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45화
“제 입으로 말하기에는 민망하지만, 저대로 보내줘도 되는 겁니까?”
세레나가 한참 멀어진 검귀 렉타르를 보며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지그하르트의 대주로서 성검련의 간부를 멀쩡하게 보내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아쉽지만, 저 영감탱이가 나보다 강해.”
아리스가 세레나를 향해 가볍게 손을 저었다. 그녀는 본인 무력의 부족함을 솔직하게 밝혔다.
“거기다 라온을 습격했던 초월자가 아직 남아 있을지도 모르잖아. 우리 쪽에 부상자도 많은데 괜히 희생자를 늘릴 필요는 없어.”
“하아, 죄송합니다. 아직 머리에 쏠린 피가 빠지지 않은 모양입니다.”
세레나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떨궜다. 본인의 부상을 살피는 시선이 가늘게 떨렸다.
“괜찮아. 그럴 때도 있지.”
아리스는 이해한다는 듯 세레나의 머리를 가볍게 쓸어내려 주었다.
“와, 사람이 진짜 변하기는 하네.”
리메르가 아리스를 보며 헛바람을 길게 흘렸다.
“지그하르트 최고의 망나니가 어떻게 저런 말을….”
“뒈질래?”
아리스는 언제 미소를 지었냐는 듯 리메르를 보며 악귀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별일 없이 끝나서 다행이네요.”
버렌이 숨을 고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전 이제 서 있을 힘도 없었는데.”
“광풍대 조장이라는 놈이 한심하네.”
마르타가 버렌을 내려보며 길게 혀를 찼다.
“나찰녀. 다리 떨려.”
루난이 마르타의 다리를 손가락으로 꼭 찍었다.
“으아악! 이 미친 게 진짜!”
마르타가 루난을 향해 달려들려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서 주저앉았다.
광풍대는 루난과 마르타가 투닥이는 모습을 보며 오랜만에 얼굴에 미소를 피워냈다.
다만 라온은 광풍대가 아니라, 렉타르가 사라진 방향을 쫓으며 주먹에 힘을 주었다.
‘역시 사정이 있으셨던 거야.’
무스턴이 나를 위해서 움직이고 있다면, 그가 따르는 렉타르도 결국 나를 도와주기 위한 행동을 하고 있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거기다 단순히 무스턴의 반응만으로 렉타르를 옹호하려는 게 아니다.
라키온 가문에서 만났을 때도, 오늘도 렉타르가 원했다면 전면전이 벌어졌을 텐데, 그는 두 번 다 순순히 물러났다.
만약 전투가 벌어진다면 성검련의 피해도 크겠지만, 지친 우리는 전멸을 당할 텐데, 그는 아무런 미련도 없이 등을 돌렸다.
오마 중에서도 검에 미쳤다는 성검련의 행동치고는 이상한 일이었다.
‘이제야 다 이해가 가.’
정확한 사정까지는 모르겠지만, 렉타르는 성검련주에게 억지로 속박되어있는 게 분명했다.
-네놈이 정에 기댈 때가 다 있다니, 신기하구나.
라스가 오동통한 손으로 머리를 잡으며 탁한 숨을 내뱉었다.
-기대했다가는 실망할 수도 있느니라.
‘정에 기대는 게 아니라, 합리적으로 생각한 거야.’
-됐고. 합리적으로 빨리 밥이나 먹으러 가자. 케헥!
녀석이 힘이 쭉 빠진 음성으로 말하다가 마른 기침을 내뱉었다. 굉장히 피곤해 보였다. 기운 자체가 크게 쪼그라든 것도 같았다.
‘그래. 일단 밥부터 먹자.’
-오? 네놈이 웬일이냐?
‘웬일은 무슨.’
라온이 살랑거리는 라스의 꼬리를 만지며 고개를 저었다. 라스에게 큰 도움을 받았으니, 녀석이 원하는 건 일단 해주고 싶었다.
‘대신 집밥은 조금 나중에 먹고.’
-음? 어디 가려고?’
‘그게….’
라온이 대답을 하려고 할 때 리메르가 손뼉을 치며 앞으로 나왔다.
“무덤 안은 카이얀이 지키고 있으니까. 여기는 나중에 정리하고, 일단 지그하르트로 돌아가자.”
