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642화 (641/653)

제642화

라온이 도검존에게 잡힌 손목을 보며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뭐, 뭐야. 이거!’

진심으로 놀랐다. 사람이 너무 당황하면 아예 말이 나오지 않는다는데, 딱 그 격이었다.

불로 태워버리려고 한 시체가 갑자기 되살아났는데, 누가 놀라지 않겠는가.

-끄에에에엑!

라스도 깜짝 놀랐는지 원숭이 같은 비명을 지르며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바람에 날리는 솜사탕을 보는 듯했다.

“조금도 당황하지 않는군.”

도검존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분의 후예다운 몸가짐이다.”

“…….”

아주 큰 착각이었다. 지금도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고 있고, 등골 사이로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만약 도검존의 눈동자가 여전히 뒤틀려 있었다면 당장 그의 목을 쳤을 것이다.

“위, 위험합니다!”

“물러서!”

“대주…님!”

버렌과 마르타, 루난이 마른침을 삼키며 달려왔다. 세 사람은 당장 도검존을 칠 것처럼 검을 뽑아들었다.

“아오! 또 시작이야?”

“대주!”

리메르와 마크 괴튼도 눈을 부릅뜬 채 무기를 들었다.

“괜찮아.”

라온이 떨리는 가슴을 내리누르면서 모두에게 손을 저었다.

“아까와는 다른 사람이니까.”

지금의 도검존에게서는 처음 보았을 때의 악의와 사이함이 보이지 않았다. 평생 수련과 선행만을 반복해온 수도승의 눈을 보는 듯 했다.

“내 영혼을 읽은 건가. 예상 이상이군.”

“…….”

도검존은 또 착각을 하고 있었다. 그저 그의 기질을 읽었을 뿐이다. 다만 사실을 말하면 귀찮아질 것 같아서 입을 다물었다.

“이름을 들을 수 있겠나?”

“라온 지그하르트라고 합니다.”

“볼수록 감탄이 나오는군. 자네의 삶도 듣고 싶지만, 시간이 없으니 바로 이야기를 시작하지.”

도검존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차분한 눈빛을 들어 올렸다.

“가장 먼저 말해야 할 건 이곳의 정체다. 너희는 모르겠지만, 본래 이 이 지역은 지그하르트의 땅이었다.”

그는 굉장한 비밀을 이야기하듯이 목소리를 죽였다.

“알고 있습니다.”

라온이 담담하게 눈을 내리감았다가 떴다.

“어…?”

도검존이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는 듯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아, 알고 있었다고?”

“예.”

라온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초대 가주의 기억과 델프로스의 행동 그리고 도검존의 시체를 통해서 이곳이 본래 지그하르트의 땅임은 알고 있었다.

“그, 그걸 알고 있었다면 이야기가 빠르겠군.”

도검존이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그럼 이 땅이 왜 만들어졌는지는 모르겠지. 여기는….”

“지그하르트의 수련장이겠죠.”

“그, 그것도 알고 있었다고?”

그가 말을 멈춘 채 눈을 끔벅였다.

“예.”

지그하르트 선조의 기억과 통제실의 자료를 보았기에 당연히 알고 있던 정보였다.

“난 아예 몰랐는데?”

마르타가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며 고개를 저었다.

“라온이 계속 말했잖아. 이곳이 수련장인 것 같다고. 물론 나도 지그하르트의 땅이었는지는 몰랐지만.”

버렌이 어이가 없다는 듯 헛바람을 흘렸다.

“난 다 알고 있었어.”

루난이 허리에 손을 올린 채 당당히 턱을 들었다.

“네가?”

“어떻게?”

버렌과 마르타가 루난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라온이 여기 오자마자 말했잖아. 이 땅은 지그하르트의 땅이라고.”

루난은 5층에 온 라온이 이 공동을 지그하르트의 땅이라고 선언했던 때를 말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게 아니지! 이 멍청아!”

마르타가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대주 말이라면 땅에서 해가 떠오른다고 해도 믿겠네!”

