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37화
로베르트 가문의 집무실.
데루스 로베르트는 은은한 달빛을 등불 삼아 서류를 살피고 있었다.
여인의 입매 같던 초승달이 하늘의 중심에 섰을 때 펜을 잡고 있던 그의 손이 우뚝 멈췄다.
“…….”
데루스 로베르트는 들고 있던 펜을 내려놓고, 장갑을 벗었다. 검은 가죽 장갑 안쪽에서부터 끈적한 핏물이 흘러내려 고풍스러운 책상 위에 뚝 떨어졌다.
그는 시뻘건 핏물이 흘러내리는 손등을 잠시 바라보다가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쿠바라.”
데루스의 부름이 끝나자마자, 집무실 문이 열렸다. 시녀 복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쿠바라가 들어와 부복했다.
“부르셨습니까?”
“무덤에 라온 지그하르트도 들어갔다고 했었지?”
“예. 다른 세력에 비해 조금 늦기는 했지만, 무덤이 열린 첫날에 들어갔습니다.”
쿠바라가 라온의 진입 상황을 이야기하며 고개를 숙였다.
“…….”
데루스는 다시 입을 다문 채 손등의 상처에서 흘러내리는 핏물을 바라보았다.
쿠바라 역시 눈을 감은 채 데루스가 다음 말을 하기를 기다렸다.
“상황이 종료되는 건 오늘 저녁쯤이었나?”
데루스는 손수건으로 책상에 떨어진 핏물을 닦으며 고개를 가늘게 틀었다.
“그렇습니다.”
쿠바라가 머뭇거림 없이 답을 내놓았다.
“다만 시체의 상흔을 조작하려면 시간이 조금 더 걸릴 수도 있을 겁니다.”
“흠….”
데루스가 곱게 빛나는 달빛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아무래도 직접 가봐야 할 것 같군.”
“예?”
쿠바라는 평소와 달리 반문을 하며 고개를 들었다.
“현재 무덤 주변에는 인산인해가 펼쳐져 있습니다. 혹시라도 눈에 띄게 되면….”
“근처까지 가지는 않을 것이다.”
데루스가 다시 손등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저 확인하고 싶을 뿐이니까.”
미신은 믿지 않지만, 손등의 상처에서 핏물이 흘러나오는 건 준비했던 계획이 어그러졌을 때뿐이었다.
‘라온 지그하르트.’
또 네놈이냐.
육황오마의 수장 급이 오지 않는 이상 문제가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변수 그 자체인 라온의 개입이 마음에 걸렸다. 놈이 나타나서 일이 제대로 풀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이번만큼은 안 돼.’
도검존의 무덤을 꾸미는 데 천문학적인 자원이 들어갔다. 실패한다면 손해를 떠나서 대계 자체가 꺾여버릴 가능성도 있었다.
이번 계획만큼은 가만히 기다릴 수가 없었다.
“델프로스와 사비대주를 믿으시지요. 무덤 전체를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내려주셨지 않습니까. ‘그것’도 있는데….”
“그래. 계획은 완벽하다. 하지만….”
데루스 로베르트가 차분히 고개를 저었다.
“라온 지그하르트. 그놈은 계속해서 내 예측을 벗어났어.”
그가 몸을 일으키며 손등에서 흘러내리는 핏물을 입술로 닦았다. 달빛조차 두려움에 질린 듯 집무실에 기괴한 어둠이 찾아왔다.
“내가 직접 보아야겠다.”
* * *
라온이 광풍대가 열어둔 길을 따라 델프로스에게 걸어가려고 할 때였다.
쿠우우우웅!
좌측과 우측에서 육중한 충격파가 터지며 광풍대가 뒤로 밀려났다.
“우리는 보이지도 않는 것이냐!”
“건방진 놈.”
귀마검주와 6사도였다. 두 노괴는 수하들을 이끈 채 광풍대의 앞을 막아섰다.
“우, 우리도 가자!”
“여기까지 온 이상 물러난 길은 없어!”
