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36화
델프로스는 라온이 도플갱어 로드를 베어버린 순간 수정구에서 손을 뗐다. 마나가 빠져나간 수정구가 빛을 잃고 어둠에 잠겼다.
“어, 어떻게.”
사비대주는 다리에 힘이 빠진 듯 뒤로 털썩 주저앉았다.
“서른 개가 넘는 결계를 몰았는데….”
그는 라온이 도플갱어 로드를 직접 상대하는 모습을 보았음에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입술을 떨었다.
“이건 말이 안 되잖아!”
사비대주가 분을 참지 못하고 주먹으로 바닥을 내리쳤다. 무인이 아니었기에 손등의 살갗이 찢어져 피가 흘러내렸다.
“후우….”
델프로스가 검게 물든 수정구를 보며 짧은 한숨을 내뱉었다.
“아….”
사비대주는 델프로스의 한숨 소리에 정신을 차린 듯 억지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짓을 해서….”
“네 계획은 틀리지 않았다.”
델프로스가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
“라온 지그하르트가 네 계획을 넘어서는 괴물이라는 게 문제였을 뿐이지.”
사비대주가 강화시킨 도플갱어 로드의 무력은 막강했다.
긴 시간을 유지하는 건 힘들겠지만, 이 무덤에 들어온 대부분의 인간을 죽일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이번 일이 어그러진 건 모두 라온 지그하르트의 어처구니없는 재능 때문이었다.
‘예상보다 강해. 아니 그보다….’
빠르게 강해지고 있어.
사비대주는 모르겠지만, 지금 라온 지그하르트는 도플갱어 로드를 상대하며 본신의 무력을 키웠다.
이 짧은 시간 동안 부족한 점을 보완하고, 장점을 더 강하게 만들었다.
‘그야말로 괴물이로군.’
그분이 라온 지그하르트 같은 애송이에게 신경 쓴 이유를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지, 지금이라도 길을 막는 게 어떻겠습니까. 길게는 힘들지만, 일을 치를 때까지는 막을 수 있을….”
“아니.”
델프로스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의미 없는 일이다.”
라온 지그하르트는 각 층의 규칙을 모조리 깨부수며 4층까지 내려왔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을 벌이게 하느니, 직접 통제하는 게 나았다.
“어차피 마지막 층이니, 내가 직접 끝내겠다.”
델프로스의 발밑에서부터 강건하면서도, 묵직한 기파가 물방울 같은 형상을 그리며 피어났다.
“그리고….”
그가 나가다 말고 우측 구석으로 시선을 돌렸다. 회색 안개 속에서 명멸하는 검은 눈동자를 보며 눈썹을 내렸다.
“때가 되면 저것을 내려보내도록.”
“알겠습니다.”
사비대주는 그저 믿겠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모든 것을 끝내고 새로운 시작을 이룰 때가 되었다.”
델프로스는 피 냄새가 흐르는 듯한 미소를 그리고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 *
라온이 다섯 번째 층에 도착한 후 두 눈을 떴다.
‘여기는 또 뭐야….’
기이한 공간이다.
천공에서 동그란 조명을 쏘는 것처럼 오직 땅에만 빛이 들어왔고, 사방이 시꺼멓게 물들어서 나갈 길이 보이지 않았다.
공간 자체도 그리 넓지 않았기에 밀폐된 용기처럼 꽉 막힌 느낌이다.
그나마 사람이 많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조금만 더 좁았다면 숨이 막혔을 것이다.
라온이 연무장처럼 고운 모래로 채워진 땅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만화공의 향이 진해졌군.’
이 수련장을 만들어낸 지그하르트 초대 가주의 기운이 굉장히 가깝게 느껴졌다.
초대 가주가 새겨놓은 결계를 조금만 더 상세히 해석할 수 있으면 데루스 로베르트가 넣어둔 어두운 기운도 제거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라온은 불의 고리를 공명시켜 집중력을 높였다. 땅 깊숙하게 박혀 있는 결계를 해석하며 다섯 번째 층에 있는 사람들을 살폈다.
‘숫자가 많지는 않군.’
공간 자체가 좁다고 해도 다섯 번째 층에 있는 사람의 숫자는 서른 명이 채 되지 않았다.
“…….”
