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646화 (645/653)
  • 제646화

    왕도 뒤편의 작은 주점.

    대낮임에도 주점 내부에는 술과 식사를 즐기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자네. 혹시 해검지라는 말을 들어 보았나?”

    갈색 로브를 입은 마법사가 술잔을 내려놓으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해검지? 처음 듣는데?”

    맞은편에 앉아 있던 기사가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

    “하여튼 소식이 느리군.”

    “어제까지 전선에 있었는데, 왕도 소식을 아는 게 이상하지.”

    “왕도 이야기가 아니라, 도검존 무덤과 관계된 일이네.”

    “도검존의 무덤?”

    “설마 도검존의 무덤이 발견된 것도 모르는 건가?”

    “그건 당연히 알지!”

    기사가 무시하지 말라며 콧잔등을 찌푸렸다.

    “사실 도검존은 중립이 아니라, 지그하르트 소속이었다고 하더군. 그의 무덤이 발견된 장소 역시 지그하르트의 땅이었고.”

    갈색 로브의 마법사가 상체를 앞으로 기울인 채 도검존의 비밀을 밝혔다. 그의 말을 듣기 위해서일까, 시끄러웠던 주점 내부가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저, 정말인가?”

    기사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벌떡 일어났다.

    “그곳에서 살아나온 사람들이 모두 같은 소리를 하는 걸 보면 절대 거짓이 아니네.”

    “그럼 도검존의 유산은….”

    “선대의 배려 덕인지 광풍대주. 라온 지그하르트가 먹었지.”

    갈색 로브의 마법사가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허, 지금도 괴물인데, 도검존의 유산을 얻었으면 어디까지 성장할지 상상이 안 가는군….”

    기사는 라온이 부러운 듯 말까지 더듬었다.

    “그래. 괴물이 날개를 단 격이지.”

    “그런데 처음에 말했던 해검지는 뭔데? 라온 지그하르트와 관계된 건가?”

    “이제 좀 눈치가 돌아온 모양이군. 맞네.”

    마법사는 주점 전체가 본인에게 주목한다는 것을 느끼고 목소리를 높였다.

    “자네도 예상했겠지만, 도검존의 유산을 노리던 모두가 무덤에 들어가지는 않았네. 상당수는 무덤 밖에서 동맹을 한 채 기다리고 있었지. 유물을 가지고 나오는 쪽을 습격하기 위해서.”

    “하이에나 짓을 하려고 했군.”

    기사는 추한 놈들이라며 미간을 찌푸렸다.

    “맞네. 지쳤고, 부상을 입었을 테니까. 그 틈을 노리려고 한 거지. 다만….”

    갈색 로브의 마법사가 입술을 꾹 내리눌렀다.

    “그놈들은 ‘대가리에 미친 괴물’을 염두에 두지 못했네.”

    “대, 대가리에 미친 괴물?”

    “라온 지그하르트 말이야. 그는 무덤 밖으로 나와서 습격받기 전에 먼저 선언을 했다고 하더군. 지금부터 이곳은 지그하르트의 땅이니까. 검을 내려놓거나, 꺼지라고.”

    “그, 그래서? 그 뒤는?”

    기사가 흥분한 듯 잔을 잡은 손을 떨었다. 주점 안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집중하여 숨을 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10초 후 라온 지그하르트가 검집 하나만 들고 그곳에 있던 무인과 마법사들을 모조리 조져버렸다고 하네. 하나도 빼놓지 않고 전부 대가리가 깨졌지.”

    “대, 대가리가?”

    “무인만 수백이 있었는데, 죽은 사람은 하나도 없고, 모조리 대가리만 깨졌어. 그야말로 공포….”

    갈색 로브의 마법사는 두렵다는 듯 어깨를 바르르 떨었다.

    “나중에는 무기를 버리고 도망쳐도 대가리를 으깨버렸다고 하네. 그래서 지금 도검존의 무덤 앞에는 버려진 무기와 머리에서 흘러내린 피로 붉은 산이 만들어졌다더군.”

    “그래서 대가리에 미친 괴물인 건가….”