“라온 지그하르트만 죽인다면 나도 도검존이 될 수 있다고!”
델프로스가 새로운 도검존이라는 말을 했기 때문인지 물러서 있었던 중립 세력의 무인들도 전장으로 뛰어들어 광풍대를 에워쌌다.
“멍청하군.”
라온이 귀마검주와 6사도를 보며 비웃음을 흘렸다.
“저놈이 너희에게 도검존의 무학서를 넘길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여유롭게 차를 마시는 델프로스를 흘기며 코웃음을 쳤다.
“안 줘도 상관없다.”
귀마검주가 얇은 검을 휘돌리며 고개를 저었다.
“널 죽이고, 저놈도 죽이면 되니까.”
그는 자신 있다는 듯 서늘한 미소를 그렸다.
“무학서를 떠나서 네놈이 마음에 들지 않아.”
6사도가 이쪽을 보며 미간을 구겼다.
“교주께서는 널 살려서 데리고 오라 하셨지만, 여기서 죽는다면 누가 알겠어.”
그는 짙은 살의를 드러내며 수도를 세웠다. 하얀 혈기가 아지랑이처럼 타올랐다.
다만 귀마검주와 6사도는 나를 보면서도 서로에 대한 견제를 늦추지 않았다.
“음….”
라온이 짧게 숨을 고르며 주변을 살폈다.
‘이놈들을 막을 사람은 없나?’
오웬 왕국에서는 만통검자 크라셀과 함께 들소의 문양이 새겨진 기사단이 와 있었는데, 난전에 최강이라는 코만 기사단이었다.
발카르 쪽은 죽은 줄 알았던 뇌쇠 바르필이 마법사들과 함께 마법 진을 형성하고 있었다.
다만 두 세력은 지그하르트를 도와줄 생각이 아예 없는 듯 가라앉은 눈으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4층에서 공검대의 모습을 한 도플갱어를 만난 것 같군.’
발카르가 계속 공검대를 노려보고 있던 것을 보면 세레나의 예측대로 공검대로 위장한 도플갱어의 습격을 받은 게 분명해 보였다.
“후후.”
델프로스가 턱을 치켜든 채 비웃음을 흘렸다. 이 상황 자체가 본인의 뜻 때로 흘러가고 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 얼굴을 바로 깨주마.’
라온이 귀마검주와 6사도가 내뿜는 패악적인 기파 사이로 제천검과 진혼검을 찔러 넣었다.
미완성의 검계현신.
신마조화결.
완성되었다고 여겼지만, 스스로의 모자람을 깨닫고 다시 미완성이라는 명칭을 붙였다.
우우우우우웅!
제천검의 은빛 검신 위로 붉은 불꽃이 타올라 신을 담았고, 진혼검을 뻘건 칼날 위로 은빛 서리가 차올라 마을 이뤘다.
신검과 마검. 두 자루의 검극에서 피어난 오연한 기파가 귀마검주와 6사도의 기파를 완연히 밀어냈다.
“검계현신….”
6사도가 각기 다른 빛으로 타오르는 신검과 마검을 보며 입술을 씹었다.
“직접 보았음에도 믿기지 않는군. 허나….
귀마검주가 눈매를 좁힌 채 입꼬리를 들썩였다.
“의미 없는 일이다.”
“의미 없는 건 네 인생이겠지.”
라온이 귀마검주를 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이놈!”
귀마검주가 참지 못하고 달려든다. 눈가를 스치는 빛줄기처럼 극한의 속도로 다가와 심장을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라온이 방어를 하기 위해서 신검을 들어 올리는데, 뒤에서 경쾌한 바람이 불어왔다.
치이이잉!
신검보다 앞서서 나온 리메르가 귀마검주의 검을 막을 막아섰다.
쩌어어어엉!
귀마검주의 검격이 리메르가 일으킨 바람의 장벽에 막힌 채 기울어졌다.
“대주의 상대는 이쪽이 아닌 것 같은데.”
그는 살짝 고개를 돌린 채 시원한 미소를 입가에 걸쳤다.
