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47화
원로원의 부원주 킬루안은 계단을 내려오는 실비아를 보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사람 자체가 바뀐 듯하군.’
실비아는 가문으로 돌아온 이후 항상 위축되어 있었다.
쥐처럼 어깨와 허리를 숙였고, 항상 눈동자를 내리깔았다. 사람과 눈을 마주치지도 못했고, 마주쳐도 금세 도망쳤다.
하지만 지금의 실비아는 달랐다.
철탑처럼 어깨를 곧게 편 채, 지그하르트만의 고고한 기세를 드러냈다.
태양 빛을 녹인 듯한 금발을 뒤로 질끈 묶고, 검은 무복을 걸친 모습은 한 자루의 명검을 연상케 했다. 그 예리함에 피부가 아려올 정도였다.
가장 큰 변화는 눈빛이다. 항상 불안에 떨던 붉은 눈동자는 심해처럼 깊게 가라앉아 자그마한 떨림도 보이지 않았다.
뿌득.
킬루안이 어금니를 지그시 씹었다.
‘이게 정말 실비아라고?’
실비아가 가문을 떠나기 전에도 정도 기세와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녀의 영혼 자체가 바뀐 것 같았다.
‘인공단전을 안착시켰다고 듣기는 했는데….’
이렇게까지 변할 수가 있나?
실비아가 인공단전을 얻은 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건만, 그녀의 무위는 벌써 마스터 최상급에 다다라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되질 않았다.
“시, 실비아?”
크리슨도 실비아의 변화를 느낀 듯 말을 더듬었고, 원로원의 무인들은 기세에 질려 뒷걸음질까지 쳤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부원주님.”
실비아는 크리슨을 무시한 채 킬루안의 앞에 서서 고개를 숙였다.
“원로원의 행사라니, 무슨 일이십니까?”
“크흠.”
킬루안이 불편한 심기를 헛기침으로 드러냈다.
‘더럽게 당당하군.’
가문을 버리고 도망친 주제에 단전이 생겼다고 건방을 떠는 모습이 너무도 추하게 느껴졌다.
“쯧.”
킬루안은 실비아에게 답을 하지 않은 채 크리슨에게 혀를 찼다.
“건방진!”
크리슨이 그 신호를 받고서 실비아의 앞에 섰다.
“방계 주제에 어디서 함부로 말을 거는 거냐!”
“방계가 원로에게 말을 걸 수도 없다는 건 지금 처음 알았군요.”
실비아는 여전히 크리슨이 아니라, 부원주를 보며 차가운 미소를 그렸다.
“주제를 모르는군.”
크리슨이 실비아를 노려보며 입매를 비틀어 올렸다.
“단전이 생겼다고, 네 죄가 사라지기라도 한 것 같으냐!”
“저는 죄가 없습니다.”
실비아가 평온한 눈빛으로 고개를 저었다.
“가문을 나갈 때 가문에 받은 것을 돌려드렸고, 다시 돌아왔을 때는 가주님의 자비를 받았을 뿐입니다. 제게 남은 죄는 무엇도 없습니다.”
그녀는 당당하게 허리를 폈다. 스스로에게 부끄러움이 없는 기파가 크리슨의 악의를 밀어냈다.
“닥쳐라! 네가 지그하르트에 남긴 얼룩은 지워지지 않아!”
크리슨이 바드득 이를 갈며 고개를 틀었다.
“제가 남긴 얼룩 때문에 지그하르트의 이름이 더럽혀진다면 그건 지그하르트가 너무도 작은 거겠죠. 다만 저는 지그하르트를 그리 작게 보지는 않습니다.”
실비아는 예전과 달리 지그하르트의 이름을 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거기다 옛 지그하르트의 정신을 잃어버린 채 약자에게 행패를 부리는 분들께는 듣고 싶지 않은 말이네요.”
“이게 감히!”
크리슨은 한때 눈조차 마주치지 못했던 실비아의 변화에 속이 뒤집힌 듯 먼저 손을 날렸다.
후우웅!