무인들 대부분은 크고 작은 부상을 입고 있었는데, 적당한 견제를 하던 1층과 다르게 당장이라도 싸울 것처럼 굉장히 날카로운 기세를 드러내고 있었다.
다만 이상하게도 이미 숨이 끊어진 시체들도 꽤 많이 보였다. 혹시나 해서 살펴보았지만, 한참 전에 죽은 이들이었다.
‘다행히 우리 애들은 없군.’
시체를 보니, 광풍대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먼저 움직여서 검사들을 찾으려고 할 때였다.
“대주님!”
안쪽에서 도리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난 곳으로 시선을 돌리니, 그가 배 주머니를 흔들려 달려왔다.
-오오! 본왕의 지갑! 무사했구나!
라스가 반갑다는 듯 동그란 손을 흔들었다.
“도리안.”
라온이 도리안을 보며 옅게 웃었다. 다행히 그는 아무런 부상도 입지 않은 것 같았다.
“대, 대주님. 진짜세요?”
도리안이 슬쩍 눈치를 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역시….’
도리안도 도플갱어의 습격을 받았던 것 같다.
“하루종일 설원을 헤매다가 간신히 사람을 만났는데, 그게 대주님이었거든요. 얼마나 반갑겠어요! 그래서 인사를 했는데….”
“했는데?”
“친근하게 받아주시는 거예요! 너무 이상하죠?”
그게 이상한가? 평소에 내가 뭘 했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도리안에게 계속하라고 손을 저었다.
“이상하지만 그냥 넘어갔어요. 가짜 대주님도 일단 움직이자고 하시더라구요.”
도리안이 입맛을 길게 다셨다.
“제가 혹시나 해서 여기서는 훈련 안 해도 되겠죠?라고 장난처럼 물어봤는데.”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래. 위험할 수 있으니, 여기서는 훈련 쉬자.’라고 말하는 거예요! 그래서 저도 모르게 뺨을 쳤어요!”
“…….”
라온이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뺨을 얻어맞은 놈이 당황하면서 갑자기 도망치더라구요! 잡으려고 했는데, 너무 빨라서 놓쳤어요!”
“…그걸로 알아봤다고?”
“대주 님이 수련하지 말라는 헛소리를 할 리가 없잖아요! 무조건 가짜지!”
도리안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하….”
이 녀석은 날 어떻게 생각하는 거지?
어이가 없어서 고개를 저을 때 뒤편에서 누군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크레인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걸어오고 있었다.
“대주님! 진짜시죠?”
“…….”
“아니, 대주님이 걸어가면서 수련을 안 하더라구요! 왜 안 하냐니까. 애들이 걱정되어서 빨리 가야겠다는 개소리를 하잖아요! 바로 가짜인 걸 알아차리고 뒤통수를 후려 팼죠!”
크레인이 가짜였지만 기분이 좋았다며 방긋 웃었다.
“너도?”
“응 나도!”
도리안과 크레인이 갑자기 머리 위에서 손뼉을 부딪쳤다.
짜악!
라온은 시원하게 울리는 소리를 들으며 관자놀이를 부여잡았다.
-푸헤헤헤헤!
라스가 배를 잡고 웃음을 터트렸다.
-본왕이 말했잖느냐! 그 귀때기랑 네놈이랑 이미지가 다를 게 없다고!
‘시끄러워….’
라온이 비웃는 라스를 밀어내고, 입술을 씹었다.
‘내 평판이 어떻게 된 거지?’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또 새로운 사람들이 공간에 들어왔다. 그 중에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입만 다물고 있으면 절세미녀인 마르타였다.
“마트타.”
“…….”
마르타는 바로 다가오지 않고 눈매를 찌푸린 채 손가락을 까딱였다. 반응을 보니, 마르타도 도플갱어를 만났던 것 같다.
“너도 날 본 건가?”
“아주 이상한 놈이었어.”
마르타가 입술을 깨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상당히 놀랐는지 존대를 해야하는 것도 잊은 것 같았다.
“설원을 걷고 있는데 갑자기 네가 나타나더라. 그런데….”
“그런데?”
“만나자마자 애들을 걱정하더군. 조금 이상하지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따라가는데, 그냥 걷는 거야. 검술 수련도, 보법 수련도 안 하고 그냥!”
