지는 게 아니거든. 그 사람에게 맞는 것을 찾는 게 중요해.”
그가 허공에서 손가락을 빙글 돌렸다.
“너는 애들을 잘 아니까. 딱 맞는 무학을 만들 수 있을 거다.”
“광풍대 녀석들을 잘 알기는 합니다. 다만….”
라온이 광풍대가 자고 있는 천막을 보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도검존 님의 무학을 해체해서 제대로 된 것을 만들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스스로가 강해졌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도검존은 초월에 들었던 무인이다.
그의 무학을 해체해서 새로운 것을 만든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뭐, 실패할 수도 있겠지.”
리메르가 하늘을 보며 픽 웃었다.
“그런데 실패하면 좀 어때.”
“예?”
“망가지면 고치면 되고, 아예 못 쓰겠으면 버리고 새로 만들면 되잖아.”
그가 어깨를 두드리며 미소를 그렸다.
“네게는 충분한 능력과 시간이 있다. 도검존의 무학이 얼마나 대단하든, 네가 못할 건 없어.”
“음….”
라온이 리메르를 보며 눈매를 좁혔다.
“저 돈 없어요.”
“갑자기 뭔 돈!”
리메르가 어이가 없다는 듯 비명을 질렀다.
“지금 돈 달라고 조언해주는 척하시는 거 아니에요?”
“아니야! 그리고 조언하는 척이라니! 말이 너무 심하잖아!”
그는 본인을 사기꾼으로 보는 거냐며 이를 갈았다.
“사기꾼은 아니고. 도박꾼, 게으름뱅이, 미래가 없는….”
“그만!”
리메르가 하지 말라며 입을 막았다.
“어쨌든 네 검술을 만들 때처럼만 하면 광풍대를 위한 무학도 문제 없이 만들 수 있을 거다.”
그는 용기를 주듯 고개를 끄덕였다.
“부대주님.”
“응?”
“요즘 무슨 일 있으세요?”
“왜?”
“애들이랑 있을 때는 조용한데, 저랑 있으면 조언을 해주시니 적응이 안 됩니다.”
“그거 조언자의 역할이니까.”
리메르는 당연한 일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근데….”
“예.”
또 다른 조언을 해줄 것 같아서 귀를 기울였다.
“돈은 정말 없어? 다음 달에 바로 갚을 수 있는….”
“없어요. 있어도 없어요.”
라온은 고개를 홱 돌렸다. 또 무슨 말을 하나 기대했는데, 역시나였다.
-흐아암, 저 귀때기의 말이 맞느니라.
한숨을 내쉴 때 라스가 하품을 쩍 하며 팔찌 위로 올라왔다.
-좀 쓴다고 망가지는 것도 아니고, 계속 시험해보면 되잖느냐. 본왕과 달리 재능이 미천하여 시간은 걸리겠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니라.
녀석은 본인 자랑을 하면서도 해보라는 듯 손가락을 끄덕였다.
‘그래. 내가 만드는 게 가장 나을 거야.’
남이 아니니까.
10년 가까이 광풍대와 생활하며 그들이 익힌 무학만이 아니라, 취향과 성격마저 알게 되었다.
저 녀석들이 사용할 무학을 만드는 건 내 무학을 만드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단 도법과 검법의 틀을 버리는 게 좋겠지.’
불의 고리를 운용했다. 집중력을 키우며 도검존의 무학을 먼저 낱낱이 분해했다. 무엇이 장점이고, 무엇이 단점인지를 파악하며 얻어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을 나눴다.
머릿속으로 정리를 하고 있을 때 밤하늘에서 하얀빛이 반짝였다.
아니, 하얀빛이 아니다. 검은색과 하얀색이 섞인 까마귀 한 마리가 급격하게 하강해왔다.
“이 새는….”
“도괴. 영감의 새네?”
리메르가 까마귀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의 말대로 이 까마귀는 도괴가 데리고 있는 연락용 영물이었다.
“무슨 일이 있나?”
“발목에 편지가 있습니다.”
라온이 까마귀의 다리에 있는 쪽지를 빼서 펼쳤다.
[원로원 부원주가 별관에 억지 시비를 걸고 있다. 될 수 있다면 빨리 돌아오거라.]
도괴의 필체. 정말 그가 보낸 편지였다.
“억지 시비라….”
리메르는 대충 상황을 예상한 듯 미간을 구겼다.
-저게 무슨 소리냐! 억지 시비라니!
라스는 별관에 시비가 걸린다는 것에 분노한 듯 얼굴이 뻘게졌다.
‘아마 감찰권 같은 걸 써서 괴롭히고 있겠지.’