그 순간. 실비아가 오른손을 말아 쥐었다. 벼락처럼 튀어 나간 그녀의 주먹이 크리슨의 턱을 후려쳤다.
뻐어어어억!
실비아의 뺨을 치려다가 역으로 턱을 얻어맞은 크리슨은 끈 떨어진 인형처럼 주저앉았다.
“크으윽….”
그는 정신을 잃지 않았지만, 뇌가 흔들렸기에 다리만 움직일 뿐 제대로 서지 못했다.
“허어억!”
“크, 크리슨 님!”
“이게 무슨!”
원로원 소속 무인들이 기겁을 하며 크리슨에게 다가갔다.
“정당방위입니다. 저쪽이 먼저 제 몸을 쳤으니까요.”
실비아가 크리슨의 손이 닿은 어깨를 툭툭 털며 고개를 저었다.
“많이도 변했구나. 가문을 떠나기 전에도 그런 성격은 아니었을 텐데.”
부원주 킬루안이 고요함 속에 분노를 담은 눈동자로 실비아를 바라보았다.
“아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어미가 되려면 변할 수밖에 없더군요.”
실비아가 옅은 웃음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크으윽!”
크리슨은 마스터답게 빠르게 정신을 차린 후 다시 킬루안의 앞에 섰다.
“부, 부원주님이 나서실 것 업습니다!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그가 피나도록 입술을 깨문 채 실비아를 노려보았다.
“그래서 무슨 일로 오신 거죠?”
실바아가 여유롭게 턱을 끄덕였다.
“별관에서 가문 내 불법 행위가 목격되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직접 확인을 해봐야겠다!”
크리슨은 사나운 기파를 일으키며 별관의 계단으로 향했다.
치이이잉!
별관 계단의 그림자 속에서 쥬벨이 튀어나와 길을 막아섰다.
“가실 수 없습니다.”
“미천한 놈 주제에 원로원의 행사를 방해하는 것이냐!”
크리슨은 실비아에게 망신당했기에 이성을 잃고, 쥬벨을 향해 검을 내리쳤다. 살기는 담기지 않았지만, 팔을 잘라버릴 기세였다.
실비아가 왼쪽 뒤꿈치를 들었다. 땅을 접은 듯 미끄러져 쥬벨의 앞에 섰다. 왼 손바닥으로 쥬벨의 어깨를 향해 떨어지는 크리슨의 검면을 후려쳤다.
터어어어엉!
크리슨의 몸이 휘청거릴 때 한 걸음 나아가 검집으로 그의 턱을 다시 한번 후려쳤다.
뻐어어어억!
같은 곳을 더 강하게 얻어맞은 크리슨이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가 꼬꾸라졌다. 그의 입에서 하얀 이빨이 옥수수 알갱이처럼 튀어나왔다.
“끄으으으….”
이번에는 정신을 잃은 듯 크리슨의 눈동자가 뒤로 돌아갔다.
“지금 네가 뭘 하는 건지 알고 있나?”
부원주는 부들부들 떠는 크리슨을 바라보다가 섬뜩한 눈빛을 드러냈다.
“저는 별관의 주인으로서 제 사람을 지켰을 뿐입니다. 또한 허가를 받지 않은 사람을 함부로 들여보낼 생각도 없습니다.”
“허가?”
“원로원에 가문 내 감찰 권한이 있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다만 그에 따른 허가증이 필요하죠. 허가증이 없다면 제게는 강도나 도둑과 다름없습니다.”
실비아는 당당하게 고개를 저었다. 원로원은 가주의 독재 권력을 견제하기 위해서 감찰권을 지니고 있지만, 그를 이루기 위한 허가증이 필요했다.
“그 허가증. 내가 말만 하면 나온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
“그럼 가져오시죠.”
그녀는 마음대로 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흥.”
부원주가 손가락을 까딱이자, 무인 한 명이 본관이 있는 쪽으로 부리나케 달려 나갔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 후 다시 그가 돌아왔고, 그의 손에는 별관의 감찰을 허가한다는 증명서가 들려 있었다.
“됐나?”
“예.”
