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634화 (633/653)

제634화

“츠, 층주!”

“어떻게 이런 일이…….”

“마, 말도 안 돼! 설괴후 님이 저런 애송이에게!”

“아아….”

흑탑의 마인들은 라온의 발밑에서 숨이 끊어진 설괴후의 시체를 보며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그들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줄줄이 흘러내렸다.

“빠, 빨리! 최대한 빨리 움직여!”

버렌이 이를 악문 채 마인들을 향해 검을 찔러넣었다. 날카롭게 갈린 칼날 위에서 피어난 삭풍이 당황한 마인들의 가슴을 갈랐다.

“저 대주 한다면 하는 인간이잖아! 농담이 아니라고!”

마르타가 미간을 구기며 광폭화를 운용했다. 그녀의 손아귀에서 번뜩인 오러가 막강한 무게를 담은 채 떨어져 내렸다.

쿠우우우웅!

미로 전체가 울릴 정도의 충격이 터지며 마인들이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수련 싫어….”

루난이 맹한 눈동자에 다급함을 담고 서리를 흩뿌렸다. 푸른 검극에서 산란되어 퍼져나간 냉기가 마인들의 손과 발을 옥죄였다.

“세상에 해악만 끼치는 놈들!”

마크 괴튼은 라온의 수련이 무섭다기보다, 마인 자체를 증오하는 듯 입술을 꾹 씹은 채 전력으로 벽란도법을 끌어냈다.

벼락처럼 천공을 찢어발기는 도격이 마인들에게 지시를 내리던 조장의 목을 갈랐다.

쿠구구구구구!

광풍대 조장들과 마크 괴튼의 폭발적인 화력이 연달아 이어지자, 마인들을 보호하던 마기의 벽이 한순간에 으깨져 버렸다.

“길이 열렸다!”

“마인들에게 자비는 필요 없다! 모조리 죽여라!”

“가자!”

광풍대는 조장들이 열어준 틈을 놓치지 않기 위해 보법을 밟으며 마인들의 영역 속으로 진입했다.

“마, 막아! 어떻게 해서든 버티라고!”

“저, 저걸 어떻게 버텨!”

“으윽…….”

“끄, 끝났어. 다 끝났다고!”

마인들은 설괴후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듯 제대로 반격도 못 한 채 속수무책으로 밀려 나갔다.

“이 멍청이들아! 여기서 죽을 거냐!”

“당장 앞으로 나가!”

“살아남을 길은 있다!”

마스터 급 마인들이 어떻게든 사기를 올리려고 했지만, 그 기세를 완전히 꺾어버리기 위해 버렌과 마르타, 루난이 움직였다.

“싸워? 싸움이 된다고 생각하나?”

“다 끝났다! 시꺼먼 쥐새끼들아!”

“길은 없어.”

세 명의 조장은 각자 마스터급 마인을 하나씩 맡으며 마인들의 반격의 싹을 잘라버렸다.

설괴후가 죽고, 조장급 마인들도 힘을 쓰지 못하자, 남아 있던 마인들은 잡초처럼 손쉽게 뽑혀 나갔다.

“네가 마지막이다!”

마르타가 비호처럼 뛰어들어 마지막으로 버티고 있던 조장급 마인의 목에 검을 박아넣었다.

“끄어어억…….”

마인은 억울하다는 듯 허공으로 손을 뻗다가 쓰러졌다.

“끝났습니다!”

버렌이 마른침을 꼴깍 삼키고서 뒤를 돌아보았다.

“시간은!”

“5분 아직 안 지났죠?”

그만이 아니라, 광풍대 모두가 떨림과 기대감을 동시에 안은 채 라온을 바라보았다.

“흐음…….”

라온이 손목을 톡톡 두드리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쉽게도 5분이 지났네.”

“예…….”

“그, 그럴 리가 없는데?”

“빨리 끝냈어요!”

광풍대는 5분이 지난 게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입을 쩍 벌렸다.

“5분?”

리메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4분 정도에 끝난 것 같은데?”

그도 시간을 잘못 센 거 아니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부대주님.”

라온이 리메르를 돌아보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같이 수련받고 싶으세요?”

“…….”

리메르가 어깨를 부르르 떨다가 고개를 저었다.

“오, 오 분 지났어! 확실해! 내가 봤어!”

그는 본인의 안위를 위해 광풍대를 헌신짝처럼 버렸다.

-이 천족 같은 놈!

라스가 미간을 깊게 구겼다.