    “맞네. 홀로 수백 명의 대가리를 깨버린 공포와 사망자는 하나도 만들지 않은 나름의 배려에 감명받아서 지금은 그 땅을 검을 풀어야 하는 지그하르트의 성지. 해검지라고 부르고 있네.”

    그는 라온이 무서우면서도 존경스럽다며 고개를 저었다.

    “후우, 믿기질 않는군. 수백 명의 무인을 검집만으로 후려 팼다니….”

    “후려 팬 게 아니라, 대가리를 깼다니까.”

    “아니, 대가리고 뭐고. 난 잘 안 믿겨.”

    기사는 이해할 수가 없다며 눈매를 찡그렸다.

    “도검존의 무덤에서 유산을 얻었다면 오마나 다른 세력과도 싸웠을 거 아닌가. 그런데 어떻게 수백 명을 쓰러뜨릴 수 있는 거지?”

    “쓰러뜨린 게 아니라, 대가리를 깼다고!”

    “그래. 대가리! 그 대가리를 깬 게 안 믿긴다고!”

    “저기에 증거가 있지 않은가.”

    갈색 로브의 마법사가 손가락을 들어 우측을 가리켰다. 기사만이 아니라, 주점에 있던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에헤헤헤….”

    “이히히히….”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는 검사와 마법사가 빈 술잔을 머리에 올리며 기괴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저 두 사람이 그 지옥에서 살아온 무인들이네. 대가리가 깨져서 돌아온 이후에도 계속 저 상태지. 치료사가 말하길 회복되려면 반년은 있어야 할 거라네.”

    “저, 저게 살아온 거야?”

    기사는 넋이 나간 두 사람을 보며 입을 떡 벌렸다.

    “일단 살기는 했잖은가.”

    갈색 로브의 마법사가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

    “해검지….”

    기사는 터럭이 얼마 남지 않은 본인의 머리를 매만지고서 마른침을 삼켰다.

    “그쪽으로는 오줌도 싸지 말아야겠군….”

    ***

    “…그렇게 소문이 퍼지고 있어.”

    체임버가 방긋 웃으며 손을 저었다.

    “…….”

    라온이 질끈 눈을 감았다.

    ‘대가리에 미친 괴물이라니….’

    소문이 너무 이상하게 났어.

    강해진 무력을 시험하고, 지친 광풍대가 피해를 입지 않도록 빠르게 정리했을 뿐인데, 예상치도 못한 소문이 퍼져버렸다.

    다만 아예 나쁜 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그 지역을 지그하르트의 소유로 인정해주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뜻이었으니까.

    -대가리 깨기가 통했구나! 그 대가리 말고, 이 대가리 말이다. 케헥! 켁!

    라스가 본인의 머리를 톡톡 치다가 마른기침을 내뱉었다.

    ‘말만 하면 기침을 하잖아. 좀 가만히 있어.’

    라온은 라스를 팔찌 안으로 밀어 넣고서 체임버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지금 저와 함께 계시는데, 소문은 어떻게 들으시는 겁니까?”

    “대마법사가 그 정도도 못 할까.”

    체임버는 마법사를 무시하지 말라며 입에 막대사탕을 물었다.

    “사실 난 네 말을 모두 믿지 않았거든.”

    그녀의 눈동자가 요요로운 빛으로 번뜩였다. 조금 전까지 친근함만을 보이던 마법사는 이 자리에 없었다.

    “외부의 소문을 종합해서 네 말이 맞는지를 확인했는데, 그리 어긋나지 않는 것 같네.”

    그 말이 귓속에 들어옴과 동시에 체임버의 분위기가 다시 어린 아이를 보는 것처럼 가벼워졌다.

    라온이 입술을 깨물었다.

    ‘무서운 사람이다….’

    겉으로는 웃으면서 속으로는 소문과 내 증언을 대조하다니, 보이는 대로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역시나 육황이라는 소리가 나왔다.

    “그래서 대가리를 깬 건 맞지?”