원로원은 기본적으로 은퇴한 간부들을 위한 곳이지만, 가문이 어긋나지 않도록 견제하는 역할도 하고 있다.
가문을 견제하는 권한을 악용하여 별관을 괴롭히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이유는….’
나 때문이겠지.
원로원은 실비아가 싫어서 별관을 건드린 게 아니라, 카룬 대신 나를 압박하기 위해서 별관에 시비를 건 게 분명했다.
-이런 늙은 놈들이! 너나 괴롭히지, 감히 우리 엄마를 건드려? 당장 수염을 다 뽑아 버리겠느니라!
‘나도 그러고 싶네.’
라스의 말대로다. 시비를 걸려면 나를 직접 찾아오지, 비어있는 별관을 찾아가다니, 뒷골목 양아치들이나 할 법한 방식이었다.
‘아무래도 전처럼 처리해서는 안 되겠어.’
내가 강해지고, 지위가 높아질수록 별관을 노리는 놈들이 많아질 것 같았다.
예전처럼 홀로 모든 것을 끝내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라온. 갈 거지?”
리메르가 다 알고 있다는 듯 눈빛을 보냈다.
“예. 바로 가야겠습니다.”
라온이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손에 든 편지를 태웠다.
‘후회하게 만들어주지.’
***
라온은 지그하르트로 복귀한 후 바로 별관으로 달려갔다. 별관이 눈에 들어오자마자, 자신도 모르게 이가 바드득 갈렸다.
‘별관 자체를 무너뜨려 놨군.’
인사를 하듯 하늘거리던 정원의 꽃과 나무는 뿌리째 뽑혀서 나뒹굴고 있었고, 잘 다져진 땅은 모두 파헤쳐져 황색 언덕이 만들어져 있었다. 꼭 전쟁터를 보는 듯했다.
별관 건물 자체도 이곳저곳이 부서지고, 무너져 있었다. 창틀은 안 뜯긴 곳이 없었고, 벽도 구멍이 뚫려서 거지가 입는 누더기 옷을 보는 듯했다.
더 웃기는 건 원로원 무인들은 명령만 내리고, 땅을 파거나 별관을 부수는 작업은 시녀들이 한다는 점이었다.
심지어 실비아와 헬렌까지 정원의 땅을 파고 있었다.
라온이 입술을 씹으며 정원의 중심에 있는 노인을 바라보았다. 그는 내가 온 것을 보고도 일어서지 않은 채 차를 홀짝이고 있었다.
‘저놈이 부원주인가.’
가문의 행사에서 가끔 마주쳤던 노인이다. 나를 벌레처럼 여기고 있다는 게 느껴져서 말도 걸지 않았는데,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저 새끼가 그 부원주냐?
라스가 주먹을 들어 올렸다.
-당장 본왕을 강림시켜라! 저 늙은이의 주름살마다 얼음 조각을 받아줄 테니까!”
녀석은 빨리 몸을 내놓으라며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지랄 났네.”
아리스가 별관의 모습을 보며 입매를 비틀었다.
“하, 이건 예상을 한참 벗어났는데.”
리메르도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못 참겠다. 내가 다 처리할게.”
아리스가 팔을 걷어붙이며 앞으로 나섰다.
“아뇨.”
라온이 앞으로 나서며 아리스와 리메르에게 고개를 저었다.
“이번 일은 별관 내부에서 해결하겠습니다.”
별관에 이런 식으로 시비가 걸려 온 건 처음이 아니다.
잡것들이 계속 달라붙는 건 힘이 없기 때문이기에 이번 일만큼은 별관이 해결하여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벽을 세워야 한다.
“그래. 그렇겠네.”
아리스는 그 말의 의미를 알아듣고서 뒤로 물러섰다. 다만 분한지 주먹을 꾹 말아쥐었다.
“그럼 나도 가만히 있으마.”
리메르도 지켜보겠다며 팔짱을 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오오오오.
라온이 불의 고리를 휘돌렸다. 강대한 기파와 분노를 드러내는 게 아니라, 오히려 가라앉히며 부원주에게 다가갔다.
“…도련님.”
“어, 언제 오셨어요?”
땅을 파고 있던 주디엘과 시녀들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라온.”
“도련님!”
실비아와 헬렌도 삽을 내려놓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임무를 마친 후 복귀한 건가? 생각보다 빨리 돌아왔구나.”
부원주가 옅게 웃으며 손을 저었다.
“이야기는 대강 들었다. 도검존의 무학을 수습했다니, 꽤 대단한 일을 했더군. 수고했다.”
“…….”
라온은 부원주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실비아와 시녀들을 보았다.
