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640화 (639/653)

제640화

라온이 중지에 낀 반지를 바라보았다. 카이얀의 깃털이 녹아내린 듯 반지의 표면에 불사조의 날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서 반지 위로 만화공을 일으켰다. 반지에서 타오르던 불길이 황금빛으로 변하며 장대한 화염의 날개를 펼쳤다.

“그, 그건 뭐냐!”

델프로스는 반지에서 피어나는 진중한 불길을 보자마자 뒤로 물러섰다. 겁을 먹은 듯한 표정이었다.

후우우욱!

반지에서 피어난 불꽃의 날개는 뒷걸음질을 친 델프로스를 놀리기라도 하듯 내 어깨 위로 내려앉아 전신을 휘감았다.

뜨거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겨울을 지우는 봄의 햇살처럼 따스함만을 안겨주었다.

치이이이익!

반지의 불꽃이 피부에 닿자마자, 도검존에게 베였던 상처가 순식간에 지워졌다. 꼭 시간을 되돌린 듯한 모습이었다.

외부의 상처만이 아니다. 내상을 입었던 장기도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파열되었던 근육과 뼈, 마나 회로도 완전히 회복되었다. 손을 떨리게 만들던 복부의 통증이 씻은 듯 사라졌다.

우우우우웅!

텅 비어버렸던 단전에도 새로운 물길이 차올랐다. 만화공의 불꽃과 글래시아의 서리가 단전을 다 채우고도 남아 전신의 마나 회로로 퍼져나갔다.

마지막으로 극한의 전투를 치르며 말라붙어가던 정신이 별관의 방에서 푹 자고 일어난 것처럼 말끔해졌다.

다시 검계를 펼쳐도 무리가 없을 정도였다.

-네, 네놈 대체 무얼 한 것이냐!

라스가 라온을 돌아보며 눈을 부릅떴다.

-오러를 채우는 건 이해하겠는데, 정신력까지 회복시키는 건 말이 안 되잖느냐!

녀석은 거래할 때마다 정신력은 회복시킬 수 없다고 말했다. 마왕도 할 수 없는 일을 이 작은 반지가 이뤄주었으니, 놀라는 건 당연했다.

‘불사조의 반지야.’

-불사조의 반지?

‘불사조가 죽어도 되살아나는 것처럼 이 반지는 소유자의 상처와 오러를 모조리 회복시키지. 정신력까지도.’

-그, 그건 사기잖느냐!

‘너보다 유능하지?’

-다, 닥쳐! 본왕도 본체가 있으면 할 수 있… 끄응.

라스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거짓말을 못 하는 녀석다운 반응이었다.

‘그래도 부러워할 필요는 없어.’

라온은 빛이 바래져 가는 불사조의 반지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일회용이니까.'

이 반지는 마왕인 라스보다도 뛰어난 회복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딱 한 번밖에 쓸 수 없다.

-이, 일회용? 으음, 써야 할 때기는 하지만, 조금 아까운데….

‘그래. 아깝지.’

딱 한 번 쓸 수 있는 아티팩트이니 아깝지 않을 리가 없다. 라스의 말대로 훗날 이 반지를 쓰기 가장 좋은 때가 따로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본능과 감정은 지금 반지를 쓰는 게 옳다고 판단했다.

‘저놈을 직접 부수지 않으면 내 속이 풀리지 않을 테니까.'

라온이 오른손으로 주먹을 말아쥐며 시선을 들었다.

“뭐냐! 네놈은 대체 뭐냐고!”

델프로스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머리를 부여잡은 채 악을 질렀다.

“여전하군.”

라온이 당황에 물든 델프로스의 눈동자를 마주 보며 고개를 저었다.

‘겁쟁이 놈.’

델프로스에겐 나를 칠 수 있는 기회가 수도 없이 많았다.

도검존과 전투를 벌이던 모든 순간이 놈에게는 기습을 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델프로스는 내가 무학서를 태울 때가 되어서야 움직이는 멍청함을 보였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겁쟁이니까.’

델프로스는 내가 숨겨둔 한 수에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끝까지 도검존만 밀어붙였다.

아마 내가 모든 힘을 소모하고 나서야 움직이려고 한 것 같은데, 그 덕분에 무학서를 태우고 도검존을 잠재울 수 있었다.

내 오러와 상처가 회복되자마자 델프로스가 물러선 게 그 증거였다.

'저게 놈의 한계지.'