“…그게 왜 이상해?”
“너는 걸으면서 항상 보법이나 검술 수련을 하잖아!”
그녀는 말이 안 된다고 외치며 하얀 이를 드러냈다.
“너무 이상해서 물어봤지. 너 수련 안 하냐고. 그러니까 뭐라는지 알아?”
“뭐라고 하는데?”
“지금은 애들이 더 중요하대! 그게 말이 되냐고! 수련 귀신이!”
마르타는 바로 적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며 입매를 비틀었다.
“그래서 어떻게 했어?”
“뒤에서 칼로 찔렀어!”
“찌, 찔렀다고?”
라온이 마른침을 꿀껌 삼켰다. 애들을 걱정하다가 칼을 맞다니, 그 도플갱어가 갑자기 불쌍해졌다.
“그놈을 잡으니까. 여기로 향하는 길이 열렸지.”
마르타는 몇 시간 기다리다가 문을 타고 내려왔다며 손을 탁탁 털었다.
“역시 대주님을 잘 아시네요!”
“모를 수가 있나! 솔직히 미친놈이잖아!”
라온은 세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대체 이들의 눈에 내가 어떻게 비치는 거지?’
-뭘 물어.
라스가 배를 긁적이며 고개를 저었다.
-미친놈이지.
‘…….’
* * *
마르타 이후로 광풍대 검사 2명이 더 내려왔지만, 그 이상은 오지 않았다.
“무슨 문제 있는 거 아닐까요?”
도리안이 불안하다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가짜 대주한테 속을 리는 없는데….”
크레인은 광풍대인 이상 가짜 라온에게 속는 건 말이 안 된다며 고개를 저었다.
“음….”
라온이 팔짱을 낀 채로 검은 벽에 등을 기댔다.
‘우리만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숫자가 적어.’
광풍대만이 아니라, 다른 육황오마 그리고 중립세력의 숫자도 확연히 적었다.
귀마검주나, 6사도 같은 놈들이 이곳까지 내려오지 못할 리가 없기에 아무래도 공간이 나뉘어있는 것 같았다.
“일단 기다려보자. 분명 무슨 일이….”
라온이 불안해하는 검사들을 다독이려고 할 때 탁 소리와 함께 천장에서 새로운 조명이 켜졌다.
타다다다닥!
연달아 마법등에 불이 들어오며 검게 물들어 있던 공간이 하나씩 모습을 드러냈다.
“어?”
“대주!”
“버렌?”
“부대주님!”
“저쪽에도 애들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머물던 곳과 같은 형태의 공간 수십 개에 빛이 들어오며 하나의 거대한 공동을 이뤘다.
지그하르트의 대연무장보다 더 넓은 크기였지만, 사람이 워낙에 많다 보니 조금 좁아 보였다.
“대주님!”
“살아계셨군요!”
“대주님! 저 가짜 대주를 봤습니다!”
광풍대는 반가운 얼굴을 한 채로 다가왔다. 대부분은 이상한 나를 보았다며 눈매를 찌푸렸다.
“나도!”
리메르가 놀란 눈을 한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도박 자금을 빌려달라는데, 바로 빌려준다는 소리를 하더라고! 미친놈이었어! 조금 아쉽지만, 가짜라는 걸 알았지.”
그는 돈은 받고 죽였어야 했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존못 라온이 민트초코가 싫다고 했어.”
루난은 민트초코를 싫어하는 가짜 라온을 베었다며 입맛을 다셨다.
“…….”
라온은 할 말이 많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다행이지 않느냐.
라스가 웃음을 참지 못하는 듯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 채 고개를 저었다.
-네놈의 미친 성격 덕분에 부상자가 적으니라!
‘…그건 그렇군.’
대부분의 세력에 이미 죽은 시체나, 중상자들이 있었지만, 광풍대에는 조금 다친 녀석들은 있어도 심한 부상자는 없다. 전투가 일어나도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오마 둘 역시 건재하군.’
3층 미로에서 만났던 흑탑과 달리 귀마검주와 6사도도 부상을 입지 않았다. 저놈들에게도 도플갱어의 공세는 통하지 않은 것 같았다.
다만 동맹 상태였던 둘은 서로를 죽일 것처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럼 공검대는… 음?’
