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43화
남쪽의 명문 무가 쥬레온의 가주이자, 천류창이라는 이명을 가진 네드로 쥬레온은 무덤에서 올라온 라온을 보며 눈을 끔벅였다.
‘뭐지?’
이게 맞는 일인가?
이곳에 남아 있던 무인들끼리는 무언의 약속을 했다.
도검존의 유산을 가지고 나오는 게 육황오마 중 누구든 상관하지 않고, 힘을 합쳐 습격하기로 맹세를 했는데, 저쪽이 먼저 선수를 쳐서 누구도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계획대로라면 선두로 뛰쳐나갔어야 할 무인들이 서로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다만 저들의 마음이 이해는 가는 게, 지금 가장 앞에 선 라온 지그하르트의 패기가 너무도 강했다. 땅을 울리고, 하늘을 진동시키는 오러가 피어나는데, 누가 달려들겠는가.
‘이대로라면 그냥 보내줄 수밖에 없….’
네드로 쥬레온이 라온을 바라보다가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잠깐. 부상이 심한데?’
라온의 강대한 기파를 무시하고, 그를 자세히 살펴보니, 검은 장포와 제복이 갈기갈기 찢어졌고, 안쪽에는 핏물이 고여 있었다. 심각한 부상으로 보였다.
‘저놈만이 아니야. 전부 부상이 심해.’
공검대주 세레나는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제복에 피가 넘쳐흘렀고, 리메르나 다른 검사들도 전신에 상처가 가득했다.
‘표정도 좋지 않고.’
광풍대와 공검대 그리고 그 뒤에 있는 중립 세력의 안색이 흙빛이다. 무덤을 파헤치며 크게 지쳤다는 의미였다.
‘이제 알겠군.’
네드로가 꾹 주먹을 말아쥐었다.
‘저놈은 지금 연기를 하고 있는 거야.’
무덤 안에 들어간 오마는 백혈교, 흑탑, 성검련 셋이다. 그들 모두를 꺾고 도검존의 유산을 챙겨왔다면 저들도 절대 정상일 수가 없었다.
라온 지그하르트는 본인들의 불리함을 지우기 위해서 먼저 앞에 나선 것이다. 그는 확실히 연기가 뛰어났지만, 뒤에 있는 검사들의 낯빛은 숨길 수 없을 정도로 파리했다.
‘기회는 지금뿐이야.’
이곳을 벗어난다면 저들을 잡을 수 없다. 여기서 끝을 봐야만 한다.
네드로가 빠르게 오러 메시지를 돌렸다. 다른 세력의 수장들에게 라온과 지그하르트가 허세를 떨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며 본래의 계획대로 움직이자고 설득했다.
다른 세력의 수장들도 지그하르트의 모두가 크게 지쳐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서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나서볼까?’
본래 맹수를 사냥할 때는 전방에 나서지 않는 게 좋다. 하지만 지금 저 맹수는 큰 상처를 입었고, 뒤에는 화살을 쏘아줄 포수가 가득했다.
안전이 보장되어 있기에 앞에 나서서 명성과 영향력을 키우기에 딱 좋은 기회였다.
네드로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수풀 밖으로 나왔다. 담담한 걸음으로 라온의 앞으로 다가갔다.
“무기를 내려놓고 떠나라? 이해가 되지 않소.”
라온과 열 걸음 떨어진 장소에 멈춰서 고개를 저었다.
“이곳의 주인은 지그하르트가 아니오. 무기를 내려놓을 생각도, 떠날 생각도 없….”
창대를 어깨에 걸치며 말을 하는데, 갑자기 강렬한 풍압이 불어왔다. 피부가 찢어질 것 같았다.
쩌어어어억!
그 풍압이 다 가시기도 전에 오른쪽 뺨으로 강렬한 충격이 와닿았다. 세상이 빙글 돌고, 전신의 감각이 사라진다.
“아….”
신음을 흘리기도 전에 정신이 육체를 떠나간다. 감기는 눈으로 보이는 건 라온 지그하르트의 시건방진 표정이었다.
콰아아앙!
네드로가 얼굴이 무너진 채 바닥에 내리꽂히는 순간 달려들 준비를 하던 무인들이 모조리 멈춰 섰다. 시간이 정지된 듯한 모습이었다.
***
“10초 지났다.”
라온은 가장 먼저 다가온 무인의 얼굴을 깨부순 후 혀를 찼다. 목각 인형처럼 굳어버린 사람들을 보며 제천검의 검집을 어깨에 걸쳤다.
“어어….”
“허세가 아니라, 진심이었다고?”
“미친….”
무인들을 담담한 라온과 얼굴이 뭉개진 네드로를 보며 입술을 떨었다.