-어떻게 된 인간이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거짓말을 내뱉는 것이냐!

녀석은 어이가 없다며 헛바람을 흘렸다.

‘다 저 녀석들을 위한 거야.’

라온이 미소를 흘리며 고개를 저을 때였다.

“아닙니다!”

도리안이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는 휴대용 시계를 손에 든 채 고개를 저었다.

“대주님이 5분을 말씀하시고 나서 바로 시계를 작동시켰는데, 아직 알림이 오지 않았어요!”

탁탁거리는 바늘 소리가 몇 번 들리더니, 시계가 진동하며 작은 새 소리를 울렸다.

“보셨죠? 지금이 5분이에요!”

“…….”

라온이 도리안의 시계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시계가 고장 난 건…….”

“제가 필수품만큼은 항상 관리하는 거 아시죠? 고장 안 났어요!”

도리안은 자신 있다는 듯 허리춤에 손을 척 올렸다.

“오오오!”

“도리안. 도리안이 해냈다!”

“악마를 이겼어!”

“마왕을 잡았다! 용사 도리안!”

광풍대 전체가 도리안의 이름을 외치며 손을 위로 들어 올렸다.

-푸헤헤헤헤헤!

라스가 오동통한 배를 부여잡은 채 폭소를 터트렸다.

-지갑한테 당했구나! 꼴이 좋아!

[뺘뺘뺘뺙!]

카이얀도 날개를 파닥이며 비웃음을 흘렸다.

-케엑!

[뺘악!]

라온이 왼손으로 카이얀, 오른손으로 라스를 움켜쥔 채 광풍대의 앞으로 다가갔다.

“내가 실수를 한 모양이군. 미안하다.”

시간까지 잰 마당에 억지로 우긴다면 이쪽의 체면만 상한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 했다.

-네, 네놈이 웬일이냐?

라스가 의외라는 듯 눈을 끔벅였다.

“저, 정말요?”

“인정하시는 겁니까?”

“우와아아아아아!”

“도리안! 도리안! 도리안!”

광풍대는 승리했다는 기쁨에 소리를 지르며 도리안에게 헹가래까지 쳤다.

“우헤헤헤! 우리가 이겼다!”

크레인은 놀리듯이 춤을 추며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크레인.”

라온이 머리를 쓸어 올리며 까불거리는 크레인의 앞으로 다가갔다.

“예?”

“칼을 맞았네?”

“벼, 별 거 아니에요.”

크레인은 손등의 상처를 감추며 고개를 저었다.

“조금만 더 별거였으면 손모가지가 날아갔겠는데?”

“어, 그게…….”

“거기다 그냥 칼도 아니고, 마기가 실린 칼이었잖아. 운이 나빴다면 손목이 아니라, 팔을 잘라내야 했을지도.”

“그, 그니까…….”

“일단 하나.”

마왕을 잡은 영웅이 되어 콧대로 하늘을 찌르고 있는 도리안에게 다가갔다.

“도리안.”

“예에?”

도리안이 슬쩍 눈치를 보며 다가왔다.

“너는 허벅지를 베였네?”

“저, 저는 스친 겁니다. 피부도 다치지 않았…….”

“마기는 피부에만 닿아도 치명적인 피해를 입히지. 괜히 마가 아니야.”

“아…….”

“둘.”

라온은 도리안을 지나 다른 광풍대에게 다가갔다. 전부 자그마한 부상을 입은 검사들이었다.

“지금 뭐 하시는 거지? 왜 숫자를 세는 거야.”

“그, 글쎄.”

“느낌이 좋지 않은데…….”

광풍대는 어느새 열이 넘어간 라온의 숫자를 들으며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스물다섯.”

라온은 부상을 입은 광풍대 검사들의 숫자를 모두 센 후 처음의 자리로 돌아왔다.

“이 싸움에서 부상을 입은 멍청이들의 숫자다.”

“…….”

광풍대는 언제 축제를 벌였냐는 듯 고개를 숙이고 입을 다물었다.

“설괴후가 죽어서 정신이 무너진 놈들을 상대로 스물다섯 명이 부상을 입다니,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그, 그게 아니고…….”

“예! 급하게 싸우느라 그랬습니다! 시간이 없어서!”

“시간이 없을수록 정신을 차리는 게 맞지 않나? 그게 핑계가 된다고 생각해?”

라온의 촌철살인에 광풍대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려갔다.

“안 되겠다. 조금이지만 이곳에서 손을 보기로 하지.”