얼굴에는 흙과 땀이 섞인 진흙이 묻어 있었고, 손에는 피멍이 들어 있었다. 얼마나 오래 땅을 팠는지 신발과 치마가 온통 흙투성이였다.
“네가 부원주인가.”
라온은 당장 검을 뽑아서 부원주의 머리통을 가르고 싶은 욕망을 참으며 시선을 돌렸다.
“그렇다면?”
부원주는 말을 놓았음에도 당황하지 않고, 미소를 그렸다.
“이게 뭐 하는 짓이지?”
“워, 원로원의 행사다!”
부원주 대신에 그의 수하로 보이는 중년인이 앞으로 나왔다.
“우리는 별관에 범죄 행위가 있다는….”
“네 주인과 이야기하는 중이다. 개는 빠져.”
라온은 크리슨을 쳐다도 보지 않은 채 부원주를 보며 눈매를 찌푸렸다.
“이, 이익!”
“물러나라. 크리슨.”
부원주가 픽 웃으며 크리슨에게 손을 저었다.
“저 말대로다. 이곳에서 범죄 행위가 일어났다는 보고가 들어와서 원로원의 권한을 이용하여 조사를 진행하는 중이지.”
“무슨 불법행위?”
“그건 말할 수 없네.”
“정보를 넘긴 자는?”
“정보원은 보호를 해줘야 한다는 걸 알지 않나. 당연히 말할 수 없네.”
그는 놀리듯이 입매를 비틀어 올렸다.
“이 꼴을 보면 아무것도 찾지 못한 것 같은데, 왜 아직도 여기에 있는 거지? 감찰 기간도 지났을 텐데.”
“아직 우리가 못 찾았을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원로원의 감찰은 본래부터 기간을 3번 연장할 수 있다네. 모두 규율대로 진행하는 중이지.”
부원주는 본인들은 합법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며 손에 든 서류를 흔들었다.
“이 일과는 관계가 없지만, 나는 이 지그하르트 원로원의 부원주네. 존중을 보였으면 좋겠군.”
“존중을 보였기에 당신 목이 지금까지 붙어 있는 거야.”
“천둥벌거숭이 같다더니, 딱 그 말대로야.”
부원주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로 찻잔을 들었다. 원로원 부원주까지 올라간 노련한 인간답게 도발에 넘어오지를 않았다.
“오늘은 훌륭히 임무를 완수한 광풍대주를 봐서 여기까지만 하도록 하지.”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별관 이곳저곳에 퍼져 있던 원로원의 무인들이 그의 뒤로 정렬했다.
“우리를 너무 미워하지 말게. 규율은 지키기 위해서 존재하는 거지 않나.”
“당신. 이번 일을 후회하게 될 거야.”
라온이 등을 돌리려는 부원주에게 다가가서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그 말은 이미 들었네. 오자마자 칼이라도 들이밀 줄 알았는데, 솔직히 실망이야.”
부원주가 조롱을 담은 눈웃음을 보였다.
“그 기대를 충족시켜 줄 테니. 걱정하지 말도록.”
“기대하지.”
그는 가볍게 손을 젓고서 별관을 떠났다.
-아우우욱! 저대로 보낼 거야?
라스가 이를 악물었다.
-당장 쫓아가서 머리통을 깨부수라고 너 잘하는 거 있잖아!
‘지금은 아니야.’
라온이 부원주의 등을 보며 입술을 씹었다. 저놈들이 합법적으로 움직이고 있기에 여기서 마구잡이로 움직인다면 오히려 역공당할 수도 있었다.
“라온.”
실비아가 앞으로 다가와서 고개를 떨궜다.
“미안해. 별관을 지키겠다고 해놓고, 할 수 있는 게 없었어….”
그녀는 분한 듯 고개를 숙인 채로 어깨를 떨었다.
“…괜찮아요.”
라온이 흔들리는 실비아의 어깨를 잡아주며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참지 못하고 검을 들었다면 일이 커졌을 것이다.
시녀들을 포함한 모두가 견뎌주었기에 저 늙은 여우의 대가리를 합법적으로 깰 길이 생겼다.
“도련님.”
주디엘은 그 사이에 별관에 들어갔다 나와서 검은 책자 하나를 건넸다.
“이건….”
“암시장과 도괴 님이 주신 정보를 취합한 자료입니다.”
그 말을 들으며 책자를 폈다. 흔들리는 글씨로 부원주에 대한 정보가 가득 실려 있었다.
낮에는 삽을 들고, 밤에 힘없는 손으로 작성한 것 같았다.
“도움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고맙다.”
라온은 책자를 빠르게 읽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길이 보여.”