“경고는 끝이야.”
라온이 턱을 삐딱하게 틀며 쓰러진 네드로의 등을 밟고 무인들을 향해 걸어갔다.
“지, 지금 뭐 하는 거요!”
“이런 곳에서 어떻게 무기를 버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여기가 왜 지그하르트의 땅이야! 개소리 말라고!”
각 세력의 수장으로 보이는 무인들은 겁을 먹은 듯 뒤로 물러서며 목소리를 높였다. 시선을 돌려 수장들의 얼굴과 위치를 머리에 새겨두었다.
터엉!
바람을 타듯 가볍게 태화보를 밟았다. 바닥의 모래가 뒤로 쓸려가는 듯한 무지막지한 속도로 나아가 정면에 있던 권사의 앞에 섰다.
“크윽!”
권사는 당황했음에도 절도 있게 주먹을 뻗어냈다.
팔꿈치를 드는 것으로 주먹을 가볍게 피해낸 후 들고 있던 제천검을 검집째로 내리쳤다.
빠아아아악!
뼈가 분질러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권사가 머리에서 피를 뿜어내며 뒤로 넘어갔다.
“일단 대가리부터 깨부수면 되겠지.”
라온이 발목을 굽힌 채 땅을 박찼다. 그다음으로 입을 놀린 검사에게 다가가 제천검을 찍어눌렀다.
“크윽!”
검사가 기합을 토하며 방어를 위한 검막을 펼쳤다.
뻐어어어억!
하지만 제천검에 담긴 힘은 그가 감당할 수 없는 거력이었다. 제천검의 검집은 검사의 검막을 깨부수고 그의 이마를 뽀개버렸다.
“케헥!”
검사는 조금 추한 비명을 지르고서 대자로 자빠졌다.
“도, 도망쳐!”
세 번째로 주절거린 궁사가 미끄러지듯이 뒤로 물러났다. 뒷걸음질을 치면서 앞으로 보법을 밟는 것보다 빨랐다.
다만 궁수의 보법이라고 해도 태화보의 속도에는 미치지 못했다.
뿌드드득!
태화이보로 따라잡은 후 궁수의 머리통을 내리찍었다.
“아악!”
궁수는 찢어지는 비명을 지른 후 몸이 낫 모양으로 꺾인 채 쓰러졌다.
-저기….
라스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말로 한다며?
‘말로 했는데 안 듣잖아.’
라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건 말이 아니라, 협박이잖아! 거기다 대가리를 깬다는 말이 적의 수장을 친다는 게 아니라, 진짜 대가리를 깨는 거였냐고!
라스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응.’
-미치고 팔짝 뛴 놈이니라….
녀석은 점점 더 미쳐간다며 고개를 저었다.
‘금방 끝나니까. 조금만 기다려.’
라온은 옅은 미소를 그리고서 네 번째로 주절거렸던 마법사를 향해 움직였다.
“허억!”
본인이 표적이 된 것을 알아차린 마법사가 기겁하며 허리를 굽혔다. 그는 빠르게 지팡이를 내려놓고 손을 들었다.
“저, 저는 놨습니다!”
마법사는 억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진작에 그럴 것이지.”
라온이 제천검의 검집을 어깨에 걸친 채로 마법사의 앞으로 다가갔다.
“하아….”
마법사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어.”
입매를 비틀며 손아귀에 꾹 잡고 있던 제천검의 검집으로 마법사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뻐어어억!
마법사는 아예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감지 못한 채 떨리는 그의 눈동자는 억울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무, 무기를 내려놓았는데….”
“왜 때리는 거지?”
“이, 이런 법이 어디에 있소! 여기가 지그하르트의 땅도 아닌데!”
무인과 마법사들이 어깨를 파르르 떨며 외쳤다.
“말했잖아. 오늘부터 이곳은 다시 지그하르트의 땅이 되었다고.”
“오, 오늘부터 다시?”
붉은 머리의 검사가 눈매를 좁혔다.
“그렇다. 이 땅은 본래 지그하르트의 것. 무덤의 주인이 인정을 해주었으니, 다시 우리가 가져가겠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내가 한다면 하는 거야.”
라온이 순간이동을 하는 듯 움직여 붉은 머리 검사의 머리통을 쪼갰다.
“크헉!”
검사는 말을 하다가 머리를 얻어맞아 혀를 씹은 채로 쓰러졌다.
“미, 미친놈이다.”
“정신이 나갔어!”
“아예 말이 안 통해!”
습격자에서 습격을 당하는 위치가 된 무인들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자, 잠깐만! 나는 돌아가겠소!”
“무기도 버리고, 물러날 테니까 이제 그만!”