“해는 원래 땅에서 떠오르는데?”

루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됐다.”

마르타는 본인이 졌다고 말하며 손을 들어 올렸다.

“크흠.”

도검존은 뒤에서 이루어진 기이한 대화를 못들은 척하면 헛기침을 했다.

“통찰력이 대단하구나. 놀라운 심계야!”

“…….”

라온은 도검존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보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또 착각을 하시네.’

그가 말해주는 정보를 알게 된 건 초대 가주의 기억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었다면 나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놀라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이것까지는 모를 것이다. 이 수련장을 만든 사람은….”

“지그하르트의 초대 가주님이시겠죠.”

“거, 거기까지 도달하다니!”

도검존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크게 손뼉을 쳤다.

“그때를 직접 본 것처럼 다 알고 있다니! 그분의 진정한 후예는 역시나 다르군!”

“…….”

본 것처럼이 아니라, 봤다. 아예 이 수련장을 만드는 장면을 보았기에 도검존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다만 그걸 말할 수는 없었기에 가만히 있었다.

라온이 당황과 기쁨을 동시에 느끼는 도검존을 보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허당 냄새가 진하게 나는데….’

이성 없이 싸울 때와 달리 도검존이 굉장히 친근하게 느껴졌다.

“그, 그럼 내가 지그하르트 소속이라는 건 알고 있었나?”

도검존은 이제 정보를 알려주기보다 수수께끼 대결로 넘어간 것처럼 질문을 던져왔다.

“아뇨.”

“역시 그건 몰랐….”

“다만 예상은 했습니다.”

“예, 예상을 했다고?”

“예.”

라온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검존 님에 대한 정보는 거의 남아 있지 않았지만, 지그하르트 초대 가주에 대한 존경을 보였고, 지금 입고 계신 무복의 안쪽에 지그하르트의 옛 문양을 새기고 있는 것으로 예측했습니다.”

“하, 머리 회전만큼은 네가 그분보다도 위에 있는 듯하구나.”

도검존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그는 잠시 마음을 정리한 뒤 잔잔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지그하르트 소속이지만, 지그하르트 내부에 속해 있지는 않았다. 외부에서 지그하르트를 수호하는 역할을 맡았지.”

“허….”

“도, 도검존이 지그하르트 소속이었다고?”

리메르와 버렌이 도검존을 보며 헛바람을 흘렸다.

“하긴 예전에 지그하르트는 지금보다도 더 강맹했다고 하니까.”

“그때의 기록이 없어서 단순한 전설인 줄 알았는데.”

“도검존이 외부 수호자라니, 미쳤군….”

다른 사람들도 아예 몰랐던 비사를 듣고서 입을 떡 벌렸다.

“그건 지그하르트 초대 가주께 입었던 은혜를 갚기 위해서 내 스스로 결정한 길이었다.”

도검존은 그 시절을 떠올린 듯 옅은 미소를 그렸다.

“은혜를 입었다니, 초대 가주님과 도검존 님이 활동한 시기는 다르지 않습니까?”

“초대 가주께서는 가주 자리에서 물러나신 후에도 대륙 창생을 위해서 힘을 쓰셨다. 나도 그때 그분께 도움을 받았지.”

“아….”

“은퇴한 후 마지막으로 내 무학을 지그하르트에 남기고자 이곳에 찾아왔는데, 일이 이렇게 꼬일 줄은 몰랐다. 정말 미안하구나.”

그는 본인의 손으로 지그하르트의 후예를 공격한 게 서글픈 듯 입술을 깨물었다.

“괜찮습니다.”

라온이 옅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선배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도검존은 내가 생각했던 그대로의 인물이었다. 잘못한 건 그가 아니라, 이 모든 일을 계획한 데루스 로베르트였다.

“하나 더.”

도검존이 옅게 웃으며 손을 들었다.

“저놈의 말과 다르게 나는 두 명의 후인을 남겨두었다. 각기 내 검과 도를 이었지.”

그는 숨이 끊어진 델프로스를 가리키며 고개를 저었다.