“자, 잠깐만요! 약속이 다르잖아요!”

크레인이 미어캣처럼 고개를 쳐들었다.

“무슨 약속?”

“5분 안에 끝냈는데, 수련을 하는 건 부당하다고…….”

“뭘 착각하는군. 지금부터 하는 훈련은 멍청하게 부상을 입은 놈들을 위한 특별 교육이다. 시간과는 관계 없어.”

라온이 광풍대를 굽어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마, 마왕이 부활했다…….”

“뭔 놈의 부활이 이렇게 빨라!”

“저건 누가 토벌해주냐?”

광풍대는 다 포기한 듯 어깨를 내린 채 한숨을 내뱉었다.

[아, 악마. 뺙!]

카이얀조차 광풍대가 불쌍하다는 듯 날개를 떨었다.

-이 멍청이들아! 몇 번을 말하냐!

라스가 광풍대를 보며 빽 소리를 질렀다.

-마계에도 저딴 마왕은 없다고!

*     *      *

“하아.”

공검대주 세레나가 검을 아래로 내린 채 짧은 숨을 내뱉었다. 그녀의 뒤편에는 새하얀 털에 뒤덮인 대형 몬스터들의 시체로 산이 쌓여 있었다.

아직 식지 않은 핏물이 대지를 흐르고 있었지만, 하늘에서 쏟아지는 눈이 순식간에 전투의 흔적을 지워주었다.

“…….”

세레나가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 아무것도 없는 천공에서 끝도 없이 눈이 떨어진다.

눈 아래의 땅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끝도 없는 평원만이 세계를 가득 담고 있었다.

‘여기는 대체 어디지?’

3층 미로를 통과한 후 4층에 도달했을 때 본 풍경과 하루 넘게 걸어서 도달한 이곳과는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이 세계를 구성하는 건 이 설원과 눈 그리고 몬스터뿐이었다.

‘다른 사람 자체가 없는 건가?’

공검대와 함께 4층 통로를 통과했는데, 수하들은커녕 다른 사람 자체를 만나지 못했다. 굉장히 넓은 곳이거나, 외부와 차단된 공간인 것 같았다.

수하들을 걱정하면서 아무것도 없는 설원을 걷다 보니, 전투를 치를 때보다 체력이 빠르게 소모되었다.

기척 없이 튀어나오는 몬스터를 상대하느라, 정신적인 피로도 쌓여서 이제는 몸이 무겁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곳이 정말 도검존의 무덤은 맞는 건가?’

지금까지는 오마보다 빠르게 움직이기 위해서 무시해왔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이 무덤의 정체가 의심스러웠다.

‘여기는 무덤이라기보다는…….’

능력을 시험하는 곳 같아.

보통 무덤과 던전은 약탈자들을 막기 위해서 죽음의 함정을 만들어 놓는다.

하지만 이 무덤은 함정이라기보다는 침입자를 시험하는 듯한 환경을 만들어 놓았다. 도검존의 의도가 이해되질 않았다.

‘대체 어떤 괴물이 이런 공간을 만든 거지?’

도검존이든, 다른 인물이든 자신으로서는 상상도 못 할 고수인 것은 분명해 보였다.

생각할수록 머리가 복잡해져서 다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미친 듯이 쏟아지는 눈발을 보자, 이곳에 오기 전에 만났던 가문의 일원이 떠올랐다.

‘라온은 잘 오고 있겠지?’

라온의 무력과 판단력은 믿지만, 상대가 백혈교와 흑탑, 성검련이다보니, 어쩔 수 없이 걱정이 되었다.

특히 던전에 들어오기 전에 라온에게 도움을 받았기에 그 아이가 잘 나아가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그걸 알려면 일단 이곳을 빠져나가야 하는데…… 음?’

세레나가 끝없이 펼쳐진 설원을 보며 입맛을 다실 때였다. 우측 끝에서 작은 형체가 보였다.

‘몬스터가 아니야.’

4층의 몬스터는 자신의 기감을 무시하고 갑자기 나타났다. 저건 이곳에서 처음 보는 사람의 모습이었다.

‘누구지?’

적일 수도 있기에 섣부르게 다가가지 않고, 안구에 오러를 집중했다.

눈을 맞았음에도 빛을 잃지 않은 금발과 태양처럼 짙게 타오르는 붉은 눈 그리고 이제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검은 장포가 휘날리는 모습이 보였다.

“라온?”

“공검대주님!”