데루스 로베르트는 델프로스의 조심성 많은 성격을 믿고 이곳을 맡겼겠지만, 지금 저놈은 데루스의 기대를 최악의 방식으로 배신하고 있었다. 내게는 참으로 다행이었다.

“안 오나?”

라온이 델프로스를 보며 턱을 까딱였다.

“죽일 것처럼 달려들더니 왜 멈춘 거지?”

“끄윽….”

델프로스는 본인이 더 강한 무력을 지니고 있음에도 섣부르게 움직이지 않았다. 조심성이 많은 게 아니라, 겁을 먹었기 때문이다.

“시간을 준다면 나야 좋지.”

라온이 고개를 저으며 제천검과 진혼검을 바닥에 박아넣었다.

쿠구구구구!

어둠 속에서 다시 한번 황금빛 태양과 은색의 달이 떠오른다. 공동을 비추는 영롱한 빛살 아래 신검과 마검이 떠올랐다.

“거, 검계를 연속으로 쓴다고?”

델프로스는 믿을 수가 없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멀리서 지켜보고 있을 때는 좋았겠지.”

라온은 전보다 더 뜨겁고 차갑게 달아오른 신검과 마검을 잡은 채 입매를 말아 올렸다.

“너는 네가 보았던 그 어떤 죽음보다도 처참하게 죽어갈 것이다.”

“개소리.”

델프로스가 부러질 정도로 이를 악물었다.

“도검존과 전투를 통해서 네놈의 무학을 모조리 파악했다. 검계를 쓴다고 해도 무서울 게 없어!”

“말 한번 더럽게 많네. 네가 안 오면….”

라온이 왼발을 내뻗었다. 발바닥의 중심에 박힌 마나 회로에서 만화공의 열기를 폭발시켰다. 포탄처럼 급격하게 뻗어나가는 육체에 태화보를 얹었다.

“내가 가지.”

땅이 접힌 듯 순식간에 델프로스의 모습이 가까워졌다.

“주둥아리만 살아서!”

델프로스가 벼락처럼 손을 휘두른다. 그의 손아귀에 잡혀 있는 검이 공간을 거칠게 가르며 가슴으로 파고들어 왔다.

‘무학을 파악했다는 게 거짓이 아니었나?’

놈은 태화보가 이어지는 순간을 완벽하게 노리고 있었다. 도검존과의 전투를 그냥 지켜보고 있었던 건 아닌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라온은 물러서기보다 더 빠르게 나아갔다. 델프로스의 검에 제대로 된 힘이 실리기 전에 놈의 검면을 후려쳤다.

쩌어어어엉!

완벽에 가까운 검격을 막은 게 아님에도 강렬한 충격이 느껴졌다. 조금만 잘못 맞아도 팔이 통째로 날아갈 듯한 위력이었다.

“아직 멀었다!”

델프로스가 한 번 잡은 기세를 이어가겠다는 듯 들소처럼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검을 찔러넣는다. 놈의 칼날 위에 스며든 강환이 폭주하듯이 솟구쳤다.

우우우웅!

라온이 마검으로 염주벽을 세우고, 신검으로 중천포를 내질렀다.

염주벽으로 방어하고, 중천포로 반격을 이루려고 했는데, 델프로스는 예측했다는 듯 입매를 비틀었다.

“다 본 것이다!”

놈이 급격히 방향을 전환했다. 염주벽을 무시한 채 우측으로 돌아가 중천포를 내리찍어버렸다.

쩌어어어엉!

중천포를 이루던 냉기가 깨지며 라온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말했지.”

델프로스가 턱을 들어 올리며 거만한 눈동자를 번득였다.

“네놈의 무학은 모두 파악했다고. 이제 끝이다.”

놈은 최대한 빠르게 끝내주겠다며 번뜩이는 검을 들어 올렸다.

“내 무학을 파악했다고 했는데….”

라온이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올리며 오연한 미소를 그렸다.

“그건 언제의 나지?”

***

“뒈져!”

마르타가 검은 안광을 불태우며 백혈교도에게 달려들었다.

“모조리 찢어주마!”

그녀의 폭급한 검이 뻗어나갈 때마다 백혈교도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나찰녀라는 이명이 너무도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이쪽은 걱정할 게 없어 보이고.”

버렌이 마르타에게서 시선을 돌려서 라온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번 일의 원흉으로 보이는 중년인과 살기 짙은 검을 부딪치고 있었다.