“가능하시겠습니까?”
“날 누구로 보는 거냐. 악마의 수하라고.”
리메르가 빨리 가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어딜 간다는 거냐.”
6사도가 기다렸다는 듯 수도를 찔러왔다. 굉장히 폭급한 무학이었지만, 그 안에는 현묘한 무리가 어려 있었다.
마검으로 서리연을 그으려는 찰나 머리 위에서 육중한 오러가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쿠우우우웅!
세레나다. 그녀는 극심한 부상을 입었음에도 아무렇지 않은 듯 나아가 6사도를 힘으로 밀어내 버렸다.
“공검대! 광풍대를 지원하라!”
“예!”
공검대는 세레나의 지시를 따라 광풍대의 옆에 붙어서 묵직한 검기를 일으켰다. 그들의 검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다.
“죽다 살아난 시체 따위가.”
6사도가 수도 위에 강환을 일으키며 입술을 씹었다.
“공검대주님?”
“반할 뻔했다.”
세레나가 뒤로 고개를 돌리며 연한 미소를 그렸다. 저런 얼굴을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예?”
“네 언행이 내가 반했던 예전의 가주님을 보는 것 같았거든.”
“나도 가주님이 온 줄 알았어.”
리메르가 귀마검주의 검을 종이 한 장 차이로 흘려내며 픽 웃었다.
“라온, 가라.”
세레나가 델프로스가 있는 옥좌를 향해 턱짓했다.
“여기는 우리가 막을 테니. 네가 해야 할 일을 하도록.”
그녀는 죽더라도 길을 막아주겠다며 웃었다.
“감사합니다.”
라온이 세레나와 리메르에게 고개를 숙인 후 다시 델프로스에게 향했다. 놈은 상황이 이렇게 되었음에도 여유롭게 차를 마시고 있었다.
신검과 마검을 다잡으며 놈에게 뛰어들려고 할 때였다.
“멈춰라.”
“미안하지만 갈 수 없다.”
지금까지 지켜만 보고 있던 코만 기사단장과 뇌쇠가 단상 앞을 막아섰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라온이 코만 기사단장 쿠잔과 뇌쇠 바르필을 보며 눈을 부릅떴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이 둘이 끼어들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우리는 지그하르트에 습격을 받았다.”
“그 일을 확실하게 해명할 때까지는 넘어갈 수 없다.”
두 사람은 진심이라는 듯 검을 뽑고, 지팡이를 세웠다.
“지금 육황의 맹약을 깨겠다는 겁니까?”
라온이 코만 기사단장의 검과 뇌쇠의 지팡이를 보며 입술을 씹었다.
“먼저 맹약을 어긴 건 너희들이다.”
“4층에서 우리를 공격했지 않느냐!”
뇌쇠는 공검대를, 코만 기사단은 나와 리메르, 광풍대를 보며 이를 갈았다.
“그건 가짜입니다. 도플갱어를 이용해서 습격 한….”
“도플갱어였다면 타인이 아니라, 우리의 모습으로 변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우리를 바보로 아는군. 개소리는 적당히 하도록.”
코만 기사단장과 뇌쇠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며 고개를 저었다.
“거기다 네 말에는 증거가 없다. 반면 우리는 실제로 습격을 당했지.”
“네 목을 바친다면 들어주마.”
“…….”
라온은 그 말을 들으며 코만 기사단장과 뇌쇠의 눈을 보았다. 이곳에 온 다른 사람들처럼 눈동자가 욕망에 물들어 있었다.
“그런 소리를 할 거면 눈에 찬 탐욕이나 버리고 하시지.”
신검과 마검으로 코만 기사단장과 뇌쇠를 보며 입매를 비틀었다.
“닥쳐라!”
코만 기사단장이 거침없이 검을 내리찍는다. 보기와 다르게 빠르면서도 예리함을 두른 검격이었다.
파지지지직!
뇌쇠는 순식간에 영창을 마치고, 다섯 줄기의 벼락을 뽑아냈다.
터엉!