“워낙에 까불던 놈들이라 지그하르트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만, 내 무학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을 것이다. 그들의 후예를 찾아서 너의 힘으로 삼거라.”

“말씀은 감사하지만, 찾을 방법이 없는….”

“그건 지금부터 알려주마.”

도검존이 라온의 이마를 향해서 손을 뻗었다.

라온이 뒤로 물러서려다가 도검존과 눈을 마주쳤다. 물방울이 맺힌 듯한 순수한 눈빛을 보자, 몸에 저절로 힘이 빠졌다.

“고맙구나.”

도검존은 이해해줘서 고맙다는 듯 작은 미소를 지었다.

내 이마에 닿은 그의 손은 차가웠지만, 신기하게도 따스함이 함께 느껴졌다.

“고민을 많이 했다. 이런 일이 겪었는데도, 내 무학을 남기는 게 좋을지. 아니면 그대로 사장 시키는 게 나을지. 다만 너를 보니, 그 고민이 날아가는구나.”

그의 음성이 멎은 순간 머릿속으로 묵직한 기운이 스며들어왔다.

‘오러?’

도검존이 지니고 있던 무게감 있는 오러가 머리를 통해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굳건하면서도 단단한 대지의 오러다.

그 무엇에도 뚫리지 않을 듯한 도검존의 기질이 그대로 스며들어 있었다.

다만 도검존이 넘겨주는 것은 단순한 오러가 아니었다. 그가 익히고 있던 무학. 마병도법과 참마검결의 무리가 오러와 함께 뇌리에 스며들었다.

도검존은 한참 전에 죽은 자였고, 핵이 깨졌기에 남은 오러가 많지 않았다. 그가 진짜 전하고자 하는 건 오러가 아니라, 무학인 것 같았다.

참마검결과 마병도법 모두 난해한 무학이었지만, 도검존을 직접 상대해보았기 때문인지 신기하게도 익숙하게 느껴졌다.

라온은 심상에서 새롭게 피어나는 무학의 꽃을 느끼며 천천히 눈꺼풀을 내리감았다.

***

도검존은 무아에 빠진 라온을 보며 옅은 미소를 그렸다.

‘대단한 아이로군.’

악인들에 의해서 깨어난 이후 정신은 멀쩡했지만, 몸은 내 통제를 벗어나 있었다.

지옥 같은 두 번째 삶을 살면서 시대가 바뀌었음을 깨달았다.

많은 정보가 어긋나 있었다. 여러 비밀들이 그대로 땅에 묻힐 것을 겁냈는데, 의미 없던 걱정이었던 것 같다.

라온 지그하르트라는 이름을 가진 이 아이는 내가 알려주지 않았던 모든 것을 혼자만의 힘으로 파악하고 있었으니까.

‘볼수록 똑같군.’

태양을 녹인 듯한 찬란한 금발, 그 어떤 악의로 태워버릴 듯한 붉은 화안은 자신의 주인인 지그하르트의 초대 가주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물론 가장 닮은 건 성격이지만.’

라온은 본인이 위험한 상황에서도 약자를 생각했다. 손해를 보면서도 먼저 사람을 구하는 모습은 지그하르트의 근본 그 자체였다.

무학과 가문이 이어지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정말 힘든 건 처음의 정신이 이어지는 일.

라온이라는 아이는 초대 가주가 지그하르트를 세우며 다짐했던 정신과 마음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이번 일을 통해서 무학을 넘기지 않으려는 마음을 바꾼 이유도 라온 때문이었다.

도검존은 홀로 라온이라는 인간을 아주 크게 착각하면서 진한 미소를 그렸다.

‘다 가주님과 비슷하지만….’

얼굴은 이쪽이 낫네.

‘가주. 당신의 후예는 당신보다도 빛나고 있는 듯합니다. 그것도….’

그는 머뭇거림 없이 라온을 호위하는 광풍대와 공검대를 보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가.’

도검존은 라온의 가슴에서 피어나는 금빛 열기를 보며 은은한 미소를 흘렸다.