라온이 북서쪽에서 모여드는 공검대를 보며 눈매를 좁혔다. 세레나의 허리춤이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심하게 당한 것 같았다.
“이런!”
라온이 세레나를 향해 달려갔다.
“공검대주님!”
“접근하지 마십시오!”
처음부터 세레나와 함께 있던 것으로 보이는 공검대 부대주가 검병에 손을 올린 채 앞을 막아섰다.
“…….”
세레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이쪽을 보며 눈매를 가늘게 내리고 있었다.
“음….”
라온이 세레나와 냉랭한 눈을 마주하며 짧은 숨을 내뱉었다.
‘설마.’
내 모습으로 기습을 한 건가?
그게 아니고서는 세라나와 공검대 부대주의 반응이 저렇게 차가울 리가 없었다.
“광풍대주! 물러서십시오!”
공검대 부대주는 전투도 각오한 듯 하얀 이로 입술을 짓눌렀다.
“그만.”
세레나가 앞으로 나오며 공검대 부대주를 물렸다.
“대주!”
“저 녀석이 아니야.”
그녀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눈을 보니까. 알겠어. 그건 라온이 아니었어.”
“저를 만나셨던 겁니까?”
라온이 세레나의 상처를 보며 눈매를 좁혔다.
“그래. 너와 외모도, 기질도, 목소리도 똑같은 놈을 만났지.”
세레나가 눈동자를 살짝 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출구를 찾기 위해서 움직이는데, 네가 뒤에서 기습을 해오더구나.”
“…….”
“간신히 급소는 피한 후 반격을 하려는데, 바로 튀어버리더군.”
그녀는 다치지 않은 것처럼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네 의도가 무엇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는데, 지금 보니 알겠어. 네가 아니었군.”
세레나는 확신을 담은 눈으로 옅은 미소를 그렸다.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너를 어릴 때부터 봐왔으니까.”
그녀가 옅게 웃었다.
“말했잖아. 처음부터 널 공검대에 데리고 오려고 했다고.”
“음….”
“그리고 저기를 봐라.”
세레나가 반대편의 벽을 가리켰다. 발카르 왕국의 마법사들이 이쪽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이곳에 온 이후부터 우리를 원수처럼 노려보길래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조금 답이 나오는 것 같다.”
“음….”
“같은 거야. 아마 저들은 우리의 모습을 한 놈들에게 습격받았겠지.”
그녀의 말을 듣고서 다시 이곳 전체를 살펴보았다.
“이 은혜도 모르는 개새끼들!”
“누가 할 소리인데! 감히 뒤를 노려?”
“누가 노렸다는 거냐!”
“우리 부대주의 시체에 남은 이 검상! 너희 패랑문의 검법이잖아!”
“기습 따위를 하다니! 이 비겁한 놈들!”
본래 동맹을 맺거나, 협력 관계를 가졌던 세력끼리 싸움을 벌일 것처럼 진한 살기를 드러냈다.
세레나처럼 이 상황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분위기에 휩쓸린 듯 감정을 그대로 드러냈다.
라온은 점점 냉랭해지는 5층의 분위기를 읽으며 입술을 씹었다.
‘이걸 노렸나.’
도플갱어로 사람을 죽이는 게 목적인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놈들의 진짜 의도는 세력 간의 분열인 것 같았다.
‘왜 시체가 있나 했더니….’
산 사람만이 내려올 수 있는 장소에 시체가 있어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이유가 있었다.
‘고수는 시체만 봐도 누가 죽였는지를 알 수 있으니까.’
시체에 새겨진 흔적을 이용해서 동맹을 맺은 세력을 더 빠르게 갈라놓으려는 계획이 분명했다.
이런 식으로 분열을 일으키다니, 데루스 놈의 악독함에는 감탄이 나왔다.
라온은 고무줄처럼 점점 팽팽하게 당겨지는 사람들의 기세에 주먹을 말아쥐었다.
‘다만 이곳의 분열이 놈의 최종 목표는 아닐 거야. 데루스가 정말 원하는 건….’
전쟁이겠지.
이곳에서 들어온 모든 사람들의 시체를 조작해서 내보내게 되면 육황 내부, 오마 내부 그리고 중립세력 전체가 전쟁의 불길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데루스의 목적은 대륙 전쟁이 분명해 보였다.