“이미 늦었어.”
라온은 차게 웃으며 무기를 버리고 물러나는 무인들의 뒤를 쫓았다. 그의 눈동자는 그야말로 광기로 물들어 있었다.
“…저게 말로 해결하는 거야?”
세레나가 어이가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말이라는 단어의 뜻을 잘못 알고 있는 건가?”
“저희 대주가 글을 잘못 배워서 그렇습니다. 공검대주님께는 아무 잘못도 없습니다.”
버렌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오늘은 좀 나은 겁니다. 칼은 안 뽑았으니까.”
“칼은 안 뽑았지만, 죽어가는 건 똑같아 보이는데….”
세레나는 피를 뿜어내다 못해 쏟기 시작한 무인들을 보며 헛바람을 뱉었다.
“나찰검이라는 이명은 내가 아니라, 저 인간한테 갔어야 했다니까.”
마르타가 콧잔등을 찌푸렸다.
“저게 어딜 봐서 협객이냐고. 그냥 깡패지.”
그녀는 라온을 보며 콧방귀를 뀌었다.
“존잘 라온.”
루난은 존잘 라온이라고 외치고서 바닥에 주저앉아 졸기 시작했다. 라온을 완벽히 신뢰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얼마 만에 끝내려나?”
“숫자가 많으니까 한 20분?”
“숫자는 많지만 대주한테 다 쫄았잖아. 난 5분 안에 끝난다고 본다.”
“난 10분!”
광풍대는 각자 편한 자세를 취한 채 언제 상황이 끝날지에 대한 내기를 시작했다.
“그냥 하지 말고, 돈이라도 거는 게 어때?”
리메르가 헤헤 웃으며 검사들에게 다가가서 내기 판돈을 걷기 시작했다.
“광풍대 원래 이래…?”
세레나는 도박판까지 벌이고 있는 광풍대를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사실 광풍대에 정상은 저밖에 없어요.”
도리안의 목소리에 우측을 바라보았다. 그는 배 주머니에서 폭신해 보이는 소파와 이미 불타고 있는 모닥불을 펼쳐 놓은 채 한숨을 내쉬었다.
“…….”
세레나는 입을 다문 채 고개를 저었다.
‘여긴 미친놈들 소굴이다….’
***
도검존의 무덤이 작은 점으로 보이는 산의 중턱.
쿠바라는 무릎을 꿇은 채 손을 바르르 떨고 있었다. 그녀는 소리 없이 침을 삼키며 앞에 선 데루스 로베르트의 등을 바라보았다.
데루스는 어떠한 기세와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인형이라도 된 듯 건조한 분위기였지만, 그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짙은 분노를 흘리고 있었다.
분노를 했음에도 그것을 드러내지 않았기에 그 누구보다도 무서웠다.
쿠바라가 본인의 목을 매만졌다. 숨을 쉴 수가 없다. 데루스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 심장이 철사로 조여지는 듯한 압박감이 들었다.
“흐윽….”
결국 참지 못하고 침을 줄줄 흘리며 신음을 내뱉었을 때 데루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이리되었군.”
데루스의 담담한 음성 속에 끈적한 분노가 깃들었다. 피부가 불길에 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델프로스와 사비대주 그리고 인형으로 만든 도검존이라면 누가 와도 충분하리라 여겼는데, 또 저놈이 다 망친 모양이야.”
그의 냉랭한 눈동자 위로 라온의 얼굴이 맺혔다. 핏빛으로 녹아내리는 듯 섬뜩했다.
“강해졌군. 그랜드 마스터에 올랐다고 알려졌건만, 이미 중급에 안착했어.”
“…….”
쿠바라가 눈을 부릅뜬 채 라온이 있는 곳을 노려보았다.
‘중급?’
라온 지그하르트가 그랜드 마스터에 올랐다는 소문이 퍼진 게 올해 초다. 그런데 벌써 중급이라니, 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말이 안 되는 성장이었다.
데루스에 대한 공포 이상으로 라온의 성장이 두렵게 느껴졌다.
어떤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는 게 자신의 장점이라고 생각해왔지만, 오늘은 그 장점이 사라진 것만 같았다.
“2차 계획은 폐기하도록. 저들이 살아온 이상 의미 없는 일이다.”
데루스가 라온을 눈에 담은 채 고개를 저었다.
“신주오령의 분열은 계속 진행해. 일이 이렇게 된 이상 그쪽이 열쇠가 될 수 있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쿠바라가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다음 계획을 생각하시다니.’
데루스는 많은 시간과 자원이 소모된 계획이 망가진 것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도 분노하기보다 다음 수를 먼저 생각했다. 평생을 모신 주인임에도 오싹한 소름이 돋아올랐다.