    “…깬 건 맞는데, 소문이 이렇게 빨리 퍼질 줄은 몰랐습니다.”

    나름 빠르게 이동했는데, 소문이 먼저 움직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본래 소문은 발보다 빠른 법이야. 왕도만이 아니라, 대륙 전체로 퍼지고 있을걸? 그 지역 먹기 쉽겠는데?”

    체임버는 축하한다며 가볍게 박수를 쳤다.

    “그보다 한 명도 죽이지 않았다니, 대단하군. 강자가 가져야 할 자세가 되어 있어.”

    레크로스 국왕이 대견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지. 속이 뻔한 놈들이잖아. 대가리를 깰 게 아니라, 목을 따버리는 게 옳아.”

    체임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눈썹을 내렸다.

    “쿠잔과 바르필 님의 일이 있었기에 피를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음, 그렇겠군.”

    레크로스 국왕이 이해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대가리 깨서 바보를 만드는 게 더 무서운 거 아니야?”

    체임버가 턱에 손가락을 올린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두 분께 보여드려야 할 게 하나 남았습니다.”

    라온은 할 말이 없기에 바로 말을 돌렸다.

    “보여줘야 할 거?”

    “말을 돌리는 것 같지만 뭐, 좋아.”

    체임버가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겁니다.”

    두 사람을 보며 암류가 깃든 검집 조각을 꺼냈다. 조각은 아직 검게 물들어 있었다.

    “도자기 조각인가?”

    “굉장히 암울한 기운이 느껴지는데?”

    차원 너머에 있는 레크로스와 달리 체임버는 조각을 보자마자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제가 무덤 주변에 있던 무인들을 쓰러뜨린 이후에….”

    라온은 체임버와 레크로스에게 데루스에게 습격을 받았던 상황을 말해주었다.

    “그럼 이 검은 기운이 널 습격한 놈의 오러라는 거야?”

    “그렇습니다. 이번 일을 계획한 세력의 수장으로 여겨집니다.”

    제천검의 겁집은 천하장인 발칸이 직접 만들었다. 내부의 오러를 가두는 효과가 있기에, 짧은 기간이지만 데루스의 암류를 가둘 수 있었다.

    “잠깐. 설마 이 안에 담긴 기운은 죽음인가?”

    체임버가 검집 조각을 만지며 입술을 씹었다.

    “예. 최소 초월자가 날린 오러입니다. 아리스 님의 말대로라면 저희 가주님에게도 닿을 수준이라고 하더군요.”

    “그 해적 계집이?”

    “예.”

    “걔 눈깔이면 헛것을 보지는 않을 텐데….”

    그녀는 놀랍다고 말하며 입술을 매만졌다.

    “확실히 이건 귀중한 정보네. 고마워.”

    체임버가 고요한 빛을 띈 눈동자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좀 보았으면 좋겠군.”

    레크로스가 검집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난 기억했으니까. 보내줄게.”

    체임버가 손가락을 튕기자,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검집이 레크로스의 손으로 이동했다.

    “허어….”

    레크로스가 검집을 보며 헛바람을 흘렸다.

    “정말 죽음이 어려있군. 이런 기운이 존재했다니….”

    그도 놀란 듯 푸른 눈동자를 부릅떴다.

    다만 라온은 다른 의미로 놀라고 있었다.

    ‘이동 마법이 저렇게 쉬운 거였나?’

    발카르와 오웬의 거리는 상당하다. 조금 전에 검을 보내놓고, 이번에는 저 검집 조각을 손가락 하나로 이동시켰다.

    체임버가 아무리 대마법사라고 해도 이동 마법을 저렇게 자유자재로 사용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렇게 놀랄 거 없어.”

    체임버가 라온의 의문을 이해한다는 듯 옅게 웃었다.

    “이 방과 저 녀석의 방 사이에는 작은 차원의 선이 연결되어 있으니까.”

    “차원의 선이요?”

    라온이 레크로스를 보자, 그가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두 분이 생각 이상으로 친하셨군요.”

    “그녀는 내 스승이었으니까.”

    “스승이요?”