“그 전에 가야 할 곳이 있습니다.”
고개를 저으며 아공간 주머니에서 부러진 검과 지팡이를 꺼냈다.
“가야 할 곳? 아….”
리메르는 부러진 검과 지팡이를 보자마자,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 거기는 가야겠지.”
***
렉타르는 수하들을 성검련으로 보내놓고, 홀로 도검존 무덤의 반대편에 있는 산으로 올라갔다.
본래라면 함께 련으로 돌아가야 했겠지만, 라온을 습격한 놈이 누구인지 알기 전에는 발이 떨어질 것 같지 않았다.
렉타르는 습격자가 있던 것으로 보이는 산의 중턱에 서서 시선을 돌렸다.
‘이곳이겠군.’
발자국이 보이지도 않고, 수풀이 눌린 흔적도 없었으며, 마나의 흐름이 뒤틀어지지도 않았지만, 습격자는 이 장소에서 검은 칼날을 날린 게 분명했다.
렉타르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바닥을 자세히 살피며 미간을 구겼다.
‘누구지?’
대륙을 돌며 이름난 강자를 모두 만나보았지만, 이 거리에서 그런 검격을 날릴 수 있는 무인은 떠오르지 않았다.
‘신주오령 수준으로는 힘들어.’
희극제가 힘을 숨기고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녀가 전력을 드러내도 그 정도 무력을 발휘하는 건 힘들어 보였다.
‘육황오마에는 이런 놈이 없고.’
오마 소속이었지만, 중립으로 살아왔기에 육황의 수장을 모두 만나보았다.
그들의 무력으로 습격은 가능하지만, 그럴 이유도, 그럴 수도 없다.
오마 쪽도 마찬가지다.
가장 신비롭다는 타천도, 수백 년을 살았다는 백혈교주도, 어둠 그 자체라는 흑탑주도 죽음의 의념을 담은 오러를 쏘아낼 수는 없으니까.
천마는 만나보지 못했지만, 그가 이곳에 와서 라온을 기습한다는 건 더더욱 말이 되질 않는다.
‘더 큰 문제는….’
이놈이 힘을 숨겼다는 거겠지.
이곳의 오러 흐름이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것을 보면 라온을 습격한 놈은 전력이 아니라, 어느 정도 힘을 아껴둔 채 공격을 해왔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아예 제3의 인물인가.’
이가 바드득 갈린다. 초월자 중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이름을 놓아야 할 놈이 라온을 노리다니, 습격자의 정체보다 놈이 라온을 노린 이유가 궁금해졌다.
“스승님.”
불안과 긴장감에 머리를 부여잡고 있을 때 아래에서 무스턴이 올라왔다.
“놈의 흔적은 찾으셨습니까?”
“보이질 않는구나.”
렉타르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암살자도 아닐 텐데, 작은 흔적 하나 없어.”
“위험한 놈이군요.”
“그래.”
무스턴의 말대로 이 짧은 순간에 모든 흔적을 지운 것을 보면 한두 번 해온 일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적은 하나가 아니라, 단체일지도 모르겠다.
“저도 찾아보겠습니다.”
무스턴이 고개를 숙이고서 거북이 같은 자세로 바닥과 수풀을 살폈다.
“무스턴.”
렉타르는 그런 제자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옅은 미소를 그렸다.
“그렇게 라온을 보고 싶다고 하더니, 녀석에게 가지 않고 잘 견뎌주었구나. 고맙다.”
“이게 라온 님을 위한 길이지 않습니까.”
무스턴이 스승과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맑은 눈. 예전에 그를 휘감고 있던 질투와 질시는 티끌 하나 보이지 않았다.
“전에 뵈었을 때보다 더 높이 나아가셨더군요.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그는 그거면 됐다는 듯 구김 없이 웃었다.
“너도 그 아이만큼이나 많은 변화를 이뤄냈다. 스스로의 가능성을 믿거라.”
렉타르가 무스턴의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렸다.
무스턴은 감사하다는 듯 눈을 살짝 내리감았다.
“련에 돌아가는 건 잠시 미뤄야겠다. 이 자에 대한 작은 흔적이라도 찾지 않으면 마음이 풀리지 않을 것 같구나.”