“확실한 계책을 잡지 않는다면 대계가 10년은 미뤄지겠군.”
데루스가 짧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다 내 탓이다.”
그는 양 떼 속 늑대처럼 무인들을 헤집는 라온을 보며 입매를 꾹 씹었다.
“놈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최우선으로 두지 않았으니, 내 탓이야.”
데루스가 스스로에 대한 비웃음을 흘리고서 손을 올렸다.
우우우우웅!
그의 손아귀 위로 달처럼 둥근 형태의 음습한 검은 기운이 타올랐다.
스으으윽!
데루스는 손날을 세워서 검은 기운을 깎아냈다. 숨 한 번 고를 시간에 원형의 기운은 얇디얇은 창 같은 형태가 되어 그의 손아귀에 잡혀 있었다.
쿠바라는 데루스가 깎아낸 창을 보며 입술을 떨었다. 살의도, 어떠한 기운도 없지만 오싹했다. 저 안에 어린 건 죽음이라는 현상뿐이었으니까.
“이거라면 저놈을 죽일 수 있을까?”
데루스가 옅은 미소를 그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물론입니다.”
쿠바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데루스가 힘을 조절했다고 해도 지금의 라온 지그하르트가 저것을 막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머리를 간지럽히지만, 나도 사람인지라 참을 수가 없구나.”
데루스가 라온을 바라보며 검은 창을 뒤로 젖혔다.
“만약 여기서도 살아남는다면 그건 운명이라는 거겠지.”
그의 나지막한 음성과 함께 어둠의 창이 밤의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
쿠와아아앙!
라온은 기절한 무인들로 쌓아 올린 산을 보며 입매를 말아 올렸다.
‘몸이 가벼워.’
도검존이 전해준 대지의 오러 덕분에 중단전이 과할 정도로 굳건해졌다. 육체와 정신, 오러가 안정감을 찾은 덕에 전신에 활력이 넘쳤다.
“그만! 제발 그만!”
“이, 이제 좀 멈춰주십시오!”
“해검하겠소!”
무인들은 다 포기하겠다고 외치며 무기를 버리고 무릎을 꿇었다. 들려오는 건 쇳덩이들이 땅을 후려치는 소리와 앓는 신음뿐이었다.
라온이 검과 창, 도가 쌓여서 만들어지는 구릉으로 다가가려고 할 때였다.
-라온!
라스의 다급한 비명이 들려왔다.
‘왜 부르는….’
라온이 대답을 하려다 말고 멈춰 섰다.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아니, 무언가가 아니다. 죽음이다. 전생에서 느꼈던 죽음의 악취가 눈앞에 도래해 있었다.
삶이 끝에 도달했기 때문일까. 극한의 집중력이 살아난다. 눈에 공기의 흐름이 보일 정도로 시간이 느려졌다.
막을 수 없다. 피할 수도 없다.
라스에게 몸을 맡겨도 영혼이 바뀌는 순간 심장이 꿰뚫릴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들고 있는 검집을 앞으로 내지르는 것뿐. 그게 전부였다.
다만 검집을 내질러도 의미가 없다. 지금 내게 쇄도해오는 무언가는 강환으로도 막을 수 없는 죽음을 담고 있었으니까.
주마등일까.
전생부터 현생까지 내가 살아왔던 장면이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다만 그 기억을 모두 헤집어도 내가 살 수 있는 방법은 보이지 않았다.
끝없이 이어지던 주마등이 뚝 끊어지려는 순간 마지막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도검존에게 무학을 전수 받는 장면. 그에게 얻었던 무학 중 가장 마지막 장에 있던 검술 파검무가 떠올랐다.
그 이름처럼 검을 파괴하여 스스로의 목숨을 구하는 비기.
제대로 쓸 수는 없겠지만, 아주 잠깐의 시간은 벌 수 있을 것이다.
피나도록 입술을 씹은 채 손에 들고 있던 검집으로 파검무를 펼쳐냈다.
파지지직!
검집이 거미줄 같은 형태로 바스러지며 눈앞에 얇은 검막을 형성했다.
하지만 죽음을 담고 있는 기운은 파검무를 단숨에 뚫어내고 내 심장을 향해 파고들었다.
0.5초. 아니, 0.1초도 되지 않을 찰나의 시간 벌이였다.
결국 아무 의미가 없었나….
죽음이 내 피부를 뚫고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다만 눈을 감지는 않았다.
끝까지 싸우기 위해서 눈동자에 힘을 준 순간이었다.
좌측의 공간이 사선으로 갈라지고, 우측 천공에서 푸른 광휘가 번쩍였다.
쩌어어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