라온이 태화보를 밟았다. 좌측으로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짓쳐 드는 벼락과 검격을 향해 신검과 마검을 밀어냈다.
쿠구구구궁!
어마어마한 충격에 어깨가 짓눌리는 것 같았다. 라온이 입술을 씹으며 시선을 들었다.
‘진심이라고?’
코만 기사단장과 뇌쇠는 정말 날 죽일 것처럼 진한 살기가 어려 있는 공세를 가해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질 않았다.
“모조리 죽여라!”
“숫자는 우리가 더 많아!”
“절대 물러서지 마!”
“도검존의 무학이 눈앞에 있다!”
오웬 기사단, 발카르의 마법사, 성검련, 백혈교. 그리고 중립 세력들까지 모두가 눈동자에 붉은 열기를 휘감은 채 칼을 휘둘렀다. 모조리 미친 것 같았다.
‘전부 보물에 정신이 나간 건가?’
아니, 이건 불가능해.
날 죽이고 도검존의 무학을 얻는다고 해도 바로 도검존이 될 수 있는 게 아닌 이상 끝없는 싸움을 벌여야 한다.
저들이 뒤 없이 행동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이런 빌어먹을!”
“죽여! 막지만 말고 다 죽여 버려!”
“감히….”
버렌과 마르타, 루난도 수비 위주의 검진에서 극공의 검진으로 전환하며 오마와 중립 세력을 몰아붙였다. 광풍대의 눈동자에도 묘한 열기가 타오르고 있었다.
“불타오르는군. 싸움은 이래야지.”
델프로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흥겨운 미소를 지은 채 차를 홀짝였다.
‘이상해.’
라온이 코만 기사단장의 검을 쳐내며 미간을 구겼다.
‘이건 말이 안 돼.’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광풍대까지 전투에 미치는 건 정상이 아니다.
보물에 대한 욕망과 다른 힘이 작용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잠깐. 다른 힘?’
이 땅에 작용하는 다른 힘은 딱 하나 밖에 없었다.
“도망치지 마라!”
“어딜 가는 것이냐!”
코만 기사단장이 강환을 일으키고, 뇌쇠가 천공에서 벼락을 소환했다.
하늘과 땅에서 피할 수 없는 공세가 연달아 이어졌다.
치이이잉!
라온이 진각을 밟았다. 마검으로 서리연, 신검으로 적섬을 그으며 사선으로 검격의 방패를 세웠다.
쩌어어어어엉!
코만 기사단장과 뇌쇠의 공격을 간신히 차단하며 땅을 향해 시선을 내렸다.
‘이 결계였어.’
데루스는 다섯 번째 층의 결계를 조작하여 사람들의 이성을 보물에 대한 욕망과 전투로 물들게 만든 것 같았다.
오마와 중립 세력만이 아니라, 오웬과 발카르, 광풍대와 공검대까지 광기에 휩싸인 게 그 증거였다.
‘대단한 계획이네.’
데루스 로베르트에게 감탄이 나올 정도로 지독한 설계였다.
‘다만….’
네 마음대로는 되지 않아.
다섯 번째 층에 내려온 이후로 결계의 해석을 꾸준히 해왔다.
조금만 더 정리한다면 데루스가 어그러뜨리기 전 본래의 결계를 회복시킬 수 있을 것이다.
라온은 건배라도 하자는 듯 찻잔을 들어 올리는 델프로스를 보며 입매를 비틀었다.
‘네 목숨을 가져가기 전에 그 찻잔부터 깨주지.’
* * *
“온다던 사람이 오질 않는군.”
델프로스가 안색을 구기고 있는 라온을 보며 진한 미소를 그렸다.
‘아무리 네놈이라고 해도 당황스럽겠지.’
같은 편이 되어야 할 육황이 먼저 공격해오니, 어쩔 줄을 모를 것이다.
라온은 당황했겠지만, 이건 당연한 결과다.
‘이게 진짜 계획이니까.’