“대주는 괜찮을까?”

상대의 강환이 라온보다 강했고, 싸움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기에 저쪽이 더 유리해 보였다.

“괜찮아.”

루난은 마르타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 1조와 2조를 보호하며 고개를 저었다.

“라온은 지금 침착해. 이길 수 있어.”

그녀는 라온의 등을 힐끔 보며 입매를 아주 작게 들어 올렸다.

“네가 말하면 맞겠지.”

버렌이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라온을 가장 잘 아는 건 루난이다. 그녀가 괜찮다고 했으니 저쪽도 믿어도 될 것 같았다.

“그럼 우리만 잘 끝내면 되겠군.”

몬스터는 불사조가 막고 있고, 욕심에 물들어 있던 무인들도 무학서가 타자마자 정신을 차렸다.

광풍대와 공검대가 백혈교와 성검련만 꺾는다면 모든 상황을 끝낼 수 있었다.

“대가리가 텅텅 빈 건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좀 심하네.”

리메르가 귀마검주를 보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저놈들이 무학서를 넘겨줄 거 같냐? 도박장에 월급을 올인하는 나만큼이나 멍청한 짓이라고.”

“멍청한 건 네놈이다.”

귀마검주가 눈동자에 귀화를 피운 채 입술을 씹었다.

“성검련은 검술과 검을 위해서라면 지옥에도 뛰어들 수 있다!”

“아오, 이 검 성애자 놈들….”

리메르가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런 내 눈앞에서 도검존의 무학서를 태우다니! 라온 지그하르트의 심장을 내가 뽑아낼 것이다!”

귀마검주는 지금까지 중 가장 섬뜩한 의념을 일으키며 쇄도해왔다.

쿠우우우웅!

오러는 줄었지만, 의념이 너무도 독해서 충격이 깊다. 조금이지만 의수가 뒤틀린 것 같았다.

“이쪽 역시 마찬가지다.”

6사도가 라온의 뒷모습을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교주의 지시를 완수하지 못했으니, 저놈의 목이라도 내가 가져간다!”

“네 상대는 나다.”

세레나가 진각을 밟으며 검을 내리쳤다. 중검이라는 격을 벗어난 어마어마한 무게가 6사도의 전신을 찍어눌렀다.

“이 시체 같은 것이! 끝까지!”

6사도가 혈기로 타오르는 수도로 검을 밀어내려 했지만, 세레나의 검은 그 자리에 고정된 듯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날 죽이기 전에는 가지 못해.”

세레나는 복부에서 다시 피가 뿜어지고 있음에도 눈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소를 지으며 강대한 패기로 6사도를 밀어냈다.

“이 망할 것들이!”

“오냐! 그렇게 원한다면 너희부터 죽여주마!”

귀마검주와 6사도가 눈동자에 시꺼먼 악의를 일으킨 채 돌진해왔다.

“그래. 우리도 끝낼 때가 되었지.”

리메르가 검을 아래로 내리며 손가락을 세웠다. 그가 연한 미소를 지은 채 북쪽의 삭풍을 불러왔다.

“검계현신.”

***

쩌어어엉!

델프로스가 유려하게 굽어지는 라온의 검격을 쳐내며 입매를 비틀었다.

'봤던 검술이다.'

라온의 검은 다채로우면서도 위력적이었지만, 2층에서부터 계속 지켜본 덕분에 놈의 모든 검술을 파악할 수 있었다.

다만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본래라면 내가 싸울 필요가 없었으니까.’

본래의 계획은 도검존으로 끝을 내는 것이었는데, 라온 지그하르트 때문에 모든 것이 망했다.

도검존의 힘이 끊어졌고, 몬스터는 불사조에게 학살을 당하고 있었으며, 분열도 멈춰버린 상태였다.

계획 자체가 모조리 무너져버렸다.

‘그래도 괜찮아.’

여기서 라온만 죽인다면 모두 해프닝으로 끝낼 수 있으니까.

라온이 사용한 반지가 빛을 잃은 것을 보면 두 번은 사용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놈의 목을 베어버린다면 모두 다 무마시킬 수 있다.

‘다만 최대한 빠르게 끝을 내야 해.'

라온 지그하르트는 싸우면서 강해지는 특별한 재능을 지니고 있다. 도플갱어 로드와 같은 꼴을 당하지 않으려면 최대한 빠르게 놈을 죽여야 한다.

[사비대주.]

[예.]