    “그렇다네. 내가 5살 때부터 교양 스승을 해주었지. 신분까지 속이고 들어왔어.”

    레크로스는 옛 생각이 난다는 듯 은은한 미소를 그렸다.

    “왜 옛날이야기까지 하고 그래!”

    체임버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모자를 눌러썼다.

    라온이 눈을 끔벅였다.

    ‘5살? 교양 스승?’

    레크로스는 중년의 나이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글렌과도 다를 바 없는 노년이다.

    그의 그가 5살 때 교양 스승을 해줄 정도라면 체임버의 나이는 예측을 한참 벗어나 있었다.

    “그럼 체임버 님 나이가….”

    그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달싹였다.

    띡!

    그 순간 라온의 시야가 뚝 끊겼다.

    ***

    “으음….”

    라온이 떨리는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낯선 천장이 보인다. 별자리를 보는 듯 기하학적인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여기는….’

    -하여튼!

    라스가 구긴 얼굴을 들이밀었다.

    -네놈은 항상 그 주둥아리가 문제이니라!

    ‘주둥아리? 내가 뭘 했지?’

    라온이 관자놀이를 매만지며 이마를 찌푸렸다.

    -에휴! 됐느니라!

    라스가 넌 안 된다고 중얼거리며 손을 저었다.

    “일어났네.”

    아리스의 목소리다. 우측을 보니, 그녀가 소파에 앉은 채 웃고 있었다.

    “너 그 마녀한테 뭐라고 했어? 그렇게 얼굴을 구긴 건 처음 보는데?”

    “아….”

    얼굴을 구겼다고 하니, 생각이 난다. 나이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시야가 어두워진 게 떠올랐다.

    “체임버 님에게 나이를 물어봤습니다.”

    “아! 그래서!”

    아리스가 참지 못하고 폭소를 터트렸다.

    “아아, 그럴 만도 하네. 사실 그 마녀의 나이가 백….”

    그녀가 말을 하려고 할 때 천장이 뒤틀리고, 마른하늘에서 벼락이 내리쳤다.

    쿠우우우우웅!

    아리스는 무너질 것처럼 흔들리는 천장을 올려보다가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그녀는 눈치를 보듯이 손을 저었다.

    “마녀. 아니, 체임버 님은 뭐라고 하셨어?”

    “두 분 다 오히려 제게 고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라온이 상체를 들어 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두 분 덕분에 살았는데, 왜 고맙다는 말을 들었는지 모르겠어요.”

    “그건 당연한 일이다.”

    리메르가 문을 열고 들어오며 고개를 저었다.

    “쿠잔과 바르필은 죽으면서까지 널 살리고자 했고, 너는 그 두 사람이 기대한 대로 흑막을 죽이고, 사람들을 구해냈어. 수하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았으니, 고맙다고 말씀하신 거다.”

    그는 평소와 달리 진중한 눈빛으로 말을 이어갔다.

    “그게 육황의 수장으로서 가져야 할 자세다. 너도 이 기회에 배워두도록.”

    “…알겠습니다.”

    리메르가 저런 조언을 하는 건 드물다. 레크로스 국왕과 체임버의 눈빛과 목소리를 다시 한번 가슴에 새겼다.

    “받아.”

    아리스가 검게 물든 검집 조각을 던져 주었다.

    “두 분 다 잘 확인했고. 수색에도 도움을 주겠다고 하셨어.”

    “아, 감사합니다.”

    라온이 검집 조각을 받아서 조심스럽게 품에 넣었다.

    ‘이제 다 끝났군.’

    발카르에 온 이유는 쿠잔과 바르필의 죽음을 알리는 게 다가 아니었다.

    데루스 로베르트가 남긴 암류를 체임버와 레카르트 국왕에게 알리는 것도 목적이었는데, 제대로 받아들여 준 모양이다.

    데루스가 혹시라도 암류를 쓰게 된다면 두 사람의 시선에 잡힐 테니, 아주 큰 수확이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거냐?”

    리메르가 팔짱을 낀 채로 턱을 까딱였다.

    “지그하르트로 돌아가야죠.”