다섯 번째 층은 실제 도검존의 유산이 놓여 있던 무덤의 끝이며 결계의 힘이 가장 강력하게 작용하는 곳이다.
데루스 로베르트는 처음부터 4층에서 모든 사람을 죽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동료 혹은 동맹에게 공격을 받아서 당황한 무인들에게 결계를 씌워서 서로가 서로에게 칼을 휘두르기를 원했다.
‘일반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그분은 가능하지.
데루스 로베르트는 무덤에 설치되어 있는 결계를 조작하여 무인들의 이성을 잃게 만드는 새로운 결계를 만들었다.
술집의 주향처럼 아주 천천히 정신을 잠식해 나가기에 초월자급이 아닌 이상 본인이 무엇을 당하는지도 모른 채 끝까지 싸우게 될 것이다.
델프로스가 뇌쇠와 코만 기사단장의 검을 피해내는 라온을 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네놈도 여기까지다.’
라온 지그하르트가 아무리 강하더라도 코만 기사단장과 뇌쇠를 동시에 상대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리메르와 세레나. 광풍대와 공검대 역시 이성을 잃고 싸우고 있기에 상황 자체가 끝났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역시 철저하시군.’
혹여나 라온이 마지막 계획도 망가뜨릴까 걱정해서 직접 나와 보았지만, 의미 없는 일이었다. 그분의 계획에 오차란 없었다.
델프로스가 여유롭게 찻잔을 들어 올릴 때 라온 지그하르트가 뒤로 훌쩍 물러서더니, 신검과 마검을 교차시켰다.
그는 이를 악문 채 마검을 신검의 검집으로 삼는 것처럼 마찰을 이용하여 청아한 소리를 울렸다.
우우우우우웅!
귀가 아니라, 정신을 일깨우는 듯한 검명이 어둑한 공간까지 치고 올라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흥!”
델프로스가 찻잔을 흔들며 비웃음을 그렸다.
“소용없는 짓이다.”
저 검술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다. 검명으로 상대의 청각을 파고들어 신경을 자극하는 검격. 아마 놈은 신경을 건드려서 미쳐가는 무인들을 일깨우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결계는 단순한 세뇌와는 질이 다르다. 오래 유지할 수 없는 대신 저딴 방식으로는 절대 깨우지 못한다.
“헛짓하지 말고, 조금이라도 살아남는데 집중하는 게 좋을 것이다. 너는…어?”
델프로스가 라온을 비웃다말고 입술을 떨었다.
“이게 무슨….”
라온에게 달려들던 코만 기사단장이 검을 멈추고, 뇌쇠가 벼락 줄기를 가라앉혔다.
“내, 내가 왜 라온 지그하르트를….”
“무슨….”
두 사람은 자기 자신이 이해가 되질 않는다는 듯 무기를 든 손을 보며 입술을 떨었다.
“아아….”
“뭐, 뭐야! 내가 왜 지그하르트를 친 거지?”
“어째서….”
“내가 어떻게 된 거지?”
코만 기사단과 마법사들도 마른침을 삼키며 뒤로 물러섰다.
고오오오오!
전장의 싸움이 한순간에 멎고, 침묵이 내려왔다.
“네, 네놈! 무슨 짓을 한 거냐!”
델프로스가 여유를 찾은 라온에게 손을 뻗으며 악을 질렀다.
“내가 말했지. 이 땅은 지그하르트의 것이었다고.”
라온이 담담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결계를 너희들이 조작하기 전으로 바꾸었다.”
“뭐?”
“결계에 박힌 정신 조작을 지워버렸다고.”
그는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며 데루스가 만들어둔 결계를 으깨버렸다고 중얼거렸다.
캬아아아앙!
델프로스가 들고 있던 찻잔을 떨어뜨렸다. 단상 아래로 추락한 고급스러운 찻잔이 산산조각으로 깨졌다.
“마, 말도 안 돼….”
이곳에 설치한 결계는 데루스가 직접 설치했다. 그걸 저런 애송이가 풀어버렸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우, 우리가 왜 싸웠지?”