[이제 욕망은 됐다. 내 무력만 강화시켜!]

[으음, 오래 지속되기는 힘듭니다.]

[어차피 오래 끌 생각은 없다.]

[알겠습니다.]

사비대주의 대답이 끊어지자마자, 전신에 힘이 차오른다. 단전의 오러가 끝없이 솟구쳐 세상을 주무를 수 있을 듯한 전능감이 느껴졌다.

‘전력으로 깨부숴주마!’

델프로스가 강화된 오러를 응집시킨 검격을 쏟아냈다. 데루스에게 직접 전수받은 흑천검이 장대한 강환의 폭풍을 일으켰다.

라온이 두 자루의 검을 동시에 내뻗는다. 검극에서 각기 다른 빛이 일렁이며 공간을 가르는 극쾌의 참격을 이뤘다.

쩌어어어억!

델프로스가 일으킨 강환의 폭풍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졌다.

“어…?”

저 검술은 알고 있는데, 위력이 좀 많이 달라진 것 같았다.

‘뭐지?’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마른침을 삼킬 때 라온이 좌측으로 짓쳐들었다. 놈은 눈빛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불꽃으로 타오르는 사선으로 그어 내렸다. 은빛 칼날과 푸른 칼날이 동시에 뻗어 나왔다.

‘서리연!’

라온 지그하르트가 직접 만들었다는 검격이다. 한 번 휘둘러서 두 번을 치는 기묘한 검격. 다만 알고 있다면 무엇보다도 막기 쉬웠다.

쩌어어엉!

첫 번째 칼날을 막고, 두 번째 칼날을 기다리는데 바로 찾아오지를 않았다.

‘이건 또 뭐야!’

긴장감에 식은땀이 흐를 무렵 두 번째 참격이 훅 떨어져 내렸다.

쩌어어엉!

본래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느린 검격이었다. 다만 바뀐 건 속도만이 아니다. 서리연의 위력이 너무도 달라져 있었다.

“크윽!”

델프로스가 검에 어린 충격을 풀어내며 뒤로 물러섰다.

“너 대체….”

하지만 의문을 풀 시간은 없었다. 라온의 공격이 계속 이어졌으니까.

놈의 검 위에서 비늘을 세운 수룡이 피어난다. 검게 일그러진 아가리에서 지독한 서리의 숨결을 뿜어냈다.

‘범위가 넓은 대신 위력이 약화… 어?’

델프로스가 보법을 밟다 말고 눈을 부릅떴다. 본래 넓은 공간을 으깨버리는 라온의 검격이 이쪽으로 집중되어 쇄도해왔다.

“이, 이런!”

걸음을 멈추고 황급히 몸을 돌렸다. 검을 앞으로 내밀며 가진 오러를 모조리 끌어냈다.

쿠와아아아앙!

라온의 검격과 부딪치자마자, 무시무시한 충격이 전신을 압박해온다. 손아귀가 떨려서 검을 놓칠 지경이었다.

화아아아아!

수룡의 포효를 잇는 건 화염의 포다. 화검의 검극에 응집된 기운이 단숨에 뻗어나왔다.

우드드득!

두껍게 세웠던 오러의 방패가 뭉개진다. 검이 부러질 듯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뭐, 뭐야! 이 힘은! 그리고 이 검술은 뭐냐고!’

분명 알고 있는 검술이었고, 라온에게 시간을 주지도 않았건만, 놈의 무력이 예측을 한참 벗어나 있었다.

‘설마….’

델프로스는 차분한 걸음으로 다가오는 라온을 보며 파래진 입술을 떨었다.

‘나와 싸우기 전부터 이미 강해진 상태였나?’

***

라온은 눈동자에 경악을 담은 델프로스를 보며 비웃음을 흘렸다.

‘당황스럽겠지.’

놈이 알고 있던 내 무학과 지금의 경지가 너무도 달라졌으니 놀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만 이건 지극히도 당연한 일이었다.

‘실제로 더 강해진 게 맞으니까.’

오러가 눈에 띄게 늘어났다거나, 무학의 경지가 압도적으로 높아진 게 아니다.

도검존과 생사의 대결을 벌이며 이 무덤에서 얻었던 깨달음을 완벽하게 정리할 수 있었다.

체력과 오러, 정신력이 달려서 그 성장을 표현할 수 없었지만, 불사조의 반지 덕분에 내 온전한 경지를 보여줄 수 있게 되었다.