실비아는 가라앉은 눈동자로 길에서 물러섰다.
“오늘 일을 후회하게 될 것이야.”
부원주는 눈매를 가늘게 좁히고서 먼저 별관으로 들어갔다.
“그건 누구도 모르는 일입니다.”
실비아는 그 뒤를 따르며 고개를 저었다.
***
라온이 손에 들린 민트초코 아이스크림을 크게 베어 물었다. 씁쓸하면서도 조금은 상쾌한 맛이 동시에 입안을 채웠다.
-에헤헤헤헤!
라스는 민트초코를 먹자마자, 모두 회복된 것처럼 아이 같은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민트초코! 케헥! 이게 바로 민트초코의 맛이지! 켁! 그리웠느니라! 케에엑!
다만 계속 기침을 하는 걸 보면 상태가 좋지 않은 건 확실해 보였다.
‘한동안은 잘 먹여야겠네.’
라스 덕분에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에 녀석이 먹고 싶어 하는 건 전부 먹기로 결심했다.
“싸가지 왕녀.”
똑같이 민트초코를 먹고 있던 루난이 조용하게 손가락을 들어 오른쪽을 가리켰다.
“음?”
라온이 그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큼지막한 안경을 쓴 채 두꺼운 마법서를 읽으며 걸어가는 여성 마법사가 보였다. 얼마나 집중했는지 책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저게 제이나라고?’
왕녀 제이나는 항상 화려함을 몸에 휘감았고, 많은 수하와 함께 다녔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화장기 없는 얼굴에, 장신구도 착용하지 않았으며, 수하들도 보이지 않았다.
모르고 봤다면 평범한 마법사라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그 이유 때문일까. 예전에 보았을 때와는 격이 다를 정도로 높은 성취를 이룬 것 같았다.
“우와….”
도리안도 제이나를 보며 헛바람을 흘렸다.
“저게 그 싸가지 왕녀라니….”
그 역시 암시장에서부터 제이나를 보았기에 놀라운 그대로 드러냈다.
“처음 봤을 때랑은 딴판이네요. 제가 데리고 올까요? 그 반지 이야기를 해주면 좋아서 죽을 텐데?”
“아니, 됐어.”
라온이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 집중하는 사람을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다.
‘사람이 정말 바뀌기는 하는군.’
전생에서는 사람이 절대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 삶을 살며 그게 아니라는 것을 여러 번 깨닫게 되는 것 같았다.
‘다만 데루스 로베르트. 너는 평생 변하지 않겠지.’
놈이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기에 자그마한 망설임도 없이 복수를 계획할 수 있었다.
데루스에 대한 복수를 떠올리니, 정반대로 별관의 가족들이 생각났다.
“후….”
라온은 남은 아이스크림을 다 먹고 고개를 저었다.
‘별관에서 좀 쉬고 싶네.’
-별관에서 더 먹고 싶네.
‘…….’
진짜 분위기 깨는 데에는 뭐가 있는 마왕이었다.
***
“가주님.”
비연회주 채드가 글렌 앞에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였다.
“라온 님에 관한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소식?”
세상 무엇에도 관심 없다는 듯 창밖만을 바라보던 글렌이 천천히 등을 돌려서 옥좌에 앉았다.
“말해보거라.”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 목소리가 가라앉았지만, 그의 눈빛을 빨리 말하라는 듯 별자리처럼 출렁였다.
“도검존의 무덤에서 그의 유산을 얻은 무인이 바로 라온 님이라고 합니다!”
채드는 놀라운 소식이니만큼 목소리를 높여서 외쳤다.
“그, 그게 정말이냐?”
글렌은 앉은 지 3초도 되지 않아서 다시 벌떡 일어섰다. 그의 입매가 지붕에 쌓이는 눈처럼 천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예!”
채드는 확실하다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허허허.”
“정말 도검존의 유산을 먹었다고? 대단한데?”
로엔과 셰릴이 놀랍다는 듯 눈을 부릅뜬 채 미소를 그렸다.
“크흐흠!”
글렌은 그런 두 사람의 반응을 즐기듯이 턱을 살짝 내민 채 어깨로 춤을 췄다.