“길이요?”
“그래.”
라온이 실비아와 시녀 모두를 보며 입매를 비틀었다.
“저런 양아치들이 다시는 이 별관을 건드리지 못하게 할 방법이.”
***
라온은 실비아와 시녀들이 쉴 수 있게 조치한 후 본관으로 향했다.
광풍대와 공검대가 모두 가주전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해결됐습니까?”
버렌이 마른침을 삼키며 다가왔다.
“하아, 요즘 왜 이렇게 나잇값을 못 하는 놈들이 많은지 모르겠네.”
마르타가 짜증이 난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괜찮으셔…요?”
루난도 평소와 달리 눈동자에 걱정을 담고 있었다.
“그래.”
라온이 세 사람만이 아니라, 뒤에서 입술을 깨물고 있는 광풍대 모두에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지금은 보고만 생각하자.”
가볍게 손을 저어주고서 광풍대의 앞에 섰다.
가주전 안으로 들어가자, 광풍대는 혼란스러워하던 표정을 지우고 안색을 굳힌 채 뒤를 따라왔다.
예전과는 달랐다. 하나같이 믿을 수 있는 검사의 기세를 두르고 있었다.
라온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알현실로 향했다. 거대한 문은 이미 열려 있었고, 안에는 지그하르트의 간부들이 양쪽 기둥 앞에 서 있었다.
조금 전 별관에서 보았던 부원주의 수하가 직계 쪽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고오오오오.
글렌은 평소처럼 옥좌에 앉아 턱을 괴고 있었는데, 그의 눈빛은 공허함이 아닌 진중한 열기를 띠고 있는 것 같았다.
쯧.
아리스가 글렌에게 고개를 까딱이고서 먼저 걸음을 옮겼다. 부원주의 수하 옆에 자리를 잡았는데, 혀를 차는 모습을 보니 마음에 안 들면 바로 베어버릴 기세였다.
그 옆자리에는 채드가 서 있었다. 그는 친구라도 본 것처럼 이상할 정도로 반가운 눈빛을 보였다.
라온이 눈을 감았다가 뜨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광풍대에게 따라오라는 눈빛을 보내고 알현실로 들어갔다.
먼지 하나 묻지 않은 붉은 카펫을 밟으며 나아가 단상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광풍대 임무 완수 후 복귀했습니다.”
“광풍대 임무 완수 후 복귀했습니다!”
글렌에게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뒤에서 광풍대가 따라 외치며 무릎을 땅에 대는 소리가 났다.
“일어나라.”
글렌의 가라앉은 음성을 들으며 허리를 폈다.
“광풍대주.”
“예.”
“광풍대에 할당되어 있던 임무는 지그하르트 영역 순찰이 아니었나?”
“맞습니다.”
예상했던 질문이었기에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검존의 무덤에서 일어난 일이 워낙에 커서 뒤로 물러두었지만, 본래 광풍대의 임무는 순찰과 경계였다.
“왜 무덤에 갔지?”
“도검존의 무덤을 찾기 위해서 몰려든 무인 때문에 지그하르트 인근의 마을들이 큰 피해를 입고 있었습니다. 계속 해결해도 끝이 없었기에 그 원인을 제거하기 위해서 먼저 무덤을 찾는 게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군.”
글렌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보니, 본인이 아니라, 다른 간부들을 위해서 물어본 것 같았다.
“그럼 무덤 내부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보고하도록.”
“알겠습니다. 저희는 설괴후, 6사도, 귀마검주와 전투를 벌이다가 무덤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라온은 끄덕이고서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모두 보고했다.
물론 선조의 기억처럼 혼자만이 알아야 하는 일에 대해서는 꺼내놓지 않았다.
“…그렇게 되어서 발카르의 대마법사님과 오웬 국왕께 인사를 드리고 돌아왔습니다.”
말을 마치자, 알현실에는 숨을 몰아쉬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모두 대략적인 정보는 알았어도 이렇게 많은 일을 치렀을 줄은 몰랐던 것 같았다.
“허어….”
“서, 설괴후를 일대일로 꺾을 정도로 성장했다니….”
“그 정도가 아니라, 도검존을 막았다고 하지 않나! 아무리 사령화를 이뤄서 약해졌다고 해도 한때 초월자였던 사람을 상대하고 살아오다니….”
“저게 진짜라면 미쳤다는 말 밖에는 나오지 않는군.”
간부들을 놀랍다는 듯 연신 헛바람을 흘렸다.
“커흐흠!”
글렌은 왼손으로 입 주변을 가린 채 짧게 헛기침을 했다. 그의 얼굴이 잘 익은 사과처럼 붉어져 있었다.