‘이제 걱정하시지 않아도 될 것 같군요.’

당신의 불꽃은 이곳에 남아 있습니다.

***

라온이 눈을 뜨고, 처음으로 본 모습은 웃고 있는 도검존이었다.

“저한테 왜 이런….”

도검존은 후인을 위해서 무학을 남기려다가 사령술에 당하는 비극을 겪었다.

그대로 사라져도 이상할 게 없는데, 내게 무학을 전해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자네라면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네.”

도검존이 은은한 미소 그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저는….”

“말할 필요 없다.”

다 착각이었다고 말을 하려할 때 도검존이 천천히 단호하게 손을 저었다.

“영혼이 쇠사슬에 묶인 채로 너를 지켜보았다.”

도검존의 검은 눈동자 위로 투명한 광채가 피어났다.

“처음에는 죽고 싶었다. 내 작은 욕심이 너희를 괴롭게 만들었다는 것에. 이미 죽었음에도 죽고 싶어질 정도였어. 다만….”

그 말이 진심인 듯 그가 가슴을 아리도록 부여잡았다.

“너를 보았을 때는 그저 기뻤다. 그분의 무학과 검술로 내 앞에서 물러서지 않고 싸우는 모습이 감격스럽더구나. 내게 눈이 남아 있음을 감사했다.”

도검존이 조금은 가벼워진 눈빛으로 고개를 들었다.

“나와 싸우는 와중에도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 움직이는 모습을 본 순간 네가 그분의 진정한 후예임을 확실히 깨달았지.”

“…….”

아쉽지만 저것도 착각이다. 사람들을 살린 건 그저 데루스의 계획을 망가뜨리기 위해서였을 뿐이다.

평소라면 본인의 욕심을 위해서 이곳에 온 사람들을 굳이 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분의 무학과 검 그리고 정신이 이어지고 있다는 게 그저 기쁠 뿐이다.”

도검존이 눈을 마주치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얼굴은 네가 더 낫다.”

“…….”

웃으라고 한 말이었겠지만, 웃음은 나오지 않았다.

“역시 존잘 라온.”

다만 갑자기 뒤에서 루난의 목소리에 헛웃음을 터트릴 뻔 했다.

“마지막으로 네게 해야 할 말이 있다.”

도검존이 기막을 펼친 채 목소리를 낮췄다.

“지그하르트에는 진정한 적이 있다.”

“적?”

“가주께서 모두 멸망시켰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그 맥이 이어지고 있더구나.”

그가 한숨을 내쉬며 본인의 눈을 가리켰다.

“흑과 백이 뒤바뀐 내 눈을 기억하겠지?”

“예.”

처음에 보았을 때 그것 때문에 당황했었다. 그 눈은 지그하르트 초대 가주의 기억에서 보았던 괴물과 같았으니까.

“그게 놈들의 특징이다. 악마들의 눈이지.”

-왜 또 악마야! 너희가 더 사악하다고!

라스가 너희들이 더 악독하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놈들의 정체는 뭡니까?”

“나 때는 ‘아니마’라 불렀지만 지금은 어떻게 칭할지 모르겠군. 워낙에 이름을 자주 바꾸는 놈들이라.”

“아니마….’

데루스과 관계가 있는 건 분명한데, 놈의 밑에 있을 때는 들어보지 못했던 이름이었다.

‘악연 중에서도 악연이로군.’

아무래도 나와 데루스는 악연은 전생에서부터 이어진 게 다가 아닌 것 같았다.

“그런데… 어?”

라온이 도검존에게 말을 걸려다 말고 눈을 부릅떴다. 도검존의 몸이 가루가 되어 흩어지기 시작했다.

“음….”

도검존이 퍼즐 조각처럼 흩날리는 본인의 손을 보며 옅게 웃었다.

“시간이 다 된 모양이군.”

“아….”

“미약하지만 네게 남은 오러를 전해주었으니, 한계가 온 모양이다.”