“이 정도로 기뻐하시면 곤란합니다.”
채드가 마른침을 삼키며 당차게 시선을 들어 올렸다.
“라온 님은 도검존이 저희 지그하르트의 선조였고, 그 무덤이 있는 땅 역시 지그하르트의 소유였다는 것을 알아내셨다고 합니다!”
“뭐?”
글렌도 그것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도검존이 지그하르트의 선조였다고?”
“예! 분명한 사실입니다. 광풍대나 공검대만이 아니라, 무덤에서 나온 중립 세력들까지 모두 같은 증언을 했습니다.”
채드가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상상도 못 했는데.”
셰릴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허허허, 라온 님이 정말 큰 공을 세우셨군요.”
로엔이 평소의 웃음을 더 짙게 흘리며 박수를 쳤다.
“단순한 공 수준이 아닙니다. 역사가 바뀌는 일이니까요!”
채드 역시 흥분한 듯 손을 흔들었다.
“커허허험!”
글렌의 헛기침을 하면서 점점 붉어지는 볼을 매만졌다.
“조, 조금 하는군.”
로엔과 셰릴, 채드의 반응이 격해질수록 그의 입꼬리도 계속 올라갔다.
“그 땅이 저희의 것이라면 사람을 보내서 관리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조금 떨어져 있으니, 미리 확실하게 기둥을 박아 놔야죠.”
셰릴이 지금부터 관리를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다며 턱을 매만졌다.
“물론 그게 맞습니다만, 급할 필요는 없습니다.”
채드가 연한 웃음을 그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왜지?”
“사실 라온 님이 무덤을 나온 후에….”
그는 라온이 수백 명의 대가리를 깨고 해검지를 세운 것을 말해주었다
“그럼 이미 그곳이 성역처럼 되었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홀로 수백의 대가리를. 아니, 머리를 부쉈지만, 살생은 하나도 하지 않았다는 점이 더 큰 공포와 존경심을 일으켰다고 하여 해검지라는 이름의 성역이 되었습니다.”
채드는 본인도 어이가 없다는 듯 헛바람을 흘렸다.
“로엔!”
글렌이 시선을 돌리며 로엔의 이름을 외쳤다.
“지금 적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이 땅은 지그하르트의 영역이다. 10초를 주마. 무기를 내려놓던가. 꺼지던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
로엔은 라온이 도검존의 무덤 앞에서 외쳤던 말을 라온 복음에 적기 시작했다.
“그 녀석 사고 한번 제대로 쳤네.”
셰릴 역시 라온의 활약이 기쁜 듯 시원한 웃음을 숨기지 않았다.
“뭘, 그리 칭찬만 하는 것이냐.”
글렌은 라온 복음을 적으라고 할 때가 언제였냐는 듯 고개를 돌렸다.
“지그하르트의 땅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일 뿐이다!”
다만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말한 그의 귓불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고, 입꼬리도 광대뼈에 닿을 정도로 올라가 있어서 뒤에서도 웃고 있다는 게 보일 정도였다.
“그래서 아이들은 언제 돌아오지?”
글렌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광풍대가 아니라, 아이들이라는 표현까지 했다. 목소리가 바르르 떨렸다.
“발카르에 가셨지만, 곧 돌아오실 겁니다.”
“…그런가.”
글렌은 바로 돌아오지 않는 것에 실망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본인도 모르게 다리를 떨자, 가주전 전체가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가주님! 금방 돌아올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예. 선물을 가지고 오는데, 조금은 늦는 게 맞죠.”
셰릴과 로엔은 천장에서 떨어지는 먼지를 보며 연한 웃음을 흘렸다.
“누가 걱정을 했다는 것이냐! 그저 궁금했을 뿐이다!”
그 말과 달리 가주전이 점점 더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드려야 할 게 하나 더 있습니다.”
채드가 얼굴에 피어난 웃음을 모두 지운 채 시선을 내렸다.