“오냐! 좋다! 지금 너희부터 죽여주마!”
“누가 할 소리를!”
중립 세력 백안검가와 파랑도문이 서로를 향해 무기를 겨누었다.
“죽여!”
“모조리 발라버려!”
“잠깐.”
라온이 서로에게 달려들려던 두 세력 사이로 끼어들었다. 이곳의 상황을 막을 수 있는 건 직접 도플갱어를 잡았던 자신밖에 없었다.
“제 이야기를 들어주십시오.”
“네가 누군데!”
“눈깔도 제대로 안 뜨고 다니다니! 용살자 라온 지그하르트잖아!”
백안검가의 가주로 보이는 중년인이 파랑도문주에게 욕을 내뱉었다.
“으음, 광풍대주의 위명을 많이 들었소. 인사를 나누고 싶지만, 지금은 때가 좋지 않구려.”
백안검가주는 고개를 저으며 붉게 타오르는 검을 다잡았다.
“맞소. 우리도 저 협잡꾼 놈들의 목을 쳐야 하니, 비키시오!”
파랑도문주도 이를 드러낸 채 도에 시퍼런 오러를 일으켰다.
“그것 때문입니다.”
라온은 모두에게 들릴 수 있도록 목소리에 오러를 실었다. 그의 나지막한 음성이 서늘한 기세를 뚫고, 공동 전체로 뻗어나갔다.
“저는 4층의 설원에서….”
지금까지의 일을 설명하려고 할 때였다. 어둠을 유지하던 북쪽에 마법등이 켜지고, 공간이 열렸다.
황제가 앉는 옥좌처럼 솟구친 금빛 의자 위로 하얀 예복을 입은 중년인의 모습이 드러났다. 짧은 금발에서 고귀함과 군인 같은 절도가 느껴졌다.
‘저놈….’
라온이 우아하게 찻잔을 들어 올리는 중년인을 보며 입술을 씹었다.
‘델프로스인가?’
얼굴이 조금 늙었지만, 저 귀족스러운 인상은 그대로였다.
암살과 정보 수집, 절도를 담당하던 그림자와 달리 직접 무력을 행사하던 데루스 로베르트의 돌격대주 중 하나 델프로스가 분명했다.
‘저놈이 여기를 맡고 있었군.’
델프로스를 보고 있는데 놈도 이쪽으로 보며 눈매를 좁혔다.
“넌 누구냐!”
“뭐 하는 놈이야!”
“당장 내려와!”
무인과 마법사들은 델프로스에게 압박을 느낀 듯 먼저 목소리를 높였다.
“이 무덤의 주인이다.”
델프로스가 가볍게 고개를 까딱였다.
“무, 무덤의 주인?”
“그럼 네가 도검존이라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아, 다시 설명하지. 도검존의 무덤을 먼저 찾은 주인이라는 뜻이다.”
그가 옅은 미소를 그렸다.
“그걸 믿으라고….”
“이거면 믿으려나?”
델프로스가 허공에서 두터운 책자 두 권을 꺼냈다.
붉은빛을 띤 책자에는 마병도법이라 적혀 있었고, 푸른 빛으로 번들거리는 책자는 참마검결이라 새겨져 있었다.
둘 다 당장 날아오를 듯한 용사비등 한 글자체였다.
“마, 마병도와 참마검이면….”
“도검존의 무학이다!”
“지, 진짜 도검존의 무덤이었다니….”
“저것만 있으면….”
서로에게 악의를 드러내던 무인들은 델프로스의 손에 들린 무학서를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이걸 원하나?”
델프로스의 물음에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모두의 눈동자에는 욕심과 열망이 차올랐다. 저것만 있다면 본인들도 도검존과 같은 경지에 오를 수 있다는 깊고 짙은 욕망이었다.
“좋아. 주지.”
그가 피식 웃으며 책자를 흔들었다.
“주, 준다고?”
“그 무학서를?’
“다만 조건이 있다.”
델프로스의 섬뜩한 시선이 라온에게 내려와 꽂혔다.
“저놈을 죽이는 자에게 이 두 권의 책을 모두 넘겨주마.”