그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다행이다. 너를 보니 가지고 있던 걱정이 모두 사라졌어.”

도검존이 아직 남아 있는 왼손으로 내 손을 잡아 왔다.

“당대 지그하르트의 후계자가 이 정도라면 가주는 안 봐도 되겠지. 내가 남긴 것들은 네가 다 알아서 사용하도록 해라.”

“도검존 님. 저는 지그하르트의 후계자가 아닙니다.”

“아니야? 하긴 어리니까. 그래도 곧….”

“그게 아니라.”

라온이 짧게 고개를 저었다. 마지막만큼은 착각하지 않도록 사실을 말해주고 싶었다.

“저는 아직 방계입니다.”

“어…?”

도검존이 눈을 부릅떴다.

“바, 방계라고? 네가?”

“예.”

“아니! 말이 안 되잖아! 어떻게 방계가 만화공과 불의 고리를 익히고 있는 건데!”

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손을 뻗었다. 다만 그의 손은 내게 닿기 전에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그게….”

“자,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 이대로는 못 가! 네가 왜 방계냐고! 지금 지그하르트에는 병신밖에 없어? 왜 네가 방….”

도검존이 비명을 질렀지만, 그의 몸이 사라지는 건 멈추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녹아내리는 그의 눈동자가 처음 보았을 때처럼 뒤틀리는 것 같았다.

“…….”

라온이 도검존이 사라진 땅을 보며 눈을 깜박였다.

“차라리 말을 하지 말 걸 그랬나?”

마지막이라 솔직하게 말해줬는데, 오히려 독이 된 것 같았다.

-후우.

라스가 머리를 부여잡은 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가끔은 할 필요 없는 말도 있느니라….

녀석은 한 번 더 한숨을 내뱉고서 미간을 구겼다.

-아니, 마족이 인간에게 인성을 가르치는 게 맞아?

***

라온이 손을 탁탁 털었다. 이미 지나간 일 어쩌겠는가. 다 잊기 위해서 고개를 젓고서 광풍대에게 돌아갔다.

“괘, 괜찮습니까?”

버렌이 눈을 끔벅이며 다가왔다.

“도검존 님이 마지막에 괴성을 지르는 것 같던데….”

“나는 발악을 하는 것처럼 보였어. 대체 무슨 말을 했던 겁니까?”

마르타도 궁금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별일 아니야. 그냥 잘 지내라고 하셨어.”

사실을 말하면 이들도 당황할 것 같아서 고개를 저었다.

“도검존이 우리의 선조였다니, 참 별일이 다 있군.”

정신을 차린 세레나가 헛웃음을 흘렸다.

“네가 처음에 와서 한 말이 틀린 말이 아니었구나.”

“그러게요.”

라온이 세레나를 보며 픽 웃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덕분에.”

세레나는 지독한 중상을 입고 있음에도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장부 그 자체였다.

“그럼 이제 나가보죠.”

라온이 광풍대와 공검대 그리고 살아남은 중립 세력을 보며 턱을 주억였다.

지그하르트의 무인을 제외해도 숫자가 상당하다. 증인이 되어주기에는 충분한 인원이었다.

“다시 올라가려면 고생 좀 하겠네.”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고개를 저으며 천장을 가리켰다.

“이 수련장을 관리하는 통제실을 찾았습니다. 그곳을 이용하면 금방 지상으로 올라갈 수 있어요.”

“좋네! 당장 가자!”

리메르는 술이 고프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졸려.”

루난은 졸린 듯 하품을 하며 눈을 끔벅였다.

“그런데 우리가 전부 다 나갈 수는 없잖아. 통제할 사람이 있어야지.”

세레나가 주변을 둘러보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남에게는 맡길 수가 없으니까. 한 명은 남기는 게….”

“통제할 사람은 없지만, 통제할 닭은 하나 있어요.”

“닭?”

“얘요.”

라온이 피식 웃으며 하늘에 둥둥 떠 있는 불사조 카이얀을 가리켰다.

“뺙뺙이가 관리할 겁니다.”