“가주님께서 더 잘 알고 계시겠지만 현재 원로원이 별관을 점거하고, 감찰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아주 노골적으로 괴롭히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는 원로원의 행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실비아 님을 이용해서 라온 님을 통제하겠다는 뜻이겠지요.”
로엔이 드물게도 눈살을 찌푸렸다.
“흐음, 제가 가서 처리할까요?”
셰릴이 가볍게 어깨를 돌렸다. 말만하면 당장 치워버릴 기세였다.
“원로원의 감찰권은 초대부터 내려온 조항이다. 권력 분립을 위한 조치이기에 가주전의 힘으로도 막을 수 없다.”
글렌이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하려면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셰릴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 막을 수는 있겠지. 다만 그들은 그걸 기다렸다는 듯 다른 방법으로 더 지독한 시비를 걸어올 것이다.”
글렌은 원로원의 생각을 읽고 있는 듯 고개를 저었다.
“결국 별관의 힘으로 싸워야 한다는 뜻이군요.”
로엔이 담담하게 턱을 주억였다.
“하지만 별관에는 아무런 권한도 없습니다. 버티는 것도 힘들 겁니다.”
채드가 걱정이 된다는 듯 마른침을 삼켰다.
“맞는 말이다. 다만 이번에 광풍대주가 아주 큰 공을 세웠으니.”
글렌이 채드를 내려다보며 서늘한 안광을 번뜩였다.
“그의 소원을 하나 들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구나.”
채드는 그 말의 의미를 알아듣고서 바로 몸을 일으켰다.
“빠르게 알리겠습니다!”
***
원로원의 감찰이 시작된 지 열흘이 지났다.
“이 바닥에 뭔가 숨겨둔 것 같은데, 열어보도록.”
“창틀이 비틀어져 있잖아! 부숴버려!”
“천장에 틈이 보인다! 뜯어내!”
원로원의 무인들은 멀쩡한 바닥과 벽, 천장을 부순 후 바로 다음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
“이 더러운 것들을 안 치우고, 뭐하나!”
“청소조차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니, 위생 상태는 무조건 최악으로 적어주지.”
“이런 곳에서 음식을 만들고 먹을 생각을 한 건가? 거지 소굴도 아니고.”
그들은 본인들이 헤집었던 잔해를 치우지도 않은 채 오히려 뒷정리하는 시녀들을 조롱하고 괴롭혔다.
“죄송합니다.”
“지금 바로 치우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별관의 시녀들은 라온과 실비아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 원로원 무인들의 패악을 꾹 참은 채 난장판이 된 집안을 정리하고, 부서진 천장과 바닥을 직접 수리했다.
열흘 동안 쉬지 않고 움직였더니, 그들의 손과 발에는 푸른 멍까지 들어 있었다.
실비아 역시 시녀들과 함께 별관을 정리하고, 청소를 도왔다.
크리슨과 원로원 무인들의 괴롭힘이 가장 심했음에도 그녀는 처음 자세 그대로 모든 것을 감내했다.
“마님.”
헬렌이 무너진 벽의 잔해를 치우는 실비아에게 다가가서 고개를 숙였다.
“조금 쉬세요. 새벽부터 계속 일만 하셨잖아요.”
“난 괜찮아. 헬렌부터 쉬어.”
실비아는 미소를 그리며 헬렌의 어깨를 두드렸다.
“저는 괜찮지만, 아이들이 힘들어하고 있어요.”
헬렌이 검은 때가 가득한 걸레를 내려놓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곧 쓰러지는 시녀들이 나올 거라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겠지. 다만 지금은 방법이 없어.”
실비아가 고개를 저었다.
“힘을 사용하는 건 저들이 바라는 일이니까.”
부원주는 적법한 방법으로 별관을 괴롭히고 있다.
여기서 강제로 힘을 사용한다면 저들이 바라던 대로 라온에게 큰 피해를 주게 될 것이다.
“잘 알고 있구나.”
우측에서 나지막한 음성이 들려왔다. 시선을 돌리니, 도괴가 망가진 창틀에 걸터앉아 있었다.