“련주가 기다리고 있을 텐데,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
“괜찮다. 죽음을 담고 있는 오러에 대해서 말한다면 도검존의 유산 이상으로 흥미를 보일 테니까.”
렉타르는 련주의 생각을 읽은 듯 단호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보다 너는 정말 괜찮은 것이냐?”
그가 무스턴을 보며 짧게 혀를 찼다.
“전에도 말했지만, 내 길의 끝에 출구는 없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아뇨.”
무스턴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스승님은 제가 버틸 수 있는 기둥이 되어주셨고, 라온 님은 그 기둥과 제가 닿을 수 있도록 밧줄을 달아주셨습니다. 두 분을 위해서라면 저는 어찌 되어도 좋습니다.”
그는 지금의 마음이 바뀌지 않을 것이라며 웃었다.
“그래.”
렉타르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빛은 이전에도 지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언제나 제자를 받쳐주는 정이 담겨 있었다.
“그럼 가자꾸나.”
“예. 스승님.”
스승과 제자는 어깨를 맞춘 채로 함께 걸음을 옮겼다.
***
라온은 발카르 왕국의 왕도에 서서 시선을 들어 올렸다.
‘오웬과는 확실히 다르군.’
칼날 같은 기세가 느껴지던 오웬 왕국과 달리 이지적이고, 현묘한 기질이 도시 전체에 퍼져 있었다.
건물들의 형태도 다르다. 대부분의 건물들이 탑처럼 높게 솟아 있었고, 고풍스러운 형태를 띠었다. 왕도 전체가 거대한 도서관처럼 느껴졌다.
사람들의 행색 역시 특이했다. 손에는 두꺼운 책을 들었고, 가지각색의 로브를 입었다. 하나같이 마법사로 보였다.
“이들 전부 마법사인가?”
버렌이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헛바람을 흘렸다.
“마법의 왕국이니까. 당연하잖아.”
마르타가 버렌의 어깨를 치며 눈매를 찌푸렸다.
“이곳이 왕도라 그렇습니다.”
뇌쇠 바르필의 제자인 쿠르만이 다가와서 고개를 저었다.
“다른 도시에도 이 정도로 마법사가 많았다면 저희가 대륙을 먹었을 텐데 아쉬운 일입니다.”
그는 무거운 분위기를 풀려는 듯 가벼운 농담을 던지고서 내성으로 향했다.
“…….”
라온은 쿠르만의 마음을 알고 있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의 뒤를 따라갔다.
쿠웅.
내성 앞을 지키던 중년의 수호 기사가 쿠르만을 보며 발을 구르고, 시선을 들었다.
“쿠르만 님. 복귀하셨군요.”
“오랜만입니다. 루칸 님.”
쿠르만이 옅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고생하셨습니다. 그런데 바르필 공께서는….”
“…….”
쿠르만은 대답 없이 입술을 씹었다. 그의 안색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음….”
수호 기사는 쿠르만과 그 뒤에 선 사람들의 분위기를 읽고서 짧게 신음을 흘렸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그보다 내성 출입 허가를 받고 싶습니다.”
쿠르만이 고개를 젓고서 뒤에 있는 광풍대를 가리켰다.
“이분들은 도검존의 무덤에서 저희를 구해주신 지그하르트의 광풍대입니다. 이번 일에 대해 해야 할 말이 있다고 하셔서 함께 왔습니다. 신분은 제 이름을 걸고 보증을 하겠습니다.”
그는 광풍대가 내성에 들어갈 수 있도록 증명을 해주었다.
“광풍대주 라온 지그하르트라고 합니다.”
라온이 쿠르만의 옆으로 나와서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수호 기사는 라온과 눈을 마주치자마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저를 아십니까?”
“이전에 오웬 왕국에서 뵈었습니다. 물론 그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만.”
그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헛바람을 흘렸다.
“쿠르만 님의 보증도 있고, 라온 님은 전에 제가 직접 보기도 했으니, 문제없겠지요. 들어가십시오.”
수호 기사가 뒤로 물러서자, 하늘 높이 솟구쳐 있던 거대한 문이 투명한 빛으로 반짝이다가 사라졌다.