라온도 이쪽의 모습을 확인한 듯 빠르게 달려왔다.

“이곳에서 처음 만난 사람이 공검대주님이라니, 다행입니다!”

그는 반가움을 얼굴에 두른 채 고개를 숙였다.

“너도 이곳에서 헤매고 있었던 건가?”

“예. 확실하지는 않지만, 하루가 넘게 지난 것 같습니다.”

라온은 끝을 알 수 없는 지독한 장소라며 한숨을 내뱉었다.

“나도 마찬가지였어.”

세레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라온을 살폈다. 이곳이 워낙에 특이한 곳이었기에 혹시나 하여 탐색했는데, 딱히 이상한 점은 보이지 않았다.

오러의 기질과 체격도 똑같았고, 이곳에 오기 전 귀마검주와 설괴후와 싸우면서 찢어졌던 제복의 형태도 그대로였다.

“특별한 일은 없었나?”

“이곳에 오기 직전에 있었습니다.”

라온이 고개를 저었다.

“오기 직전?”

“예. 3층 미로에서 설괴후를 만났습니다.”

“설마 그놈을 이긴 건가?”

“예.”

그는 설괴후를 잡았다고 말하며 담담하게 웃었다.

“허…….”

세레나가 라온을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너란 녀석은 정말 감당이 안 되네.”

“운이 좋았습니다. 마기를 파도처럼 부리는데, 상대하기 까다롭더군요.”

“어떻게 이겼는지는 궁금하지만, 일단 움직이자.”

그녀가 라온에게 손을 까딱였다.

“다른 사람들도 찾아야 하니까.”

“알겠습니다.”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세레나의 좌측 뒤편에 붙었다.

“가면서 말해봐. 설괴후를 어떻게 만났고, 어떻게 이긴 거냐?”

세레나는 앞으로 걸어가면서 옆에 있는 라온에게 손가락을 까딱였다.

“미로의 끝에 도착하니까. 기다렸다는 듯 찾아왔습니다. 일단 광풍대를 마인들과 싸우게 한 후 일대일로…….”

라온은 특유의 차분한 어조로 설괴후와의 전투를 설명했다.

“냉기를 이용하다니 너도 참…….”

세레나가 피식 웃으며 전방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사람을 만났고, 그게 평소 아끼던 라온이었기에 긴장이 빠르게 풀렸다. 가문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나는 너보다 편하게 온 편이다.”

“오마와 만나지 않으셨습니까?”

“그래. 오마하고는 한참 떨어져 있었지. 다만 미로에서 조금 지독한 함정이 걸려서…….”

그녀가 앞을 보며 그간의 일을 설명할 때였다.

“그랬군요.”

라온이 미소를 유지한 채 오른손으로 수도를 세웠다. 기세도, 살기도 두르지 않은 채 그대로 세레나의 등을 향해 수도를 찔러넣었다.

퍼어어억!

*     *      *

“버렌. 너는 모두를 앞에서 이끌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스스로의 무력을 드러내는 점이 부족해.”

라온은 먼지가 묻은 손을 털고서 가장 먼저 버렌의 앞에 섰다

“아, 알겠습니다.”

눈 밑이 시커메진 버렌이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르타. 너는 요즘 광폭화 의존도가 높다. 그 힘에만 의지한다면 본신의 실력이 떨어질 거야.”

“으….”

마르타는 반박을 하지 못한 채 입술을 씹었다.

“루난. 여전히 소극적이다. 네게는 아직 해야 할 일이 있을 텐데?”

“네….”

루난은 어떤 의미인지 알아듣고서 고개를 꾸벅였다.

“도리안. 무서움을 이겨내기 위해서 움직이는 건 좋지만, 너무 조급해서 시야가 좁아지고 있다. 주의하도록. 다음은….”

라온은 전투와 훈련에서 느꼈던 광풍대의 단점을 모두에게 지적해주었다.

광풍대는 휴식을 취하면서 라온의 조언을 가슴 깊게 새겼다.

그가 그저 심술을 부리기 위해서 이런 짓을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마음으로 깨닫고 있었다.

“쉴 만큼 쉬었으면 준비해.”

라온이 손뼉을 치고서 4층으로 향하는 통로를 가리켰다.

“마지막 조언을 하자면 너희는 스스로의 무력을 조금 더 믿는 게 좋다. 자신감을 가져.”

“알겠습니다!”

조언이자, 칭찬을 들은 광풍대는 시원한 미소를 그리고서 4층의 통로로 들어갔다.