“겨, 견제만 하려고 했는데 왜 죽일 듯이….”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람들은 정신을 차리고 무기를 내리고 있었다. 놈의 말이 진실이라는 뜻이었다.
“왜긴 왜겠어.”
리메르가 검을 들어 델프로스를 겨누었다.
“저 똥개가 방귀를 뀐 거지.”
“크윽!”
델프로스가 피나도록 입술을 씹은 채 고개를 저었다.
“사비대주, 보고 있나?”
[…예.]
사비대주도 당황한 듯 한참 후에야 대답이 들려왔다.
“그걸 내려보내.”
[하지만 아직 시간이….]
“이미 늦었다. 계획이 망가졌어.”
델프로스는 입술을 꾹 씹은 채 라온을 노려보았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놈을 죽여야겠다.”
* * *
라온은 당황한 델프로스를 보며 미소를 그렸다.
‘미리 준비해놔서 다행이야.’
갑작스럽게 결계를 풀어야 했다면 상당한 시간이 걸렸을 텐데, 이곳에 온 직후부터 결계를 연구해두어서 빠르게 해석할 수 있었다.
초대 가주의 결계의 흐름대로 청우를 울렸더니, 결계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모두의 정신을 깨울 수 있었다.
“미, 미안하오.”
코만 기사단장이 고개를 숙여왔다.
“내 의지가 아니…, 내 잘못이오!”
그는 본인의 의사가 아니었음에도 잘못을 인정하고 고개를 숙였다.
“나도 마찬가지네.”
뇌쇠가 한숨을 내쉬었다.
“부상이 심해서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아.”
그가 미안하다고 말하며 지팡이를 내렸다.
“괜찮습니다. 대신 방해만 하지 말아주십시오.”
“방해가 아니라. 도와주지
코만 기사단장은 정말 죽을 죄를 지었다며 도검존의 유산을 챙기는 행동에서 물러나겠다고 외쳤다.
라온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고서 델프로스가 앉아 있는 단상 앞에 섰다.
“이제 정말 내려올 시간이다.”
계단을 오르려고 하는데, 보이지 않는 투명한 벽이 앞을 막아섰다.
“끝까지 추하군.”
라온이 입매를 비틀며 신검과 마검을 들었다. 찬연하게 빛나는 불꽃과 아릿하게 가라앉은 서리가 달무리와 같은 빛을 뿜어내며 단상 앞을 가린 벽을 깨부쉈다.
쿠구구구구!
깨져나가는 오러의 벽 앞에 서며 턱을 모로 틀었다.
“내려오지 않는다면 직접….”
“열어주지.”
델프로스가 입매를 비틀었다.
“뭐?”
“길을 열어주마.”
그가 손짓하자, 지금까지 어둠에 잠겨 있던 단상 뒤편에 빛이 들어왔다. 새로운 공간이라기보다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문 같았다.
“나, 난 나갈래! 여기에 더는 못 있겠어!”
“나도! 죽기 싫어!”
이성을 잃고 싸우던 중립 세력의 무인들이 열린 문으로 달려갔다.
“잠깐만!”
라온이 말리려고 손을 뻗었지만, 이미 공포에 질린 사람들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푸카아아아악!
문으로 달려가던 수십 명의 무인의 몸이 종잇장처럼 갈라졌다. 핏물이 소나기가 되어 바닥을 적셨다. 현실 같지 않은 광경이었다.
고오오오!
은은한 빛 속에서 체구가 큰 한 남자가 걸어 나온다.
왼손에는 푸른빛을 띤 검을 들었고, 오른손에는 붉게 달아오른 도를 쥐고 있는 노인이다. 주름이 가득했는데, 기이하게도 피부는 아이처럼 환했다.
그가 천천히 걸어와 공동에 들어서 고개를 들었다. 검은 안구와 하얀 안구가 뒤바뀐 모습. 살아있는 자가 보일 수 없는 눈빛이었다.
“너희가 기다리고 있던 그 사람이다.”
델프로스가 비틀린 미소를 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검존. 모조리 죽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