성문도 마법으로 만들어냈던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쿠르만이 수호 기사에게 고개를 숙이고서 다시 안내를 시작했다.
내성에는 마법사들이 더욱더 많았다.
다만 그들은 할 일이 바쁜 듯 이쪽을 쳐다보지 않고 본인들이 가야 할 곳으로 걸어갔다. 마법사 왕국다운 모습이었다.
“음….”
라온이 왕성 내부를 살피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안쪽도 오웬과 다르군.’
발카르 왕성 내부는 박물관을 보는 듯 정체를 알 수 없는 아티팩트들이 가득했다.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옷이나, 신발, 팔찌 같은 것부터 정체를 알 수 없는 물건들로 꽉 채워져 길이 좁게 느껴질 정도였다.
은은한 조명이 왕성 전체에서 흘러내리고 있었는데, 어디서든 책을 읽는 마법사들을 위한 장치 같았다.
“이곳이 폐하께서 머무시는 왕성입니다. 일단 알현을 신청할 텐데, 지금 계실지는 모르겠군요.”
쿠르만이 안쪽에 있는 알현실을 가리키며 짧게 입맛을 다셨다.
“폐하께서 부재중이시라면 체임버 님이라도 뵙고 싶습니다.”
-야! 왔다!
그 말을 하기 무섭게 라스가 손가락으로 천장을 가리켰다.
“나?”
라스의 말이 들려온 후 머리 위에서 소녀의 음성이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 올리니, 영화의 대마법사 체임버가 마녀 모자를 쓴 채 방긋 웃고 있었다.
“체, 체임버 님!”
쿠르만이 기겁을 하면서 바닥에 자빠졌다.
-보았느냐?
라스가 허리에 손을 올린 채 콧대를 높였다.
-이번에는 안 늦었느니라! 케헥! 켁!
녀석은 인과율로 인한 손상을 아직 메우지 못했기에 마른기침을 하며 켁켁거렸다.
‘…그래. 수고했어.’
이번에는 아무 의미도 없었지만, 녀석이 아파 보여서 위로차 대단하다고 치켜세워주었다.
“라온 맞지? 소문은 들었지만, 말도 안 되게 강해졌는데?”
체임버는 눈동자에 감탄을 두른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 특이한 조합은 뭐야? 저기 비린내 나는 계집은 왜 조용히 있는 거고.”
그녀는 광풍대와 마법사 그리고 아리스를 보며 눈동자를 굴렸다.
“발카르의 대마법사를 뵙습니다.”
아리스는 좋지 않은 상황 때문인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스스로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대마법사를 뵙습니다.”
라온이 아리스의 옆에서 함께 허리를 굽혔다.
“흥. 갑자기 그렇게 나오면 내가 민망해지는데.”
체임버가 입에 막대 사탕을 넣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대충 보니까. 여기서 들을 이야기는 아니겠네.”
그녀가 짧게 한숨을 내쉬고서 손가락을 탁 튕겼다.
우우웅!
그 순간 허공에 붕 뜨는 듯한 감각과 함께 공간이 변했다.
왕성 복도가 뒤틀리며 하얀색 방으로 바뀌었다.
굉장히 넓은 장소였는데, 소녀의 방처럼 인형과 과자가 이곳저곳에 쌓여 있었다.
다만 벽에는 수를 헤아리기 어려운 책들이 가득 꽂혀 있었다.
체임버의 개인 공간인 것 같았다. 다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만 이쪽으로 이동된 것 같았다.
“도검존의 무덤과 관계된 일이겠지?”
체임버의 목소리가 뚝 가라앉았다.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말해봐.”
“이번 일에는 오웬 왕국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다만 먼저 가까운 발카르에 온 건데….”
“그럼 오웬도 가야겠네?”
“그렇습니다.”
“그냥 한 번에 처리하자.”
그녀가 막대사탕을 빙글 돌리고서 손가락을 튕겼다.
따아악!
호두를 깨는 듯한 시원한 소리와 함께 허공에 푸른 차원이 열렸다.
일렁거리는 차원의 틈 속에는 그림으로 그린 듯한 미려한 금발벽안의 중년인이 누워 있었는데, 그는 분홍색 책을 보며 히죽거렸다.