“너 광풍대를 천검대 수준으로 만들 생각이냐?”

마지막으로 남은 리메르가 통로 앞에 서서 시선을 돌렸다.

“천검대 수준이 아니라, 천검대를 넘어서야죠.”

라온이 고개를 저었다. 이 정도에서 멈출 생각은 없었다. 광풍대 전부를 마스터로 올려서 지그하르트가 아니라, 대륙 최강의 무력대를 만들 생각이었다.

“어우, 애들한테 살짝 미안해지네.”

리메르는 대주 자리를 너무 빨리 넘긴 것 같다고 중얼거리며 4층 통로로 들어갔다.

“나중에는 고마워할 겁니다.”

라온은 피식 웃고서 마지막으로 검은 구멍에 들어갔다.

우우웅!

부유하는 듯한 감각은 여전했지만, 떨어지는 시간은 이전에 비해서 극명하게 짧았다.

“후우.”

라온이 낮은 숨을 내뱉고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하얗다.

나무, 수풀, 돌멩이 하나 없는 말 그대로 새하얀 설원이 펼쳐져 있었다.

아이의 주먹만 한 눈이 끝없이 쏟아져서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설원에 묻힐 것만 같았다.

‘아무도 없군.’

광풍대는 물론이고, 손에 쥐고 있던 카이얀도 사라졌다.

-아무도라니! 본왕은 있느니라!

라스가 까불지 말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래. 네 덕분에 심심하지는 않겠어.’

라온이 피식 웃고서 설원을 나아갔다.

하지만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사람, 몬스터, 나무, 구름, 태양. 이정표로 삼을 게 무엇도 존재하지 않아서 내가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뒤로 향하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대체 여기는 뭐 하는 곳이냐!

라스가 짜증이 돋은 듯 미간을 찌푸렸다.

-왜 하루를 넘게 걸어도 끝이 없는 것이냐! 심심하느니라!

‘마찬가지야.’

1층부터 3층까지는 나름 의도를 알 수 있는 곳이었는데, 4층만큼은 존재 의미를 알 수가 없었다.

‘짜증이라도 나게 하려는 건가?’

라온이 짧게 혀를 찰 때였다. 우측 끝에서 그림자 같은 검은 인영이 보였다.

“라온!”

분노의 마안으로 시각을 강화시키자, 손을 흔들며 달려오는 리메르의 모습이 보였다.

머리와 어깨에 눈이 쌓여서 눈사람 같은 모습이었다.

“부대주님.”

“드디어 만났네!”

리메르가 걱정을 듬뿍 담은 목소리로 한숨을 내쉬었다.

-흐음?

라스가 리메르를 보며 입매를 비틀었다.

라온은 리메르를 보며 눈동자를 가라앉혔다. 혹시나 하여 살펴보았는데, 그에게서 특별히 이상한 점은 보이지 않았다.

“어휴, 하루종일 혼자 있느라, 너무 힘들었어.”

그는 너무 지루하고 힘든 시간이었다며 고개를 저었다. 심부름시킬 사람이 없었다는 뜻 같아서 여전하다고 여겼다.

“넌 별일 없었어?”

“정말 아무것도 없는 곳이라, 오히려 편했습니다.”

“하긴 너는 그런 놈이지.”

리메르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빨리 움직이자, 애들이 보이질 않으니, 걱정되네.”

그는 광풍대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지도 모른다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게 하죠.”

라온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고서 정면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가 차분히 나아가고 있을 때 리메르가 손가락을 모아서 수도를 세웠다.

검보다도 날카롭게 갈린 손날이 라온의 등을 향해 소리 없이 뻗어나갔다.

파아아아앙!

하지만 리메르의 수도는 라온의 심장이 아니라, 하늘에서 떨어진 눈덩이만을 갈랐다.

타악!

라온은 허깨비처럼 바닥에서 튀어나와 떨리는 리메르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어, 어떻게!”

리메르가 라온의 가라앉은 눈동자를 보며 입술을 떨었다.

“그 망할 엘프 스승이 나와 애들을 걱정할 리 없거든.”

오그라드는 것을 싫어하는 리메르는 속으로 생각하더라도, 겉으로는 누군가를 걱정한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뿌드드득!

라온의 눈동자 위로 용암과도 같은 열기가 줄기줄기 타올랐다. 그가 손아귀를 거칠게 움켜쥐어 리메르의 모습을 한 무언가의 손목을 으깨버렸다.

“너 누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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