[누, 누가 닭이야! 그 전에 내가 왜! 나는 아무것도 안 할 것이다!]

카이얀은 이제 인간의 말은 안 들을 거라며 고개를 저었다.

“나도 나가는데?”

[어…?]

“내가 나가면 너도 편안히 살 수 있는데, 그 기회를 걷어차겠다고.”

라온이 빙글 거리며 카이얀의 날개를 톡톡 두드렸다.

“나랑 있는 게 그렇게 좋다면 어쩔 수 없….”

[하겠다! 당장! 초고속으로 올려보내 주마!]

카이얀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빠르게 날개를 펄럭였다. 바닥의 모래가 폭풍이 되어 날아올랐다.

-이 악마가 영원히 떠나는 게 아니거늘.

라스가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닭대가리는 어쩔 수 없느니라….

***

연한 붉은빛을 띤 발판이 천천히 하늘로 향해 솟구친다. 이 수련장을 통제하는 자만이 이용할 수 있는 비밀 통로였다.

“나가면 인간들이 가득하겠지?”

리메르가 천장을 올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없는 게 더 이상한 일이다.”

세레나가 당연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이제 싸우기 귀찮은데.”

“아니죠. 그들이 꼭 있어야 합니다.”

라온이 리메르를 보며 턱을 저었다.

“증인이 되어줘야 하니까.”

“그건 그렇지만, 힘들잖냐.”

리메르는 증인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은 듯 잔잔히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도검존을 만나게 되다니, 아직도 믿기질 않네.”

버렌은 지금도 심장이 떨리는 듯 가슴을 매만졌다.

“나도 일이 이렇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어.”

마르타가 동의한다고 말하며 콧잔등을 긁었다.

“맞아. 자고 싶어.”

루난은 피곤하다며 눈을 끔벅였다. 이제 도검존이고 뭐고 별 관심 없어 보였다.

라온은 여유를 찾은 광풍대를 찬찬히 둘러보며 작게 턱을 주억였다.

‘잘 싸워줬어.’

다만 아직 조금 부족해.

이번에도 여러 우연이 겹치지 않았다면 상당히 위험했을 것이다.

아무래도 검사들 개개인의 무력을 확실하게 끌어 올려주어야 할 것 같았다.

‘그 재료는 이미 내 손에 있으니까.’

도검존의 무학을 잘 조합한다면 저 녀석들을 위한 새로운 무학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모두가 조금 더 강해질 수 있는 방향을 세우고 있을 때 통제실에 있는 카이얀의 음성이 들려왔다.

[뺙! 거의 다 도착했다!]

‘뭐, 그 전에….’

라온은 햇살이 흩날리는 듯한 빛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해야 할 일이 있지만.’

바닥이 불쑥 솟구치는 듯한 감각과 함께 어둑한 밤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오랜만에 밟는 지상의 땅이 솜털처럼 부드럽게 느껴졌다.

“많군.”

“그래. 아주 가득해.”

리메르와 세레나가 숲을 둘러보며 미간을 구겼다.

두 사람의 말대로 이 주변은 도검존의 유산을 빼앗기 위해서 대기하는 하이에나 무리로 가득했다.

“경계 태세.”

버렌이 짧게 고개를 젓자, 광풍대가 진을 펼치기 위해서 좌우로 날개를 펼쳤다.

“내가 말로 해결할 게.”

라온은 광풍대가 세우는 진을 벗어나 앞으로 걸어갔다. 홀로 숲의 중앙에 서서 발을 굴렀다.

쿠우웅!

대지만이 아니라, 하늘까지 울리는 듯한 거대한 충격파가 사위로 뻗어나갔다.

수풀과 나무가 휘청이며 모습을 감추고 있던 무인들의 창백한 안색이 드러났다.

“지금부터 이 땅은 지그하르트의 영역이다.”

라온은 욕망이 흘러내리는 수천의 눈동자를 굽어보며 뇌까렸다.

“10초 주마. 무기를 내려놓던가. 꺼지던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