“그들과 싸워 이긴 것도 대단하지만, 무덤의 통제실을 찾아낸 게 더 놀랍지 않아?
“그렇지. 잘만 다듬으면 검사들을 위한 수련장으로 쓸 수 있을 테니까.”
“난 그것보다는 무덤에서 나왔을 때가 미쳤다고 생각하는데. 피 말리는 싸움을 끝낸 후에 수백 명을 어떻게 때려눕힌 거지? 무슨 좀비냐고….”
“해검지. 지그하르트의 성지가 그런 곳에 만들어지다니, 어이가 없군.”
간부들은 라온이 해온 일 하나하나를 꼬집으며 칭찬과 함께 미소를 보였다.
“음….”
“쯧.”
“뭐 저리 난리인지.”
직계 간부들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지만, 그간 별관을 괴롭혔던 것 때문인지 오히려 비웃음을 보이기도 했다.
“지그하르트의 성지라니! 울림이 좋군!”
발데르가 시원해 보일 정도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워. 그런 건 내가 만들고 싶었는데!”
그는 아쉽다며 솥뚜껑만 한 주먹을 휘저었다.
“네가 했으면 성지가 될 수 없어. 피 냄새나 났겠지.”
아리스가 되지도 않는 소리 말라며 고개를 저었다.
“누님의 말이 맞다.”
데니어가 라온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광풍대주가 단 한 명의 무인도 죽이지 않았기에 존경의 의미를 담아서 성지가 된 거다. 함부로 따라 할 수 없는 일이지.”
“음, 하긴.”
발데르가 코를 후비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라면 다 죽이긴 했겠네. 잘했다.”
그는 잘했다는 듯 라온에게 딱 두 번 손뼉을 쳐주었다.
라온은 발데르에게 고개를 끄덕이고서 다시 글렌에게 시선을 돌렸다.
“크흠….”
글렌은 생각을 하는 것처럼 여전히 입을 가리고 있었는데, 그의 손가락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흔들렸고, 눈동자는 말하는 사람을 따라 좌우를 벼락처럼 번갈아 움직였다.
무슨 반응인지 이해가 되질 않을 정도였다.
“가주님. 말씀드리고 싶은 게 하나 있습니다.”
기다려도 글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을 것 같아서 먼저 말을 걸었다.
“말해보거라.”
글렌이 평소의 건조한 눈빛으로 돌아간 채 고개를 끄덕였다.
“도검존님은 지그하르트의 선조셨고, 그분의 무덤은 본래 지그하르트의 수련장으로 사용하던 곳입니다. 뜻하지 않게 해검지까지 이루어졌으니, 최대한 빨리 그 땅에 대한 소유권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라온이 조금씩 빛이 진해지는 글렌의 눈을 보며 말을 이었다.
“오웬과 발카르의 허가는 받았습니다. 도검존 님의 무덤이 지그하르트가 조금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그 사이에 다른 세력이 많지 않으니, 빠르게 움직인다면 어렵지 않게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지그하르트와 도검존의 무덤 사이에는 특별히 강한 세력이 없다.
발카르 왕국과 흑탑이 가까이에 위치하지만, 발카르의 인정을 받았으니 주변 마을 사람들만 설득하면 어렵지 않게 먹을 수 있을 것이다.
“흠….”
글렌이 입맛을 다시며 입에서 손을 뗐다. 그의 얼굴은 언제 떨렸냐는 듯 담담했다.
“그럴 필요는 없다.”
“예? 하지만 너무 아까운….”
그곳을 수련장으로 이용한다면 단계별로 무인들을 성장시킬 수 있다. 이대로 버려두기에는 아까운 곳이었다.
“그런 뜻이 아니다.”
글렌이 차분히 고개를 저었다. 그가 손을 까딱이자, 물러서 있던 채드가 앞으로 나왔다.
“루센 마을, 유필 마을, 투잔 시 그리고….”
채드가 허공에 지도를 펼쳐서 지그하르트와 도검존 무덤 사이에 있는 마을과 도시를 하나씩 가리켰다.
“광풍대가 도움을 주었던 마을의 주민들이 지그하르트에 투신하고 싶다고 연락을 보내왔습니다.”
그는 훌륭한 일을 해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말대로다.”
글렌이 허공에 손가락을 긋자, 지도 위에 지그하르트와 도검존의 무덤 사이를 잇는 한 줄의 선이 그려졌다.
루센 마을, 유필 마을, 투잔 시. 광풍대가 구해주었던 중립 지역들이 지그하르트의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너와 광풍대가 대륙이라는 지도에 지그하르트의 선을 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