    -케헥! 켁!

    “다만….”

    라온은 라스의 기침 소리를 들으며 옅게 웃었다.

    “돌아가기 전에 민트초코 아이스크림 하나만 먹고 가야겠어요.”

    -오오!

    라스가 빽 소리를 지르며 팔찌 위로 튀어나왔다.

    -민트초코를 먹는다고 하니까 갑자기 기침이 멎었느니라! 역시 민초의 힘은 굉장하느니라!

    ‘기침이 멈췄으면 먹을 필요가 없는데….’

    -케헤헥! 케에에엑! 끼에에에에에엑!

    라스는 짐승이 된 것처럼 울부짖기 시작했다. 녀석의 목에서 피가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먹을 테니까. 그만해.’

    ***

    지그하르트 별관 앞 정원에 흑의를 입은 한 무리의 사람들이 서 있었다.

    “정원이 넓어졌군요. 아니, 건물도 증축한 건가?”

    무리 중 가장 앞에 서 있는 금발의 중년인이 정원과 별관 건물을 살피며 비웃음을 흘렸다.

    “저것부터 시작하면 될 것 같습니다. 부원주님.”

    그가 우측에 선 백발의 노인에게 고개를 숙였다.

    “멍청한 소리 마라. 크리슨.”

    부원주라고 불린 노인이 한심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정원은 본래부터 이 크기였고, 별관 증축은 가주의 허가를 받았다. 쓸데없는 부분을 건드렸다가는 오히려 역공을 당할 수도 있다. 제대로 조사를 하지 않은 모양이군.”

    “죄, 죄송합니다.”

    크리슨이 뒷머리를 잡으며 고개를 숙였다.

    “어차피 라온 지그하르트가 없으면 다 허수아비라 생각해서 그냥….”

    “쯧.”

    부원주가 짧게 혀를 찼다.

    “방계의 잡것들을 눌러주던 카룬이 저 꼴이 되었으니, 정신 제대로 차리도록. 라온 지그하르트의 목줄을 잡을 수 있는 건 이곳밖에 없다.”

    “그런데 그게 정말 잘 될지 모르겠습니다….”

    크리슨이 걱정된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산만 한 사자를 제압하는 방법을 알고 있느냐?”

    “음, 그게….”

    “뒤로 달려들어서 목덜미를 강하게 움켜쥐면 꼼짝도 하지 못한다. 어릴 적 어미에게 목덜미가 물리던 기억을 잊지 못한 것이지.”

    부원주가 입매를 비틀었다.

    “라온 지그하르트의 목줄을 쥐기 위해서는 먼저 실비아의 목에 목줄을 걸어야 한다.”

    그가 혐오를 담은 눈동자로 별관을 노려보았다.

    “지그하르트를 제 발로 기어나간 도망자 년과 누구의 씨인지도 모를 잡것이 지그하르트의 중추에 서는 건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볼 수가 없어.”

    “맞는 말씀이십니다.”

    크리슨도 그것만큼은 받아들일 수 없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정신 똑바로 차리고 따라오도록.”

    부원주가 싸늘한 눈빛을 세우며 별관으로 걸어갔다. 크리스와 원로원 소속의 무인들이 그 뒤를 따랐다.

    찌지직.

    그들은 길이 있음에도 정원에 피어난 꽃을 짓밟으며 별관의 앞에 섰다.

    “크흠.”

    부원주의 눈짓을 받은 크리스가 목을 가다듬고 앞으로 나왔다.

    “원로원의 행사다! 별관의 인원은 모두 밖으로 나오라!”

    겁을 주기 위해서 먼저 외쳤건만, 그의 목소리는 별관에 닿기 직전에 사라져버렸다.

    우우웅.

    별관의 정문이 고요하게 열리고, 백색 무복을 입은 햇살을 녹인 듯한 금발의 여검사가 걸어 나왔다.

    “으음….”

    부원주는 고요하게 가라앉은 여검사의 붉은 눈동자를 마주하며 입술을 씹었다.

    ‘저게 그 실비아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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