“어…?”
라온이 중년인을 보며 입을 떡 벌렸다.
‘레크로스 님?’
그 사람은 묵검존이라는 이명을 지닌 오웬의 국왕 레크로스였다.
“체임버! 내가 갑자기 차원을 열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했… 헉! 라온?”
레크로스는 이쪽을 보다가 라온의 시선을 느끼고 흠칫 어깨를 떨었다.
“커허험!”
그는 헛기침을 하고서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곧게 세웠다.
“라, 라온 지그하르트. 아니, 이제는 광풍대주라고 불러야겠지? 오랜만이네.”
레크로스는 순식간에 위엄 있는 모습을 보였지만, 첫 모습이 너무도 충격적이었기에 조금도 무겁게 느껴지지 않았다.
-쟤, 쟤가 읽던 책 이름 봤느냐? 본왕은 지금 헛것을 본 느낌이니라!
라스가 놀랍다는 듯 입술을 떨었다.
“…묵검존을 뵙습니다.”
라온은 일단 라스를 무시하고 레크로스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 그래. 무슨 일인지?”
“이 녀석이 너와 나한테 할 말이 있나 봐.”
체임버가 사탕을 살짝 깨물며 고개를 저었다. 육황 회의에서 보았을 때와는 다른 분위기다. 지금보니 이 둘은 실제 알려진 것보다 친한 것 같았다.
“할 말?”
“예. 두 분께 드려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저는 이번에 도검존의 무덤에 들어가서….”
라온은 필사적으로 정신을 차린 후 체임버와 레크로스에게 도검존의 무덤에서 있었던 일들을 모두 말해주었다.
“…그렇게 되어서 저는 코만 기사단장님과 뇌쇠 님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 말을 하며 부러진 검과 지팡이를 앞으로 내밀었다. 나도 모르게 손이 떨렸다.
“그리되었군.”
레크로스는 갑작스러운 소식을 들었음에도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녀석 말대로 기사는 주군의 얼굴이지. 다만 얼굴이 사라지는 것보다는 먹칠을 하는 게 낫다는 걸 모르는 모양이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로 입술을 씹었다.
“뇌쇠라는 이명은 단단한 벼락 줄기라는 뜻이야. 내가 지었지.”
체임버가 물고 있던 사탕을 빼며 눈매를 찌푸렸다.
“마법사가 아니라, 기사 같은 녀석이라 조금은 부드러워지기를 바라면서 그 이름을 주었는데, 갈 때도 그리 갔네. 답답한 녀석이야.”
그녀는 바르필의 지팡이를 가져가며 혀를 찼다.
“그래도 그 녀석은 후회하지 않을 거야. 유품을 가지고 와줘서 고마워.”
체임버가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으로 그녀가 제 나이로 보이는 것 같았다.
“나도 마찬가지네.”
오웬 국왕은 체임버가 공간전송을 해준 검을 살피며 옅게 웃었다.
“쿠잔은 자네와 함께 싸운 것을 자랑스러워할 거야. 감사를 표하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미소로 같은 뜻을 전해주었다.
“제가 더 감사합니다.”
라온은 레크로스와 체임버의 감정을 깊게 느끼며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그나저나 그 지역이 본래 지그하르트의 땅이었다니, 놀라운 일이로군.”
레크로스가 턱을 매만지며 눈매를 좁혔다.
“나는 지그하르트에 그 땅의 소유권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겠네.”
“네가 뭐라고 인정을 해!”
체임버가 사탕을 다시 물며 미간을 구겼다.
“오웬은 그 장소와 아무 상관도 없잖아!”
“커흠, 좀 분위기 좀 맞춰주지….”
레크로스가 떨떠름하게 고개를 저었다.
“다만 우리가 인정해도 사람들이 인정하는 건 다른 일일 것이네.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
그는 위엄을 찾는 것을 포기하지 않은 듯 묵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닐걸?”
체임버가 레크로스를 보며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게 무슨 말이지?”
“지금 소문이 미친 듯이 퍼지고 있거든.”
그녀는 지금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듯 본인의 귀를 가리켰다.
“그 숲에 들어온 자는 검을 놓을 수밖에 없는 지그하르트의 성지. 해검지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