그 순간 5층에 있는 수백 개의 시선이 라온에게 향했다. 어둑한 호숫가에 머무는 반딧불 떼가 동시에 비상하는 듯했다.
“그, 그게 진짜인지 우리가 어떻게 알아!”
“맞아! 여기까지 불러들인 것만 해도 네놈의 속셈이 보이거늘!”
서로 싸우던 백안검가주와 파랑도문주가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
“거기.”
델프로스가 좌측 끝에 서 있던 문사 차림의 중년인에게 손짓을 했다. 뒤늦게 온 오웬 기사단 소속의 무인이었다.
“만통검자 크라셀 맞지?”
“…맞소.”
크라셀이 시선을 들어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학의 역사와 해석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는 당신이 직접 보도록.”
“…….”
크라셀이 동료들의 눈치를 보다가 천천히 델프로스가 있는 단상 위로 올라갔다.
“받아라.”
델프로스는 자신 있다는 듯 마병도법을 던져주었다.
“음….”
크라셀은 그 자리에서 마병도법을 펼쳐서 빠르게 눈동자를 굴렸다. 점차 그의 안색이 굳어지고, 뺨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지, 진짜요….”
크라셀이 마병도법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책 자체도 수백 년 전의 물건이고, 수, 수정을 한 곳도 없소. 내용 역시 이상한 부분이 보이지 않아!”
그는 다 읽지는 못했어도 정말 마병도법이 맞는 것 같다며 입술을 떨었다.
“대충 증명은 되었겠지.”
델프로스가 손가락을 까딱이자, 크라셀의 손에 잡혀 있던 마병도법이 다시 그의 손으로 빨려 들어갔다.
“저놈을 죽인 자가 새로운 도검존이다!”
델프로스가 마병도법과 참마검결을 던지자, 동그란 오러의 막이 형성되어 두 책자를 허공에 띄웠다.
“으음….”
“크흠!”
백안검가주와 파랑도문주가 슬쩍 뒤로 물러나며 무기를 다잡았다. 틈을 보이면 언제라도 공격을 할 것 같은 서늘한 눈빛이었다.
“후….”
라온은 제천검의 검병의 매만지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런 관심은 처음 받는데.’
욕망이라는 악마에 사로잡힌 수백 명의 기세가 심장을 옥죄인다.
오마 놈들에게 둘러싸여 있을 때보다 더한 긴장감이 전신을 채웠다.
다만 두렵지는 않았다. 이곳은 지그하르트의 땅이었고, 이 땅을 세운 선조의 뜻은 나와 함께 하고 있었으니까.
“주인이 없으면 개가 주인 행사를 한다더니.”
라온이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턱을 모로 틀었다.
“목줄을 다시 묶어줘야겠군.”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
델프로스가 허리를 앞으로 기울이며 미간을 찌푸렸다.
“내 땅에서 주인 행세를 하지 말라고, 똥개 새끼야.”
“내 땅?”
그가 이마에 손을 올린 채 광소를 터트렸다.
“언제부터 이곳이 지그하르트의 땅이 되었다는 거냐! 여기는….”
“내가 온 순간부터.”
라온이 왼발 진각을 밟았다. 쿵 소리와 함께 땅이 갈라진다.
별빛을 담은 듯한 황금빛 불꽃이 사위로 퍼져나가 유려한 호선을 그렸다.
화아아아아!
짙은 아지랑이와 함께 타오르는 화염은 황색 대지에 지그하르트의 문양과도 같은 불의 검을 세웠다.
“뭐, 뭐야!”
“무슨 불꽃이!”
“크으윽! 오, 오러가 타고 있어!”
“물러나!”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 같았던 욕망의 노예들이 기겁하며 뒤로 물러섰다.
“광풍대. 길을 열어라.”
“명을 받듭니다!”
광풍대는 묵묵한 대답을 내뱉은 채 라온의 좌측과 우측에 섰다.
그들이 세우는 서릿발 같은 기세에 무인들이 마른침을 삼키며 무기를 뒤로 물렸다.
“내려와라. 똥개 새끼야.”
라온의 두 눈에 붉은 광휘가 맺혔다. 그는 욕망에 땅에 서서 옥좌를 굽어보며 뇌까렸다.
“거긴 네 자리가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