“원로원은 저런 뱀 같은 늙은이들이 가득한 곳이지. 내가 원로원을 나온 건 저런 늙은이들의 꼴을 보고 싶지 않아서기도 했다.”
도괴는 좋은 늙은이보다 추잡한 늙은이가 많다며 미간을 구겼다.
“너희들의 한숨 소리가 너무 들어와서 술맛까지 떨어지더구나.”
그는 그 말을 하면서 손에 들고 있던 작은 종이 한 장을 던지고서 사라졌다.
“아….”
실비아는 도괴에게 받은 종이를 펼쳐본 후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녀는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서 별관 밖으로 나갔다.
“그쪽을 더 파! 손을 멈추지 마라!”
크리슨이 턱에 붕대를 감은 채 시녀들에게 정원을 파헤치도록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대부분의 시녀들은 지쳐서 손을 떨고 있었고, 주디엘과 그녀의 동생 쥬벨만이 다른 시녀들이 쉴 수 있도록 끝없이 팔을 움직였다.
“아아, 그쪽은 됐어. 이제는 반대편을 파도록.”
크리슨은 시녀들을 놀리듯이 비웃음을 그리고서 다른 장소를 파도록 지시했다.
덕분에 꽃이 반말했던 정원은 전쟁이 터진 것처럼 황폐하게 변해 있었다.
부원주는 망가진 정원의 중심에 고급스러운 테이블을 놔둔 채 다과를 즐기고 있었다.
“부원주님.”
실비아는 평온한 눈빛으로 그에게 다가가서 고개를 숙였다.
“뭐지?”
부원주는 우아한 자세로 찻잔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이제 그만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만하라?”
그가 비웃음을 그린 채 시선을 들었다.
“열흘이 지났어도 그 거만함은 버리지 못했구나. 아주 건방져.”
“…….”
실비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분한 눈동자로 부원주를 바라보았다.
“이 상황을 끝내는 건 네가 아니라 나다. 결정권이 누구에게 있는지 잊어서는 곤란하지.”
부원주는 피 묻은 손으로 삽질을 하는 시녀들을 보며 입매를 비틀어 올렸다.
“저들이 고생하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텐데? 지금 네 행동은 좋은 길이 아니야.”
“조금 편하자고, 더러운 인간에게 머리를 굽히는 것도 좋은 선택은 아니지요.”
“끝까지….”
그가 입매를 비틀었다.
“설마 허가증의 날짜가 끝나는 걸 믿는 것이냐? 착각이 너무도 크군. 허가증의 연장은 너무도 쉬운 일이다.”
부원주는 끝까지 가보자는 거냐며 소리를 높였다.
“부원주님이야말로 크게 착각을 하시는군요.”
“뭐?”
“저는 진심으로 부원주님을 생각해서 드린 조언입니다. 마지막으로 말씀드리죠. 본인을 위해서라도 그만 돌아가시는 게 좋을 겁니다. 그러면 지금까지의 일은 묻지 않겠습니다.”
실비아는 본인이 더 우위에 있는 것처럼 당당한 눈빛을 보였다.
“정신이 나간 모양이군. 좋다 어디 끝까지 가보지!”
부원주는 크리슨을 시켜서 새로운 허가증을 받아오라고 지시를 내렸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실비아는 그런 부원주를 뒤로하고, 땅을 파고 있는 시녀들에게 다가갔다.
“마님. 저희는 괜찮습니다.”
“마, 맞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얼마든지 버틸 수 있어요!”
주디엘과 시녀들이 걱정 말라며 고개를 저었다.
“정말 미안해.”
실비아는 옅게 웃으며 손에 꼭 쥐고 있던 도괴의 편지를 파여진 땅에 떨어뜨렸다.
[라온 지그하르트 오늘 저녁 안으로 복귀 확실. 그에게 원로원을 패악을 막을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질 예정. -제비]
도괴의 손을 통해서 온 비연회의 정보에 주디엘과 시녀들의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조금만 참으렴.”
실비아가 그 종이를 땅속에 묻으며 옅게 웃었다.
“저들의 대가리. 아니 머리통이 깨지는 걸 보게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