“네놈은 대체 뭐냐! 언제까지 방해만 할 거냐고!”

델프로스가 악을 지르며 검을 비틀었다. 검게 갈린 칼날에서 강환의 소나기가 쏟아져 내렸다.

쿠웅!

라온이 델프로스의 공간을 파고들었다. 놈의 눈동자를 보며 입술을 말아 올렸다.

‘겁을 먹었군.’

델프로스는 조금 전까지 나를 죽이기 위한 공격을 해왔다면 지금은 본인을 지키기 위한 검격만을 운용하고 있었다.

본래의 겁쟁이로 돌아갔다는 뜻이었다.

놈의 좌측으로 들어가 적섬과 청우를 그었다.

쩌어어어어엉!

깨달음에 젖은 검격이 뻗어나갔지만, 델프로스가 일으킨 검막을 뚫어내지는 못했다. 굉장히 단단하게 여물어 있었다.

‘검술도 바꿨군.’

델프로스의 검술이 흑천검에서 방어 위주의 사관검으로 바뀌었다. 방어가 9할인 검술이었기에 깨는 게 쉬워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도 두드리면 열리게 되어 있어.’

여전히 그릇이 작다고 생각하며 델프로스를 향해 나아갔다.

쩌어어어엉!

적섬삼십육결과 서리연이 동시에 그으며 델프로스의 검막을 연달아 두드렸다.

“꺼져라!”

델프로스는 아예 공격을 포기한 채 방어와 회피만을 반복했다.

“이 새끼들부터 죽이라고!”

놈은 뒤로 물러서다 말고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파고들어 광범위 검격에 제동을 걸었다. 얍삽하기로는 지금까지 본 놈 중 제일이었다.

“네놈은 이곳을 나갈 수 없다! 여기가 네 무덤이야!”

델프로스는 그 와중에도 도발하듯 악을 질러댔다.

“그 두 놈과 같은 곳으로 보내주마!"

“…….”

라온의 안광이 냉랭하게 물들었다.

코만 기사단장 쿠잔과 뇌쇠 바르필이 죽은 곳을 바라보았다. 부러진 검과 망가진 지팡이를 보며 입술을 씹었다.

“크윽!”

델프로스도 분위기가 바뀐 것을 느낀 듯 가진 오러를 모조리 끌어내서 검막을 일으켰다. 강환의 줄기로 이루어진 검막이 벽처럼 솟구쳤다.

“등껍질이 단단해봤자. 거북이는 거북이일 뿐이지.”

라온이 신검을 뒤로 젖혔다. 검날에 어린 금빛 화염이 용음을 토하며 장대한 궤적을 그린다. 질주하는 듯 뻗어나간 불길이 찬연한 빛과 함께 춤을 췄다.

[땅거미 진 노을 아래의 칼날은 파도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으니.]

설괴후를 베며 이뤘던 첫 번째 구결 뒤로 새로운 부름이 이어진다.

[벽을 부수는 건 검이 아니라, 사람. 의지를 깎은 이는 가르지 못하는 게 없노라.]

깨달음이 구결로 화하며 뇌리에 새로운 검을 세웠다.

라온 지그하르트 류 검식

제7형 공허살.

시간과 공간. 찰나를 베어버리는 일검이 델프로스의 검막을 꿰뚫었다.

쩌어어억!

검막은 그대로 놔둔 채 그 뒤에선 델프로스의 복부가 길게 갈라졌다.

푸카아아악!

델프로스의 아랫배가 갈라지고 붉은 핏물이 쏟아진다.

“크아아아아악!”

놈이 배를 움켜잡은 채 괴성을 질러댔다. 무인이라고는 할 수 없는 추잡한 비명이었다.

하지만 당연한 일이다. 갈라진 건 복부만이 아니었으니까.

붉은 핏물 사이로 거대한 오러 뭉치가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단전이 갈라지며 길을 잃은 오러가 터져 나온 것이다.

“아어어억!”

델프로스의 안색이 당장 죽을 것처럼 창백하게 물든다.

빠드드득!

무너진 검막을 밟으며 델프로스의 앞에 섰다.

“일부러 목을 베지 않았다. 너는 그렇게 죽기에는 너무 아까우니까.”

“자, 잠깐!”

“말했지? 네가 보았던 그 어떤 죽음보다도 처참하게 죽여줄 거라고.”

라온은 소름이 돋아 오를 듯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뻗었다.

“기대해도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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